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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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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제국기3. 일제강점기4. 미 군정기5. 정부수립 이후6. 사망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신익희의 일생을 서술한 문서.

2. 대한제국기

1892년 7월 11일 경기도 광주유수부 초월면 서하리에서 구한말 대사헌을 지낸 신단과 넷째 부인인 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의 여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신익희가 태어났을 당시 신단은 무려 61세, 즉 환갑의 나이에 얻은 아들로 굉장한 늦둥이였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풍양 조씨, 전주 이씨 등 적모가 있었고 동복형제는 2명이 있었다.

5살 때부터 백형(伯兄) 신규희(申揆熙)에게 한학을 수학했다. 그의 집안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실천 정신을 강조하는 양명학을 추구하는 강화학파였다. 고조부인 완구(宛丘) 신대우(申大羽. 1735~1809)는 대표적인 조선의 양명학자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의 손녀사위로 강화 하곡리에서 처가살이를 하며 정제두의 양명학을 익혔다. 신대우의 막내 아들이자 신익희의 증조부인 실재(實齋) 신현(申絢. 1764~1827)은 광주유수부 초월면 서하리로 이주하여 신씨 문중을 열었고 양명학을 가학으로 전수했다. 어렸을 때는 한문에 능통했으나[1] 1908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이때부터 우파적인 성격을 띄어 "영국 젠틀맨"이라는 별명반 조롱반을 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3. 일제강점기

1910년 일본 유학을 떠났고 세이소쿠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912년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버는 한편 송진우, 문일평, 안재홍과 의기투합하여 유학생의 통일 조직으로 '조선유학생학우회'를 결성하고 총무, 평의회 의장, 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학우회의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의 편집 겸 발행인 등을 맡아 유학생 및 국내 청년 학생들의 민족 정신과 독립 사상을 고취하려 노력했다. 1913년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귀국한 신익희는 두 형 신규희(申揆熙), 신필희(申弼熙) 등과 함께 생가에 광동학당(廣東講塾)을 설립하여 교육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인근 동리에서 80여 명의 학동들을 모아 가르쳤는데 이때 관립학교의 교과서를 사용하면서도 조선총독부가 금서로 정한 <유년필독(幼年必讀)>을 별도로 가르쳐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191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뒤 중동학교에서 잠시 교사를 맡았으며 1918년 보성법률상업학교[2]의 교수로 부임해 비교헌법, 국제공법, 재정학 등을 가르쳤다.

1918년 6월 국내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알려지자 신익희는 최린, 임규, 송진우, 최남선, 정노식(鄭魯湜) 등과 함께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하고 1918년 11월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락하고 상의하는 임무를 맡아 해외로 떠났다. 우선 만주연해주의 독립군 지도자들을 만난 뒤 1919년 1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조선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을 기다렸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자 2월 중순 상하이를 떠나 톈진, 베이징, 만주를 거쳐 귀국했다. 국내에 들어온 뒤 평양을 지나면서 3.1 운동 소식을 접한 그는 서울에서의 대규모 만세 시위를 추진했으며 제자 강기덕, 한창환(韓昌桓) 등과 연락하여 3월 5일 남대문역 앞 만세 시위 계획을 지원했다. 이후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3월 14일 농사꾼 차림으로 신분을 위장한 채 중국으로 망명했다. 3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현순 등과 만나서 국내 인사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전한 뒤 국외 모든 인사들을 망라하여 정부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몇 차례 기호 출신 중심의 인사들이 신익희의 주선으로 모임을 가졌고 4월 10일 밤 10시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60번지에서 신익희를 비롯한 29명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부 조직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고 4월 11일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이때 신익희는 경기도 선출 의원으로서 임시 의정원에 참여하여 이시영, 이광수, 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헌장 기초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손정도, 조소앙, 이광수와 함께 임시의정원법도 기초했다.
파일:임시정부 국무원 - 신익희, 안창호, 현순 (앞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뒷줄)1.jpg 파일:Syngman Rhee and Shin Ick Hee.jpg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1921년 3월, 상해를 떠나기전 이승만 대통령과 신익희 법무차장이 남긴 기념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내무차장을 맡았으며 차장제 폐지 이후에는 윤현진, 김구 등과 함께 내무부위원으로 선임되어 내무총장 안창호를 도와 연통제를 조직하는데 앞장섰다. 이후 상하이의 임시 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정부가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하여 통합 운동을 전개할 때 신익희는 법무차장으로서 통합 임시정부의 헌법 초안을 마련했다. 그가 주도한 헌법 초안은 임시 의정원의 심의를 거쳐 9월 6일 통과되었고 통합 임시정부 성립은 9월 11일에 공포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지 않으면서 파행이 거듭되자 신익희는 1920년 3월 윤현진, 계봉우, 윤기섭 등 16명의 의원과 함께 '대통령내도촉구안(大統領來到促求案: 대통령에 대하여 상하이로 올 것을 촉구하는 안건)'을 임시 의정원에 제출하여 통과시킴으로서 이승만의 상하이 부임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했지만 이승만과 심한 갈등을 빚은 국무총리 이동휘가 1921년 1월 26일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의 여파로 사퇴하고 안창호도 사퇴 의사를 표명하는 등 파행은 거듭되었다. 이후 이승만 또한 사직의 뜻을 밝히고 1921년 3월 상하이를 떠나 쑤저우, 항저우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신익희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장붕과 함께 이승만을 따라가 설득했고 이승만은 상하이로 돌아와 사직을 번복하고 정부 조직을 재정비했다. 이때 신익희는 국무원 비서장에 임명되어 이승만을 보좌했으며 1921년 4월 한중상호조합(韓中互助社)을 결성해 중국의 도움을 받고자 했으나 이승만은 5월 29일 상하이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고 신익희는 이 일로 이승만에게 크게 실망했다. 1921년 3월 11일 윤기섭, 양기하, 손정도, 연병호 등과 함께 국민대표회의 소집 건의안을 제출했고 건의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신임 운동을 일으켰다. 결국 1922년 6월 17일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통과시켰지만 이승만이 헌법상의 근거가 없다며 사퇴를 거부했기 때문에 퇴진시키지 못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대내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데 동의했으며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신익희는 모친과 부인이 자식들을 데리고 베이징으로 망명해서 그들을 보살피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기 때문에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1923년 6월 국민대표회의가 파행으로 끝났다는 소식을 접한 신익희는 시안으로 가서 산시성 독군(督軍) 후징이(胡景翼)를 찾아갔다. 후징이는 신익희가 일본에 유학하던 시절 친교를 맺은 인물로 신익희는 막하의 고문이 되었다. 신익희는 후징이의 지원을 받으며 한중 양국의 청년들을 모집해 군사 교육을 실시했다. 그는 유격 부대인 분용대(奮勇隊)를 편성하고 북만주에서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성주식(成周寔)을 초빙해 분용대 연성대장의 직임을 수여하고 대원들을 훈련시켰다. 1924년 가을 후원자인 후징이가 사망하자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진행 중이던 장제스난창에서 만나 분용대의 병력과 훈련 상황을 설명하고 한국-만주 국경에서의 일본군 토벌 작전을 건의했지만 장제스는 그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난징 국민당 정부의 심계원장인 위유런의 배려로 심계원에 근무했다.

