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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06:45:08

KBS NEWS/기자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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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현직3. 전직
3.1. 1950년대 이전3.2. 1960년대3.3. 1970년대3.4. 1980년대3.5. 1990년대3.6. 2000년대 이후

1. 개요

KBS 보도본부 소속 전현직 기자를 정리한 문서. 각주가 많아져 문서를 분리하였다.

2. 현직

볼드체는 국장급 이상 간부.

[1] 前 두바이 특파원(2004~2006), 前 사회1부장(2008~2012), 前 부산방송총국장(2018~2020). 2006년 3월 특파원 시절 팔레스타인에서 취재 도중 무장단체에 납치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난 적이 있다.[2] 前 디지털뉴스부장(2013.6~12 / 2014.8~2015.7). 2018년에 모 사회1부 리서치 여직원이 SNS를 통해 6년 전 MT 당시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하자, 이에 백 기자 본인이 허위사실이라며 명예훼손으로 그 여직원을 검찰에 고소했다가 기각됐다. 결국 감사실에서 '주의' 처분을 받고 현재 심의위원으로 근무 중.(당시 기사, 피해자의 관련 포스타입 게시글)[3] 前 비서실장(2011.9~2012.12), 前 정치외교부장(2013.1~12), 前 LA 특파원(2014.7~2017.7), 前 통합뉴스룸 국장(2017.7~2018.4), 前 해설위원(2019~2022)[4] 前 사회팀장(2010.2~6), 前 사회2부장(2010.6~2011.7), 前 문화부장(2011.7~2012.6), 前 취재주간(2014.8~2015.12), 前 스포츠국장(2015.12~2018.4). 기자 시절인 2006년부터 2년여 간 1노조 위원장이기도 했다.[5] 前 뉴스제작2부장(2013.1~2014.5), 前 뉴스제작3부장(2014.5), 前 뉴스제작1부장(2015.3~12), 前 재난·과학부장(2015.12~2017.8), 前 남북교류협력단 남북교류협력부장(2018.4~2019.11), 前 방송뉴스주간(2019.11~2021.4), 前 KBS 아메리카 사장(파견, 2022.1~2023.8)[6] 前 네트워크부장(2020.5~2022.1)[7] 前 방송뉴스주간(2021.4~2022.3)[8] 前 경인취재센터장(2018.4~2019.2), 前 국제부장(2020.11~2021.4)[9] 前 선거방송기획단장(2021.12~2022.4), 前 통합뉴스룸 국장(2022.4~2023.3).[10] 前 스포츠취재부장(2015.12~2017.1). 춘천/청주총국 기자와 동명이인.[11] 2013년부터 3년 간 한국방송카메라기자협회 회장 역임.[12] 前 대구방송총국 보도국장(2016.9~2018.4), 前 네트워크부장(2022.2~2023.3)[13] 前 도쿄 특파원(2008.6~2011.6)[14]KBS 뉴스라인 앵커(2016.4~2017.1).[15] 前 스포츠국 스포츠기획부장(2018.4~2020.5), 前 스포츠국장(2022.12~2023.11).[16] 前 사회2부장(2017.8~2018.4), 前 뉴스제작3부장(2019.2~11), 前 국제부장(2019.11~2020.11)[17] 1997년 KBS가 MLB 중계권을 획득했을 당시 박찬호 전담 기자였다.[18] 前 모스크바 특파원. 배우자는 MBC 박선영 기자.[19] 前 네트워크부장(2019.11~2020.5), 前 경인취재센터장(2020.5~2021.7), 前 원주방송국장(2022.9~2023.12).[20] 前 언론노조 KBS본부장(2018.1~2019.12), 前 통일외교부장(2020.5~11), 前 보도기획부장(2020.11~2021.4), 前 전략기획실 대외협력국장(2021.4~2022.3).[21] 前 뉴스제작2부장(2019.2~2021.4), 前 경인취재센터장(2021.8~2022.3), 前 방송뉴스주간(2022.4~2023.3), 前 심의실장(2023.4~11).[22] 前 뉴스제작3부장(2019.11~2020.11), 前 디지털뉴스주간(2020.11~2021.4).[23] 前 사회2부장(2018.4~2019.2), 前 정치부장(2019.2~2020.5), 前 시사제작2부장(2020.11~2022.3).[24] 前 스포츠국장[25] 前 네트워크부장(2023.3~11).[26] 前 대외협력국 커뮤니케이션부장(2019.3~11), 前 대외협력국장(2019.11~2020.12), 前 충주방송국장(2021.1~2022.12), 前 이사회 사무국장(2023.4~10).[27] 前 홍보실·대외협력실 홍보부장(2015.12~2018.4), 前 뉴스제작1부장(2020.5~11)[28] 前 사회1부장(2018.4~2018.9), 前 취재1주간(2021.4~2021.12), 前 시사제작국장(2022.4~2023.11).[29] 前 경인취재센터장(2022.4~2023.3).[30] 前 스포츠취재부장(2023.3~11).[31] 前 워싱턴 특파원(2016.7~2019.6).[32] 前 문화부장(2019.1~2), 前 산업과학부장(2019.2~11), 경제부장(2019.11~2020.5), 前 시청자센터장(2021.12~2023.6).[33] 前 워싱턴 특파원, 前 정치외교·통일외교부장(2018.4~2018.7/2018.8~2019.5), 前 취재1주간(2021.12~2022.3), 前 선거방송기획단장(2022.4~2023.11).