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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4:24:28

냄비근성

1. 개요2. 유래3. 비판
3.1. 한국인에게만 있는 특성이라는 의견3.2. 애초에 유효한 개념인가의 여부3.3. 언론플레이의 수단
4. 결론5. 관련 문서

1. 개요

군중들이 빨리 끓어오르고 빨리 식는 현상을 냄비에 빗대어 부르는 말이다. 단순히 어떤 화두에 대해서 과열양상을 보이는 것과는 좀 다른데, 비판의 요지는 빨리 끓는 것보다 빨리 식는 데 있기 때문이다.

2. 유래

대저 처음에는 근면하다가도 종말에 태만해지는 것의 사람의 상정이며, 더욱이 우리 동인(東人)의 고질이다. 그러므로, 속담에 말하기를 「고려 공사 삼일(高麗公事三日)이라.」 고 하지만, 이 말이 정녕 헛된 말은 아니다.
세종실록_세종 18년 윤6월 23일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에도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1]이란 말이 나올 만큼 의외로 오래된 고정관념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독도 문제, 동북공정,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도 나돌았다. 냄비근성의 의미 자체는 오래전부터 유래되었다. 언제 시작됐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80년대 이전부터 쓰이던 말임은 확실하다. 84년 신문기사에 용례가 나온다.

대표적인 냄비근성으로 꼽히는 건 월드컵 때의 축구 열풍으로 월드컵이 끝난 직후에 K리그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든 것을 보고 냄비니 뭐니 하는 말이 나돌았다. 월드컵 직후인 7월 7일에 개막하여 월드컵 인기를 등에 업고 큰 인기를 끌었지만, 불과 2달 만인 9월에 전년도 수준으로 추락했다. 세계적인 선수들의 국가대항전인 월드컵을 K리그로 대체하기는 어려웠던 건 사실이며, 2002년의 흥행 실패는 당시 축구계 내부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했다. 당시에 서울, 인천, 대구, 광주 등 대도시에 축구팀이 없었고,부산은 9위(10개팀)를 하는 등 축구 인기를 견인해야 할 대도시가 전멸해 버려서 축구 인기를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과열양상'을 경계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예컨대 어느 범죄자의 흉악한 행위에 분개하여 국민적 여론이 생겼더라도, 몇 달 안에 그 붐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식어 버리는 것을 냄비근성이라 하는 것. 만약 과열된 상태라도 금방 식은 게 아니라면 냄비근성은 아니다.

일찍부터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점을 끈기 없고 지조 없고 일관성 없는 속성이라 규정하여 열심히 깠다. 또 90년대에 이르기까지 특히 심했던 선진국 진입이라는 화두에 맞추어 '우리 사회의 후진적 작태'의 대표로 빨리 근절해야 할 요소로 손꼽혔다. 여기에 따르면 한국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흥분은 잘 하면서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기질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냄비근성 같은 현상이 생긴다는데, 마치 식민사관처럼 자학적인 굴레를 스스로에게 씌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 자체는 언론에서 교조적으로, 선민적으로 내세웠던 구호다. 여기에 "우리 전통 식기인 뚝배기와 같이 오래오래 식지 말고 꾸준해지자"는 틀에 박힌 결론까지 곁들여지곤 했는데, 이는 언론의 이중잣대다. 오히려 냄비근성이 부족해서 문제인데 일반 국민에게만 냄비근성을 강요하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너도 나도 지나친 과열을 막자는 취지였다면 대중들도 어느 정도 공감했을 것이다.

3. 비판

3.1. 한국인에게만 있는 특성이라는 의견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는 석유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석유는 채취될 때 토양과 바다를 오염시킨다. 석유는 수천 km를 유조선으로 운반되는데, 법에서 정한 자격규정에 미달하는 인력이 낮은 보수를 받고 일하고 있다. 거의 예외 없이 해마다 한 건 이상의 대형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금방 나타나지 않는 바다 속 피해는 차치하고, 긴 해안선을 따라 떠 있는 기름띠를 떠올려보자. 기름으로 범벅이 된 새들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을 경악시켰지만, 이에 대한 관심은 2주 후면 사라진다. 다음 사고가 생길 때까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일이 진행될 것이다.
모집 라티프_『기후의 역습』, p.149

