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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0:43:53

가라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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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샤
ガラシャ
파일:t02200275_0386048211466502507.jpg
가라샤 상상화
본명 호소카와 가라샤
(細川ガラシャ, Hosokawa Gracia)
출생 1563년
에치젠국
(現 후쿠이현)
사망 1600년 8월 25일 (향년 37세) (음력 7월 17일)
셋쓰국
(現 오사카부 오사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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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타마(玉), 타마코(玉子)
가문 아케치
부모 아버지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
어머니 츠마키 히로코(妻木煕子)
배우자 호소카와 타다오키 (1578년 결혼)
자녀 장녀 고초(御長)
장남 호소카와 타다타카(細川忠隆)
차남 호소카와 오키아키(細川興秋)
차녀 타라(多羅)
종교 기독교
(가톨릭 | (세레명: 가라샤, ガラシャ, 그라시아, Gracia)
묘소 코토인(高桐院) }}}}}}}}}
파일:o0500075014964265346.jpg
가라샤 동상[1]
1. 개요2. 생애3. 여담4. 창작물의 가라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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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散りぬべき 時知りてこそ 世の中の 花も花なれ 人も人なれ
져야 할 때를 알아야 비로소 세상의 꽃도 꽃이 되고 사람도 사람이 된다.
가라샤의 사세구

호소카와 타다오키정실부인이자,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케치 미츠히데의 셋째 .

2. 생애

원래 성명은 '아케치 타마코(明智玉子)'이며 후에 가톨릭에 귀의해 가라샤(ガラシャ)[2]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현재와 달리 혼인 후에도 부인은 원래 성을 유지하는 부부별성을 따랐는데 크리스천 중에는 서양식으로 부부동성에 의거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있어 가라샤도 남편의 성을 따랐다. 그래서 아케치 타마코, 호소카와 가라샤로 구별해서 부르기도 한다.

전국시대의 소문난 미녀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기품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천성적으로 매우 탐구심이 많고 또한 뛰어난 재원"이라고 평했고 일본서교사(日本西教史)에는 "용모가 미려하고 비교할 수 없이 정신활발, 예민, 과감, 고상하고 재치는 탁월했다"고 적혀 있다. # 가라샤가 어린 시절 미츠히데와 친한 호소카와 후지타카미소녀 가라샤를 보고 너무 귀여워서 "아저씨한테 한 번 안길래?" 했더니 고개를 젓길래 그 이유를 물어보니 "안아주실 거면 손을 옷자락으로 덮고서 안아주세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때 미츠히데가 구두로 약속했던 허혼이 나중에 진짜가 되어 후지타카의 아들 호소카와 타다오키에게 시집가게 된다.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를 타도한 미츠히데가 직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해 죽자 가라샤는 주군을 배신한 반역자의 딸이 된다.[3] 그리고 이후 집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신하였고, 그가 노부나가 사후 거병한 명분도 일단은 주군의 가문을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에 호소카와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는 가라샤와 연을 끊고 추방해야 된다는 의견이 가문에서 나왔으나 타다오키는 가라샤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이혼하지 않고 가라샤를 유폐하는 정도에 그쳤다.[4] 전국 시대에 금슬이 좋은 부부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는 것이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인데 타다오키와 가라샤도 그에 뒤치지 않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이 타다오키는 을 두고 있었고 돌아와 이를 접한 가랴샤는 남편과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더불어 유폐되어 있던 동안 불안하고 힘들던 가라샤는 시녀들의 영향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곧 독실한 신자가 되었지만 당시 일본에 온 포르투갈 상인들이 인신매매를 하거나 선교사들의 꾀임에 넘어간 다이묘들이 사찰을 멋대로 부수고 승려들을 내쫓는 등의 물의를 빚은 바 결국 가톨릭이 금지되고 선교사들과 상인들은 추방되었다. 타다오키도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했는데 가라샤는 신자 중에서도 특히 모범이 될 만큼 가톨릭에 빠져 있었다. 때문에 타다오키는 가라샤의 시녀들의 코를 자르거나 유곽에 팔아치우기도 했다고 한다.