[34] 前 문화복지부장(2020.5~2022.3), 前 국제부장(2022.4~2023.3).[35] 前 보도기획부장(2020.5~11), 前 뉴스제작1부장(2020.11~2021.4), 前 국제부장(2021.4~2022.3), 前 취재2주간(2022.4~2022.12), 前 전략기획실 전략기획국장(2023.1~11).[36] 현역 시절 언론노조 KBS본부 위원장(2015~2018)과 방송기자연합회 회장(2020~2022)을 맡았다. 前 사회부장(2019.2~11), 前 취재1주간(2022.4~2023.3), 前 통합뉴스룸 국장(2023.3~11).[37] 前 사회부장(2019.11~2020.5), 前 사회재난주간(2020.5~2021.4), 前 탐사보도부장(2021.4~2022.11).[38]KBS 뉴스라인 앵커(2013.10~2016.4), 前 KBS 아침뉴스타임 앵커(2016.4~2018.4), 前 LA 특파원.[39] 前 진주방송국장(2020.5~2021.4), 前 비서실장(2021.4~12), 前 해설위원(2021.12~2022.3), 前 뉴스제작2부장(2022.4~2023.3), 前 지역정책실장(2023.4~11).[40] 前 시사제작1부장(2020.5~2021.12), 前 문화복지부장(2021.12~2022.4). 前 취재2주간(2023.1~11).[41] 2016년 퇴사 후 뉴스타파에 입사했다가, 2018년 특별채용 형식으로 복직. 前 탐사보도부장(2019.3~2020.5), 前 정치부장(2020.5~2021.4), 前 저널리즘책무실장(2023.1~11).[42] 前 뉴스제작2부장(2021.4~2022.3).[43] 前 스포츠취재부장(2020.5~2021.12), 前 스포츠사업제작부장(2023.4~11).[44] 前 뉴욕 특파원.[45] 前 디지털뉴스제작부장(2020.11~2021.4), 前 디지털뉴스주간(2022.4~2023.3).[46] 前 통일외교부장 겸 남북교류협력단장(2022.4~2023.3), 前 시사제작2부장(2023.3~11).[47] 前 재난미디어센터장(2023.3~11).[48] 前 뉴스제작3부장(2023.3~11).[49] 前 경제부장(2020.5~2021.4), 前 보도기획부장(2021.4~2023.11).[50] 前 경제부장(2022.4~2023.3).[51] 前 스포츠제작사업부장(2021.4~2022.3), 前 국제스포츠이벤트추진단장(2022.4~2023.3).[52]KBS 뉴스광장 평일 앵커(2006.8~2008.11), 前 문화복지부장(2019.11~2020.5).[53] 前 탐사보도부장(2020.5~2021.4), 前 사회부장(2021.4~2022.3).[54] 前 그룹마케팅총괄국 마케팅전략부장(2018.4~2019.2), 前 제작2본부 콘텐츠프로모션부장(2019.3~2021.3), 前 디지털뉴스1부장(2021.4~2022.3), 前 디지털뉴스주간(2022.4~2023.3).[55] 前 디지털뉴스제작부장(2019.11~2020.11), 前 시사제작2부장(2022.4~2023.3), 前 LA 특파원.[56] 前 산업과학부장(2019.11~2020.10), 前 KBS 뉴스 12 앵커(2020.11~2023.4).[57] 前 베를린 특파원[58] 前 워싱턴 특파원[59] 前 뉴스제작2부장(2023.4~9).[60] 前 산업과학부장(2023.1~7).[61]KBS 뉴스광장 평일 앵커(2018.4~2019.11), 前 베이징 특파원.[62] 前 통일외교부장(2021.4~2022.3), 前 정치부장(2022.4~2023.3).[63] 前 디지털뉴스주간(2023.3~11).[64] 前 사회부장(2020.5~2021.4), 前 뉴스제작1부장(2022.4~2023.3), 前 방송뉴스주간(2023.3~11).[65] 前 경제부장(2023.3~11).[66] 前 도쿄 특파원[67]남북의 창 진행(2020.5~2021.4), 前 전략기획실 대외협력부장(2021.4~12), 前 디지털뉴스2부장(2021.12~2023.3), 통일외교부장 겸 남북교류협력단장(2023.3~11).[68] 前 문화복지부장(2023.3~11).[69] 前 문화복지부장(2022.4~2023.3), 前 정치부장(2023.3~11).[70] 前 워싱턴 특파원[71] 前 두바이 특파원, 前 뉴스제작2부장(2023.9~11).[72]KBS 뉴스광장 평일 앵커(2015.4~2017.1), 前 베이징 특파원(2017.6~2020.8).[1박2일] 2015년 2월 1박 2일 시즌3 <특종 1박 2일>에 출연하였다.[74]남북의 창 진행(2018.4~2020.5), 前 뉴스제작1부장(2023.3~11).[1박2일] [76] 2004년 교양PD로 전직했다가 2007년 복귀.[77] 前 산업과학부장(2023.8~11).[78] 前 디지털뉴스2부장(2023.3~11).[79] 前 디지털뉴스1부장(2022.4~2023.11).[80]KBS 뉴스 12 앵커(2016.12~2018.4)[81] SBS 인턴기자 출신. 배우자는 박주경 기자.[82] 2001 미스코리아 대구 진 출신.#[1박2일] [84]KBS 뉴스광장 토요일 앵커(2019.11~2020.11)[85] 前 사회부장(2023.3~11).[86]KBS 뉴스 12 앵커(2018.4~2019.11)[87] 前 도쿄 특파원[88] 한국일보, 여수MBC 출신. 前 KBS 뉴스 12 앵커(2018.4~2019.11), 前 사사건건 앵커(2021.8~2023.4)[89] MBC 영상편집기자와 동명이인.[90] 북한 독재자나 배우와는 동명이인. 저서로는 <2009년 5월(2011)>, <조국을 부정한다(2021)> 등이 있다.[1박2일] [92] 前 베를린 특파원[1박2일] [94] 입사 이래 부산총국, 울산국 등을 거치면서 KBS 노동조합(1노조) 울산지부장, 위원장 등지 역임.[1박2일] [96] 댓글 읽어주는 기자들 작가 출신.[97] YTN 출신.

