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강화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현재는 일개 군이긴 하지만, 강화도는 예로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으며, 여러 역사적인 사건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고을이었다.2. 선사시대
적어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다.3. 청동기시대
청동기 시대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수많은 고인돌이 건립되었다.4. 고조선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에는 단군이 쌓았다는 전설이,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각각 전해진다.5. 원삼국시대
마한의 대석삭국인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3세기 이후, 4세기쯤 백제에 병합되었다.6.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지명으로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는 후대의 강화도 방언으로 강화도를 일컫는 갑고지로 이어지는데, 한반도 중남부의 선주민이 일본어족계 민족[1]이었다는 반도 일본어설에 따르면 갑비고차는 고대 일본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kapi'[2]와 한국어 '곶'[3]의 합성어로 추정된다.한강 및 임진강과 예성강의 입구라는 입지 탓에 삼국 간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다. 맨 처음 강화를 차지한 나라는 백제. 서해안을 통제 및 방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요새인 관미성(關彌城)[4]의 유력한 위치로 거론된다. 성은 주로 치소를 가리켰으니 행정구역상으론 관미군(郡) 혹은 관미현(縣)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어느 쪽이었을진 알 수 없으나 이후에도 군이었던 걸로 봐선 관미군쪽의 가능성이 더 높다. 즉 대석삭국이 백제에게 점령되고 최초로 설치된 행정구역은 관미군(關彌郡)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관미성은 함락되고 고구려 치하에서 혈구군(穴口郡)으로 개칭된다. 당시의 강화도에는 혈구군 및 혈구군의 관할인 동음나현(冬音奈縣, 하점면), 수지현(首知縣, 양도면)이 있었고 인근 교동도에도 역시 혈구군 관할의 고목근현(高木根縣, 교동면)이 설치되어 있었다. 혈구군은 이후 신라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영토로 흡수되었다.
한편 전설에 따르면 고구려의 독재자이자 명장인 연개소문이 강화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 고려산 등에는 연개소문 관련 전설들도 전해진다. 하지만 고구려 명문가인 연씨 가문이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강화도에 정착해 연개소문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당시 정황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보통은 전설로 취급된다. 다만 그런 전설이 그냥 남는 건 아닌 만큼 연개소문 당대 혹은 이후에 무언가 얽혔던 역사가 있었을 거라 추정된다.
7. 남북국시대
신라의 영토에 흡수된 이후로도 혈구군으로 유지하다가 신라 경덕왕 때인 757년 한화정책으로 해구군(海口郡)으로 개칭된다. 이를 따라서 동음나현은 호음현(沍陰縣)으로, 수지현은 수진현(守鎭縣)으로, 고목근현은 교동현(喬桐縣)으로 개칭된다.844년 8월 신라 제46대 문성왕이 서해안 방비 거점이었던 관미성의 역사를 이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한다. 이것이 근현대까지 천 년 이상 방어 시설로 활용된다.
8. 고려 시대
고려 태조 때 강화현(江華縣)으로 개칭되어 비로소 현재의 명칭이 정립되었다.고려시대 왕이나 왕족이 유배를 자주 가던곳이고 고려 전기 무역 거점 벽란도의 관문으로 번영을 누렸고, 여몽전쟁 시기에는 몽골 제국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개경에서 천도하여 38년 간 정식 수도로 기능했다. 이때의 이름이 바로 강도(江都). 장기간 전투로 인해 삼별초와 많은 지식인들이 대거 이탈하게된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궁궐과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버렸다.
고려의 왕릉도 대한민국(남한)에서 4기가 존재하는데 그 중 3기가 이 강화도에 있다. 다만 한 기가 유실되었다. 다만 고려 고종의 왕릉이 올라가기 힘든 산중턱에 자리잡고있고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고려 희종의 왕릉인 석릉도 초라하긴 마찬가지다.[5] 그 외에 왕비릉인 가릉과 곤릉도 있다. 가릉은 충렬왕의 어머니인 정순왕후 김씨, 곤릉은 강종의 후비이자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왕후 유씨의 능이다. 하지만 국력이 약할 때라 그런지 봉분도 석물들도 전부 초라하다. 고대의 고구려 왕릉, 백제왕릉, 신라왕릉, 가야왕릉, 발해왕릉 등, 그리고 조선왕릉의 깔끔한 봉분과 수준 높은 석물들과 비교했을 때 고려왕릉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러고 보니 무신정변 이후에 무신정권이 대대로 해먹었다. 어쨌든 왕권도 실추되었고 나라도 침략을 받는 처지였지만 강화도의 국내에서의 상대적인 지위만 보자면 일약 리즈 시절이라고 할만한데, 강화의 인구가 10만에 달해서 2018년 현재보다도 많았다. 하지만 개경 복귀 이후 반발한 삼별초가 이곳에서 거병했으나 이들은 곧 진도로 남하했다. 고려말 왜구들이 이곳에서 대규모의 인원을 동원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9. 조선 시대
조선 태조 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고 조운의 요충지로 기능했다. 수도에서 가까운 섬이라는 입지 덕에 유배지로도 애용되었는데, 연산군과 광해군이 강화로 유배당한 대표격 인물.임진왜란 당시는 주 전장[6]에서 비껴난 탓에 피해가 적었다. 이후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는 당시 국왕이었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했다. 그 다음 다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왕실은 피신에 성공했으나 청군에게 길이 막힌 인조 본인이 강화도로 넘어가지 못했고, 차선책인 남한산성으로 파천한다. 결국 강화도는 당시 강화도의 수비를 맡은 김경징이 방어에 소홀했던 탓에 공격이 시작된지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이후 조선 후기 들어 효종과 숙종 대에 강화도의 군사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12진보(鎭堡)라 불리는 수많은 요새가 수축되었다. 정조 대에는 군사적인 중요도 때문에 화성, 남한산성, 개성과 함께 유수부(留守府)로 지정하여, 중앙에서 직접 관리하기도 했다.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도 이곳에 유배되었다가 왕이 되었다. 그런데 이후 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 미국 같은 서양 세력이 있었다.