1932년 1월 윤기섭, 성주식, 김홍일 등과 함께 난징에서 한국혁명당을 창당하고 산하 단체로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 투쟁을 준비했으며 '우리의 길'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한인 동포들에게 민족 정신과 독립 의지를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1932년 11월 신익희는 한국독립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대표들과 협의하여 민족 협동 전선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조직했는데 한국대일전선통일연맹은 ‘혁명 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 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 행동’을 투쟁 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 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으며 최동오, 김두봉, 김규식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활동했지만 가맹 단체간의 연락 협의 기관으로서의 기능만 수행했을 뿐 통제 및 결속에 한계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33년 말 민족대당 형성을 위해 자신이 조직한 한국혁명당을 만주사변 후 만주에서 중국 관내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을 창당했다. 이후 1935년 7월 난징금릉대학에서 민족 통일 전선의 원칙에 따라 신한독립단, 의열단,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5당을 통합시켜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신익희는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서 민족혁명당 군사부에 편입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 특별반 졸업생들의 교양 훈련을 맡아 '국내외 정세'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신익희에게 가르침을 받은 청년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당군인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되었다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된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에서 의열단 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그는 조소앙 등과 함께 탈당했으며,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좌파 독립운동 정당 중심의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에 참여했다. 이후 1938년 9월 한커우에서 조직된 조선청년전위동맹에 가담했다. 전위동맹은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신익희, 최창익, 김학무 등 당원 11명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의 한인 특별반 졸업생 35명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무장 투쟁 단체였다. 그는 전위동맹원들을 이끌고 1938년 10월 10일에 창설된 조선의용대에 참여했으며 전위동맹 대표로서 1939년 8월 치장에서 열린 '7당 통일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주석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통합 문제를 논의했으나 도중에 단일당 방식을 주장하는 측과 연맹 방식을 주장하는 측이 대립했다. 신익희는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김성숙과 함께 연맹 방식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성숙과 함께 7당 통일 회의를 탈퇴했으며 회의 결렬 후 조선의용대에 참여한 전위동맹원들이 모여있는 낙양으로 가서 그들을 지도했다. 1941년 3월에서 5월에 걸쳐 전위동맹원들이 속한 조선의용대 제2지대가 낙양에서 황하를 건너 화북 중국공산당 지역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는 동참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향했다.[3]

충칭에 도착한 신익희는 1941년 한중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상무위원을 맡았으며 1942년 8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장 조소앙의 권유를 받아들여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20년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돌아왔다. 1943년 3월 4일 외무부 차장을 겸임했으며 4월 10일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었을 때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4월 20일 제36차 임시 의정원 임시 회의에서 임시약헌을 개정한 대한민국 임시 헌장이 통과되었다. 주석에는 김구, 부주석에는 김규식이 선출되었고 국무위원으로는 이시영을 비롯한 14명이 선출되었으며 행정 각 부의 부장으로는 외무부장 조소앙, 군무부장 김원봉, 재무부장 조완구, 법무부장 최동오, 선전부장 엄항섭, 문화부장 최석순, 내무부장으로 신익희가 임명되었는데 내무부장으로서 충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의 가족을 비롯한 600여 명의 한인 동포들을 보호 및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4. 미 군정기

1945년 8.15 광복 후 신익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국을 서둘렀다. 하지만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환국하는 방법이나 교통편을 마련해야 했고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교섭해야 했다. 귀국 노선은 충칭에서 상하이, 상하이에서 국내로 이동하기로 결정되었으며 교통편은 충칭에서 상하이까지는 중국, 상하이에서 국내로는 미국이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 국민당의 주선으로 신익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29명이 1945년 11월 5일 비행기 편으로 상하이에 도착하였으나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는데 임시정부 요인들의 자격이 문제가 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정부 자격을 요구하였지만 미국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만을 고집하였고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국의 요구대로 11월 19일 중국 전구 미군 사령관인 위드마이어 장군에게 ‘개인 자격의 귀국’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하고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제공하는 비행기의 탑승 인원이 15명에 불과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1진과 2진으로 나누어 들어가기로 했지만 귀국의 선후 문제로 논란이 발생했다. 이때 조소앙은 실무진이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했고 신익희도 적극 찬성하였는데 실무진이 먼저 들어가 국내의 정세를 파악하여 귀국 기반을 마련한 뒤 주석을 비롯한 정부와 임시 의정원 대표들을 위엄있게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조소앙과 신익희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 결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주석과 부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제1진이 먼저 귀국하고 나머지 의정원 의장과 행정 각 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제2진이 뒤에 귀국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제1진은 11월 23일 귀국하였고 제2진은 12월 1일 귀국하였다. 신익희는 제2진으로 12월 1일 귀국하였는데 폭설로 김포비행장에 착륙하지 못하고 옥구비행장을 거쳐 상경하였기 때문에 12월 2일에야 서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환국 직후 임시정부는 정통성을 지닌 정부로서의 권위와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고자 노력했으며 신익희는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임시정부의 하부 조직으로 정치 공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때 임시정부 특파사무국 요원들이 신익희를 찾아갔는데 특파사무국은 해방 직전 임시정부의 국내 공작원으로 파견된 백창섭(白昌燮)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하순 조중서(曺仲瑞), 김제선(金濟璿), 심창섭(沈昌燮) 등이 임시정부의 환국에 대비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하지만 이들은 11월 23일 환국한 김구 주석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해 해체 위기에 몰려 있었다. 특파사무국 요원들은 신익희에게 자신들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고 신익희는 그들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기로 했다.

