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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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통신회사인 KT의 공기업 시절부터 민영화 이후의 내용을 서술한 문서다.2. 역사
2.1. 민영화 이전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3764><tablebgcolor=#003764> 대한민국 체신부의 후신(後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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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일부 이전) | 우정사업본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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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기통신공사 당시 광고(1987년). 광고 속 캐릭터는 당시의 마스코트다. |
한국통신 시절 공중전화 부스에 붙어있던 표식 |
원래는 체신부[2] 산하 전무국(電務局)[3]이 전기통신서비스 사업을 관장했으나, 1981년 3월 14일 '한국전기통신공사법' 제정 후 12월 10일에 한국전기통신공사로 새로 출범한 후 이듬해 신정을 기해(1월 4일 업무개시) 정식 발족되었다. '한국통신'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90년 12월.# 다만 법률상 정식 법인명은 2002년 완전 민영화될때까지 계속 '한국전기통신공사'였고 '한국통신'은 일종의 브랜드명칭이었다.[4][5] 한통 출범 당시에는 기업이념을 '정보, 통신, 인간의 융화'로 정했다. 원래는 공기업도 아니고, 우정사업본부처럼 체신부 소속기관이었다보니 체신부 시절에 국가직 공무원 시험을 보고 입사하여 체신공무원 → 한통 직원(공기업) → kt 직원(민간 대기업) 테크를 두루 거치고 명퇴[6]하신 분들도 계신다.[7] 정부부처 직속 기관에서 공기업으로 바뀔 때, 직원들은 자신의 직업이 공무원에서 일반 직장인이 되어버리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고...[8][9] 한국통신 시절 영어 약칭은 KTA(Korea Telecomunication Authority)였다.
1984년부터 KBS와 MBC의 송신시설 및 송신운용조직(인력)이 한국통신에 이관되었다가 1988년 양 방송사에 환원되기도 했다.
공사화 후 본사는 1983년 8월 국제자동전화(DDD) 서비스를 개시했고, 1984년 12월에 시외전화망을 개통한 후 이듬해 충북 보은에 제1위성통신지구국을 신설했다. 1986년 3월 우리 기술로 개발한 전전자교환기(TDX-1)를 개통하고 1987년 7월 전국 전화 광역자동화를 완수해내 '1가구 1전화' 시대를 개막했다. 1988년 10월 30일 전화가입자 수 1천만을 달성한 후 1989년부터 서비스-품질-경영 3개 혁신을 담은 '3I 운동'을 폭넓게 전개하였고, 1990년 12월 10일부터 '기업문화헌장' 선포와 동시에 새 CI를 공개한 뒤 20일엔 한국통신카드(주)를 세웠다. 1991년 9월부터 컴퓨터통신 '하이텔' 시범서비스를 실시한 후 11월 29일에는 TDX-10을 처음 개통함과 동시에 TDX 회선 400만을 돌파해냈다. 12월 1일에 한국경제신문사와 합자해 한국PC통신(주)를 세웠다.
그 외에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통신주관기관으로 활약하였고, 1993 대전 엑스포 때 '정보통신관'을 열었다. 1994년에 국내 최초로 상용 인터넷 서비스 'KORNET' 개통 후 1995년에 '무궁화위성 1호'를 쏘아 우주통신 시대를 열었고, 1996년에 '무궁화위성 2호'를 쏘아 국내 위성방송 시대를 열게 했다. 그 해 6월에 PCS 사업권을 따낸 후 12월 27일에 한국통신프리텔(주)를 세웠고, 1997년 5월에 '전환기 관련 특별대책'을 수립해 경영혁신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여 10월 1일, '공기업 경영구조 개선 및 민영화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부출자기관으로 전환했다. 1998년 한국증권거래소에 상장하였고 이후 뉴욕증권거래소와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하였다.
