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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1984)

김호준(축구선수)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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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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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FC 골키퍼 코치
김호준
金鎬浚 | Kim Ho-Jun
<colbgcolor=#00396f><colcolor=#ffffff> 출생 1984년 6월 21일 ([age(1984-06-21)]세)
강원도 태백시
(現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90cm, 체중 90kg
직업 축구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코치
학력 황지중앙초등학교
황지중학교
강릉농공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소속 <colbgcolor=#00396f><colcolor=#ffffff> 선수 FC 서울 (2005~2009)
제주 유나이티드 FC (2010~2017)
상주 상무 FC (2012~2013 / 군 복무)
강원 FC (2018~2019)
부산 아이파크 (2020)
부천 FC 1995 (2021~2022)
지도자 수원 FC (2024~ / 골키퍼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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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배우자, 슬하 1남 2녀
별명 호빵, 거북이[1], 유상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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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코치. 현역 시절 포지션은 골키퍼이다.

2. 선수 경력

2.1. 프로 입단 전

강원도 태백시의 황지중앙초등학교, 황지중학교[3]를 졸업하고 강릉농공고[4]로 진학했다.

강릉농공고 1학년이던 2000년에는 U-16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브라질 전지훈련을 다녀오고, 5월 AFC U-17 챔피언십 1차 예선에 참여했으나 황인성에 밀려 3경기 모두 벤치에 앉았다. 3학년에는 2002년 57회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벌이면서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고 학교가 11년간 승부차기에서 이기지 못한 기록을 직접 깼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U-20 대표팀 명단에 들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축구부 1학년이던 2003년까지도 수원컵 대표로 U-20대표에 다시 발탁되기도 했다. 2003년 11월 22일 FA컵 32강 안양 LG 치타스전에서 고려대의 골키퍼로 나서 화려한 선방으로 0-1 업셋을 이끌었다. 이 경기는 안양 LG의 명칭으로 참가한 마지막 경기로, 김호준의 프로 데뷔가 안양 LG가 연고이전한 FC 서울인 것이 아이러니.

2004년에는 1,2학년 전국 하계대학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또한 U-23 대표로 올림픽 최종예선에 참가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이면서 이미 대학 졸업 이후 프로행이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학 시절 무릎과 어깨 수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영광, 성경일, 염동균, 정성룡, 권순태 등 동나이대 쟁쟁한 골키퍼들에 밀려 더 이상 연령별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2.2. FC 서울

파일:김호준FC서울2009.jpg

2005년부터 구단별 자유계약제로 신인선수를 선발하면서 자유계약으로 FC 서울에 입단한다.

신인 시즌인 2005년 3경기를 뛰긴 했으나 원종덕, 박동석에게 밀려 많은 기회를 잡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2006년 당시 연속 출전 기록을 세우던 김병지가 영입되며 2007년까지 1군 경기는 뛰지 못하고 R리그만을 뛰어왔다.

그러다 2008년 1월 김병지가 국가대표 경기에서 허리 부상을 당했고, 개막 전 LA 갤럭시와의 평가전에서 눈부신 선방으로 경기 MVP를 받는 등 본격적으로 포텐을 터트렸다. 그렇게 골키퍼 출신인 셰놀 귀네슈 감독 아래 주전으로 급부상해 3월 초 국가대표 예비명단에 오르는 등 눈길을 끌더니 리그 31경기 32실점이라는 좋은 기록으로 팀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렇게 풀타임 데뷔 시즌임에도 리그 베스트 11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나 이운재에 밀려 수상엔 실패했다. 이때 출전 문제로 귀네슈 감독과 불화를 갖던 김병지가 시즌 종료 후 경남으로 이적하며 본격적으로 김호준이 서울의 넘버원 골키퍼로 안착한다.

2009시즌에도 리그 24경기 출전 26실점 좋은 성적으로 마쳤지만 팀은 5위에 그쳤다. 김호준 역시 잊을만 하면 심해지는 기복과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수준급 골키퍼에서 더 올라서지 못했다. 특히 감바 오사카와의 AFC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4실점 할때가 심했는데 위치 선정에 실패해 실점하고, 대량 실점에 흥분해 페널티 박스를 벗어날 때까지 손에서 볼을 놓지 않았다가 패널티킥을 내주는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 그래도 가시마와의 16강 승부차기에서 맹활약으로 팀을 8강에 이끌어 놓는 등 특유의 PK 선방 능력을 발휘했다.