12월 6일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에 정치 공작대가 조직되었고 특파사무국 요원들이 대거 가담했으며 일제강점기 시기 행정 관료였던 사람들 중 건국 일선에서 행정을 담당할 이들을 선발하여 행정연구위원회를 만들어 시정(施政) 자료 수집과 연구를 담당하도록 했다. 정치 공작대는 조직되자마자 각급 단위의 조직을 구성했으며 신익희는 정치 공작대의 조직 방식을 과거 임시정부가 추진했으나 실패로 돌아간 연통제 방식으로 정했다.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서 임시정부 내무부 산하에 중앙본부, 도 조직, 군(부) 조직, 면 연락부, 리동 연락반으로 하는 계선 조직을 구축한 것이다. 12월 6일 중앙 조직을 결성한 후 보름만에 남북한 전역에 걸친 군 단위 조직이 짜여 졌고 이후 1달여 만에 면 단위 조직이 대체적으로 이루어졌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안이 공식발표되었는데 결정안에는 열강이 한국을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임시적인 코리아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즉시 신탁통치에 대한 절대 거부 의사를 표명하고 각 정당 대표, 종교, 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 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했다. 12월 28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어 반탁 운동을 전개했는데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는 12월 29일 모임에서 임시정부의 즉각적인 주권 행사를 건의하였고 김구는 내무부장 신익희에게 이를 따르게 했다. 이에 신익희는 12월 30일 내무부 예하의 행정연구위원회로 하여금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전국 군정청에 소속된 한인 직원을 임시정부 산하에 두는 내용을 담은 임시정부 포고문을 작성하고 12월 31일 자신의 명의로 <국자(國字)> 제1호와 제2호를 발표했다.
국자 제1호
1. 현재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을 전부 본임시정부 지휘하에 예속케 함.
2. 탁치반대의 시위운동은 계통적 질서적으로 행할 것.
3. 폭력행위와 파괴행위는 절대 금함
4. 국민의 최저 생활에 필요한 식량·연료·수도·전기·교통·금융·의료기관 등의 확보 운영에 대한 방해를 금지함.
국자 제2호
此 운동은 반드시 우리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기까지 계속함을 요하며, 일반 국민은 금후 우리 정부 지도하에 제반 사업을 부흥하기를 요망한다.

미군정은 국자 제1호와 국자 제2호를 임시정부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쿠데타로 받아들였고 임정 요인들을 중국으로 추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북한소련군정은 1946년 4월 7일 '남조선 정세 보고서'에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망명정부는 인민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이 과거에 신탁통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것이 거부될 경우 신탁통치 반대운동은 현실화될 것이다. 그들은 혼란을 이용하여 좌익들에게 테러행위를 가하기로 결정하였다. 망명정부의 장관들인 엄항섭과 신익희가 이를 준비하고 있다. 엄항섭은 서울에서, 신익희는 지방에서 테러행위를 조직하고 있다. 신익희의 지도 하에 있는 “정치행동단”이 이러한 테러행위를 실행에 옮길 것이다.

이러한 임시정부와 미군정의 갈등은 1946년 1월 1일 김구와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이 만나면서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미군정은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하였으며 신익희 역시 미군정에 구금되어 심문받아야 했다. 미군정은 국자 1호와 2호 발표 직후 정치 공작대 본부인 낙산장을 수색하여 관련 서류를 모두 압수했고 1946년 1월 3일 신익희를 CIC 본부로 연행하여 2일 동안 심문했다. 이후 하지 중장은 또다시 이런 짓을 저지른다면 사살하겠다고 위협한 뒤 풀어줬으며 사건 후 신익희의 임시정부에 대한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신창현의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누군가가 김구에게 "이제 천하는 신익희의 천하이지 백범 주석의 천하라는 말은 벌써 예전"이라며 이간질했다고 한다. 미군정 역시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에 정치 공작대의 해체를 요구했으며 김구는 1946년 4월 28~29일 정치 공작대와 정치위원회의 임시 대표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전국적인 국민 운동이 필요하다는 결정에 따라 정치 공작대와 정치위원회는 해체하고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합류하도록 하였는데 이후 신익희는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한편 좌익 세력에 대한 백색테러를 지휘했다. 김일성을 죽이기 위해 백의사를 북에 보내 1946년 3월 1일 평양의 3.1절 기념식에서 김일성에게 수류탄을 던지게 했으나 수류탄은 김일성 옆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주워서 던지려다가 노비첸코의 손에서 폭발했으며 그는 한쪽 손이 잘려나가고 한쪽 눈이 실명되지만 김일성은 무사했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발언으로 해방 정국에 파란이 일어나고 한국민주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이승만을 비판했지만, 신익희는 임정 계열과 결별하고 이승만이 주도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가담해 전국대표대회에서 부의장에 선임되어 우파 진영의 명실상부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이후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교 초대 학장 및 이사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겸했으며 1946년 12월 24일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일종의 국회의원격) 서울지역 대의원에 피선돼 1947년 의장이 되었다.[4]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5월 31일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초대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다 제헌 국회 초대 국회의장이었던 이승만이 7월 24일 대통령에 취임하여 국회의장이 공석이 되자 8월 4일에 열린 국회의장 보궐 선거에서 새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때 이미 54세여서 그다지 부각되진 않지만 역대 최연소 국회의장이다.[5]

5. 정부수립 이후

파일:Korean Congressmen visited U.S..jpg
1949년 8월 15일, 미국을 방문한 제헌국회의원단. 왼쪽부터 김세선 주미국대사관 참사관, 이훈구 의원, 신익희 국회의장, 딘 애치슨 국무장관, 장면 초대 주미대사, 이나영 사무국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지청천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이승만과 멀어지면서 1949년 2월 10일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대한국민당을 한국민주당과 합당시켜 민주국민당을 창당하고 최고위원에 취임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6월 19일 실시된 국회의장 선거에서 친이승만 세력의 지지를 받은 오화영과 경합한 끝에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6.25 전쟁 발발 후 국회 부의장 조봉암과 함께 이승만을 면담하러 갔으나 실패하고 서울이 조선인민군에게 점거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빠져나와 열차 편으로 남하해 부산으로 피난했다.

