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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 정보기관.2. 상세
해방 직후 귀국한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의정원 결의를 거쳐 내무부 산하에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를 조직했다.[1]정치공작대 중앙본부 | |
본부장 신익희 | 차장 강태동 |
총무반 김정실 | 지도반 |
조직반 조중서 | 정보반 박문 |
중앙본부 요원 30명 | |
강응룡, 강현원, 김제선, 김제철, 김형집, 남상학, 백시영, 백창섭, 서상호, 선우길영, 성낙준, 심창섭, 안길호, 안병성, 안준희, 유성복, 유익배, 이만영, 이을식, 이인남, 이종근, 이희두, 정낙진, 정희섭, 조성식, 조영진, 조완식, 진헌식, 최기성, 황남룡 | |
출처 |
이미 특파사무국에는 신의주학생사건 이후 월남한 반공청년들이 100여 명 이상 집결해 있었고, 사무국은 임정 지지와 반소・반공의 지향이 결합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정치공작대는 북한·남한의 면 단위까지 전국적 조직망을 구축했고, 대원은 총 358명에 달했다. 정치공작대는 12월28일 북한에 조직요원을 침투시키기로 결정했는데, 조만식 계열이 정치공작대에 포섭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조만식과 이승만의 연대가 인편 접촉의 수준이었다면, 조만식과 김구의 연대는 인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공작대의 북파 임무는 반탁운동과 요인 암살이었다.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단체가 바로 백의사다. 정치공작대의 북파 공작은 테러단체 백의사와의 협조하에 이루어졌고, 정치공작대 중앙본부 요원 중에도 백의사 단원이 있었다.
1946년 3월 정치공작대는 백의사와 연대하여 김일성, 최용건, 김책, 강량욱 등에 대한 암살작전을 수행하였다. 백의사 단원들에게는 조중서의 지령문과 소개장, 임정 내무부장 명의의 승차편의 의뢰장, 임시정부의 국자포고 제1・2호가 발급되었다. 이들은 김일성 암살 시도(1946년 3월 1일), 최용건 자택 습격(1946년 3월 5일, 7일), 김책 자택 습격(1946년 3월 9일), 강양욱 자택 습격(1946년 3월 12일) 등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분단이 기정사실화 되려고 하자 1947년 이후부터는 활동을 종료했다.
3. 여담
소련 당국은 3·1절 김일성 암살시도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였고, 북한은 김구를 "테로강도단" "살인강도단"의 두목이라 맹렬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실제로 북파요원들은 북파되기 전 김구를 만났다는 증언이 있긴 하다. 윤봉길 처럼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을 들고 김구와 기념촬영을 했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선전물에서 김구에 대한 비난이 사라진 것은 1948년 4월 남북협상 이후였다. 남북협상 개최 전, 내무서원들이 시내에 붙은 김구 비난 전단을 떼느라 꽤나 고생했다고 한다. |
당시 조선로동당 선전물 |
4. 관련 자료
[1] 정치공작대는 임정의 조직적 통제보다는 내무부장 신익희의 개인적 통제 하에 운영되었고, 사실상 신익희의 사조직으로 기능했다고 한다.#[2] 그 중심에는 해방 직전 임정 특파원으로 밀파된 백창섭(白昌燮)이 있었다. 그는 독일 패전 이후 미군 OSS의 윔스(Weems),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의정원 의장 홍진 등과 협의한 후 연합군의 국내 상륙에 대비한 국내 공작 차 1944년 11월 22일 조병걸(趙炳傑)과 함께 중경을 출발, 부양 광복군 3지대의 김학규와 협의한 후 1945년 4월 14일 국내에 잠입했다. 부여된 임무는 연합군 상륙에 대비한 거점 마련과 청년 동조자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제의 패망으로 이러한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그리고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가 특파사무국의 해체를 지시함에 따라 특파사무국은 1945년 11월 24일 해체되었다. 이들은 곧 백창섭의 안내로 임정 2진으로 귀국한 내무부장 신익희와 연결되었고, 특파사무국은 정치공작대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