3. 전직

3.1. 1950년대 이전


[98] 조선방송협회 경성방송국 출신(1943년 입사)으로, '한국 방송기자 1호'로 알려진 언론인. 미군정과의 의견대립으로 인해 1946년부터 방송계를 떠나 조선통신, 경향신문, 자유신문, 서울신문, 조선일보 등지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하며 1950년 6.25 전쟁 때 서울신문 소속으로서 종군기자로 참전하여 1953년 휴전협정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기도 했다.[99] 1946년부터 서울신문으로 이직하여 1962년 퇴직 시까지 사회부에서 주로 뛰며 부장까지 맡았고, 1963년 MBC로 촉탁 입사했다가 1966년 원호처 원호위원에 선임됐다. 이후 대한통운 사장 비서실장 등지 역임.[100] 1961년 MBC 개국에 따라 이직. 1993년 8월 12일 사망.[101] 원래 아나운서였으나, 기자로 전직.[A] 1961년 MBC 개국요원으로 이직.[A] 1961년 MBC 개국요원으로 이직.

3.2. 1960년대


[104] 1962년 MBC로 이직.[105] 입사 당시 KBS-TV 개국요원으로 합류했다가 이듬해 기자로 전직했으며, 1968년 TBC로 옮겼다가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TBC가 합쳐지자 복귀. 1981년 교통부 공보관으로 임용되면서 퇴직했다. 이상근 SBS미디어넷 이사의 장인으로 2023년 2월 1일 사망.[106] 前 제주방송국 방송과(부)장(1972~1974), 前 라디오국 특집반장(1978), 前 청주방송국 방송부장(1978~1981), 前 속초방송국장(1981), 前 제주방송(총)국장(1981~1984/1991~1993), 前 방송심의실 심의위원(1985~1991). 1993년 정년퇴임 후 1994년 KCTV제주방송 창립 당시 초대 사장을 맡다 1997년 11월 3일 사망.[107] 前 카메라취재반 주관/카메라취재부장(1977.7~1980.12), 前 카메라1부 부국장(1980.12~1981.2), 前 보도국 카메라취재부국장/뉴스센터 촬영총감독/보도국 카메라부국장(1981.2~1990.1), 前 영상제작국장(1990.1~1996.4), 前 TV본부 제작위원(1996.4~1997.7). 1997년 7월 정년퇴임했으며 대통령표창(1967) 및 국무총리표창(1987) 수상.[108] 1966년 MBC로 이직. 곽우신 기자의 부친이며 2010년 11월 17일 사망.[B] 1969년 MBC로 이직.[110] 공보부 선전과에서 넘어왔으며, 2년 후 서울특별시 공보실과 대통령 경호실 등을 거쳐 1969년 MBC까지 넘어갔다.[111] '한국 뉴스앵커 1호'로 손꼽히는 기자로 1967년 광부 양창선 매몰현장 중계방송 진행을 시초로 TV 프로 <뉴스의 초점>, <알고싶은 일들> 등을 진행. 前 사회교육국 전문위원(1976~1978), 前 방송위원(1978~1980). 퇴사 이후 시사평론가로서 미래사회연구소 소장을 맡으며 1라디오 <안녕하십니까(1981)> 및 <라디오 동서남북(1984~1991)> MC, 2TV <생방송 전국은 지금> '조간뉴스' 코너, TBS <교통시대> 및 <시사해설> '사건과 오늘' 코너 MC, 극동방송 <1188 전망대> MC, SBS 러브FM <792 뉴스대행진> MC 등을 맡았으며, 2007년 7월 4일 사망. 저서로는 <오늘을 생각한다(1981)>, <인생을 값지게 사는 길(1992)> 등이 있다.#[112] 前 AG관리국 편의업무부장(1986), 前 올림픽운영국 예약업무부장(1986~1989), 前 해설위원실 해설위원(1989~1990), 前 라디오제작2부장(1990~1991), 前 사회부장(1991), 前 방송심의실 심의위원(1991~1995), 前 노무국장(1995~1996), 前 대전방송총국장(1996~1997), 前 전주방송총국장(1997~1998), 前 보도본부장(1998~2000). 2000년 KBS영상사업단 사장으로 임명된 후 2년 간 재직.[113] 前 홍콩특파원(1984~1986), 前 영상편집부장(1988~1990), 前 카메라취재1부장(1990~1991), 前 카메라취재2부장(1991~1993). 2012년 3월 10일 사망.[114] 원래 아나운서였으나 1967년 기자로 전직.[115] 아나운서로 입사했다가 곧바로 기자로 전직. 前 정치부장(1979. 9.~1980), 前 해설위원(1980~1984.1), 前 국제방송국 부국장(1984.1~1985.8), 前 기획조정실장(1985. 8.~1986.4), 前 비서실장(1986.4~1988.3), 前 보도국장(1988.3~11), 前 국제방송국장(1988.11~1991.3), 前 방송심의실장(1991.3~1992.2), 前 조직관리국장(1992.2~1993.2), 前 사회교육방송국 전문위원(1993.2~1994.9). 1994년 퇴사 이후 한국방송개발원 방송인력개발실장과 방송정책연구실장, 한국방송제작단 회장, <LPN 로컬파워뉴스> 논설위원 등지 역임.[116] 1980년 신군부의 언론정화 당시 해직되었다가 1989년 복직.[117] 前 홍콩특파원(1986~1989).[118] 1998년 명예퇴직 후 2009년 '방송개혁시민연대' 설립 참여.[119] 前 외신부장(1988.3~1989.1), 前 기획보도실 특집3제작부주간(1989.1~1990.4), 前 해설위원(1990.4~1991 / 1995.7~1996.4), 前 모스크바 특파원(1991~1995.7), 前 라디오제작부장(1996.4~1997.5), 前 뉴욕지국장(1997.5~1998.10). 이후 대한언론인회 이사 등지 역임.[120] 前 방송심의실 심의부장(1979~1981.2), 前 보도본부 TV편집부장(1981.2~1982.11), 前 보도본부 부국장 겸 편집실장(1982.11~1984.1), 前 방송연수원 연구위원(1984.3~1985.2), 前 부산방송본부 뉴스센터주간(1985.3~1986.3), 前 뉴스제작실장(1986.3~12), 前 수석부주간(1986.7~12), 前 보도국 TV편집부국장(1986.12~1988.3), 前 청주방송총국장(1988.3~1989.1), 前 심의실 심의위원(1989.1~1991.3), 前 보도국 TV제작주간(1991.3~1992.2), 前 보도국장(1992.2~1993.6). 이후 1994년 YTN으로 합류하여 초대 보도국장을 맡으며 1995년에는 상무이사 자리까지 꿰찬 바 있고, 1998년 이후 중앙일보-중앙방송 상임위원, 대구 FC 단장 등지 역임.[121] 前 라디오정치부장(1982), 前 경제특집부장(1982~1983), 前 경제부장(1983~1984), 前 부산방송본부 뉴스센터주간(1984~1985), 前 뉴스센터 부주간(1985), 前 기사심의부주간(1985~1986), 前 남북대화부주간(1986), 前 TV편집1부장(1986~1987), 前 외신부장(1987~1988), 前 해설위원(1988~1990 / 1993~1995 / 1996~2000), 前 과학부장(1990~1991), 前 대구방송총국 보도국장(1992~1993), 前 국제주간(1995~1996). 2000년 3월 31일부로 정년퇴임.[122] 1980년 강제해직 후 1985년 한국방송사업단으로 취직했다가 1988년 복직.[B] 1969년 MBC 이직.[B] 1969년 MBC 이직.[125] 1970년 문화공보부 비서실로 발령났다가 1971년 복귀. 前 홍콩특파원(1981.3~1984.3), 前 외신부장/제4부주간(1984.3~1985.1), 前 국제방송국 방송부장(1985.1~7), 前 총괄부주간(1985.7~1986.3), 前 미주한국방송(KTE) 전무(파견, 1986.3~1989). 퇴직 후 한동안 미국에서 식품 도매업 및 컴퓨터 부품 도매업에 종사하다 <미주중앙일보>, <여성경제신문>, <세종경제신문> 등에 칼럼을 기고해왔다. 2010년대 들어 <계간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여 <나의 아픔 우리들의 상처> 등 수필집을 내기도 했다.[126] 1970년 문화공보부 비서실로 발령났다가 1971년 복귀. 前 기획보도실 특집2제작부주간-보도제작국 제작2부장(부주간)(1986~1996), 前 제작1부주간(1996~1998). 1998년 명예퇴직.[127] 前 도쿄 특파원(1981~1986), 前 카메라취재부장(1998.10~1999.12), 前 전문촬영기자(1999.12~2001.3). 2001년 3월 31일 정년퇴임.