1970년대 중반 이전에는 이용자들에게 집 전화설치비가 너무 비싸다며 욕을 먹었고, 그 이후로는 집전화가 보편화되면서 이러한 불만이 크게 줄었지만 주로 공중전화 관리와 관련해서 까였다. 특히 1990년대 PC통신이 일반화되면서 PC통신 이용자들에게 욕을 왕창 먹었는데 이때의 PC통신은 전화선을 이용하여 모뎀으로 접속하는 방법이 대다수였다. 문제는 PC통신을 이용했을때도 시분제를 적용했기에 전화요금이 3분당 몇십 원씩[10][11] 나가는 일종의 종량제가 되었던 것. 따라서 이때는 PC통신에 심취했다가 몇십만 원 단위의 전화 요금 고지서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참고로 1990년대의 몇십만 원은 한 달치 급여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으니 쌩돈을 날리거나[12] 아니면 부모님한테 두들겨맞는 경우가 속출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13] PC통신이 일반화되면서 이 문제가 계속 제기되자 1997년 4월 1일 정액제 요금도 출시했는데 24시간 무제한이 아닌 일정 시간만 정액제가 적용되는 제한 요금제였다.(일명 야간정액제[14]) 당연히 이것도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식으로 대차게 까였다.[15]
거기다 하나로통신이 출범하면서 ADSL을 전면에 내세우자 한국통신은 ISDN2라는 것을 내세우는데, 이건 기존에 서비스되던 ISDN을 아무런 개선 없이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16] 이것도 당연히 대차게 까이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로통신의 ADSL(하나포스)에 가입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몇 년 동안 시범서비스만 하던 ADSL(메가패스)을 내놓게 된다. 이처럼 민영화 이전에는 통신비는 그렇게 싸지 않으면서 관료주의적인 요소는 강하며 수익성 때문에 정보화는 뒷전으로 밀어놓은 국영기업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그나마 까이지 않았던 건 2000년에 PPP서비스인 POWWOW[17]의 인터넷 접속 요금을 분당 3원/월 4,000원으로 조정한 것인데 ADSL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때라서 별 의미가 없었다. 또한 2001년 6월 1일에 할인시간 정액제[18][19]가 IDSN[20]/PSTN 종일 정액제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별 의미는 없었다.[21]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전화 안내멘트(다이얼이 늦었거나, 잘못 걸었거나 등)의 BGM으로 Earl Klugh의 'Across the sand'가 쓰였다. #[22] 그 이전에는 Francis Lai의 'emotion'이 쓰였다.#[23]
2.2. 민영화 이후
1981년 '통신사업경영체제' 개편을 시작으로 1987년에 정부가 공기업 민영화추진위원회를 설치해 민영화하기로 확정되었으며, 1997년부터 점진적으로 민영화를 진행하다가[24] 2002년 5월에는 정부지분 완전매각에 따라 완전 민영화 절차를 밟았고, 2002년 8월 20일 공식적으로 완전 민영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전화국을 '지사'로 개편했다.[25] 공식 명칭은 완전 민영화 8개월 전인 2001년 12월 KT로 변경하였으며, 한국통신 이름을 달고 있던 한통의 자회사들도 2003년 전부 앞 명칭을 KT로 바꿨다. 1기 사장은 이용경 KTF 사장. 2005년 12월 28일 북한 개성공단에 남북한을 잇는 통신망을 개통하고 지사까지 세웠다. 2007년 SC제일은행으로부터 제일FDS도 인수했다.사실 2009년 말 iPhone을 내면서 일부 사용자에게 잠시 이미지가 개선되었던 적이 있었다. 아이폰이 들어오기 전에는 데이터 통신 요금이 너무 비쌌고[26], 외제 단말기도 국내에 들어오면 Wi-Fi 기능이 삭제되어 꼼짝없이 통신사의 데이터 통신을 써야했던 시절이 있었다.[27] 그러다 kt에서 아이폰을 아무런 수정 없이 그대로 출시하면서 국내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릴 것이 암시했고, 데이터 통신 요금은 많이 내려가지는 않았지만 통신사 차원에서 Wi-Fi도 열심히 설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기에 이 시기에 kt의 이미지는 잠깐 좋았던 적이 있었다. 거기다 그때 SKT가 삼성전자와 손을 잡고 내놓은 스마트폰이 악명높은 옴레기였던데다, SK텔레콤이 이 시기에 여러 가지 문제를 많이 터트리면서 반대급부로 이미지가 좋아진 것도 있다.[28][29]
2009년 6월 1일 이동통신업체인 KTF와 합병, 초거대 통신회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이때 KTF 건물에서 F자만 떼면 통합 KT 간판이 되니 돈이 별로 안 들어갔으나#, 2009년 7월 신CI를 적용하면서 이마저도 헛짓이 되었다.
