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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 정보기관. 북파공작원을 파견하여 여러 대북작전과 김일성 암살작전을 수행하였다.[1]2. 상세
해방 직후 귀국한 임시정부는 1945년 12월 의정원 결의를 거쳐 내무부 산하에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를 조직했다.정치공작대 중앙본부 | |
본부장 신익희 | 차장 강태동 |
총무반 김정실 | 지도반 |
조직반 조중서 | 정보반 박문 |
중앙본부 요원 30명 | |
강응룡, 강현원, 김제선, 김제철, 김형집, 남상학, 백시영, 백창섭, 서상호, 선우길영, 성낙준, 심창섭, 안길호, 안병성, 안준희, 유성복, 유익배, 이만영, 이을식, 이인남, 이종근, 이희두, 정낙진, 정희섭, 조성식, 조영진, 조완식, 진헌식, 최기성, 황남룡 | |
출처 |
그 중심에는 해방 직전 임정 특파원으로 밀파된 백창섭(白昌燮)이 있었다. 그는 독일 패전 이후 미군 OSS의 윔스(Weems),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 의정원 의장 홍진 등과 협의한 후 연합군의 국내 상륙에 대비한 국내 공작 차 1944년 11월 22일 조병걸(趙炳傑)과 함께 중경을 출발, 부양 광복군 3지대의 김학규와 협의한 후 1945년 4월 14일 국내에 잠입했다. 부여된 임무는 연합군 상륙에 대비한 거점 마련과 청년 동조자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일제의 패망으로 이러한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그리고 1945년 11월 귀국한 김구가 특파사무국의 해체를 지시함에 따라 특파사무국은 1945년 11월 24일 해체되었다. 이들은 곧 백창섭의 안내로 임정 2진으로 귀국한 내무부장 신익희와 연결되었고, 특파사무국은 정치공작대로 이어졌다.[2]
북한에 대한 공작 전개는 정치공작대가 결성된 직후인 1945년 12월 6일부터 개시되었는데, 제1차로 함경도, 2차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중앙본부원이 밀파되었다. 정치공작대의 본격적인 대북작전은 1946년 초부터 전개되었다. 이 시기 임시정부의 기본적인 대북정책은 북한에 수립된 친소・친공세력을 타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대북 타격공작은 남한 내 여러 극우반공단체와 연계, 북한 내 반공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수행되었다.
1946년 3월 정치공작대는 백의사와 연대하여 김일성, 최용건, 김책, 강양욱 등에 대한 암살작전을 수행하였다. 북파된 정치공작대 요원들은 광복군 출신 그룹, 백의사 단원 그룹, 그리고 이 두 그룹을 연결하는 임정 특파사무국 출신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북파 요원들에게는 조중서의 지령문과 소개장, 임정 내무부장 명의의 승차편의 의뢰장, 임시정부의 국자포고 제1・2호가 발급되었다. 1946년 2월 27일 작전수행은 개시되었고, 이들은 김일성 암살 시도(1946년 3월 1일), 최용건 자택 습격(1946년 3월 5일, 7일), 김책 자택 습격(1946년 3월 9일), 강양욱 자택 습격(1946년 3월 12일) 등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이외에도 정치공작대는 많은 작전을 수행하였고, 많은 요원들이 이 과정에서 사망, 체포, 투옥, 사형 등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3. 여담
- 임시정부는 대북 타격공작 뿐만 아니라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국공내전의 향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직접적으로 국공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려 했으며, 학계에선 이를 '만주 계획'이라 한다.
실제로 좌익 계열의 조선의용군이 중국공산당에 가담해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것 처럼 김구의 후원 하에 한국광복군을 이은 임시정부의 '장연지구민주자위군'이 반공의 일원으로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 당시 소련 당국은 김일성 암살시도의 배후를 김구로 지목하였고, 북한은 김구를 "테로강도단" "살인강도단"의 두목이라 맹렬하게 비난했다고 한다. 실제로 북파요원들은 북파되기 전 김구를 만났다고 한다. 작전은 조만식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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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선전물 |
[1] 정치공작대는 임정의 조직적 통제보다는 내무부장 신익희의 개인적 통제 하에 운영되었고, 사실상 신익희의 사조직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학계의 공식입장 일 뿐 정황상으로 보아 김구와 어떤식으로든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이미 특파사무국에는 신의주학생사건 이후 월남한 반공청년들이 100여 명 이상 집결해 있었고, 사무국은 임정 지지와 반소・반공의 지향이 결합되어 있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