1952년 제2차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국회의 간접선거로는 당선이 힘들다고 판단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내각책임제 개헌을 통해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하려 했는데,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원들을 감금시킨 뒤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발췌 개헌이라 한다. 당시 신익희는 국회의장으로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정창현의 <5.16 군사쿠데타의 배경과 성격>에 따르면, 이 때 이용문, 박정희 등이 UN군 사령관 클라크와 미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지원을 받아 이승만을 제거하고 장면을 대통령으로 세우려는 쿠데타를 감행하려 했다고 한다. 이들이 신익희를 찾아가 협조를 요청하자 신익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당장은 분풀이도 되고 속 시원하겠지만, 그 군권 밑에 매달려 잇는 정부가 무슨 민주 정부가 되겠으며, 어떻게 정부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군부가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면 그 나라는 망하는 것이라오. 그것은 군부가 자기들끼리 또 찢고 당기고 할테니 결국 군부 쿠데타는 악순환의 씨를 뿌려 준 결과가 된다는 말이라오.”
신창현, <해공 신익희>, p.495~499

이후 신익희는 대통령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이승만이 재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출마를 포기했다. 이에 윤길중 의원이 찾아와서 출마를 권했지만 그는 "지금과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신변을 보장받기란 어렵다"며 거부했다. 그러다 조봉암 민의원 부의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그는 조봉암의 좌파적 성향을 경계하고 부통령 후보로 이시영을 추대하자는 공동 성명을 김창숙, 장면 등 8명과 함께 발표했다.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대관식 때 대한민국 정부의 축하 사절로 영국을 방문했다. 이후 민주국민당 선전부장 함상훈이 신익희가 1953년 여름 인도 뉴델리에서 북한에 납북되었던 조소앙과 만나 남북협상을 논의하고 중립국 실현 문제를 거론했다며 폭로했다.(뉴델리 밀회 조작사건) 민주국민당 상임집행부는 당을 파괴하려는 정치적 모략이라는 반박 성명을 발표하고 함상훈을 제명 처분했다. 자유당에서는 함상훈 성명 내용은 제3세력의 책동을 의미하며 이들의 배후에 국내 세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야의 정쟁은 국회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어 약 1주일간이나 동 사건이 정부에서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이 출석한 가운데 여야 측의 격렬한 정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함상훈의 신익희 민주국민당위원장 매장모략이라는데 의견이 대체로 모아져서 동 사건을 사직당국에 일임하기로 결의를 보았다.

