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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07:13:30

김관식

파일:시인 김관식.png
이름 김관식(金冠植)
추수(秋水)·만오(晩悟)
우현(又玄)·현현자(玄玄子)
본관 사천 김씨[1]
출생 1934년 5월 10일[2]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소룡리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3]
사망 1970년 8월 31일 (향년 36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은동 자택
학력 강경제일국민학교[4] (졸업)
강경상업중학교[5] (졸업)
충남대학교 (토목공학 / 중퇴)
고려대학교 (건축공학 / 중퇴)
동국대학교 (농학 / 중퇴)

1. 개요2. 일생3. 그 외에4. 일화5. 선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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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시인이자 한문번역가. 본관은 사천(泗川). 호는 추수(秋水)·만오(晩悟)·우현(又玄)·현현자(玄玄子).

흔히 천상병, 중광, 고은 등과 더불어 해방 이후 한국문학계의 기인으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또한 미당 서정주와는 동서지간인 것으로도 유명하다.[6]

2. 일생

1934년 5월 10일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소룡리(현 논산시 연무읍 소룡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하던 아버지 김낙희(金洛羲, 1885. 8. 25 ~ ?)[7]와 어머니 연일 정씨 정성녀(鄭性女, 1889. 1. 26 ~ ?)[8] 사이의 4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9] 부친인 김낙희는 일찍이 서원향교에서 각각 전교 및 제관을 지내는 등 선비정신이 강한 사람이었고, 덕분에 김관식도 아버지로부터 4살 때부터 한학을 익혔다.

10살 때 강경읍으로 이주하여 1946년 강경제일국민학교(現 강경중앙초등학교)를 거쳐 1952년에 강경상업중학교(現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충남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입학했다가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에 편입하였고, 1953년 다시 동국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하였으나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정인보최남선, 오세창, 최병심(崔秉心) 등으로부터 꾸준히 한학 및 성리학을 배웠다. 한편 김관식은 17살 즈음에 서정주와 알고 지내게 되면서 추천을 받기 위해 그 집에 자주 오게되었다. 이때 서정주의 처제인 온양 방씨 방옥례(方玉禮, 1932. 4. 3 ~ )[10]에게 반하여[11] 3년 동안이나 구애를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음독자살 소동까지 벌인 끝에 1954년에 결혼하였다. 이후 김관식은 방옥례와의 사이에서 장남 김영문(金暎文, 1955. 2. 27 ~ ), 차남 김영출(金暎出, 1957. 1. 1 ~ ), 장녀 김남순(金籃筍, 1959. 4. 5 ~ ), 차녀 김영희(金暎憙, 1964. 6. 25 ~ ), 3녀 김서경(金瑞京, 1967. 3. 30 ~ ) 등 2남 3녀를 얻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던 경력이 인정되어서인지 1954년 이래로 여주농업고등학교·서울공업고등학교·서울상업고등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세계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52년, 조지훈이 서문을 써주어 시집 《낙화집》을 발표하였다. 이후 1955년, 동서지간이었던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연(蓮)〉·〈계곡에서〉·〈자하문 근처〉 등을 발표하여 정식으로 문학계에 등단하였다. 이때부터 문학성을 인정받는 한편,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 힘든 갖가지 기행을 선보여 세간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육당사업회 상임위원을 역임했고, 1960년 4.19 혁명 이후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타단체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던 민주당 장면 후보와 맞붙었으나 낙마하고 말았다. 그 여파로 경제 상황이 몹시 궁핍해졌기에 이듬해인 1961년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영동 세검정 부근에 소유하고 있던 과수원을 처분하고 서대문구 홍은동 산1번지로 이사해야 했다. 이후로도 시인으로 활동하였으나, 평소 지나친 음주를 하였던 것이 원인이 된 탓인지 건강이 크게 상하여 간염위궤양을 동시에 앓게 되었고, 결국 1970년 8월 31일 오후 11시에 자택에서 요절하였다.#. 그의 나이 불과 36세였다.

서정주는 김관식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하였다.
"세상의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욕만 퍼부으며 철저한 자존과 고독과 깡소주로만 살다가 완전히 폐가 녹아 사십도 못되어 스러져간 젊은 사내, 신동출신(神童出身)의 김관식이를 시인으로 추천한 것을 나는 한동안 후회했으나, 이제는 후회 안해도 되는가? 또다시 우리를 괴롭게 울리며 죽어갈 염려는 없어졌으니까…" #

3. 그 외에

4. 일화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용산구 갑) 기타단체 417표 (0.99%) 낙선 (7위)

[1] 사헌공파(司憲公派) 22세 식(植) 항렬.[2] 음력 3월 27일.[3] #[4] 현 강경중앙초등학교[5] 박용래 시인과 강경중앙초등학교 및 강경상업고등학교 동문이다.[6] 서정주의 아내의 친동생(여)과 결혼했다. 그럼에도 서로 나이가 20살이나 차이가 나서 당시로서는 거의 부자뻘이었는데, 이는 서정주의 처제늦둥이었기 때문이다.[7] 사천김씨대동보 전권 177쪽에는 金洛로 등재되어 있다.[8] 정종택(鄭鍾澤)의 딸이다.[9] 김관식의 맏형 김우식(金禹植, 1931. 5. 4 ~ )은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한약방을 경영하였다. 김관식의 절친이었던 신경림의 회고에 따르면, 김관식이 사정이 궁할 때에는 형을 찾아가 돈을 꾸어다 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형에게 된통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10] 방규수(方珪守)의 딸이다.[11] 방옥례는 당시의 여성으로는 드물게 은행원이라는 번듯한 직장까지 지니고 있었다.[12] 그러니까 모든 것을 고백할때에는 34살이라고 속였던거 였다(...) 당시 방옥례 여사가 28세였는데 한참 연상이라고 속였던 것... 드라마 명동백작에선 첫날밤을 보낼 때 거사를 치르기 직전 고백하는 것으로 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