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김관식(金冠植) |
호 | 추수(秋水)·만오(晩悟) 우현(又玄)·현현자(玄玄子) |
본관 | 사천 김씨[1] |
출생 | 1934년 5월 10일[2] |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소룡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3] | |
사망 | 1970년 8월 31일 (향년 36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 | |
학력 | 강경제일국민학교[4] (졸업) 강경상업중학교[5] (졸업) 충남대학교 (토목공학 / 중퇴) 고려대학교 (건축공학 / 중퇴) 동국대학교 (농학 /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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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한문번역가. 본관은 사천(泗川). 호는 추수(秋水)·만오(晩悟)·우현(又玄)·현현자(玄玄子).흔히 천상병, 중광,
2. 일생
1934년 5월 10일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소룡리(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아버지 김낙희(金洛羲, 1885. 8. 25 ~ ?)[7]와 어머니 연일 정씨 정성녀(鄭性女, 1889. 1. 26 ~ ?)[8] 사이의 4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9] 부친인 김낙희는 일찍이 서원과 향교에서 각각 전교 및 제관을 지내는 등 선비정신이 강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김관식도 아버지로부터 4살 때부터 한학을 익혔다.10살 때 강경읍으로 이주하여 1946년 강경제일국민학교(現 강경중앙초등학교)를 거쳐 1952년에 강경상업중학교(現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충남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가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에 편입하였고,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정인보와 최남선, 오세창, 최병심(崔秉心) 등으로부터 꾸준히 한학 및 성리학을 배웠다. 한편 김관식은 17살 즈음에 서정주와 알고 지내게 되면서 추천을 받기 위해 그 집에 자주 오게되었다. 이때 서정주의 처제인 온양 방씨 방옥례(方玉禮, 1932. 4. 3 ~ )[10]에게 반하여[11] 3년 동안이나 구애를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음독자살 소동까지 벌인 끝에 1954년에 결혼하였다. 이후 김관식은 방옥례와의 사이에서 장남 김영문(金暎文, 1955. 2. 27 ~ ), 차남 김영출(金暎出, 1957. 1. 1 ~ ), 장녀 김남순(金籃筍, 1959. 4. 5 ~ ), 차녀 김영희(金暎憙, 1964. 6. 25 ~ ), 3녀 김서경(金瑞京, 1967. 3. 30 ~ ) 등 2남 3녀를 얻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던 경력이 인정되어서인지 1954년 이래로 여주농업고등학교·서울공업고등학교·서울상업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세계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2년, 조지훈이 서문을 써주어 시집 《낙화집》을 발표하였다. 이후 1955년, 동서지간이었던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연(蓮)〉·〈계곡에서〉·〈자하문 근처〉 등을 발표하여 정식으로 문학계에 등단하였다. 이때부터 문학성을 인정받는 한편,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 힘든 갖가지 기행을 선보여 세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육당사업회 상임위원을 역임했고,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타단체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던 민주당 장면 후보와 맞붙었으나 낙마하고 말았다. 그 여파로 경제 상황이 몹시 궁핍해졌기에 이듬해인 1961년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부근에 소유하고 있던 과수원을 처분하고 서대문구 홍은동 산1번지로 이사해야 했다. 이후로도 시인으로 활동하였으나, 평소 지나친 음주를 하였던 것이 원인이 된 탓인지 건강이 크게 상하여 간염과 위궤양을 동시에 앓게 되었고, 결국 1970년 8월 31일 오후 11시에 자택에서 요절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36세였다.
서정주는 김관식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세상의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욕만 퍼부으며 철저한 자존과 고독과 깡소주로만 살다가 완전히 폐가 녹아 사십도 못되어 스러져간 젊은 사내, 신동출신(神童出身)의 김관식이를 시인으로 추천한 것을 나는 한동안 후회했으나, 이제는 후회 안해도 되는가? 또다시 우리를 괴롭게 울리며 죽어갈 염려는 없어졌으니까…" #
3. 그 외에
- 어렸을 적부터 한학을 배웠기에 1958년에는 한시를 번역하여 엮은 《노당한시존》을 출간하였고, 1968년에는 《서경》를 번역하여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 영향인지 평소에 지조와 의리같은 선비적 가치를 매우 중요시했으며, 때문에 동서였던 서정주와 충돌하기도 했다.
- 평소에 "대한민국 김관식"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명함을 가지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곤 했다. 김관식의 미망인이었던 방옥례가 1983년, 동문출판사에서 남편의 삶을 회고하며 쓴 책의 제목도 여기서 따와 《대한민국 김관식》이라 하였다.