2010 시즌을 앞두고 귀네슈 감독이 팀을 떠났고, 서울은 김용대를 영입하면서 그대로 팀을 떠났다.

2.3. 제주 유나이티드 FC

파일:Kim, Ho-Jun.jpg

2010 시즌 개막을 얼마 앞둔 2월 24일, 제주로 이적했다. U-23 대표 시절 코치였던 박경훈 신임 감독과 재회했다.

당시 상위권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던 제주 유나이티드는 박경훈 신임 감독 아래 김은중, 이상협, 배기종, 박현범, 산토스, 네코 등과 함께 김호준을 영입하면서 전력을 보강했다. 그리고 구자철, 김영신, 오승범, 이상호, 마철준, 강준우 등 기존 전력에 홍정호와 같은 특급 신인들의 맹활약이 더 해지며 리그 준우승을 달성한다.

31경기 29실점의 좋은 성적으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0점대 방어율을 보여주면서 최고의 시즌이자 전성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시즌을 보낸다. 이 해 챔피언결정전에서 친정팀 FC 서울을 만나면서 자신을 밀어낸 골키퍼프로 데뷔팀을 떠난 지 1년 만에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보게 됐고, 결국 1무 1패로 준우승하게 된다.

2011시즌은 팀의 첫 AFC 챔피언스리그 병행에 의한 경험 미숙과 구자철의 이적, 홍정호의 승부조작 관련 조사다행히 무혐의로 인한 결장 등으로 팀이 휘청거리는 바람에 24경기 36실점으로 실점이 늘었다.

2012년 군 복무를 위해서 상주 상무로 입대한다. 2012년에는 권순태에 이은 세컨드 골키퍼로 뛰었으나 2013 시즌 권순태의 전역으로 주전 골키퍼로 뛰었다. K리그 챌린지 30경기 23실점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챌린지 초대 우승과 함께 2013 K리그 챌린지 시즌 베스트11에 선정된다.

2014년 전역 후 제주 유나이티드로 다시 복귀해서 주장으로 선임됨과 동시에 주전으로 뛰면서 첫 시즌은 37경기 37실점으로 실점률 1의 훌륭한 모습으로 골문을 지켰다.

2015년부터는 과거부터 지적받던 기복있는 플레이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5년 31경기 45실점, 2016년 28경기 39실점으로 실점율이 다소 오른 모습을 보이다가 2017 시즌을 앞두고 수원 FC에서 이적한 이창근과 함께 로테이션으로 출장하였다. 2017시즌 자신의 세 번째 리그 준우승을 거뒀다.

2.4. 강원 FC

파일:김호준1.png

2017시즌이 끝난 뒤 계약이 만료되어 FA 신분이 되었고, 고향 연고 팀인 강원 FC로 이적하였다. #

시즌 개막 후에는 인천과의 경기에서 선방쇼를 펼치며 승리를 지켰고 FC 서울전에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4월 21일 전남 드래곤즈전에서 쓸데없는 파울로 퇴장을 당했고 징계가 풀려서 복귀한 5월 2일 친정팀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는 부상으로 조기 교체, 전열에서 이탈했고 휴식기에 들어가기 전 3경기를 모두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시즌 아웃되었다.

2018 시즌 기록 : 6경기 10실점

2019 시즌에는 작년 주전이던 이범영전북 현대로 이적하며 주전 자리를 차지했고, 상주와의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으나 센터백 한용수, 김오규를 위시한 수비수들의 삽질에 경기 내내 고통받았다.[5] 전반전에 김영빈의 1:1 찬스를 몸을 던져 막았고, 후반전 초반에 김민우안진범의 중거리 슛을 슈퍼세이브하고 윤빛가람의 프리킥을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쳐내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윤빛가람, 박용지에게 실점하며 팀은 0:2로 패배했다.[6]

2라운드 울산전에서는 전반 8분 주니오의 PK를 선방하였다. 이후 전반 20분 주니오의 결정적인 슈팅을 슈퍼 세이브로 저지했고, 1:1 상황에서 김보경의 슈팅을 안면(...)으로 선방하며 팀을 위기에서 구했다. 하지만 이 안면 선방의 여파로 부상을 당하며 후반 시작 전 함석민과 교체되었다. 한편 후반전에 교체 투입된 함석민도 선방쇼를 보이면서 결국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고, 귀중한 승점 1점을 수확했다.

