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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제11대 이치카와 단쥬로 第十一代目 市川團十郞| Ichikawa Danjūrō XI | |
<colbgcolor=#BC002D> 본명 | [ruby(堀越, ruby=ほりこし)][ruby(治雄, ruby=はるお)](호리코시 하루오, Horikoshi Haruo)[1] |
예명[2] |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 9대 이치카와 코마조 9대 이치카와 에비조 11대 이치카와 단쥬로(1962년 4월 습명) |
출생 | 1909년 1월 6일 |
도쿄도 주오구 니혼바시 | |
사망 | 1965년 11월 10일 (향년 56세) |
도쿄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3cm |
학력 | 교세이 가쿠엔 초등부(졸업) 킨죠 가쿠엔 중등부(중퇴) |
가족 | 아버지 7대 마츠모토 코시로(1870-1949)[3] |
양아버지 10대 이치카와 단쥬로(1880-1956)[4] | |
남동생 초대 마츠모토 하쿠오(1910-1982)[5] 남동생 2대 오노에 쇼로쿠(1913-1989)[6] 여동생 후지마 아키코[7] | |
아내 호리코시 치요 장남 12대 이치카와 단쥬로(1946-2013) 장녀 초대 이치카와 쥬코(1949-)[8] | |
장손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1977-) 친손 4대 이치카와 스이센(1979-)[9] | |
증손 4대 이치카와 보탄(2011-)[10] 증손 8대 이치카와 신노스케(2013-)[11] | |
조카 2대 마츠모토 하쿠오(1942-) | |
직업 | 가부키 배우 |
야고[12] | 나리타야(成田屋) |
문장 |
1. 개요
일본의 가부키 제1명문가 나리타야 이치카와 종가의 선선대 당주이다.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아버지이자 가문의 현 당주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의 친조부이기도 하다.2. 생애
자택에서 아버지 7대 마츠모토 코시로, 남동생들과 함께 제일 왼쪽이 11대 이치카와 단쥬로이다 |
모모타로 이야기로 하츠오메미에, 첫 무대를 밟았으며 이때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를 습명받았다.
소학교 시절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
아버지인 7대 마츠모토 코시로는 곧바로 재혼하였지만 새어머니마저 가문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돼서 병사하고 말았다.
9대 이치카와 코마조 습명 이후 아버지의 스케로쿠 무대에서 |
25살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
서른살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나리타야 입적과 9대 이치카와 에비조 습명 직후 |
1940년, 10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양자로 입적하며 성을 후지마에서 호리코시로 개명했다. 나리타야의 양자가 된 것이기에 9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습명하였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력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하며 '에비사마'라고 불렸다.
스케로쿠와 겐지모노가타리에서의 성공으로 그의 미모와 연기에 매료된 팬들이 생겨났고 업계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세간은 그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가정이 없는 것을 흠으로 꼽았었는데 사실 11대 단쥬로는 이미 결혼도 하였고 슬하에 자녀도 둘이나 있었음을 6년이 지나서야 밝혔다.
동생들에게 치요를 소개하는 11대 단쥬로 |
그러나 세간에 아내와 아이들의 존재를 밝히자 역시나 치요의 뒷배경으로 인해 많은 후원자들에게 맹비난을 받으며 파혼을 요구받는다. 11대 단쥬로는 치요와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없다면 차라리 가부키 배우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였고 그제서야 나리타야의 오랜 후원자 중 한 명이 치요의 뒷배가 되어주며 둘은 결혼 생활을 이어올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책이 많이 나오기도 하는 등, 11대 단쥬로와 치요의 이야기는 가부키 계에 있어 이례적인 사례로 꼽힌다.
장남 호리코시 나츠오와 함께 |
1962년,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습명을 공표 |
말년의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그의 생전 마지막 무대 <스케로쿠>에서 |
체중이 부쩍 줄어, 뼈밖에 없다고 느껴지던 그였지만 그럴 때에 더욱 몸을 깎아내듯 연기하여 그와 신체 접촉이 있는 게 아닌 이상 그가 시한부였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거라 한다.
조카인 2대 마츠모토 하쿠오 또한 11대 단쥬로의 마지막 벤케이 연기가 끝난 뒤, 그를 잠시 껴안았더니 뼈밖에 느껴지지 않아서 너무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그 순간 11대 단쥬로의 영혼이 벤케이를 연기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3. 연기 스타일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습명 피로연의 니라미 |
11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스케로쿠 |
11대 단쥬로의 무사시보 벤케이 토비 롯포 |
4. 여담
장남 호리코시 나츠오와 함께 |
- 애처가에 가정에 충실한 남자였다고 한다. 치요와 결혼한 뒤로는 여자 문제로도 전혀 걸리는 게 없었고 공연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여름에는 늘 가족과 해수욕에 다녀왔고 사망하기 바로 전 해에도 아내와 유럽 여행을 다녀왔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장손이라는 인간은…
- 장손이자 현 나리타야 이치카와 단쥬로의 당대인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 가부키 연습이 힘들 때에 늘 할아버지인 11대 단쥬로의 비디오를 보면서 그의 용모와 예술에 감동하였고 이와 같은 대배우가 되어야 한다며 버텼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어릴 적 다큐에도 11대 단쥬로의 스케로쿠를 보며 연구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 간사이 가부키 명문가 마츠시마야의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장남인 1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14]과 동성이지만 좋은 감정으로 연애를 했었다는 게 드러났다. 회고록에서 9대 이치카와 코마조 습명 직후 눈이 맞았다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11대 단쥬로가 폐결핵으로 가문의 사람들만 아는 장소로 요양에 들어가며 만나는 일은 없었다고. 나중에 11대 단쥬로가 이미 결혼도 했고 자녀도 두었다는 사실에 14대 니자에몬은 식음을 전폐했으며 그의 이른 죽음에 제일 슬퍼했다고도 한다.[15]
[1] 나리타야 양자 입적 전 출생명은 '후지마 하루오'.[2] 가부키 배우로서의 예명이다.[3] 본명은 후지마 킨타로.[4] 10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그의 사후 양자인 11대 단쥬로에 의해 추존된 것으로 생전 마지막 세습명은 '이치카와 미마스'였다.[5] 본명은 후지마 준지로. 나리타야에 양자로 들어간 11대 단쥬로를 대신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오라이야의 당주가 되었다.[6] 본명은 후지마 유타카. 6대 오노에 키쿠고로의 일문이 되어 오토와야에 소속되었다.[7] 가부키 가문 쿄야의 4대 나카무라 자쿠에몬과 결혼하여 아오키 아키코가 되었다. 8대 오타니 토모에몬, 5대 나카무라 자쿠에몬 형제의 어머니이기도 하다.[8] 본명은 호리코시 하루요. 현재 일본 무용 이치카와류의 수장을 맡고 있다.[9] 본명은 호리코시 치에코.[10] 이치카와 보탄은 나리타야의 직계 영애가 일본 무용계에서 사용하는 예명으로, 본명은 호리코시 레이카. 애칭은 '레이(レイ)'.[11] 본명은 호리코시 칸겐. 애칭은 '칸칸(かんかん)'. 별탈없이 가부키 배우업을 이어나간다면 칸겐이 훗날 12대 이치카와 에비조, 14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될 수 있다.[12]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10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야고가 있다고 한다.[13] 10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그의 사후 11대 단쥬로가 추존한 것이다.[14] 본명은 카타오카 하지메.[15] 지금이야 생각하기 어렵지만 당시 온나가타만을 주력으로 연기하는 배우들은 남자를 밝히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