한편 가입자 몰래 정액제로 가입시킨 게 들통나 몰래 kt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 #[30]또 2G 서비스를 종료시키기 위해 무분별한 DM발송과 집요한 연락을 하였으며, 심지어 집전화를 끊어 기사가 방문하게끔 만들어 2G 휴대폰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다. #
아이폰을 처음 도입한 통신사답게 앱 생태계 육성을 위해 2010년 에코노베이션 센터라는 이름의 스마트폰 앱 개발자 지원 센터를 오픈했다. 우면동과 선릉, 서초 등 서울권을 중심으로 몇 개의 센터와 몇몇 지방 대학에 동아리 형식의 센터를 개소하였으며, 회의 공간을 제공할 뿐 아니라 아이폰, 맥북 등의 개발 기기를 지원하고 한창 때에는 경진대회나 컨퍼런스,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까지 지원했으나 2014년부터 사업을 축소하며 결국 2016년에 완전히 종료했다. 현재는 전남대학교에 동아리 하나가 남아있으나 이름을 제외한 KT 지원사업 시절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2011년 유아교육용 소형로봇 '키봇'을 출시했고, 2012년 2월에는 삼성 스마트 TV의 인터넷을 끊었다.한국일보 하지만
그리고 2012년 7월 즈음에 변칙P2P를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DPI(심층패킷검사, Deep Packet Inspection)를 도입했다. 예전의 삼성 스마트TV 트래픽 논란과 유튜브 속도 제한 논란의 연장선으로 최종적으로는 총량제(누적 트래픽 총량 제한)나 종량제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 kt에서는 종량제가 목적은 아니라고 한다만 글쎄다. 미디어오늘 네이버뉴스
2012년 1월부터 LTE 서비스를 시작했다. 브랜드는 LTE WARP. 다스 베이더를 이용한 WARP 광고가 잘 먹히지 않자 버스커 버스커를 긴급 투입한 빠름~ 빠름~ 빠름~ 광고로 대체하였다. 하지만 LG유플러스의 약진으로 인해 LTE 꼴지로 밀려났고, LTE 꼴지 신세를 면하기 위해 베가 레이서 2, 갤럭시 R 스타일 등 쟁쟁한 폰들을 한 자릿수 가격에 풀었다!
2012년 9월 보조금 대란 때 통신3사가 갤럭시 S III를 정신나간 가격에 풀어서 KT도 LTE 가입자를 대량 유치했다. 그런데 주말에 어마어마한 양의 번호이동이 들어오고 또 나가면서, 첫 영업일인 9월 10일에 전산이 터졌다. 그것도 KT만! 들어오는 사람도 못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도 못 나가는 막장 상황에, 기다리다 못한 일부 LG유플러스 판매자는 KT에서 오는 번호이동을 폭파시키기까지 했다. 공식적으로는 12일에 다 복구했다고는 하는데 전혀 믿을 수가 없는 게, 13일에도 개통이 안 된 번호 이동건이 수두룩하다. 덕분에 이 주에는 보조금 잔치가 아니라 번호이동 전산 터진 걸로 기사가 잔뜩 나갔다. 특히 KT가.
여담이지만 KT LTE의 만족도는 영 좋지 않다.# 2G 가입자들을 헌신짝처럼 쫓아내서 가뜩이나 이미지가 안 좋은 판에 주파수 문제[31]로 LTE 서비스 개시가 6개월이나 지연되어 2012년 1월 기준 KT LTE가 서울에서 첫 시작할 당시 LG유플러스는 이미 84개 시에서 LTE 서비스를 제공 중이었다.
거기다 멀티캐리어 주파수인 900MHz 도 혼선이 되고 있어 통화 품질 저하 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주파수를 이동하여 혼선을 피해 멀티캐리어 서비스
KT 가입자 800만 명의 개인정보가 털린 것이 확인되었다. 네이버 뉴스링크
그런데 2014년 3월 6일 또 털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번 건 1,200만 명과 전건 800만 명을 합쳐 도합 약 2,000만 명의 개인정보를 유출시켜버렸다. KT 홈페이지 개인정보 유출 사건 문서 참고.
2014년 6월 13일까지 해외망 보수 공사중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로 인해서 그런지 유튜브 재생이 원활하게 안 되는 현상이 제기되는데 KT측에선 이에 대한 언급이나 공지사항이 전혀 없었다.
