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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15:16:15

금강대도

1. 개요2. 상세
2.1. 역사

1. 개요

금강대도(金剛大道)는 1906년 이승여(李承如)[1]가 창도한 종교이다.

2. 상세

2.1. 역사

이승여는 1874년[2] 강원도 통천군 태어났다. 이승여는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해 배움에 나아가지 못하고 나무하는 일로 업을 삼아야했다. 하지만 늘 남을 위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의리를 행함에 앞뒤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1898년 서의복(徐宜福)[3]과 결혼하였다. 이후 1906년 종교적 체험을 통해 대도를 깨달았는데, 이승여는 나무를 하고 산으로 내려오다가 잠깐 쉬던 중에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이윽고 천지가 맑아지고 우주가 한눈에 펼쳐졌다. 이때 이승여가 깨달은 대도는 ‘선후천 교역기에 타락된 인간의 도덕성을 건곤부모(乾坤父母)인 자신이 개화(開化)함으로써 큰 겁운에 쌓여 죽어가는 인류를 구원하고, 나아가 우주의 화평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승여는 자신은 금강도사(金剛道師)라 하고, 서의복은 연화도사(華蓮道師)라고 하여 금강산을 중심으로 포교의 길에 나섰다.

하지만 1910년 이승여는 제자들과 금강산을 떠나 계룡산 신도안에서 본격적인 포덕을 시작해[4] 처음 30여명에 불과 했던 제자가 1년만에 수천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남천포덕 이후 급속하게 도세가 확장되자 이를 경계한 일제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근거없는 죄목을 씌워 이승여를 헌병대로 강제 연행, 일주일 동안이나 구금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1914년부터 이승여가 구술한 것을 1932년까지 약 18년간 제자들이 받아 적었는데 모두 11경 28권이었다. 1921년에는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냈다는 이유로 청주경찰서에 강제 연행 당했다. 당시 이승여는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십여 명의 제자들 또한 차례로 호출당해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다시 대전 검사국에 불려가 여러 차례 신문을 받았으나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20여일 만에 풀려났다. 1922년 법당을 건설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그 안에 단군의 성상을 비밀리에 봉안했으며, '진종동붕교(眞宗同朋敎)'의 간판을 걸었다.[5] 이후 1923년연기군 금남면에 도장을 지었고, 1925년에는 ‘선화부(宣化部)’를 두어 책임자인 ‘선화사(宣化司)’에게 도인들을 관장하게 하는 등 조직을 정비했다. 이후 1926년 진종동붕교의 간판을 내리고 ‘관성교 연기지부’로 바꾸었다가[6] 1927년 ‘금강도총본부(金剛道總本部)’을 내걸었다.

1931년 서의복이 사망하자 제자들은 부모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며 중복(重服)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이후 1934년 경성, 경기, 영동, 호서, 관서 등에 지부를 설치해 교세를 확장했고, 충남도청 광장에서 도인들을 모아 강연회를 추진했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사전 발각돼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장남인 이성직(李成稙)[7]과 여러 제자들이 옥고를 치르게 되자 이승여는 병세가 악화돼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에도 제자들은 부모를 잃은 슬픔으로 중복을 입고 3년상을 치렀다.

이성직은 교리 및 예법의 체계화에 주력하였고, 1937년 흥기도덕가를 저술하였으며, 흥기도덕가 개화무를 제작 및 교육하였는데 항일운동 사상 내용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1941년신사년에 일제에 의한 탄압으로 도인 53인 체포되고, 5명이 순도하였으며, 성전이 훼철되었다. 그리고 신도해산 명령이 떨어지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하였는데 이를 신사사변(辛巳事變)이라고 한다. 1947년 금강고등공민학교[8]를 설립하였고, 1952년에는 금강초등공민학교[9]를 설립하였다.

1957년 이성직이 사망하고, 1964년에 3세 도주로 장남인 이일규(李一珪)[10]가 도통을 계승하였다. 3세 도주는 도장의 성역화 및 종단조직의 확대에 주력하여 현재 전국에 1백여 개의 본원 · 분원 및 회관을 두고 있다.

[1] 아호는 토암(土庵)이고, 자는 현우(顯宇)이며, 사호는 만법교주 대성사부(萬法敎主大聖師父)이가. 1874년 5월 19일생이고, 본관은 한산이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8세손이다. 부친은 이문유이고, 그 부인인 전백전(全白田)의 꿈에 옥황상제가 나타나 하얀 솜을 많이 주어 품에 안았는데, 그러고는 그 달로부터 잉태하여 이승여를 낳게 되었다.[2] 금강대도에서는 이 해를 원년으로 삼는 기년법인 개도(開道)를 쓰고 있다.[3] 아호는 자암(慈庵)이고, 사호는 만법교주 대성사모(萬法敎主大聖師母)이며, 1884년 11월 25일생이다. 본관은 달성이며, 약봉(藥封) 서성(徐渻)의 14세손이다.[4] 이를 금강대도에서는 남천포덕(南遷布德)이라 한다. 금강대도에서는 교조의 탄생으로부터 계산하여 1874년을 개도 원년으로 보지만, 실질적인 포덕은 1910년 이승여가 금강산을 떠나 계룡산으로 남천포덕한 이 때로부터 시작된다.[5] 이는 당시 일제가 신종교를 사교(邪敎)로 몰아부쳐 탄압했기 때문에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한 방책이었다.[6] 이는 당시 유행했던 도교에 대한 대중적인 신앙을 이용해 자신의 가르침을 드러내려 했던 은도의 방편이었다.[7] 아호는 청학(靑鶴)이고, 사호는 동화교주 도성사부(東華敎主 道聖師父)이며, 1923년 5월 5일생이다. 서의복이 오색구름이 영롱한 가운데 한 마리 푸른 학이 계룡산으로부터 날아와서 품에 안기는 태몽을 꾸어 호를 청학이라 했다. 부인은 민영인(閔永仁)인데, 아호는 보단(寶丹)이고, 사호는 동화교주 도성사모(東華敎主 道聖師母)이며, 1923년 5월 12일생이다.[8]금호중학교의 전신[9] 현재는 감성초등학교로 편입되었다.[10] 아호는 월란(月鸞)이고, 사호는 통천교주 덕성사부(通天敎主 德聖師父)이며, 1934년 4월 29일생이다. 부인은 김동윤(金東允)인데, 아호는 향련(香蓮)이고, 사호는 통천교주 덕성사모(通天敎主 德聖師母)이며, 1937년 12월 26일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