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1DA1E0> École Supérieure des Sciences Economiques et Commerciales ESSEC Business School, 고등경제상업학교 | ||
대학 정보 | ||
표어 | Per scientiam ad libertatem Enlighten. Lead. Change. | |
개교 | 1907년 | |
국가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총장 | Vincenzo Vinzi | |
소재 | 3 Av. Bernard Hirsch, 95000 Cergy, France | |
▲ 캠퍼스 전경 |
▲ 캠퍼스 항공사진 |
[clearfix]
1. 개요
▲ 소개 영상 |
2. 평가
순위 기재 시 주의사항 | |
{{{#!wiki style="padding: -5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FF); margin: 0 -10px" {{{#000,#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5개년 단위로 순위 기재 - 새로운 집계 연도를 추가하면 가장 오래된 집계 연도를 삭제함으로써 5개의 칸을 유지 • N/A* - 자료 없음을 의미 |
파이낸셜 타임스 집계 대학 세계 순위 |
<rowcolor=white><colbgcolor=#1DA1E0><colcolor=white> 기준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유럽 비즈니스 스쿨 | 6 | 8 | 9 | 9 | N/A* |
MiM (Masters in Mangement) | 3 | 6 | 6 | 5 | N/A* |
MSc in Finance (재무학 석사) | 4 | 4 | 4 | 3 | 4 |
- 그랑제콜 과정인 MiM이 해당 대학의 간판인 만큼 매우 높은 순위를 보이고 있다.
- MiM은 미국계 비즈니스 스쿨보다는 주로 유럽계에서 플래그십 과정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경우 MBA가 간판이라면, 유럽은 MiM이라는 인식; 다만, 유럽계 또한 MBA 과정을 개설해 각국에서 학생을 모집하고 있다)
3. 역사
재단(1907~1913)1907년 파리에서 페르디난드 르 펠레티에에 의해 경제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20세기 초 가톨릭의 후견 하에 설립된 다른 사립 경영대학원들, 예를 들어 릴 천주교 연구소의 HEC 노르드(나중에 EDHEC가 됨)나 앵거 가톨릭 협회의 ESSCA의 움직임에 따라 설립되었다.
1854년 Falloux 법률이 제정되면서 종교 중등교육이 발달하게 되었다.드레푸스 사건(1895년)과 정교분리법(1905년)으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한 상황에서 교회는 특히 경제세계에 도덕적 가치를 전파하고 새로운 세대의 기업 지도자를 양성함으로써 영향력을 되찾으려고 했다.
ESSEC는 특히 국가의 세속주의 및 공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예수회 간의 투쟁의 맥락에서 HEC의 창설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대응이 되었다. 새 기관의 목표는 "기독교와 인간의 가치관이 깃든 유능한 인재를 필요로 하는 상업 및 경제 경력을 위해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이 학교는 1854년 예수회에 의해 설립된 라틴 학군 에콜 생트 제네비에브에 위치해 있었다. 첫 번째 수업에는 7명의 학생이 있었고 공부는 2년 동안 지속되었다.1909년, 선택적인 3년째가 도입되었다.
이 과정은 법률, 회계, 언어, 기술 등 일반 과목 위주로 구성돼 있어 독창성이 돋보이지 않았다. ESSEC가 두드러질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적 도덕적 가치의 도입을 통해서였다. 학생들은 매주 에콜 생트 제네비에브 예배당에서 열리는 변증학 회의에 참석했다. 기술 교육(콜리그래피, 속기, 상업 문서의 초안 작성)은 과학 교육(물리학, 화학, 공장 방문)으로 보완되었다.
1913–1940
1905년 정교 분리법의 적용으로 1913년 학교 건물을 몰수하여 ESSEC는 파리 가톨릭 연구소 또는 ICP에 흡수되었다. 그 결과, 학교 자원은 현저하게 감소했다. 예를 들어 ICP에서 빌린 원형경기장은 1개뿐이었고 초등학교 구간은 폐지됐다.1960년까지 거의 그대로였던 교육 분야는 언어, 무역사, 상업지리, 정치경제, 법률, 회계 등이었다. 일주일에 10시간(영어 및 독일어 4시간, 이탈리아어 및 스페인어 1시간)의 어학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그 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생존에 어려움을 겪었다.1914년에는 1학년 때 4명, 2학년 때 2명만 있었다.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가 1915년에야 다시 열었다. 세 번째 선택적 학년은 폐지되었고 학교는 첫 해에 50명 이상의 학생들을 받아들인 1920년까지 재정적인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1923년 전쟁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한 연대기금으로 학생회가 결성되었다. 1926년, 첫 졸업생 명단이 출판되었고 3년 후, 첫 번째 경영 윤리 과목이 주어졌다. 1930년까지, 학생의 수는 150명으로 증가했다.
1930년대의 위기에서, ESEC는 공공 서비스나 정규 법학과를 더 선호하는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등록금을 줄여야만 했다.1914-1918년의 갭이어와 경제위기로 인해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 학교는 고등학교 졸업생, 자격증 없는 시험관, 그리고 자격증 없는 과정을 수강한 프리랜서 감사관들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