2014년 10월 20일 초고속 인터넷보다 10배 빠른 기가 인터넷을 출시하면서 하루 용량 일 100GB 초과 시에는 인터넷 속도를 100Mbps로 제한하는 만행을 해버렸다. 하루에 100기가라니,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 정도의 트래픽을 소모할까 싶지만 잘 생각해보자. 그 회선을 혼자 쓰나?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보급되면서 자취를 하지 않는 이상은 한 가구에 인터넷에 연결할 수 있는 기기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서너 대쯤은 될 텐데, 거기에 4K를 위시한 각종 고해상도 컨텐츠가 늘어나면서[32] 일반 사용자가 하루 사용량을 넘어갈 만한 상황이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토렌트나 서버를 돌리는 헤비 유저들을 막기 위해 취한 조치라고 하더라도 업로드 속도를 제한했었더라면 일반 사용자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헤비 유저들을 잡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하루 100기가라는 용량에 묻혀 간과되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사용 트래픽이 누적되는 기준이 100Mbps를 초과해서 쓰는 트래픽만 누적되는 게 아니라 100Mbps 미만의 속도로 소모되는 트래픽도 하루 사용량으로 계산된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하루 100기가라는 제한이 지금 당장은 대부분의 사람이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충분히 부족할 만한 용량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왔을 때 과연 kt가 하루 이용량을 순순히 늘려줄까?[33]
2016년부터 '올레'라는 브랜드보다 kt라는 이름을 더 밀어주고 있다. '올레 스퀘어'가 'kt 스퀘어'로 바뀐 것을 시작으로 광고에서도 올레 대신 kt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현재 kt 측에선 "올레 스퀘어의 경우, 최근 내·외부 리뉴얼(새단장)을 하면서 회사 명칭인 kt가 더 부각되도록 명칭을 바꾼 것일 뿐"이라며 "기존에 사용하던 '올레' 브랜드 명칭을 인위적으로 바꿀 계획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kt는 이미 앞으로 출시되는 신규 상품이나 서비스에서 더 이상 '올레' 표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기사 또한 일부 olleh 스마트폰을 대상으로 추노마크를 olleh에서 kt로 변경하기 시작했다.
또한, 단말기에 표시되는, 통신사 캐리어명도 2016년 3월을 기점으로 일부 기지국에서는 기존의 olleh가 아닌 kt로 캐리어명이 표시된다. 2017년 3월 17일 오후쯤부터 대부분의 기지국에서 kt로 표시하는 걸로 보아 기지국 업데이트를 한 모양이다. 그리고 테스트한 결과 일부 선박에는 olleh라고 아직도 캐리어명이 표시된다. 또한, kt wiz의 응원가에서 올레가 들어간 건 죄다 바뀌거나 없어졌다. 특히 오정복선수의 응원가는 앞부분 올레부분이 생명이었는데 이게 없어져서 콱갤에서 모기업은 엄청 욕을 먹는 중이다. 이후 항의가 심했는지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olleh 표기를 없애는 이유에 대해 황창규 회장이 이석채 전 회장의 색채를 지우기 위해서라는 얘기가 있다. 같은 해 개성지사도 개성공단 폐쇄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결국.. 언더케이지 갤럭시 J5 / J7 2016 출시 관련기사에서 J7 뒷 커버 통신사 로고가 olleh에서 kt로 변경되었고 휴대전화에서 잘 보면 통신사 캐리어도 kt로 변경되었다. 노트7부터는 부팅로고에서도 올레가 아닌 kt로 변경되었다. 고작 대문자에서 소문자로만 변경되는데 무려 3번이나 바꿨다. 그런데 올레 브랜드는 버리지 않는다고 보아 SK텔레콤처럼 올레라는 브랜드는 일부 상품과 지사 등 kt 본사 직속 지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리점에서만 olleh 브랜드를 그대로 둘 가능성이 높아졌다.[34]
그러던 2017년 7월 경 갑자기 올레닷컴의 사이트 배너가 결국 kt로 바뀌었다. 남아있던 olleh의 상징을 사실상 버린 것으로 보인다. 또한 olleh로 표기한 대리점 간판을 최근들어서 kt로 교체되기 시작하였다.[35]
2017년 9월 18일, 점점 모든 것이 2016년을 기점으로 olleh에서 kt로 바뀌고 있는 가운데, 변경될 것으로 예상되었던 olleh.com → kt.com 전환도 확정되어 사이트 주소가 10월 1일을 기점으로 변경될 예정이며 잠정적으로 며칠 동안 사이트 이용이 불가하다는 내용이 공지사항과 메인화면에 게재되었다. 물론 올레샵(olleh shop)도 KT Shop으로 전환되었다. 공지사항 글 내용 관련 공지 이미지
2018년 5월 10일에 '남북협력사업개발 TF'를 발족하여 개성공단 등 남북통신 인프라 복구를 추진코자 했다.