애초에 이런 인간 공통 특성을 '한국인의 특징'이라면서 획일적인 프레임 안에 가두려는 이른바 '국민성'과 같은 사고는 지양되어야 마땅하며, 정통 사회학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경계하는 태도이다. 현재 전 세계 수십 억의 인구는 전례없는 매스미디어와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하룻동안에만 해도 수십, 수백 가지 다른 장르의 정보를 접하고 있다. 오전에는 지하철에서 "북극의 얼음이 녹고 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고, 점심시간에는 "연예인 A와 B의 불화설" 가쉽을 보고, 저녁에는 "무슨무슨 회사에서 파업에 들어가 노사협상이 시작되었다."라는 9시 뉴스를 본다. 이러한 뒤이어 밀려오는 정보의 물결에 밀려 이윽고 관심이 끊기는 현상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3.2. 애초에 유효한 개념인가의 여부

다수만이 비위를 맞춰주어야 할 세력이기 때문에 다수의 모든 계획은 가장 열렬하게 채택된다. 그러나 다수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돌려지자마자 이와 같은 모든 열성은 사라진다. 반면에 독자적이면서도 안정된 행정을 누리는 유럽의 자유국가들에서는 입법부의 관심이 다른 대상으로 옮겨진 경우라도 그 계획들은 계속 집행된다. 아메리카에서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특정한 개선사업은 굉장한 열성과 활력을 가지고 추진된다. 유럽에서는 그와 똑같은 사업들이 비록 사회적인 노력을 덜 들이지만 더욱 계속적으로 추진되는 것이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_『미국의 민주주의 I』, p. 335.
토크빌은 19세기 미국의 사회를 동시대의 귀족적인 유럽에 대비하여 관찰한 결과, 법 집행과 행정 수행이 대중의 관심에 따라 열렬히 이루어지다 급격히 식는 것을 알아챘다. 그 시절 미국의 한 예로, 덕망 있는 사람들의 호소에 감화된 대중은 교도소 환경 개선 사업을 착수하도록 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새로운 인도주의적 교도소가 곳곳에 세워졌다. 하지만 이런 사업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대중의 전반적인 관심이 새로운 대상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 사업은 잊혀갔다. 교도소에는 건전한 형행이 도입되었다가 나중에 파기되었으며, 새로 세워진 인도적 감옥과 대비되어 주목받지 못하는 기존 감옥들은 더욱 불결하고 부패하게 되었다. 토크빌은 이런 현상이 특정 국가 구성원의 급한 성미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 입법 및 행정권이 다수에게 있는 민주정 자체의 생래적인 결함 가운데 하나라고 본 것이다.[2]

대중이란 처음부터 불특정 다수다. 한 마디로 묶어 버리지만 실체는 각각의 사정과 생활이 있는 여러 개인의 집합이다. 이들 전부의 관심사가 특정 상황에 어느 한 곳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오히려 어렵고 희귀한 것이며, 그렇게 모인 관심이 계속 이어지기도 매우 어렵다.

일부 정치, 외교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쉽게 끓어올랐다가 꺼져 버린다."고 폄하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전문 정치인도 아니고 관련인도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 한때 여론에 의해 도마에 오른 사건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할 의무는 없으며, 그러기도 쉽지 않다. 당사자가 아닌 일반 대중한테는 결국 남의 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건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 인력이 해야 할 일이다.

또 사회가 직면하는 화두는 굉장히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대중의 냄비근성을 폄하하는 자의 논조는 다방면에 걸친 모든 분야의 화두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라고 강요하는 것에 가깝다. 물론 일반인 입장에서 그러할 의무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애초에 일반인이 그런 일을 모두 할 수 없으니 전문가를 양성해서 그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인데, 이를 대중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오히려 언론이 본인의 의무를 다하지 않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꼴이다.

3.3. 언론플레이의 수단

'냄비근성'이라는 말 자체를 어떤 사회 이슈나 붐을 부정하기 위해서 고안된 단어로 볼 수도 있다. "그 현상은 거품이다.", "한때의 유행이다."는 식으로 해당 이슈를 묻어버릴 목적으로 사용되며, 이 경우 애초부터 뚜렷한 근거나 전제가 없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어떤 화제가 묻혀버리는 걸 우려하는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해당 화제를 묻어 버리는 데에 쓰는 것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자기들에게 불편한 화두를 묻어버리기 위해서 국민성까지 볼모로 삼아 냄비를 운운하며 좌든 우든 상관없다. 좌편에서는 '악덕기업의 마케팅에 넘어간 냄비현상'이란 표현을 자주 쓰고 우편에서는 '유언비어에 넘어간 냄비현상'이란 표현을 자주 쓴다.