- 신경림, 천상병 등과는 절친으로, 문학계의 기인이자 주당으로 이름을 날리며 숱한 일화를 빚어내기도 하였다. 신경림은 이후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등을 비롯한 에세이에서 김관식에 대한 일화를 여러개 소개하였다.
4. 일화
- EBS 드라마 《명동백작》에서 김관식의 미망인이었던 방옥례 여사가 직접 출연해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주벽이 너무 심하다 못해서 거의 알코올 의존증 수준이라 이혼을 수차례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슬하의 아이들이 다들 공부를 잘했고, 김관식의 성격이 대놓고 미워하기 어려울 정도로 순박해서 차마 헤어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어투를 보면 쌓인 한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 외에는 김관식의 말재주가 워낙 좋아서 말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 평소에 남에게 얕잡아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자신의 나이를 10살 정도 높여서 소개하는 기괴한 버릇이 있었다. 김관식의 아내였던 방옥례 여사도 이런 김관식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서 결혼하고 나서야 남편이 자신보다 2살 연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12] 김관식이 워낙 노안인데다가 언행도 나이든 사람처럼 꼬장꼬장해서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거짓말에 쉽게 속아넘어갔다.
- 아직 약관의 나이었던 50년대부터 기행을 펼치기 시작했다. 술만 마셨다 하면 당시에 이미 문단의 큰 손으로 손꼽혔던 서정주·박목월·김동리·조연현 등의 대선배들을 서군·박군·김군·조군 등으로 불렀던 것이 좋은 예이다. #
- 교사를 지내던 와중에도 기행은 계속 되었다. 언젠가는 교장과 말싸움이 붙었는데, 교장이 나이와 지위로 자신을 찍어 누르자 밖으로 뛰쳐나가 텃밭에서 기르던 무를 안주삼아 만취할때까지 술을 잔뜩 들이키더니 곧 교장실로 뛰어들어 그 앞에서 구토를 했다고 한다(…). 이런 김관식의 독함에 질려버린 교장은 다시는 그와 언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지금과는 비교도 어려울 정도로 교사의 권위가 강하던 시절이었음에도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스스럼없이 함께 거리를 활보하거나 그들과 함께 길 한복판 위에서 개를 잡아먹기도 했다.
- 1960년대 초, 월탄 박종화가 문학상 시상에 참가하여 축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게 길어지자 박종화의 면전에서 "어이, 박군 자네 이야기가 너무 길어. 나도 한마디 하겠으니 이제 그만 내려오지."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한다. # 참고로 박종화와는 나이 차이는 물론이고 등단 햇수도 30년 이상 차이가 났는데도 이런 행동을 한 것. 이처럼 대선배들에게는 오만하리만치 뻣뻣하게 굴었으나 후배 시인들에게는 매우 예의바르게 대해주었다고 한다.
- 동서지간인 서정주와는 20살이나 되는 나이차가 있었다. 지금도 큰 차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부자(父子) 뻘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적인 관계는 가까운 편이었다. 김관식은 평소에는 서정주를 "형님"으로 불렀지만 술에 취하면 "서군" 등으로 칭하곤 했다고 한다.
- 서정주와 있었던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67년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김관식이 친구인 신경림과 함께 세배를 가기로 하였는데, 평소에 김관식이 존경하던 조지훈과 동서인 서정주 중 누구를 먼저 찾을까 생각하다가 조지훈에게 먼저 세배를 드리고 술을 마셨다. 김관식과 신경림은 그 다음으로 서정주의 집으로 향했는데, 김관식은 너무 술에 취한 나머지 신발을 벗고 택시에 타버려서 눈길을 양말 바람으로 걸어와야 했다.
서정주는 그 모습을 보고는 김관식에게 "술 좀 작작 하게"라고 훈계했다. 이에 빈정이 상한 김관식은 "이전의 행적을 볼 때에 형님을 먼저 뵈는 것은 좀 아닌 것 같아서 조지훈 선생 댁에 먼저 세배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는 폭탄 발언을 던졌다. 이에 서정주는 술을 따라 주던 막걸리 주전자를 던져 김관식의 머리를 갈겨버리며 "이놈을 당장 개똥 떠다 버리듯 삽으로 떠다 버리거라!"라고 말하는 등 노발대발 했다. 그리고 함께 온 신경림에게도 "이런 미친놈과 어울리면 자네도 미친놈이 될 테니 함께 다니지 말게!"라고 호통을 쳤다.
- 이처럼 서정주와는 서로 투닥거리기는 했으나, 서정주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김관식을 사위나 동생처럼 아꼈다. 당초에 김관식의 재주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문단에 오를 수 있도록 추천해준 사람도 서정주였다. 이후 김관식의 건강이 악화되자 서정주가 아내와 함께 몸소 닭이나 과일 등을 싸들고 자주 문병을 갔다고 한다.