본업인 통신업 외에도 금융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케이뱅크의 최대주주를 노리고 있지만, 은산분리 규제에 막혀서 케이뱅크 주식을 더 매입하기 힘든 상태였다. 정치권에서 신산업 육성을 위해 인터넷전문은행에 한해 은산분리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인터넷은행법이 발의되어 국회 정무위원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2020년 3월 인터넷은행법이 부결되면서 KT의 꿈이 좌초될 뻔했으나, 4월에 인터넷은행법이 수정되어 다시 본회의에 안건으로 올라왔고, 이번에는 가결되었다. 이로써 KT가 케이뱅크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케이뱅크 외로는 비씨카드를 인수하여 2011년부터 계열사로 두고 있다. 동시기 금호그룹으로부터 금호렌터카도 인수하며 몸집을 불렸지만, 이후 KT금호렌터카는 롯데그룹에 매각하여 롯데렌탈이 되었다.[36]
2022년 1월 18일 KT는 얀덱스 SDG와 인공지능, 로봇, 자율주행 분야 사업 협력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3. 로고
3.1. 1982년 1월 ~ 1990년 12월
1981년 12월 10일부터 1990년까지 쓰인 무궁화 모양 로고 |
3.2. 1990년 12월 ~ 2001년 12월 10일
1990년 12월부터 2001년 12월 10일 사명 변경 직전까지 사용했던 로고와 마스코트. 2001년 5월부터 동년 12월까지는 KT 로고와 한국통신 로고를 병행하여 쓰였다. 해당 로고는 지구와 전화기 버튼을 형상화해 제작되었으며, 완전함을 의미하는 원은 지구를, 5개의 선은 5대양 6대주를 상징하는 각종 통신망을 의미한다. 통신사업의 기본을 전화기 버튼으로 표현한 사각형 9개는 기업슬로건 하나와 3개의 기업이념, 그리고 5개의 실천원리를 나타낸다. 전화버튼 사이의 스퀘어(#)는 음성과 비음성을 연결하는 정보통신을 나타낸다. 기업컬러인 청록색은 자연의 풍성함과 순수한 인간중심의 에너지원을 연상케 하는 색상이며, 심벌컬러인 청색은 무한한 우주공간으로 도전하는 기상과 세계를 상징한다. 현재도 대부분의 동전과 티머니를 사용하는 공중전화의 본체에서 볼 수 있는 로고이다.[37]
3.3. 2001년 5월 1일 ~ 2009년 6월 30일
2001년 5월 1일 슬로건용 로고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2001년 12월까지 7개월동안 기존의 한국통신 로고와 병행하여 사용하다가 2001년 12월 10일에 사명 변경과 함께 공식 로고가 되었고 2009년 6월 30일 CI 개편 이전까지 사용되었다. “Let’s KT”는 사명 변경 전인 2001년 5월부터 2005년 10월, “Life is Wonderfull”은 원더경영을 기조로 삼은 2005년 10월부터 KTF 합병 직전인 2009년 초까지 쓰였다. 로고 교체 직전인 2009년 1월 14일 ~ 2009년 6월 30일까지는 "All New KT"도 쓰였다.
위와 같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보통신 전문기업'으로서의 기업비전과 이미지를 담아낸 워드마크는 한국을 뜻하는 'K(Korea)'와 T(Telecommunication)'를 강한 직선과 유연한 곡선을 활용하여 하나의 형태로 묶어내 과거와 현재의 조화, 전문성과 친근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K와 T의 연결부분이 상승과 발전을 상징하는 화살표 형태로 표현되어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이미지를 담아냈다. 당시 기업컬러인 Royal Blue는 강렬하면서도 신뢰감과 친근한 이미지를 담아냈으며, 여러 색상과 잘 어울려 다양한 이미지를 표현해 낼 수 있었다. 또 이 로고의 심벌릭 모티프를 얘기하자면, 희망을 상징하는 오렌지 빛과 첨단기술을 상징하는 푸른빛이 서로 만나 교차하면서 더 밝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참고로 이 로고는 몇몇 KT 지점이나 연락사무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그냥은 아니고 2000년대 설치한 장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3.4. 2009년 7월 1일 ~
변경 당시 로고 |
현재 로고 |
이 로고는 고객 눈높이로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소문자로 변화했는데,[38] 이는 고객중심의 기업이 되겠다는 다짐을 표상한다. 휘날리는 깃발의 모습은 세계로 뻗어 나가는 글로벌 브랜드의 위상을 나타낸다. 또 깃발 부분의 빨간색은 열정과 혁신 그리고 고객을 향한 따뜻한 감성을 의미하며, 검은색은 신뢰를 상징한다. 이 두 컬러 간 조화를 통해 KT가 지향하는 가치와 변화의 스토리를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4. 기업 정신
4.1. 1990 ~ 2001
- 기업이념
정보·통신·인간의 융화
- 경영목표
한계에 도전하는 세계첨단기업
가치를 창출하는 종합통신기업
고객과 함께하는 인간중시경영
가치를 창출하는 종합통신기업
고객과 함께하는 인간중시경영
- 비전 (1999년 제정)
Cyber World Leader
4.2. 2001 ~ 2005
- 핵심가치
창의, 자율, 도전, 사랑
4.3. 2005 ~ 2009: 원더경영
- 비전
Great KT
- 경영이념
고객관점, 주인의식, 열린문화
4.4. 2009 ~ 2014
- 비전
Global ICT Convergence Leader
- New KT Way
고객중심, 협력상생, 신뢰, 창의적 혁신, 주인의식, 즉시실행(A.C.T.I.O.N.)