3라운드 전북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며 클린시트를 기록, 승점 3점을 획득했다. 벌써 시즌 2번째 클린시트다.

5라운드 포항전에서도 여러 번 선방을 보여 주며 강원의 골문을 든든하게 지켰다. 특히 후반 42분 김승대의 1:1 찬스를 침착하게 막아낸 장면은 압권이었다. 그러나 송민규에게 실점하며 0:1 패배를 막지 못했다.

8라운드 친정팀 제주전에서는 전반 8분 만에 1명이 퇴장당한 상황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였고, 압도적인 안정감을 과시하였다. 마그노에게 멀티골을 허용하기는 했으나 아길라르의 프리킥, 마그노의 결정적인 헤더를 슈퍼 세이브로 막아내면서 친정 팀 제주를 상대로 4:2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 날 1골 1도움을 기록한 김현욱과 함께 친정 팀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 칭찬을 받았다.

10라운드 인천전에서 상대의 수차례 위협적인 공격을 잘 막아내며 시즌 3번째 클린시트를 기록했고, 팀도 1:0으로 승리하였다.

29라운드 친정팀 제주전에서 경기 막판 좋은 선방을 보여주며 클린시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시즌 막판부터는 U-20 월드컵으로 상승세를 탄 이광연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19시즌 총 리그 28경기 출장을 기록하였다.

2019시즌을 끝으로 1년 만에 강원을 떠났다.

2.5. 부산 아이파크

2020년 1월 10일, 자유계약 신분으로 승격팀 부산으로 이적했다.

개막전 포항전에서 조금 불안한 모습을 보이며 2실점을 기록했다. 7라운드 대구전에 조금은 괜찮은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세징야와 이진현에게 또 2실점을 기록했다.

8라운드 인천전에서는 몇차례 선방도하며 경기내내 부산골문을 지키면서 팀의 승리와 클린시트 모두 기록하는 기분 좋은 경기가 되었다. 9라운드 성남전 동료 박준강의 어이없는 실수로 선제골을 내주고 후반에 양동현의 완벽한 단독찬스를 선방하는 등 좋은 활약을 했으나 결국 팀은 1대1 무승부했다.

10라운드 친정팀 강원전에서 전반에 들어가는 골 2개를 쳐내는 등 무서운 폼을 보여주었다. 특히 강원의 코너킥에서 헤더를 아슬아슬하게 골라인 부분에서 쳐 낸 것이 백미. 전반과 후반에 1골씩 실점했으나 부산 공격진의 화려한 포화로 4대2로 대승을 거뒀다.

잠시 김정호에게 밀리기도 했으나 경기에는 출전하는 중이다.

16라운드 성남 FC전에서 오랜만에 선발출전했다. 전반전내내 성남의 위협적인 슛팅을 모두 깔끔하게 선방했고 후반12분에는 나상호의 중거리 슛팅을 깔끔하게 쳐냈다. 후반14분에도 혼전상황에서 나온 양동현의 슛팅까지 깔끔하게 선방했으나 후반15분 유인수에게 실점했고 이후 후반33분에는 공중볼 경합중 이창용의 팔꿈치에 맞고 큰 부상을 당하면서 교체가 예상되었으나 붕대를 감고 뛰는 투혼을 보여주었고 후반39분에는 이창용의 헤더를 안정적으로 선방해내며 팀을 구해냈다. 팀은 후반45+5분에 터진 도스톤벡 투르스노프의 극장골로 1대1무승부를 거두면서 경기는 마무리됐으며, 이 경기 김호준은 그야말로 마누엘 노이어급 선방을 보여주면서 최필수와의 주전경쟁에 불을 지폈다.

17라운드 포항 스틸러스전에서는 최필수가 선발출전하면서 벤치를 지켰다.