- 어느 날은 한국일보 사장이자 경제부총리인 장기영이 축사를 하고 있는 출판 기념회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 나타나 곧장 장기영 곁으로 나아가 "에또, 자네는 그만하고… 내가 말을 좀 해야겠네."하고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의 동서이자 존경하는 선배인 서정주가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문인들의 모임에서도 김관식은 "의장!" 하고 일어서서 횡설수설해 회의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때 서정주가 주위를 둘러보며 "내가 동서 하나 둔 것이 이래서, 여러분 미안하오."하고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 아무리 수중에 돈이 없어도 친구와 함께 밥이나 술을 마시면 밥값과 술값은 무조건 자신이 내려 했고, 어딘가로 갈 때에도 대중교통은 일절 사용하지 않고 반드시 택시를 타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 절친이었던 신경림 시인과는 관련해서 꽤 황당한 일화가 있었다. 김관식은 초야에 묻혀 살던 친구 신경림에게 서울에는 일자리가 많다며 적극 상경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런 호언장담과는 달리 김관식에게 이끌려서 서울에 온 신경림은 꽤 오랜 기간 동안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김관식은 이것이 마음에 몹시 걸렸는지, 하루는 덜컥 신경림을 끌고 한국예총으로 향했다. 김관식은 다짜고짜 예총 사무실로 쳐들어가서 당시 예총 이사장을 지내고 있던 연극인 박진에게 "내가 오늘부터 예총 이사장을 할테니 당신은 관두시오."라고 외쳤다. 박진은 처음엔 "벌써 취하셨군. 김 형 같이 나가서 한잔 합시다."라고 말하며 달래주었다. 그러나 김관식은 자기가 농담하는 것 같냐며 막무가내였다. 또한 사무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들어온 사무국장을 해고한다고 선포하고는 그 자리에 신경림을 앉히겠다고 막무가내로 우겨댔다. 이 소동은 빌딩 경비원들이 와서 김관식을 끌어내 근처 술집에 데려다 앉히는 것으로 간신히 끝났다. 그럼에도 김관식은 기회가 날 때마다 술자리에서 내가 신경림에게 예총 사무국장을 시켜주었는데 그 친구가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 또다른 절친이었던 천상병 시인과 관련해서도 황당한 일화가 있다. 천상병은 평소에 김관식의 집에 자주 놀러갔는데, 하루는 그를 골탕먹이고 술값도 벌겸 김관식의 집에서 제법 값나가 보이는 고서 하나를 몰래 슬쩍해서 봉투에 놓어 고서점에 팔아 넘기려 하였다. 그런데 김관식이 이를 눈치채고는 천상병이 훔친 책을 몰래 봉투에서 빼내고선 대신에 낡은 원고지 한 뭉치를 넣어버렸다. 이를 모르고 고서점에 책을 팔러 갔던 천상병은 되려 망신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적반하장으로 김관식에게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김관식은 이 광경을 보고 배꼽이 빠져라 웃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천상병에게 따로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60 |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용산구 갑) | 기타단체 | 417표 (0.99%) | 낙선 (7위) |
[1] 사헌공파(司憲公派) 22세 식(植) 항렬.[2] 음력 3월 27일.[3] #[4] 현 강경중앙초등학교[5] 박용래 시인과 강경중앙초등학교 및 강경상업고등학교 동문이다.[6] 서정주의 아내의 친동생(여)과 결혼했다. 그럼에도 서로 나이가 20살이나 차이가 나서 당시로서는 거의 부자뻘이었는데, 이는 서정주의 처제가 늦둥이었기 때문이다.[7] 사천김씨대동보 전권 177쪽에는 金洛義로 등재되어 있다.[8] 정종택(鄭鍾澤)의 딸이다.[9] 김관식의 맏형 김우식(金禹植, 1931. 5. 4 ~ )은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김관식의 절친이었던 신경림의 회고에 따르면, 김관식이 사정이 궁할 때에는 형을 찾아가 돈을 꾸어다 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형에게 된통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10] 방규수(方珪守)의 딸이다.[11] 방옥례는 당시의 여성으로는 드물게 은행원이라는 번듯한 직장까지 지니고 있었다.[12] 그러니까 모든 것을 고백할때에는 34살이라고 속였던거 였다(...) 당시 방옥례 여사가 28세였는데 한참 연상이라고 속였던 것... 드라마 명동백작에선 첫날밤을 보낼 때 거사를 치르기 직전 고백하는 것으로 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