가라샤에 대한 타다오키의 애정은 병적인 집착이나 다름없었는데 그 집착을 보여주는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가라샤가 정원에 나와 대야에 손을 씻고 있는데 정원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이를 본 타다오키는 매우 분노하며 뛰어가서 당장 정원사를 베어 죽였다. 가라샤는 타다오키의 집착에 이미 진절머리가 난 상태여서 대야에 피가 튀어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타다오키가 " 같은 여자다"라고 하자 "악마의 아내로는 뱀이 제격이겠지요."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가신을 가라샤가 감싸자 타다오키가 아예 그 가신을 죽여버린 일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타다오키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 모양인 듯하며 가라샤는 이렇게 죽은 이들의 머리를 모아 장식하였다고 한다.(...) 결국 타다오키와 시아버지인 호소카와 후지타카까지 사과해서 이 머리들을 간신히 치웠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타다오키가 동군에 가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시다 미츠나리는 병사를 보내 가라샤를 인질로 잡았다. 가라샤는 남편에게 해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 자살을 하려 했는데 자살을 금지하는 가톨릭 교리 때문에 자살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가신인 오가사와라 히데키요에게 자신을 죽이고 주거에 불을 붙이라고 명했다. 시신은 이탈리아인 선교사가 수습해 염을 했다고 전해진다. 타다오키는 이 사건으로 격분했는데 가라샤가 죽었음에도 아들인 타다타카의 정실은 살아서 도망치자 아들에게 이혼을 명했고 아들이 그것을 거부하자 아들을 폐적했다.[5] 이 사건으로 이시다 미츠나리가 놀라서 인질 정책을 관뒀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타다오키는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누구보다도 먼저 동군에 가담했다.

가라샤의 시녀가 후에 증언한 바에 의하면 가라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군대를 보내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피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시녀가 다시 그녀에게 와보니 이미 그녀는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타다타카의 정실과 가라샤의 딸, 타다오키의 여동생 등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만 남편에게 해가 되는 것을 우려해서 도망치지 않고 자살한다는 건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가라샤를 죽인 오가사와라 히데키요의 두 자녀도 키리시탄이었고 예수회선교사들과 긴밀한 관계였다는 점에서 히데키요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지시로 도피하려는 그녀를 살해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건 뇌절인게 예수회가 그런 짓을 벌여서 얻을 이득이 없다. 상술했듯이 부부 생활이 하도 피폐했기 때문에 그냥 인질극을 계기로 평생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해 자살한 것 아니냐는게 정설.

사후 가라샤의 다른 아들들 중 타다토시는 오사카 전투 당시 아버지를 따라 도쿠가와 막부군에 참가하고 오키아키는 도요토미 군에 참가한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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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창작물의 가라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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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쪽에는 남편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동상이 있다.[2] Gratia의 당시 일본식 표기.[3] 이 여파는 생각보다 굉장해서 아케치 미츠히데는 일본사의 대표적인 배신자, 역적이 되었다. 후에 아케치 미츠히데와 똑같은 관직(휴가노카미)을 받게 된 자가 재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거절한 사례도 있을 정도였다. 한때 다케다 신겐이 아들 다케다 카츠요리한테 작은 관직이라도 하나 얻어주려고 온갖 고생을 다했을 정도로 관직은 당시에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런 이유로 거절할 정도라면 얼마나 아케치 미츠히데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는지 알 수 있다.[4] 보통이라면 호소카와 가문이 역사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호소카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음에 들었던 덕분에 히데요시의 허락을 맡고 가라샤를 데려온다.[5] 다만 아들의 폐적에 관해서는 며느리가 마에다 토시이에의 딸이었기에 정치적 문제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긴 한데, 정작 본인은 반역자 아케치의 딸을 평생 끼고 살았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6] 아자이 나가마사의 누나인 쿄고쿠 마리아에게 세례성사를 준 사람이다.[7] 1위는 네네, 2위는 오이치, 4위는 요도도노, 5위는 이이 나오토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