3.3. 1970년대


[128]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직.[129] 2004년 5월 20일 사망.[130] 원래 교양PD로 입사했다가 1980년 기자로 전직. 1994년 마이TV(현 SBS Golf) 상무로 영전.[131] 조선일보, 동아방송 출신으로 아호는 효암(曉巖). 前 중앙방송국 보도부/보도국장(1971.9~1974.7), 前 런던지국장(1974.7~1976.4), 前 파리지국장(1976.4~12), 前 국제국장(1976.12~1979.4), 前 워싱턴지국장(1979.5~1985.5), 前 올림픽방송본부장 및 아시아경기대회방송실시단장(1985.5~1987.8), 前 올림픽방송운영본부장(1987.8~1988.11), 前 기획조정실장(1988.11~1991.3). 1990년 서영훈 사장 사임 후 서기원 사장 선임 전까지 잠깐 사장 직무대행을 맡았으며 1991년부터 1년여 간 KBS 제작단(현 한국방송제작단) 사장을 맡았고, 방송위원회 위원(1993~1997), 한국방송개발원 이사장(1997~1999), KBS 시청자위원회 위원장(1999~2002), 대한언론인회 회장(2002~2006), 오라뉴스 대표고문(2007~2008) 등을 맡다가 2008년 1월 16일 사망.[132] 前 카메라취재부장(1986.12~1988.3), 前 영상편집부 제작위원(1988.3~1990.1), 前 카메라주간(1990.1~1991.3), 前 방송연수원 교수(1992~1993), 前 보도위원(1993). 1993년 정년퇴임 후 1995년 6월 14일 사망.[133] 동화통신 출신.[134] 2004년 12월 정년퇴임.[135] 서울신문, 조선일보, 경향신문 출신.[136] 대한일보 출신. 前 라디오수도권부장(1980.12~1981.11), 前 과학기술부장(1981.11~1982.7), 前 마산방송국장(1982.7~1984.7), 前 네트워크부주간(1985.7~1986.3 / 1986.7~10), 前 과학부주간(1986.3~7), 前 심의위원(1986.10~1987.6 / 1990.5~1992.7), 前 공주방송국장(1987.6~1989.8), 前 노무국장(1989.8~1990.5), 前 청주방송총국장(1992. 7.~1993. 4.), 前 보도위원(1993)[137] 조선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출신. 前 보도국 사회문화부장(1973~1976), 前 보도국 취재부국장(1975~1977.7), 前 보도국 부국장(1977.7~1980.6), 前 대전방송국장(1980.6~1982.11), 前 업무국장(1982. 11.~1984.7), 前 기획조정실장(1984.7~1985.8/1991.3~11), 前 사회교육방송국장(1985.8~1986.6), 前 보도본부 부본부장 겸 뉴스센터주간(1986.6~12), 前 부산방송본부장(1986.12~1989.4), 前 기획조정실 부본부장 겸 방송개혁발전위원장(1989.4~8), 前 인사관리실장(1989.8~1990.5), 前 경영본부장(1991.11~1993.3). 이후 KBS 아트비전 사장(1993. 3.~1995), KBS 이사회 4기 이사(1996~1998), KBS 사우회장(2007~2009) 등 역임.[138] 동화통신 출신. 1998년 3월 정년퇴임.[139] 동아일보/동아방송 출신.[140] 동화통신 출신. 前 주일특파원(1979.4~1986.6), 前 기획보도부주간(1986.6~7), 前 뉴스파노라마부주간(1986.7~12), 前 기획보도실 특집3제작부주간(1986.12~1987), 前 해설위원실 해설위원(1987~1989.1 / 1999.8~2001.6), 前 방송위원(1989.1~1990.2), 前 런던지국장(1990.2~1993.11), 前 국제부장(1993.11~1995.5), 前 도쿄총국장(1996.4~1999.8). 2001년 6월 정년퇴임 이후 2005년 'FM분당(현 성남FM)'을 개국하여 대표로 재직해왔다.[141] 동화통신 출신. 1997년 정년퇴임 후 호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경운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숭실대학교 언론홍보학과 등지 초빙교수, 대한언론인회 이사 등을 지내다 2014년 5월 17일 사망.[142] 前 사회부장(1990.2~1991.4), 前 라디오제작2부장(1991.4~9), 前 수도권부장(1991.9~1993.4), 前 정치부장(1993.4~1994.9), 前 취재주간(1994.9~1995.2), 前 TV제작주간(1995.2~1996.4), 前 보도국장(1996.4~1997.8)[143] 원래 편성PD로 입사했으나 기자로 전직. 前 뉴스기획부장(1991.9~1992.2), 前 보도제작국 제작1부주간(1992.2~1995.2), 前 TV편집부장(1995.2~1996.5). 1996년 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국제방송) 창립 당시 제작국장으로 이직한 이래 한국씨네텔 초대 대표(1999~2003), iTV 전무(2003~2004) 등을 역임하다 2004년 2월 8일 사망.[144] 문화공보부 물리기사 및 사진기사 출신.[145] 독립운동가 심재인의 차남. 1980년 신군부의 언론정화로 해직되었다가 1985년 복직. 前 경제부장(1993.4~1995.2), 前 사회부장(1996.4~1997.7), 前 국제부장(1997.7~1998.4), 前 취재주간(1998.4~12), 前 취재1주간(1998.12~1999.3), 前 부산방송총국장(1999.3~2000.1), 前 해설위원(2000.1~2001.4 / 2003.5~2004.7), 前 영업국장(2001.4~2003.5), 前 남북교류협력팀장(2004.7~2005.5). 이후 KBS 비즈니스 감사, 대한언론인회 이사 등지 역임.[146] 1972년 <시조문학>에서 '혼례'란 작품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며, 1986년부터 3년 동안 파리 특파원을 맡았다. 1991년 SBS 이직.[147] 원래 PD로 입사했다가 기자로 전직. 前 보도제작국 제작2부주간(1996.4~1998), 前 제작1부주간(1998~2001), 前 강릉방송국장(2001~2002), 前 보도제작국 선거방송기획주간(2002~2004). 2005년 정년퇴임 후 2008년 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국제방송) 방송본부장으로 영전.