- 올레경영
역발상 경영(olleh), 미래경영(올來), 고객감동 경영(ole), 소통 경영(올레)
4.5. 2014 ~ 2019
- 비전
GiGA topia
- 핵심가치
1등 KT, Single KT, 고객 최우선, 정도경영
- 인재상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재
고객을 존중하는 인재
벽 없이 소통하는 인재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인재
고객을 존중하는 인재
벽 없이 소통하는 인재
기본과 원칙을 지키는 인재
4.6. 2020 ~
- 비전
KT는 고객의 삶의 변화와 다른 산업의 혁신을 리딩하여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다.
- 핵심가치
고객중심, 주인정신, 소통/협업, 본질/과정
5. 사가
5.1. 한국통신 시절 (1990~2001)
작사는 본사 사가제정위원회가 사원 공모를 통해 뽑았고, 작곡은 작곡가 김희조가 맡았다.(1절)삼천리 방방곡곡 번갯길같이 / 친절로 이어주는 사랑의 통화 우리의 전기통신 나라의 신경 / 새 기술 높은 이상 영구불멸로 (후렴)나아가자 한 가족 한마음 되어 / 내 일터 한국통신 길이 빛내리 (2절)오대양 육대주를 하나로 묶어 / 인류의 마음속을 통하여 주는 우리는 온 누리의 새 역군이다 / 몸 바쳐 친절봉사 보람찬 내일 (3절)무한한 우주공간 뻗어나가서 / 오가는 전신 전화 문명의 이기 우리는 정보시대 선구자 되어 / 새 의지 높은 사명 하늘 끝까지 |
5.2. KT의 노래 (2004~2015)
작사는 KT비전경영실, 작곡은 김형석이 맡았다.뜨거운 태양이 아침을 열 때 / 힘차게 비춰주는 저 빛 희망의 푸른 꿈 드높은 꿈 위에 날개를 달아 / 저 하늘 끝까지 오르자 Oh, let’s go KT 넓은 세상 많은 사람 우리의 소망이 /저 하늘 아래로 하나 되는 우리들의 KT 젊은 열정 푸른 꿈이 펼쳐지는 이곳 희망을 모아 함께 나가자 / Oh, let’s go KT 가슴 쫙 펴고서 가자 Oh, Let’s KT! ** Oh-let"s go KT! let"s go KT! 저 끝까지 oh-let"s go KT! let"s go KT! 저 끝까지 손에 손 잡고 마음을 열고 모두가 하나 되는 이 곳에서 희망찬 내일 미래의 열쇠, 우리가 만들어가요. 가슴 쫙 펴고서 가자 Oh, Let’s KT! (KT) |
5.3. KT의 노래 (2015~ )
(1절) 세상의 꿈들이 내일을 열때 눈부신 도전과 열정이 함께 숨쉰다 하나된 우리의 희망을 모아 세상 모두 함께 나누자 최고의 가치를 거친 바람 몰아쳐도 주저하지 말고 넓은 세상 향해 달려가자 우리는 KT 최고라는 강한 긍지 흔들림 없는 믿음 백년 역사 위에 펼쳐내는 천년의 영광을 다 함께 만들어가자 우린 KT (2절) 높은 하늘위로 펼쳐진 열정 하나되는 우리 KT가 빛을 밝힌다 뜨거운 가슴에 희망을 담아 세상 모두 함께 손잡고 더 높이 오르자 거친 바람 몰아쳐도 주저하지 말고 넓은 세상 향해 달려가자 우리는 KT 최고라는 강한 긍지 흔들림 없는 믿음 백년 역사 위에 펼쳐내는 천년의 영광을 다 함께 만들어가자 우린 KT (후렴구) 떠오르는 태양처럼 언제나 변함없이 밝은 희망으로 사랑받는 우리는 KT 최고라는 강한 긍지 흔들림 없는 믿음 백년 역사 위에 펼쳐내는 천년의 영광을 다 함께 만들어가자 우린 KT |
6. 역대 경영진
6.1. 체신부 시절
- 전무국장
- 이재곤 (1946~1948/1949~1952/1956~1957)
- 황갑성[39] (1948~1949)
- 이규성 (1952~1954)
- 김재규 (1954~1955)
- 홍순성 (1955~1956)
- 임남수[A] (1957~1958)
- 윤태은 (1958~1960)
- 신용철 (1960~1961)
- 박희성 (1961~1962)
- 이춘화 (1962~1963)
- 오세관 (1963~1964)
- 진근현 (1964~1968)
- 이우연 (1968~1970)
- 강유원 (1970~1971)
- 최병권 (1971[41])
- 정규석[A] (1971~1974)
- 장기익 (1974~1975/1979~1980)
- 신서우 (1977~1979)
- 김정렬 (1980~1981)
- 전무기획국장
- 장기익 (1975~1977)
- 전무사업국장