21라운드 친정팀 강원 FC전에 선발출전했다. 전반전에는 안정적으로 팀의 골문을 지켰으나 후반11분 조재완에게 실점하면서 끌려가기 시작했고, 후반20분에 김병오의 헤딩으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으나 후반37분 이영재의 환상적인 슛에 실점하면서 팀은 2대1로 패했다.

23라운드 강원 FC전에서도 최필수가 선발출전하면서 벤치를 지켰다.

한때 조덕제감독 체제에서는 기회를 받기도 했으나 이후 이기형 감독대행 체제에서는 벤치에도 못 드는 것을 보면 사실상 최필수와의 주전경쟁에서 밀린 것으로 보인다. 20시즌 종료 후 팀은 강등을 당했고 김호준도 자유계약으로 풀려났다.

2.6. 부천 FC 1995


2021시즌 겨울 이적시장 종료를 하루 앞두고 문광석의 음주운전으로 인한 계약해지로 급하게 서드키퍼를 찾던 부천 FC 1995와 계약을 체결했다. 등번호는 38번.[7] 주전 골키퍼 전종혁이 수비진들과 유기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김호준 선수가 출전하기는 다소 어렵겠지만 베테랑으로써 팀의 분위기를 잡아줄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9월 25일의 리그 31라운드 경남 FC 전에서는 후반 추가시간 2분에 고경민의 헤더를 막아낸다는 것이 손으로 상대의 머리를 쳐버리며 PK를 내주었고, 이로인해 부천은 2:3의 뼈아픈 역전패를 감수해야했다.

2021시즌 부천에서의 출전 기록은 리그와 FA컵을 합쳐 4경기 출전 7실점.

21시즌 종료 후 부천과 재계약을 체결했으며, 등번호가 39번으로 바뀌었다. 2022시즌 최종전이자 자신의 은퇴식 1경기 출전했다.

2.7. 은퇴

2022년 10월 12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0월 15일 전남 드래곤즈와의 홈 경기에서 은퇴식이 진행된다. #

은퇴 시점 K리그 역대 클린시트 top 10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K리그 레전드 골키퍼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커리어를 보냈다. 다만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제주 시절 모두 준우승밖에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이 흠이다.

3. 지도자 경력

2024 시즌 서울과 제주 시절 팀동료였던 김은중 감독의 부름을 받고 수원FC 골키퍼 코치로 첫 지도자 데뷔를 하게 됐다.

4. 플레이 스타일



순발력이 좋고, 페널티킥 방어 능력이 뛰어난 선수이다. 특히 페널티킥 방어는 상술한 대로 고등학교 시절 팀의 11년 만의 승부차기 승리를 이끌거나, 2008년 LA 갤럭시와의 친선전에서의 대활약#, 2009 AFC 챔피언스리그 16강 가시마전처럼 여러 번 그 능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젊었을 땐 심리적인 문제로, 최근엔 신체능력 하락으로 인해 기복이 있는 편으로 이따금씩 불안한 모습을 보이거나 어이없는 실점을 하기도 한다. 상술된 서울 시절 ACL에서의 4실점 과정이 대표적이고 강원 시절엔 상대 선수에게 바로 가는 킥미스로 팬들을 불안에 떨게 한 적이 있다.

5. 여담


[1] 상주 상무 시절 빡빡 깎은 머리로 인해서 붙여진 당시 별명.[2] 얼굴이 비슷해서 붙은 별명. 위의 사진에서는 별로 느껴지지 않지만, 영상 중계로 보면 확실히 닮았다.[3] 35회[4] 74회[5] 경기 내내 자기 진영에서 계속 공을 상대한테 갖다 바쳤다. 결국 한용수-김오규 조합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졌고, 현재는 이호인-발렌티노스 조합이 주류이다. 한용수에 비해 삽질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했던 김오규는 그나마 간간히 나와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만, 한용수는 완전히 실종자 신세.[6] 윤빛가람의 골은 한용수가 안진범의 크로스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클리어링 미스를 범한 데다 한용수의 발에 맞고 굴절되었고, 박용지의 골은 헤딩이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꽂혔기 때문에 막아내기엔 어려움이 따랐다.[7] 본인이 계속 달았던 1번은 이미 전종혁이 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