[148] 영화 촬영기사, 국방부 국군영화제작소, 한국방송연맹 홍보부, 한국반공연맹 출신으로 1987년 '한국TV카메라기자회(현 한국영상기자협회)' 창설에 참여하여 운영위원을 지내다가 1992년 1월부터 11개월 동안 제5대 회장을 지냈다. 前 보도국 뉴욕특파원(1988~1991). 1994년 퇴사 후 독립제작사 '톱프로덕션' 설립/운영.[149] 1994년 YTN 이직.[150] 합동통신, 대한일보, TBC 출신.[151] MBC 출신. 前 춘천방송총국 보도국장(1993~1994.8), 前 제주방송총국 보도국장(1994.8~1995.7), 前 전국부장(1995.7~1997.7), 前 사회부 기동취재부주간(1997.7~1998.5), 前 TV편집부주간(1998.5~10), 前 해설위원(1998.10~12), 前 여수방송국장(1998.12~2000.12), 前 시청자센터 홍보주간(2000.12~2002.11), 前 제주방송총국장(2002.11~2003.12). 2004년 퇴사를 전후해 제주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및 학과장, 방송위원회 보도/교양 심의위원, 뉴스통신진흥회 이사 등지 역임. 저서로는 <영욕의 빛과 그림자(2022)>가 있으며 1989년 제21회 한국기자상 방송제작부문 등 10여개의 상을 받았다.[152] 1980년 신군부의 언론정화 당시 해직되어 삼성정밀공업에서 카메라 광고업무를 맡다가 1983년 복직. 前 춘천방송총국 보도국장(1995.2~1996.4), 前 TV편집부 부주간(1996.4~1997.7), 前 사회부 부주간(1997.7~1998.5), 前 국제부장(1998.5~10), 前 뉴욕지국장(1998.10~2001.4), 前 취재2주간(2001.4~2003.5), 前 보도국장(2003.5~2004.2), 前 부산방송총국장(2004.2~2005.12), 前 해설위원(2005.12~2007). 2007년 17대 대선 당시 이명박 대선후보 방송특보를 거쳐 2008년부터 4년 동안 KT스카이라이프 사장을 맡은 뒤, 2013년 부회장으로 추대되어 1년 더 재직했다. 저서로는 <이것이 경쟁력이다(1994)>, <미국은 아니다(2001)> 등이 있다.[153] 대한일보, 문화공보부 보도국 출신. 前 편집부장(1979.9~1980), 前 방송(문화)연구소 연구위원(1981.2~11 / 1985~1986), 前 연구부장(1981.11~1982.11), 前 종합기획실 부장(1982.11~1984), 前 TV센터 제작관리담당(1984~1985), 前 기획조정실 기획위원(1986.4~1987.2), 前 대구방송총국 보도국장(1987.2~1988.5), 前 충주방송국장(1988.5~1989.1), 前 기획보도실 부실장(1989.1~1990.6), 前 보도제작국장(1990.6~1991.3), 前 비서실장(1992.2~1993.2), 前 제주방송총국장(1993.2~1994.8), 前 정책연구실장(1994.8~1995.2), 前 전산정보실장(1995.2~3). 1995년 KBS문화사업단 이사로 임명되어 3년간 지내고 대한언론인회 이사 및 부회장, KBS사우회 부회장 등 역임.[154] 前 홍콩 특파원(1992.12~1993.1), 前 베이징 특파원(1993.1~1996.5), 前 과학부장(1997.11~1998.5), 前 전국부장(1998.5~10), 前 국제부장(1998.10~2000.6), 前 런던지국장(2000.6~2002.2), 前 취재2주간(2002.2~11), 前 편집1주간(2002.11~2003.12), 前 보도제작국장(2003.12~2004.7), 前 취재4팀장(2004.7~2005.4), 前 방송문화연구팀(소)장(2005.4~2007.9), 前 부산방송총국장(2007.9~2009.9), 前 해설위원실장(2009.9~2010.2), 前 정책기획센터(본부)장(2010.2~2011.7). 2011년 KBS 비즈니스 감사로 옮겨 2년을 지내고 2014년부터 2년 동안 영화진흥위원회 감사 역임. 저서로는 <천안문을 열고 보니(1996)>, <찔레꽃과 된장(2007)>, <책바다 무작정 헤엄치기(2019)> 등이 있다. 2017년 은관문화훈장 수훈.[155] 1989년 KBS노동조합(1노조) 공정방송위원회 간사를 맡기 시작했고, 1990년부터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후 같은 해 KBS 사태 당시 제작거부 투쟁에 참여하다 구속된 바 있었다. 1991년 1월 'KBS방송민주화투쟁 구속자협의회' 의장을 맡다가 3월부터 '직무부여' 형식으로 보도제작국에 배치되어 집중기획 프로를 제작해왔고, 9월 28일 한국의 유엔 가입과 관련된 특집물 제작 도중 과로로 순직했다.[T] TBC 출신.[157] 前 뉴스제작부주간(2000.6~2001.4), 前 경제부장(2001.4~2003.5), 前 취재2주간(2003.5~2004.2), 前 보도기획팀장(2004.2~2005.12), 前 부산방송총국장(2005.12~2007.9), 前 인적자원센터 연수팀장(2008.9~12), 前 경영개혁단장(2009.1~11), 前 보도본부장(2009.11~2011.1). 이후 KBS 비즈니스 사장을 2013년까지 맡았으며, 2008~2009년까지 한국방송협회 사무총장도 역임.[158] 개그맨과 동명이인.[159] 2005년 정년퇴임 후 2006년 JIBS 방송본부장으로 영전되어 2011년 대표이사까지 올랐다.[160] 영화 촬영기사 출신. 1983년 바인타브락 2봉 등정 과정과 남태평양 새우어업 현장 등을 취재했고, 1984년 9월 20일 단양팔경 취재 도중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출처: <TV가이드> 1984년 제166호 p43.)[161] 전남일보(현 광주일보), 전일방송 출신. 1994년 퇴사 후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호남매일 사장 등 역임.[162] 1997년 7월 7일 백혈병으로 사망.[163]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해직되어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후 이 곳에서 줄곧 일했고, 2007년 방송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복직.[164] 前 스포츠국 스포츠취재부주간(1999~2002), 前 스포츠전문기자(2002~2003), 前 스포츠제작팀장(2005~2007), 前 해설팀/해설위원실 해설위원(2007~2009). 2009년 12월 정년퇴임.

