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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군단 페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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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3.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4. 이후의 행적

1. 개요

Legio VI Ferrata. 상징은 암늑대.[1] 갈리아 전쟁 시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창설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시리아에 배치되어 4세기까지 동방 속주를 방위했다.

2. 로마 공화국 말기 시기

기원전 52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의 난으로 큰 손실을 입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갈리아 트란살피나 속주에서 자신의 비용으로 6군단을 창설했다. 이들은 베르킨게토릭스의 갈리아 대봉기에 맞서는 카이사르를 따라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특히 알레시아 공방전에서 선배 군단들과 함께 알레시아 성내와 포위망 외곽에서 동시에 협공해오는 갈리아인들을 상대로 굳건히 버텨서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겨울 동안 샬롱쉬르손(Châlons-sur-Saône) 또는 마콩(Mâcon) 일대에 주둔했고, 51년 루아르 강 하류의 오를레앙 일대로 파견되어 카르누테스 족과 전투를 치러 승리를 거두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를 따라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이후 히스파니아로 이동하여 일레르다 전투에 참여했고, 기원전 48년 카이사르의 발칸 원정에 동행하여 디라키움 공방전파르살루스 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카이사르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추격하기 위해 이집트로 향했을 때, 6군단에 소속된 분견대 3,200명만이 그를 따라갔다. 그 후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전쟁에서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군 및 민병대의 맹렬한 공세와 봉쇄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다. 익명의 저자가 기술한 <알렉산드리아 전쟁기>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에서의 전쟁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6군단 장병은 1,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버텼고,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서의 곤경을 끝내 극복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를 이집트 최고 권력자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그 후 소아시아에서 침략 행위를 벌이고 있던 폰토스 왕국의 국왕 파르나케스 2세를 응징하려는 카이사르의 원정에 동행했고, 기원전 47년 8월 2일 젤라 전투에서 폰토스군을 결정적으로 격퇴했다. 그 후 이탈리아로 보내져서 아를에 정착했다. 그러다 카이사르가 2자 히스파니아 원정을 단행했을 때 퇴역병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6군단이 재결성되었고, 기원전 45년 3월 17일 문다 전투에 참전해 카이사르의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6군단은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지만, 기원전 44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재편성되었고, 나중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가담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이끄는 해방자파 군대를 격파한 후, 6군단 퇴역병들은 이탈리아 베네벤토에 정착했다. 다른 군인들은 안토니우스와 함께 지중해 동부로 이동했고,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의 시리아 침공으로 인해 파르티아의 속국이 된 유대 왕국을 탈환하고 헤로데 대왕이 유대의 새 국왕이 되는 데 일조했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동행했으며,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이 발발하자 안토니우스 편에 서서 발칸 반도로 이동했지만 악티움 해전 직후 옥타비아누스에게 귀순했다.

3.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기

6군단은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시리아로 보내져서 3군단 갈리카, 10군단 프레텐시스, 12군단 풀미나타와 함께 동방 속주를 방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기원전 20년, 아우구스투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변에 주둔해 파르티아 샤한샤프라아테스 4세와 협상한 끝에 양국의 경계를 유프라테스 강으로 확정하고 파르티아가 노획했던 로마군 깃발을 돌려받았으며, 안토니우스를 따랐다가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을 돌려받았다. 이때 이들도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가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사망한 후 메시아를 자칭한 히스기야의 아들 유다, 페레아의 시몬, 아트론게스의 반란을 진압할 때 시리아에 주둔한 3개 군단을 동원했다고 전해지는데, 이중 6군단도 있었을 것이다.

45년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는 프톨레마이스(현재 아크레)를 재건하고 시리아에 주둔한 4개 군단의 퇴역병들을 그곳에 정착시켰는데, 이들 중에는 6군단 출신도 있었을 것이다. 58~63년 파르티아-로마 전쟁에서, 6군단은 3군단 갈리카, 10군단 프레텐시스와 함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의 지휘를 받으며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 티그라노케르타를 공략하고 친로마파 아르메니아 왕인 티그라네스 6세를 아르메니아 국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역습이 매서웠던 데다 아르메니아인들이 티그라네스 6세보다 파르티아 샤한샤 볼로가세스 1세의 동생인 티리다테스 1세를 지지하는 것을 알게 되자, 코르불로는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간의 평화 협상을 중재했다. 그 결과 로마는 티리다테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로마 수비대를 소펜에 영구적으로 주둔하도록 했고, 티리다테스는 로마로 찾아가서 네로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이후 시리아로 돌아간 6군단은 66년 유대 반란이 발발하자 유대 총독 가이우스 케스티우스 갈루스의 휘하에서 반란 진압에 착수했으나 오히려 반란군에 패배했다. 그 후 반란 진압 임무를 맡은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고, 69년 네 황제의 해 당시 베스파시아누스의 편에 섰고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의 지휘하에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내전이 종식된 후에는 시리아로 돌아가서 유대 반란 진압을 이어갔다.

4. 이후의 행적

72년 콤마게네 왕국이 로마 제국에 병합된 뒤, 6군단은 콤마게네로 이전되어 사모사타에 주둔했다. 113~117년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전해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등지에서 여러 전투를 치렀지만, 117년 제2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자 유대인 영역의 심장부에 있는 나사렛에서 15마일(24km) 떨어진 갈릴리의 카파르코나로 이동한 후 반란을 진압했다. 트라야누스 사후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모든 영토를 포기하기로 했고, 이들은 사모사타로 돌아갔다. 이후 모종의 시기에 아라비아 페트라리아 속주로 이전했고, 132년~136년 제3차 유대-로마 전쟁이 벌어졌을 때 투입되었다. 유대 반란 진압이 성공한 뒤 갈릴리의 카파르코나에 주둔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기(138년 ~ 161년)에 아프리카에 잠시 복무하면서 도로를 건설했다. 161~165년 베루스의 파르티아 원정이 발발했을 때 참여했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 공략에 기여했다. 193년 다섯 황제의 해가 발발했을 때 다른 동방 군단들이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를 지지한 데 비해 그들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편에 섰다. 세베루스는 나중에 니게르를 제압한 뒤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것에 보답하고자 '충성스럽고 변함없는'이라는 뜻의 피델리스 콘스탄스(Fidelis Constans) 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 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페르시아 원정, 고르디아누스 3세의 페르시아 원정, 발레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고대 문헌에서 이에 관한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확실하며, 아우렐리아누스팔미라 제국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어느 쪽에 섰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244년 가이사랴 마리티마에서 필리푸스 아라부스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6군단의 주화가 주조된 사실이 고고학자들의 연구로 밝혀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팔레스티나 속주를 방어하기 위해 아라비아 국경 남쪽에 있는 아드루로 이전했다. 로마 제국의 직위 목록인 노티타 디그니타툼(Notitia Dignitatum)에 이들이 언급되지 않는 것을 볼 때, 6군단은 395년 이전에 해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1] 로물루스레무스에게 젖을 먹였다고 전해지는 로마 건국신화의 늑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