그들은 단순히 과열양상을 우려하는 것이라 변명하지만, 정작 그를 해결할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과열양상을 해소하려면 사안의 본질에 맞는 기사와 잘못된 내용에 대한 공정한 수정, 그리고 또 다른 중요 사안에 대한 여론의 환기가 필요하다. 어떤 현상을 두고 "저것은 냄비니 부질없는 짓이다."라는 말로 일축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바로보지 않는 흠집 내기일 뿐이다.

특히 언론의 힘이 막강해진 오늘날에는 대중의 선호와 관심이 언론에 크게 좌우된다. 연예계에서 특정 연예인의 마케팅을 위해 언론을 활용하는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대중적 화제가 애초부터 여론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 한다면, 오히려 냄비근성을 유발하는 자는 화제를 수시로 갈아치우는 언론이 될 것이다.

언론에서 조성한 화제의 예로 월드컵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월드컵 시즌에는 하루 온 종일 TV, 라디오, 신문 등 모든 매체에서 월드컵이라는 화제에 집중하나 월드컵이 끝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화제에 관심을 돌린다. 각 개인이 매체의 이러한 화제전환에 따라가기만 해도 냄비근성을 지닌 대중으로 폄하당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매체에서 알려주지 않으면 일반인으로서는 특정 사건에 관심이 있어도 깊게 들어가기 어렵다. 정보에 접근할 시공간적 여력이나 권한 등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게 언론이다.

이 단어가 네티즌들에게 넘어가면서, 무심한 듯 시크한 척하는 네티즌들이 다른 네티즌을 까는 데에도 사용한다. 앞서도 말했듯, 사태의 과열을 우려하는 것과 그것을 애초에 보지 않으려 하는 행동은 다른 것이다.

4. 결론

모든 인간은 각자 관심사가 다르며, 관심사에 대한 관심의 정도 또한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일정 수준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자신이 관여된 일이 아니면 사람은 자신의 본업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분노 어린 관심을 계속 가지면 명이 짧아지기에 냄비근성을 가진 사람이 절대다수가 될 수밖에 없다.

냄비근성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해도 그게 꼭 바람직하지는 않다. 상황이 변해서 기존 문제가 어느 정도로 나아졌거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으면 관심이 옮겨가는 게 맞으며, 오히려 그렇게 해야 전반적으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특정 주제에 머물러 있으면 새롭게 나타나는 문제들을 무시하는 꼴이 되는데, 나중에 방치한 문제들이 어떻게 위협이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 일례로, 세월호를 예로 알아보자. 세월호 사건을 통해서 많은 국민이 무능하고 관료주의적인 컨트롤타워에 불만을 품었다. 또 배의 안전성에 대한 불신이 생겼고, 결국 사회는 컨트롤타워를 더 쉽게 운영할 수 있게 하였고 배와 관련된 안전법도 강화했다. 이렇게 많은 부분이 나아지면서 강원도 산불이 났을 때 헬기들이 손쉽게 이동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각종 어선 전복 사고에도 효과를 보았다. 이렇게 사고가 일어나면 국민이 이에 분노하거나 공감하고, 문제점을 파악하고 정부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점점 사회가 좋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3]

그렇기 때문에 특정 분야의 문제는 관련자들만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대중은 본업에 충실하는 게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더 효율적이다. 사안에 따라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잊히는 게 나을 사건도 있다.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사건들은 적당히 잊히는 게 모두에게 낫고, 잊힐 권리 같은 개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특정 문제가 지나치게 오래 제기되면 사람들에게 공감은커녕 지겹다며 반감을 사게 마련이다. 어차피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져 봐야 일반인들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정리하자면, 어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되, 어느 한 이슈에 지나치게 몰두하기 보다는 서로 간의 합의점을 찾고 다른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5. 관련 문서


[1] 고려 사람(한국인)들은 한 번 시작한 일은 오래 하지 못하고 정책이나 법령조차 3일이면 바뀐다.[2] 이런 입법과 행정의 불안정성이 국민의 물신주의 추구 경향, 다수의 폭정(tyranny of the majority), 균일화로 인한 사상과 정신의 빈곤 등과 함께 민주제의 결점으로 제시된다.[3] 그리고 이는 역사적으로도 쭉 이어져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