3.4. 1980년대


[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176] 1990년부터 SBS 이직.[T] TBC 출신.[T] TBC 출신.[179] 1984년 주미공보관으로 임용된 후 주핀란드공보관 등을 거쳐 1990년 SBS 이직.[T] TBC 출신.[T] TBC 출신.[182] 1991년 SBS 이직.[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187] 1991년 SBS 이직.[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200] 1995년 YTN 이직.[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206] 1991년 SBS 이직 후 1995년 YTN 이직.[T] TBC 출신.[208] 1994년 YTN 이직.[209] 한국일보, DBS 출신.[210] 라디오DJ, 영화감독과 동명이인으로 동양통신-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D] DBS 출신.[217] 1981년 MBC 이직 후 1991년 SBS 이직.[D] DBS 출신.[219] 1994년 YTN 이직.[D] DBS 출신.[221] 1991년부터 SBS 이직.[D] DBS 출신.[223] 1981년 MBC 이직 후 1991년 SBS 이직.[D] DBS 출신.[D] DBS 출신.[226] 합동통신, DBS 출신으로 1991년 SBS 이직.[D] DBS 출신.[C] CBS 출신.[229] 前 춘천방송(총)국 뉴스센터부(보도국)장(1986~1987). 1988년 CBS로 복귀.[C] CBS 출신.[231] 前 LA특파원(1986~1989), 前 국제부장(1991~1992). 1992년 2월 22일 사망.[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243] 배우와 동명이인으로 2005년 3월 정년퇴임.[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C] CBS 출신.[서] 서해방송 출신.[서] 서해방송 출신.[서] 서해방송 출신.[252] 2001년 10월 20일 자택 화재로 사망.#[253] 대한제국 시절 참정대신과 동명이인. 국립영화촬영소 및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256] 1991년 SBS 이직.[T] TBC 출신.[258] 2020년 6월 25일 사망.[T] TBC 출신.[T] TBC 출신.[261] 1991년 SBS 이직.[T] TBC 출신.[T] TBC 출신.[T] TBC 출신.[265] 미국의 소리 한국어뉴스 담당 기자 출신으로 前 뉴스80 앵커(1982~1983.8), 前 워싱턴 특파원(1983.8~1986). 1986년 문화공보부 해외공보관 외보부장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고, 1988년부터 4년 동안 대통령비서실 공보비서관을 지낸 뒤 1992년 동아마스터비전(현 동아TV) 설립 당시 부사장으로 모셔졌다. 1995년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 특보와 대전 유성지구당 위원장을 지내다가 1996년 15대 총선 때 대전 유성구 후보로 출마했으나, 조영재 자유민주연합 후보에게 졌다. 이후 동아방송예술대학 상임이사, 글로벌커뮤니케이션스 대표이사, 성균관대학교 교수, 대구가톨릭대학교 언론광고학부 석좌교수, 아리랑TV <Diplomacy Lounge> MC 등지 역임.[266] 중앙일보 출신. 한자명 중 '涍' 자가 '성씨 효'라고 읽혀지나 본인은 '호'라고 읽는다. 그런고로 인물정보나 언론에선 '엄효현'이라고도 기재되어 있다. 前 프랑크푸르트 특파원(1981.5~1984), 前 프랑크푸르트지국장(1984~1989). 1989년 문화공보부 3급 공무원으로 임용되었다가 1990년부터 3년 동안 민주사회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후 청와대 정무수석비서실 홍보2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가 1994년부터 4년 동안 한국방송개발원 원장을 역임했다. 1996년에는 전 독일 외교안보 보좌관 호르스트 텔칙의 저서 <329일: 베를린장벽 붕괴에서 독일통일까지>를 번역한 바 있다. 1988년 국민포장 수훈.[8기] [268] 1983년부터 1987년까지 교양PD로 일한 적 있으며 1991년 SBS 이직.[9기] [270] 1989년 6월 11일 교통사고로 순직.[9기] [9기] [273] 1991년 SBS로 옮겼다가 1994년 YTN으로 또 이직.[9기] [9기] [276] 2013년 12월 31일 정년퇴임.[9기] [278] 1995년 YTN 이직.[279] 1994년 YTN 이직.[9기] [9기] [9기] [9기] [284] 사회부 사건기자 시절인 1984년 파랑도 취재로 한국기자상을 받았으나, 동년 9월 20일 단양팔경 취재 도중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9기] [9기] [9기] [288] 2002년 10월 29일 사망.[9기] [290] 당초 PD직으로 입사했으나 이후 기자로 전직. 1990년부터 3년여 간 KBS 노동조합 부산지부장을 맡은 바 있었다. 前 사회2부장(2001.4~2002.11 / 2003.5~2004.7), 前 TV편집부주간(9시뉴스)(2002.11~2003.5), 前 시사보도팀장(2005.4~12), 前 1TV뉴스제작팀장(2005.12~2008.5), 前 해설위원(2008.5~12), 前 방송문화연구소장(2009.1~9), 前 보도(시사)제작국장(2009.9~2011.1), 前 부산방송총국장(2011.1~2012.1), 前 보도본부장(2012.2~2013.5). 이후 동서대학교 영상매스컴학부 객원교수, GS홈쇼핑 사외이사 등지 역임.[9기] [9기] [9기] [9기] [9기] [296] 당초 PD직으로 입사했으나 기자로 전직. 1991년 SBS 이직.[9기] [9기] [299] 1991년 SBS 이직 후 1994년 YTN 이직.[9기] [9기] [9기] [9기] [304] 1994년 YTN 이직.[8기] [306] 원래 카메라맨으로 입사했다가 1982년 10기 카메라기자로 재입사. 현역 시절인 2000년부터 2년 동안 제15~16대 한국TV카메라기자협회 회장을 맡았다. 前 영상편집제작팀장(2004.7~2006.12), 前 뉴스시스템혁신프로젝트팀장(2006.12~2008.12). 2012년 정년퇴임했으며 저서로 <Avid Xpress DV & Pro(2004)>, <Avid Xpress Dv & Pro, Media Composer(2008)> 등을 냈다.(개인 홈페이지)[307] 1994년 YTN으로 이직.[308] 1983년 6.25 특집 <총성없는 전장, 서해5도를 가다> 제작에 참여하여 사내 우수프로그램상을 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으며, 오디오 및 방송보도기재에 조예가 깊고 연구열 또한 높았다. 1984년 9월 20일 단양팔경 취재 도중 헬기 추락사고로 순직.(출처: <TV가이드> 1984년 제166호 p43.)[309] 前 청와대 비서실장과 동명이인. 前 베이징 특파원(2002.2~2005.5), 前 남북교류협력팀장(2005.5~2008.9), 前 이사회 사무국장(2009.4~2012.1), 前 부산방송총국장(2012.2~2014.3). 2014년 4월 KBS 미디어 감사로 임명되었다가 2015년 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국제방송) 방송본부장으로 영전되어 3년 동안 재직. 이후 영산대학교 방송사진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310] 1995년 YTN 이직.[311] 원래 라디오PD로 입사했으나 기자로 전직. 2001년 대통령비서실 언론비서관으로 임명된 후 EBS 부사장, 삼정투자자문 대표, 삼정KPMG그룹 부회장, EY한영 부회장, GOOD TV 대표 등 역임.[기상] [313] 1991년 SBS 이직.[314] TBC 및 중앙일보 출신.[11기] [11기] [11기] [11기] [11기] [320] 前 워싱턴 특파원(2000.4~2003.7), 前 국제부장(2003.7~2004.7), 前 취재3팀장(2004.7~2005.12), 前 해설위원(2005.12~2006.7), 前 시사보도팀 CP(2006.7~2008.4), 前 시사보도팀장(2008.4~9), 前 정책기획센터장(2008.9~2010.2), 前 보도국장(2010.2~2011.7), 前 대전방송총국장(2011.7~2013.5), 前 보도본부장(2013.5~2014.5). 