조선 말기 발발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외세를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과정에서 경제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외규장각 도서 약탈이 대표적인 사례. 결국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조선은 1876년 2월 27일 연무당[7]에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고, 이로써 망국으로 향하는 한 걸음을 더 내딛게 된다.
조선시대에 '심도(沁都)' 같은 별칭으로도 불렸다.[8] 구한말 조선군 편제 중에 강화도에 설치된 군영을 '심영(沁營)'이라 불렀다.
1895년에 23부제 시행으로 인천부 강화군으이 되었고, 1896년에 13도제 시행으로 경기도 강화부가 되었다가 1906년에 다시 강화군이 되었다.
10. 일제강점기
1914년 일제가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 때 교동군(喬桐郡)을 흡수 통합하였다.11. 해방 이후
해방 및 분단 이후로도 북한과 대치하는 최전방 지역으로 해병대 2사단이 주둔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남게 되었다.해방 이후 경기도에 잔류하였고 1973년에 강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3월 1일에 검단, 옹진군과 더불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당시 내무부 문서에 따르면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된 근거는 경제권과 생활권이 인천광역시와 연계된 상태이고 인천광역시에 진출한 강화군민들도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경기도청보다 인천광역시청이 더 가깝다는 점도 편입의 근거가 되었다. 원래 계획은 김포시를 인천광역시에 편입하는 것인데 김포시는 검단면만 내주고 나머지는 경기도로 유지하면서 지금처럼 모호한 구역이 형성된 것. 결국 경기도는 대명항을 제외한 북단 해역을 완전히 봉쇄당한다. 남단도 옹진군의 상실로 많이 잃어버릴 뻔했지만 대부도와 화성시, 평택시가 있어서 완전하게 상실하지는 않았다.
사실 관리비에 비해 직접적인 수익이 적은 바다와 별도로 관리해주어야 하는 섬이 줄어드는 게 경기도에게도 나쁜 선택은 아닌지 경기도로 돌아가자는 안건이 나오기는 하나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진다. 경기도청도 강화군의 경기도 환원에 대해선 적극적이진 않고 너희가 돌려준다면 굳이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강화군은 거리나 생활권이 인천광역시와는 거리가 멀다. 강화군의 생활권은 김포시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이지 인천광역시는 아니다. 인천광역시로 진출한 강화군민들이 있지만 영향력이 크지는 않다. 국회의원 선거구를 획정할 때마다 거리가 먼 지역과 붙는 등 이익이 없어서 경기도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상황이다.
[1] 일본인이 아니다. 반도 일본어설은 임나일본부설과는 아예 반대되는 가설이며, 이 가설이 맞다고 하면 한반도 선주민과 고대 일본인은 서로 뿌리만 같은 별개의 민족이라고 추정된다.[2] 서로 교차한다는 뜻인 交ふ(*kapu)의 명사형에서 유래했으며, 현대 일본어의 峽(かい)로 이어진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산골[岳\], 골짜기[峽\], 구덩이[穴\] 등을 의미하는 지명 접미사 '압(押)/갑(岬)'과 같은 단어로 파악된다.[3] '꽃'의 옛말과 동음이의어인데, 고려 초에 개칭된 지명인 '강화'에 꽃 화(華)가 들어간 것이 이 때문이다.[4] 다른 이름은 각미성(閣彌城). 같은 이름을 다르게 음차했거나 한자를 오기한 것이다.[5] 그 외에 강종의 후릉도 강화도에 있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후릉은 유실된 상태다.[6] 주로 남해안과 영남대로 일대가 주 전장이었다.[7] 강화산성 서문 인근[8] 심도중학교, 심도지구대 등에 이름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