신창현의 저서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신익희는 1953년경 김성수와 만나서 민주국민당이 세간으로부터 '진부하고 고루한 봉건적인 지주계급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조봉암을 영입해 당의 면모를 쇄신시키고 고향을 이북에 둔 장면을 불려들어 민주국민당이 남북이 함께 뭉친 정당임을 보여줘야 하며 독립운동가 곽상훈과 여성계 대표 박순천을 맞아들여서 민주국민당이 명실상부한 대동단결의 정당임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함상훈이 반기를 들었고 신익희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 참석차 해외로 여행갔을 때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신익희는 자신의 여행 일정을 상세히 밝히고 정부 수립 과정에서 벌인 반탁 운동, 남북협상 반대와 단독 정부 노선의 지향, 그의 반공주의를 피력해 의혹을 불식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4년 11월 6일 이정재는 신설동 경마장에서 김동진을 불러 이기붕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면 신익희, 조병옥 등을 제3세력으로 몰아 제거해야 한다며 그러려면 동일한 시기에 제거 대상자 40여 명을 없애야하는데 하수자는 네가 수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김동진은 즉시 경찰에 고발했으며 경찰은 이 사건을 유야무야 처리했지만 이로 인해 신익희 등 주요 인사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54년 자유당은 이승만의 다음 대선 출마를 위해 개헌을 단행하려 했는데 개헌이 1표 차로 무산되자 그들은 '사사오입' 논리에 의거해 억지로 가결시켰다.(사사오입 개헌) 이에 자유당 내 소장파들이 대거 탈당하여 호헌동지회라는 범야권 연대 조직을 결성했다. 신익희는 이들과 협의해 통합 야당 조직을 세우기로 하고 1955년 민주당을 결성시켰다. 그는 민주당 최고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그 유명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워 이승만과 대결했다. 이 때 민주당 내부에서 조봉암과 연대해야 한다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는데 조봉암과의 연대를 주장하는 세력은 '민주대동파'라고 불렸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은 '자유민주파'로 불렸다. 신창현의 저서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신익희는 반대파들에 의해 조봉암, 서상일의 참여가 막히게 되어 이들을 제외하고 민주당 결당 대회를 가진 것에 대해 매우 허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약간의 풍파가 있다고 해도 조봉암 계열과의 통합을 기필코 성사시켜야 한다고 봤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민주당이 민주 세력의 집결체가 되어야 하며 통일을 위해서 조봉암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조봉암이 공산주의 계열이라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대해 신익희는 공산당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공산당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인물이라야 상대방과 협상하는 대표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본다고 반박했다. 이후 신익희는 1956년 4월 25일 조봉암과 비밀 회동을 가졌는데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를 추대할 의향이 있지만 부통령은 민주당에서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4월 27일 민주당-진보당 양당의 정부통령 후보인 신익희, 장면, 조봉암, 박기출 간 4자회담이 있었으나 장면은 여기에 불참했다. 박태균의 <조봉암 연구>에 따르면 조봉암은 이 날 회담에서 진보당 측이 부통령 후보까지도 사퇴하는 대신 이전에 요구한 사항들을 받아들여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진보당의 기본 정책인 책임 정치의 구현, 수탈없는 경제 체제의 확립, 평화통일 추구 등 3개항을 민주당의 집권 공약에 반영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덧붙여 신당 운동 때 혁신 계열을 배척한 과오를 사과하고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모략하지 말 것, 민주당 승리 후에 자신을 기피하던 조병옥과 김준연을 정부 요직에 등용치 말 것 등의 보장을 요구했다. 이에 신익희는 조봉암과 은밀히 합의했는데 그 내용은 진보당 창당의 기반을 넓히기 위해 진보당은 5월 초까지 지방 유세를 계속하며 그동안 막후 교섭을 통해서 민주당은 진보당 측 조건을 수락하고 진보당은 후보 사퇴를 할 수 있는 당내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것, 5월 초 신익희와 조봉암이 회담을 갖고 공동 성명을 통해 후보 단일화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한 마지막 회담은 5월 6일 전주에서 갖기로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조봉암의 회고록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나의 정치백서>에도 기재되어 있다.
민주 국가에서 제일 우리들이 주의하는 점은 "법이 다스리는 나라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학자들이 민주 국가라 하는 것이 외면(外面)으로 되는 것이라 하면(= 민주 국가라 표방한다는 말은), 이면(裏面)에 있어서는 "법이 다스리는(= 법에 근거하여 다스려지는) 법치 국가라는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옛날 지나간 시대에는 황제의 말 한 마디가 법률이라고 해서,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거두는 때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요새 항용(恒用, 늘) 보는 특명이니, 무슨 명령이니, 훈시 같은 한 사람의 말은 법률을 못 당하는 것입니다. 법률이라야만 반드시 우리들이 하는 일 못 하는 일을 규정한다는 법치의 정신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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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全국민의 뜻대로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이 법률인데, 이 법률이야말로 대통령 되는 사람부터 저 길거리에서 지게를 지고 그 품삯을 버는 친구들에게 이르도록 남녀노유, 부귀빈천 아무 구별없이 법률 앞에서는 다 만인이 평등으로 다 똑같이 지켜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형편으로 이런 말을 하기가 나부터도 가슴이 쓰린 얘기입니다만, 대한민국의 법률의 그물은 커다란 독수리는 물론이려니와 까막까치, 제비까지도 모두 뚫고 나가지만, 불쌍하게도 법률 그물에 걸리는 것은 오직 파리나 모기뿐이라 하는 얘기가 있는 것입니다(우레와 같은 박수)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답게 살려고 하면 도덕과 도의를 높여 가지고 큰 법률, 작은 법률 다 지켜야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 하단 영상에 나오는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한강 백사장 유세 연설내용 일부 발췌. 민주주의와 법치 국가 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끌어올린 연설로 평가받고 있다.
정략적으로 이번 선거는 표의 다과를 막론하고 야당후보가 당선 못될 것은 확실히 보였기 때문에 선거운동은 선거운동대로 적극적으로 강행하고 마지막 투표일 며칠 앞두고 우리 당 후보의 입후보를 취소하고 야당연합적인 투표를 하게 해서 다수 국민의 소원에 응하는 것이 정치적인 의의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해공선생과는 그러한 조치에 대한 합의를 보아두었던 것입니다.
조봉암,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 : 나의 정치백서>, p.177, 1957.

1956년 5월 3일 신익희는 30만이 운집한 한강 백사장 연설을 단행했다.
신익희 백사장 연설문
{{{#!folding [ 펼치기 · 접기 ]여러분! 이 한강 모래사장에 가득히 모여주신 친애하는 서울시민 동포 동지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해방이 되기 전에 약 30년 동안이나 외국에 망명생활을 하던 사람의 하나로 오랜 시간을 두고 본국 안에 살고 있는 부모 형제 자매 동포 동지들이 그리워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짓던 사람입니다.

오늘과 같이 많은 우리 동포 동지들과 이 한자리에서 대하게 되니 내 감격은 무엇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6ㆍ25사변 때 우리 전국 남녀 동지들의 가슴속에 깊이 박힌 원한의 이 한강, 오늘 이렇게 많이 만나 뵙게 된 것도 감탄 회포를 불금(不禁)하는 바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40년 동안이나 두고 우리 전 국민 동포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어야 우리는 살겠다고 하였거니와, 참으로 우리는 오매지간(寤寐之間)에도 염원하고 성축하고 바라고 기다리던 우리 독립 국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민주주의 국가를 우리들이 찾은 지 벌써 8년입니다.

일본제국주의의 파멸에 이은 무조건 항복이라는 것이 있은 지 10년이나 되는 것을 기억하지만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어서 대한민국에 정부가 선 지도 8년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살림살이 살아가는 형편이 어떠한 모양이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리 전국 동포 동지들이 날마다 시간마다 꼬박꼬박 우리들이 몸소 겪고 지내 내려온 터인지라 여러분은 특별히 잘 체험하고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양, 이 꼬락서니, 우리들이 40년 동안 두고 밤이나 낮이나 원하고 바라던 독립, 이 독립 이것이 결코 우리가 사는 꼬락서니, 이와 같으리라는 것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 이 까닭이 무엇입니까? 세상만사가 이유 없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 무슨 까닭? 이 까닭은 다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책임 맡아 나라 일 하는 이들이 일 잘못해서 이 꼬락서니가 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헌정대원(憲政大原)의 원칙일 것입니다.

국토는 양단된 채로 우리들이 사는 형편 어데 가던지 우리가 이 모양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어떻게 해서 이러한 고생에 파묻혀 있나?