이후 KBS 아트비전 감사를 6년 동안 지내고 2021년부터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객원교수로 재직 중.[11기] [11기] [11기] [11기] [11기] [326] 당초 전문언어PD로 입사했으나 후에 기자로 전직. 前 파리지국장(2006.7~2009.12), 前 보도(시사)제작국 탐사보도팀(부)장(2009.12~2011.1), 前 스포츠국 스포츠취재부장(2011.1~10), 前 심의실 심의부 심의위원(2013~2014), 前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 뉴스국장(파견, 2014~2018). 2019년 6월 30일부로 정년퇴임한 후 2023년 국방부 국방홍보원장으로 임명.[11기] [328] 당초 전문언어PD로 입사했으나 곧바로 기자로 전직.[12기] [12기] [12기] [12기] [12기] [334] 前 국제팀장(2006.5~2008.4), 前 정치외교팀장(2008.4~12), 前 시청자센터 홍보팀장(2009.1~2011.1), 前 시사제작국장(2011.1~2012.1), 前 심의실장(2012.2~12), 前 해설위원(2013~2014.8), 前 보도본부장(2014.8~2015.12). 이후 2018년까지 3년 간 KBS 비즈니스 사장을 역임.[12기] [336] 前 뉴스제작부주간(2003.5~2004.7), 前 상파울루 특파원(2005.7~2008.9), 前 탐사보도팀장(2008.9~2009.11), 前 네트워크팀장(2009.11~2010.2), 前 편집주간(2010.2~2011.7), 前 방송문화연구소장(2011.7~2012.1), 前 시사제작국장(2012.2~2013.5), 前 정책기획본부장(2013.5~2014.9). 이후 KBS 비즈니스 감사를 3년 동안 지내고 순천향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초빙교수, 극동대학교 초빙교수, 대한방직 사외이사 등을 지내며 2021년부터 이사로 선임됐다.[12기] [12기] [12기] [12기] [341] 코미디언, 배우와 동명이인.[342] 1990년 '초록카페 사건'으로 1991년 해고되었다가 1994년 복직. 1991년에는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편집실장 및 노조 편집국장, 2000~2001년까진 노조 부위원장도 맡았다. 前 창원방송총국 보도국장(2009.1~2010.6), 前 부산방송총국 보도국장(2010.6~2011.12), 前 울산방송국장(2011.12~2014.8).[343] 2000년 퇴사 후 중소기업 '가제보'를 운영해 오다 2008년 휴온스 홍보/광고담당 고문으로 영전.[344] 前 <사건 25시(1기)> 및 <KBS 뉴스광장> 앵커. 1999년에는 2년 전 모 의류업체로부터 청탁 등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어 서울지법으로부터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고, 퇴사 후 미지온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라이프팩 회장 등을 역임.[345] 배우와 동명이인.[11기] [11기] [11기] [11기] [11기] [351] 1991년 SBS 이직.[11기] [11기] [11기] [11기] [11기] [11기] [11기] [11기] [360] 1995년 KBC로 이직.[361] 2010년 퇴사 후 2012년 온케이웨더 기상예보사로 영전되어 날씨 관련 칼럼을 기고해왔고, 이후 웨더커뮤니케이션즈 이사 역임.[13기] [13기] [364] 입사 3개월 후 퇴사하고 1987년 한국일보로 입사.[13기] [366] 前 방콕 특파원(2001.7~2004.7), 前 해설위원(2006.4~12/2008.5~12/2010.6~2012.1/2013.1~2014.3), 前 행정복지팀장(2009.1~2010.3), 前 인터넷뉴스주간(2012.2~12), 前 이사회 사무국장(2014.3~8), 前 강릉방송국장(2014.8~2015.11), 前 보도본부장(2015.11~2017.1). 2017년 3월 KBS 미디어 감사로 발령나서 2년 간 몸담았고, 이후 국제FX렌트본부(주) 대표이사, 복음언론인회 대표, 차별금지법바로알기 아카데미(차바아) 운영위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권리특별위원 등 역임. 저서로는 <2008년 촛불시위와 프레임 전쟁(2011)>, <누워서 가는 태국여행(2013)>,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2019)> 등이 있다.[13기] [13기] [13기] [13기] [13기] [13기] [13기] [374] 원래 PD직으로 합격했으나 얼마 안 가 기자로 전직.[13기] [14기] [14기] [14기] [379] 1991년 SBS 이직.[14기] [14기] [14기] [383] 前 모스크바 특파원(1998.7~2001.6), 前 디지털뉴스팀장(2006.12~2008.12), 前 경제팀장(2009.1~2010.3), 前 해설위원(2010.3~2011.7), 前 취재주간(2011.7~2012.12), 前 보도국장(2012.12~2014.5). 이후 방송문화연구소 공영성연구부(2014~2016), 인재개발원(2016~2020)을 각각 거치다 2020년 정년퇴임.[14기] [385] 서울 오류중학교 및 관악고등학교 교사 출신. 1988년 세계일보로 옮겼다가 1996년 경향신문 이직.[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396] 2018년 6월 30일부로 정년퇴임.[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14기] [410] 1988년 국민일보 이직.[14기] [14기] [413] 코미디언과 동명이인으로, 원래 아나운서로 입사했으나 후에 기자로 전직했다. 1994년 YTN으로 이직.[15기] [415] 1994년 YTN으로 이직.[15기] [417] 1991년 SBS로 옮겼다가 1995년 YTN으로 또 이직.[15기] [419] 1994년 YTN으로 이직.[15기] [15기] [15기] [423] 2021년 정년퇴임.[15기] [425] 1989년 재입사 후 1991년 SBS로 이직.[15기] [427] 1994년 YTN으로 이직.[15기] [15기] [430] 1994년 YTN으로 이직.[15기] [432] 前 보도운영부장(2010.6~2011.1), 前 광주방송총국 시청자서비스국장(2011.1~9), 前 법무실장(2011.9~2012.12), 前 디지털뉴스부장(2013.12~2014.5), 前 심의실 심의위원(2014.5~2016), 前 인재개발원 인재개발부 교수(2016~2018). 2018년 정년퇴임했으며 저서로는 <방송기자가 쓴 논술 잘 ,하는 법(2005)>, <2막의 멘탈(2016)>, <인생 180도 바꾸기(2019)>등이 있다.[15기] [15기] [15기] [15기] [15기] [15기] [439] 1991년 SBS로 이직.[15기] [15기] [442] 1994년 YTN으로 이직.[15기] [15기] [445] 원래 아나운서로 입사했다가 기자로 전직.[15기] [447] 원래 일반사무 직종으로 입사했으나 이후 기자로 전직.[14기] [14기] [14기] [14기] [452] 2021년 퇴사.[453] 1993년 다솜방송 이직.[454] 1994년 YTN으로 이직 후 1997년 12월 23일 췌장암 투병 도중 사망. 사후 한국기자협회 YTN지회는 그의 뜻을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딴 기자상을 제정한 바 있다.[455] 前 탐사보도팀장(2006.12~2007.9), 前 대외정책팀(실)장(2007.9~2008.9 / 2011.1~2012.12), 前 비서팀(실)장(2008.9~2009.9), 前 정치외교팀(부)장(2009.9~2011.1), 前 편집주간(2013.1~2014.8), 前 런던 특파원(2014.8~2015.12), 前 보도국장(2015.12~2017.8), 前 대전방송총국장(2017.8~2018.7). 2023년 퇴사.[456] 코미디언과 동명이인. 원래 PD직으로 입사했다가 후에 기자로 전직.