- 가재남 (1975~1976)
- 배호원 (1976~1977)
6.2. 공기업 시절
- 이사장: 1984년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제정 이후 1997년까지 이사장제가 존재하였다.
- 대표이사 사장
[1] MS 카드식 공중전화기(자기식 전화카드를 먹는 공중전화. 카드 투입구에 신용카드가 들어가지 않는다.)라면 말하지 않겠다. 얘는 최초 사용이 1986년이다.[2] 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3] 1975~1977년까진 전무국이 전무기획국/전무사업국으로 분할됨.[4] 한국철도공사를 코레일, 중소기업은행을 IBK기업은행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5] 다만, 한국철도공사를 철도청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얘도 원래는 국영이었다. 당시 명칭이 철도청.(단, 철도청의 공사화는 2005년 1월 1일. 2004년 1월 1일에 (구)철도청의 건설정보부문이 고속철도건설공단을 통합해 먼저 공단화되었다.)[6] 민영화 이후 여러 차례 구조조정(희망퇴직)이 이루어졌다.[7] 공사로 전환되면서 국민연금 대상자로 강제 편입되는 바람에 공무원 연금을 받지 못한다. 본래는 공무원으로 시작했다가 민영화 등으로 강제 민간인이 된 경우 공무원 연금 납입 연수에 따라서 민영화 이후에도 연금을 수령하는 경우는 있으나(대표적으로 철도청), 여기는 그 기간이 짧아서 받지 못하는 것이다.[8] 요즘 같으면 국가를 대상으로 소송이 이어졌을 정도의 사안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서울대학교 법인화 사건을 보더라도 답이 나온다.[9] 현재 우정직 커트라인이 일행직에 비해 낮고 일행직과 별개로 뽑는 건 KT의 사례와 무관하지 않다. 다만 근본적으로는 우정사업본부에 속한 일행직인 만큼 인사교류로써 국가직 타 기관이나 지방직으로의 이동은 가능하다.[10] 이게 처음에는 20원이었으나 이후 전화요금 현실화라는 이유로 30원, 35원, 40원, 50원... 이렇게 단계적으로 올라갔다.[11] 단 014XY는 요금 인상에서 제외되었다.[12] 더군다나 당시 컴퓨터 가격이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13] 특히 시내전화는 014XY에 비해 산정구간이 좁았고 시외전화는 뭐… 일정거리 이상 넘어가면 10초당 요금을 내야한다(…). 그나마 21시부터 적용되는 할인시간에 산정 구간을 주의하며 접속하면 되나 시외전화는 할인시간외 특별할인시간이 0시에 적용되기에 될 수 있으면 산정구간이 넒은 014XY에 접속해야했다. 물론 일반인들이 그걸 알기가 어려웠기에 문제가 터지고 곪았던 것.[14] 적용시간은 월 2만 원 요금제는 밤 11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 4만 원 요금제인 할인시간 정액제는 밤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8시까지(공휴일은 전일) 적용된다.[15] 거기다가 1997년 초에 실시한 선택 서비스랑 1998년 도수정액형 서비스는 왜 실시했나 싶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다(…)[16] ISDN은 64Kbps의 속도였고, 2회선을 사용하면 128Kbps까지 속도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요금 적용이 전화 요금과 똑같은 데다 2회선을 사용하면 전화 요금의 2배가 들어갔다. 거기다 ISDN2라고 나왔을 때의 모뎀 속도는 최대 56Kbps로 ISDN 1회선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용할 필요가 전혀 없는 서비스였다. 거기다가 요금제까지 1998년부터 수도권에서만 실시되었다가 1999년에서야 전국에서 실시되어서 많이 까였다.[17] 접속번호 01412(56k)[18] 적용시간은 22→20시~8→9시, 12~13시, 공휴일은 24시간 요금은 40,000원→30,000원→25,000원.