여러분! 오직 우리나라 정치가 한 사람의 의사에 의한 일인독재정치가 여론을 다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함부로 비판이나 모든 종류의 체계 없는 생각이나 정책이나 하는 것을 함부로 거듭해서 불법이니 무법이니 위법이니 하는 것이 헌법을 무시하는 것을 비롯해서 큰 법률, 작은 법률 지키지 않는 까닭에 우리들의 도덕은 여지없이 타락되어서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이 없는 이러한 형편으로 한심한 형편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한겨레의 능률은 극도로 저하가 되고, 전국의 우리 군인, 동포, 동지들은 고통의 위협에 허덕이고 있을 뿐더러 빌어도 환멸인, 이런 그늘 밑에서 우리들은 시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하면 우리는 살아나갈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이 위기와 이 곤경에 직면하고 있는 우리 국가 민족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이 나라, 사랑하는 이 민족을 어떻게 해야 보다 낫게 바로 살아가도록 힘을 쓸 수 있을까? 또 우리나라, 우리 민족을 어떻게 해야 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이 어리석은, 그러나 내 정성된 몇 가지의 의견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몇 마디 말을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신익희라는 사람은 민주당에서 앞으로 오는 선거에 대통령의 후보자로 지명받은 사람이니, 이제 몇몇 마디의 말은 만일 자기가 투표를 많이 받아서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 이런 이런 일을 하겠다고 우리 국민들에게 하는 약속이리라 들어주셔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되고 안 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전 국민이 지지하고 찬동해서 많은 표를 던져줌으로 해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는 것이지 자기가 잘났다고 “내가 대통령 되겠다.”, “나를 따르라” 이러한 생각 가지고는 대통령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마 우리 일반 사람들이 아는 도리일 것입니다.

특별한 방법으로 되고 안 되는 것은 나는 알 수 없고, 이러한 처지니까 만일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몇 마디 이야기는 대통령이고 무엇이고 다 집어치우고서라도 우리나라가 이렇게 해야 잘될 것이고, 우리 민족이 이렇게 해야 잘살 수 있으리라 하는, 한 집안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서 걱정하고 의논하고 얘기하는 격으로 여러분이 들어주신다면, 많이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는 말씀입니다.

제일 먼저 중요한 줄거리를 말씀 드리면 사람과 짐승의 구별은 도의 도덕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사람 사는 보람이지, 남부럽지 않게 남의 뒤에 떨어지지 않게 잘살아가자는 것이 우리 전체의 목적이라면, 우선 먼저 사람다운 표준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양심 있고 올바르게 일하고 사람 속이지 아니하고 책임지고 모든 갖가지 일을 틀리지 않게 해가자고 하는 사람들을 오늘날 이 세상에서 행세를 못하게 되는 처지입니다. 양심 떼어서 선반에 올려놓고 얼굴에다 강철 조각을 뒤집어쓰고 사람을 속이고 거짓말하고 도적질 잘하는 자들이 대로 활보하고 행세하고 꺼덕거리고 지내는 세상입니다.

이러하니 만일 이 세상이 그대로 이렇게 지속되어 간다면 아마 사람다운 생활을 하기에는 틀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먼저 사람답게 잘살아가자면 우리는 도의 도덕을 지켜서 사람과 짐승의 구별이 예의염치(禮儀廉恥)를 찾는 데 있다는 옛날 교훈을 받아 새로 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마을을 바꿔먹자 하는 말을 제일 먼저 첫 마디로 드립니다.

둘째로는 우리는 오늘날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옛날과 달라서 민주국가라는 나라입니다. 백성이 제일이요, 백성이 주장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라 백성의 나라, 이 백성의 나라는 옛날 나라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주국가에서 제일 우리들이 주의하는 것은 법을 다스리는 나라다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수많은 학자들이 말하기를 민주국가라 하는 것이 거죽 외면으로 되는 것이라면, 이면에 있어서는 법을 다스리는 법치국가이라는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옛날 지나간 시간에는 황제의 말 한마디가 법률이라고 해서 지키지 않으면 모가지를 자르는 때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한 사람의 말이나, 요새 항용 보는 특명이니, 무슨 명령이니, 특권으로 무슨 명령한다, 유시한다 하는 것이 법률을 못 당하는 것이며, 법률이래야만 반듯이 하는 일, 못하는 일을 규정한다는 법치의 정신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률이야말로 전 국민의 뜻대로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이 법률인데, 이 법률이야말로 대통령 되는 사람부터 저 길거리에서 지게를 지고, 품삯을 지는 친구들에게 이르도록 남녀노소, 부귀빈천 아무 구별 없이 법률 앞에서는 다 만인이 평등으로 다 똑같이 지켜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형편으로 이런 말을 하기가 나부터도 가슴이 쓰린 얘기입니다마는 대한민국의 법률의 그물의 커다란 독수리는 물론이려니와 가마기, 까치, 제비까지도 모다 뚫고 나가지만 불쌍하게도 법률 그물에 걸리는 것은 오직 파리나 모기뿐이라 하는 얘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답게 살려고 하면 도덕과 도의를 높여 가지고 큰 법률, 작은 법률 다 지켜야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 얘기할 것은 우리 동포들이 주야로 염원하고 있는 우리 국토의 통일, 우리 국가 재건에 선결 문제되는 이 남북통일의 문제, 이 통일문제, 우리들이 산 사람을 비유한다면, 한 허리 중간에다 바오라기로 잔뜩 동여매 놓고 밥 한 숟가락을 한 모금, 잘 내려가고 넘어갈 이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형편으로서는 남쪽이 없이 북쪽이 살아가기 어렵고, 북쪽이 없이 또한 남쪽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단일민족으로 정든 삼천리강산을 반쪽으로 나눌 수 없는 것도 또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현재 우리가 사는 경제 형편으로 본다 할지라도 남북이 통일되지 않는 한 제대로 우리의 행복스러운 생활을 해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북을 통일하자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제일 간절한 근본의 과제인 것이고 의무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모두 잘살아가자는 데에 선결문제라는 것을 다 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모든 일을 국내적 형편이나 국제적 형편에 알맞게 현실적으로 되도록 우리가 해가야 될 것은 물론입니다.

우리 전 민족의 본의 아닌 휴전조약이니 하는 것이 성립되어 가지고 몇 해째 계속하고 있지만 필경은 조국을 통일이라는 이 문제야 우리들이 해결한 문제인데는 틀림없지 만은, 이것저것 상관할 것 없이 덮어놓고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이라도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서 당장에 백두산 꼭대기에다 태극기를 휘날리고 두만강, 압록강 물에 우리의 마른 목을 축이자는 이 희망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누가 없으리오마는 되지 않는 헛소리, 책임지지 않는 큰소리 아무리 소리 질러 보았댔자 특별히 뜻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될 수 있는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선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다는 나의 주장입니다.