3.5. 1990년대


[457] 기자 초년병 시절 영월방송국에서 순환근무를 한 바 있고, 1994년 YTN 이적 이래 2018년까지 방송심의부장 및 홍보팀장, 인사팀장, 스포츠부장, 문화과학부장, 뉴스1~2팀장, 편집1부장, 강릉지국장, 타워운영팀장, 편집부국장, 보도국장 등을 두루 거쳤다.[458] 前 런던 특파원(2004.12~2011.1), 前 뉴스제작2부장(2011.1~2012.6), 前 과학·재난부장(2012.6~12), 前 국제부장(2012.12~2013.12), 前 순천방송국장(2016.8~2017.8), 前 대외협력실장(2018.4~2019.2), 前 대외협력국장(2019.2~8), 前 보도본부장(2019.8~12). 삼한일렉트로닉스 창업주 김종인(1951~2022)의 동생이기도 하며 2022년부터 국회방송자문위원장도 역임.[459] 前 선양 특파원.[460]4시 뉴스집중/사사건건 앵커(2016.4~2020.6), 前 방콕 특파원(2020.8~2023.8). 2024년 명예퇴직.[461] 축구인과 동명이인. 2019년 10월 5일 사망.#[462] 1999년 9월 14일 히말라야 캉첸중가봉 등정 생중계 취재 도중 눈사태로 순직.[463] 2024년 명예퇴직.[464] 2021년 카카오로 이직.

3.6. 2000년대 이후


[465] 2018년에 KBS기자협회장 역임. 2024년 명예퇴직.[466] 김한양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개명인지 필명인지는 불명. 2015년 12월 퇴사 후 드라마 제작사인 실크우드를 설립했으며, 시간,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 등을 제작했다. 이후 2020년 8월에 신세계그룹의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마인드마크에 인수되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하여 2023년 3월에 매각됐으며, 2024년 현재는 우주제작소로 사명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자회사로는 같은 해 KBS에 입사한 前 아나운서 한석준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 '비단숲'이 있다.[467] 야구인과 동명이인. 2006년 5월 8일 사망.[468] 서울신문 출신. 2006년 SBS로 이직.[469] 조선비즈 출신. 2022년 1월 18일 사망.#[470] 2022년 2월 10일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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