[19] 야간 정액제는 적용시간(23~22시~8~9시)이 그대로지만 요금은 2,000원→18,000원→12,000원으로 인하되었다.[20] 이쪽은 2000년 5월 1일[21] 단 ADSL을 깔 수 없는 도서산간지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22] 38초경부터 들으면 된다.[23] 가수 윤시내가 1992년에 부른 '유혹속에 추억속에 기억속에' 노래 도입부에 이 멘트가 삽입되어 있다.#[24] 1997년에 정부출자기관으로 전환, 1998년에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25] 다만 전화국이라는 명칭은 관습적으로 남아 아직 여러 지역에서 버스 정류장의 명칭이나 교차로의 명칭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지어, 버스 정류장에 쓰여져 있는 명칭을 아예 전신전화국 이라 그대로 놔두고 있는 곳들도 있다.[26] 그러나 Fimm 240요금제가 150MB를 제공할 때(프로모션시 테더링 포함 무제한) june 250은 75MB를 제공했고 Fimm 650이 1GB를 제공할 때 june 500은 250MB를 제공했다.[27] 물론 요금제도 있었다. 하지만 범국민 데이터요금제를 제외하면 홍보를 안 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알려진 알요금제는 데이터 통화료가 합산돼서 소진됐었다.[28] 물론 kt 역시 가입자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외제를 들여왔기에 나당연합군이라는 비난을 받았다.[29] 물론 국내 경쟁사들의 행보를 보면 정말 쓸데없는 비난.[30] 두 링크 모두 청소년 유해물로 지정되어 성인인증이 필요함[31] 2G에서 사용 중인 1.8GHz 주파수를 LTE 주파수로 이용할 계획이어서 2G 서비스를 종료할 때까지 LTE 서비스를 시작할 수 없었다. 기업 입장에선 돈이 안 되는 서비스를 종료할 수 있고 주파수 입찰 비용을 아낄 수 있는데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LTE 주파수라 자사 휴대폰 LTE 로밍 지원 국가가 가장 많고, 외산 스마트폰 판매, 010 번호를 통합할 수 있는 등 다른 통신사에 비해 투자를 적게 하고 좋은 조건에서 LTE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32]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GTA 5 용량이 65기가에 달하고 넷플릭스에서 4K 영상을 스트리밍한다고 하면 1시간에 무려 19기가를 잡아먹게 된다. 기본 20기가는 나가는 현세대 게임은 말할 것도 없고.[33] 늘려주긴 했다 1Gbps 제품 기준 일 트래픽은 150GB인데 24년 현재 나온 게임들중 DLC를 포함하여 용량이 큰 게임들은 180GB정도를 먹으며 25년 26년 발매 예정인 게임중에는 200GB가 넘는 게임도 존재한다.[34] 예전에 SK텔레콤도 2007년 부터 T라는 브랜드를 내세웠다가 2014년 부터 버리기 시작하더니 2015년에 갑자기 SK텔레콤으로만 쓰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는 모습이 지금 바뀐 kt 광고와 비슷하다.[35] 아직까지는 기존 대리점을 바꾸기 힘드니 먼저 신규 출점 대리점과 CS점만 바꾸고 차차 기존 대리점으로 확대할 가능성이 있다.[36] 이 여파로 KT 임직원용 노트북을 롯데렌탈에서 대여한다.[37] 마찬가지로 이것도 맨홀뚜껑버전으로 종종 보인다.[38] 글씨체는 Droid Sans Fallback(일명 '올레체')이라는 폰트를 사용했다.[39] 1950년 6.25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됨.[A] 훗날 체신부 차관 역임.[41] 이듬해부터 체신부 차관으로 임명됨.[A] 훗날 체신부 차관 역임.[43] 전 체신부 우정국장 및 차관. 이후 한화그룹 부회장 겸 (주)한화 정보통신부문 회장으로 영전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