여러분! 나라의 목적이 어데 있느냐? 정부를 세우는 목적이 어데 있느냐? 우리 국민이 다 잘살아가자는 것이 나라의 독립의 목적이오, 민족의 자유의 목적이고 정부 건립의 또한 목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뭐니 뭐니 다 얘기할 것 없이 우선 먼저 우리 국민이 잘 살아가도록 올바른 민주정치로 백성을 위하는 정치, 백성이 하는 정치, 백성의 정치라는 유명한 이상적인 민주정치 정의로 내리고 이야기하는 이 실상에 있는 이 올바른 민주정치를 우리는 하나하나 실행함으로써 우리 전 국민이 마음으로 연구해서 옳다! 우리 정부야말로 우리를 살게 하는 정부다, 우리는 정부 없이 살아갈 수 없구나, 이 정부야말로 과연 우리 정부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이와 같은 신의와, 이와 같은 대세가 우리 정부에 오도록 우리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북쪽의 공산치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이북동포 동지들 목을 길게 들여서 목구멍이 마르도록 하루바삐 백성을 위하는 우리의 정부, 대한민국, 우리 조국의 따뜻한 품안으로 한 시간 바삐 들어가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자는 터전을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놓으면, 어느 사람 치고 자유 없이 구박받는 정치제도 하에서 살겠냐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정치를 잘해서, 백성들을 잘 살도록 해야만 될 것인데, 오늘날과 같은 정치를 해 가지곤 도저히 우리 국민이 행복하게 살 수 없어요.

우리가 밤낮으로 염원하는 첫째 조건으로써 우리가 잘살 수 있게 하는 올바른 민주정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국민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국정의 혁신이 있는 연후에 비로소 국방력도 강화될 수 있고 모든 국민이 마음 놓고 북진통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형편을 보면, 국민은 생활고에 허덕이어 못살겠다고 하고 있는데, 큰소리로 뭐니 뭐니 하는 것은 하나의 공수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고 공연히 내 대지 말고 한 가지라도 내 손으로 내 힘으로 만들도록 하는 현명하고 슬기로운 방면으로 여러 군사방면으로 최후의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은 평시에 보기 좋은 장비를 훌륭하게 가졌다는 것이 최후의 승리를 얻는 요건이 아닌가요?

하루 반나절 못돼서 최후의 승리를 가져오는 비결은 장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충에 있다는 것입니다. 대포 하나 없어지면 보라는 듯이 보충하고, 탄알이 몇 십만 발 몇 백만 발 없어지면 보라는 듯이 보충해 놓고, 비행기가 오그라지면 비행기다 화염방사기가 없어지면 또한 화염방사기다, 이렇게 보란 듯이 보충 보급이 돼야 최후의 승리를 가져온다. 이 준비야말로 싸움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면 다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군사, 어느 한 가지 우리나라에서 총 몇 자로나 만든다고 그럽디까, 우리나라에서 탄알을 몇 개나 만든다고 그럽디까? 그런고로 우리나라 우리의 힘으로 모든 우리가 다 마련해 놓고 얘기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긴요하고 근본인 우리의 조국통일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정치적으로 기본을 삼고 군사역량을 조금 가미해 가지고 평화로운 방법이 7, 8할이라 하면 이외의 다른 방법을 한 2, 3할쯤 가미를 해가지고 우리는 통일하는 것이 근본 결론의 길이고 또한 우리 국내, 국제적으로 제약 돼 있는 우리 형편에 반듯이 현실적으로 우리가 노력할 일이라 하는 것을 나는 말씀 드립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 오늘날 우리 민주국가의 형편은 지나간 세대와는 달라요. 대통령이 대단히 능력 있고 자격 있고 고귀한 듯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지만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을 무어라 그러는지 여러분들은 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인이라고 불러요. 프레지던트라고 불러요. 프레지던트라는 말은 심부름꾼이 되는 하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하인인데 대통령 이외의 사람들 부장, 차장, 국장이니, 과장이니, 지사니, 무슨 경찰국장이니, 군수니, 경찰서장이니, 또 무엇이니 하는 사람들이 거 뭐일까요? 하인 중에도 자질구레한 새끼 파리들이다 이 말이에요. 그러므로 하인이란 말은 심부름꾼이란 말을 비유로 얘기 해 보면, 농사짓는 집의 머슴꾼 같은 것이고 장사하는 댁의 하인꾼 같은 것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요. 그러므로 일 잘못하면 주인 되는 우리 국민들이 반듯이 이야기하고, 반듯이 나무라고, 반듯이 갈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입니다. 주인 되는 사람이 심부름하는 사람 청해 놓았다가 잘못하면 “여보게 이 사람 자네 일 잘못하니 가소” 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요새 무슨 표어를 보면 모시고, 받들고, 뭐고 뭐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은 다 봉건 잔재의 소리입니다. 모시기는 무슨 할아버지를 모십니까? 받들기는 뭐 상전을 받듭니까? 이러므로 만일 주인 되는 국민들이 언제나 “당신 일 잘못했으니 그만 가소” 그러면 두 마디가 없는 것입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나는 일 잘못했으니 나는 물러가겠습니다.”하고 가야 합니다.

요새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가거라.”하면 “가? 어딜 가! 날더러 가라고! 당치 못한 소리” 거 좀 실례에 가까운 말이지만, 농사짓는데 무슨 논을 갈던지 할 때 논 속에 많은 거머리가 정강이에 딱 달라붙으면 암만 때려고 해도 자꾸 파고 들어갑니다.

거머리 달라붙듯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말이 통속적으로 얘기 했습니다마는 우리 민주당에서 정치적인 원칙으로 내각책임제의 책임제도로 정치를 하자는 것이 이 진리를 우리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국민의 대표격인 국회에서 “당신 일 잘못하니 정치 그만둬” 그러면 당연히 책임지고 물러가야 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거야 요새 국회의 형편 모양으로 한 당의 사람들이 굉장히 수요를 모아 가지고 된 일도 손을 들고 안 된 일에도 손을 들고 그래 가지고 전체의 올바른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두통을 앓도록 하는 형편입니다. 이러한 것조차 우리는 주의를 해야 된단 말씀입니다.

쓸데없이 공연히 정부에서 괜찮게 일하는데도 “가거라. 말아라.”하는 때에는 그것도 좀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말썽 많으면 가는 게 원칙이지만 쓸데없이 공연한 험담이나 하고 가라고 하는 때에는 과연 이게 전 국민의 의사가 이런 게 아닌가 그걸 또 알아보는 방식으로 해 가지고 정부에서는 국회를 한번은 해산시키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내각책임제가 가지는 근본 뜻일 것입니다. 이것이 내각책임제의 알기 쉬운 이런 얘기를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은 우리 일반 행정 방면으로 어떻게 해야 우리들은 보다 낫게 살아 보겠는가? 제일 먼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나라 살림을 해 가는 데 제일 긴요하고 시급한 문제 즉 일반 공무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나라 일을 해 나가는 데는 수많은 일꾼이 필요해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나, 문관이나, 무관이나, 경찰이나, 군인들이나, 전부 몰아서 국가의 공무원이란 명칭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자, 이분들이 오늘날 우리 일하고 있는 형편이 어떠합니까?

애는 많이 쓰고 갖은 고생 다 겪어 내려오는 우리 일반 공무원 동지들, 나는 늘 평소에 얘기하기를 말이나 노새에게 짐을 지워서 백 리나 팔십 리 길을 가라고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말이나 노새에게 먼저 먹이를 먹이라는 것입니다. 먹이를 배불리 먹이지 아니하고는 팔십 리 백 리를 그대로 가라하고 채찍질한다고 하면 그 말이나 노새가 그대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나라 공무원의 형편은 어떠합니까?

한 사람이 이십 일이나 아니 반달이나 제대로 살아가기 어려울 만한 월급 푼어치를 주면서 어느 누군가 부모처자 없는 이가 있어요. 적어도 사오식구를 부양해서 살아가는 이러한 형편이나 우리가 늘 말 듣건대 우리 공무원들이 일 잘못해간다고 행정에 효율이 올라서지 않는다고 더 심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일본 사람들이 있을 때에는 세 시간 동안 일하면 해내던 일을 군정 때가 되니까 사흘 동안을 가지고도 다 못해내더니 대한민국이 생긴 뒤에는 석 달이 되어도 짓뭉개고 해놓지 못하더란 말입니다. 무슨 까닭일까요. 도장 하나 찍어서 결재해주는 일이라는데, 한 달 두 달 석 달 넉 달 끈단 말이에요, 또 어떤 이가 얘기하는 것을 들으니 무슨 대통령 비서실로 끌고 갔다 끌고 내려왔다 올라갔다 칠십일 동안 돌아다녀도 도무지 도장이 안 찍혔다는 그런 말을 최근에 들었습니다.

왜 이러느냐 말입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또 무슨 사바사바가 있어야 된다고 교제가 있어야 된다고요. 왜 이러는 것일까요. 왜 이러는 거냐 말입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공무원의 생활을 최저한도로 보장을 아니해주고 공무원의 신분을 확보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일 잘 해 가거라. 하며 그대로 밀고 끌고 가는 것은 곧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은 도적질해서 먹고 살라 하는 말과 똑같은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실정에는 우선 맞도록 최저한도의 조밥이나 보리밥이라도 배가 고프지 않도록 주고 무명이나 외양목 끝이라도 집안 식구의 등어리를 덮어 줄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공무원이 비단으로 감고 싶다든지 산해진미의 좋은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여서 그러기 위해서 수뢰를 받거나 요새 흔히 하는 말로 사바사바를 하거나 이렇게 되거든 아무 사양할 것 없이 그야말로 모가지를 잘라 버리라는 말입니다. 이러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나라살림을 꾸려가려 며는 일반 공무원동지들에게 신분을 보장하고 최저한도의 생활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는 말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또 한마디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민주국가를 꾸려가려고 할 때는 백성이 주인이라는 세상이 있도록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극히 적은 말 같습니다마는 우리나라의 신문이나 영화에 돌아다니는 것을 본다면 봉건시대의 계급적 용어가 얼마든지 아주 상투적으로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고 그대로 줄줄 써 내려온단 말입니다.

각하가 왜 그렇게 많은지. 각하, 각하는 민주국가의 알 수 없는 취미예요. 원칙으로 먼 각하는 다리 아래가 각합니다. 다리 아래. 또 말하자면 유시라는 게 있습니다. 신문에 보면 대통령의 유시라고 있습니다. 유시가 뭡니까? 유시가요.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한문 글자에 유시라는 글자는 그전에 황제가 쓰던 자예요. 요새 대통령이 말하면 지시라던지 훈시한다던지 하면 다란 말입니다. 유시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거기다 더군다나 대통령이 분부를 한다든지… 분부가 뭐입니까? 분부가.

무슨 얘기를 한다든지 그러면 모르려니와 상전이 종들에게 분부하는 게고 더구나 가정에서 높은 어른이 얕은 비속에게 분부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래 하(下)짜 줄 사(賜)짜 그전에 황제, 임금이 신하들에게 주는 것을 하사라 그랬습니다. 하사는 뭐냐 말입니다. 그런 것이 썩 집어치워야 해요.

내가 이 간단한 몇 마디를 얘기한다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관권이 너무 남용된다는 얘기입니다. 아까 말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심부름꾼이고 하인이라면 관권의 남용된 유시가 뭐란 말입니까?

오늘날 어떻게 되고 있어요? 특별히 경찰권의 남용, 특무대니, 경찰이니, 무시무시합니다. 관리 공무원들은 다 하인들이란 말이야요. 하인이 주인의 따귀를 붙이고 발길질을 하고 대들어 보아야 그놈의 집안은 거꾸로 돼서 다 망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하면은 관권의 남용을 애초 썩 집어치우란 말입니다. 이것은 일반 행정면에서 얘기를 하고 다만 아무리 무어라 말하더라도 현재 우리생활에 있어서 재정경제와 상공방면에 상관된 얘기를 한마디 아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 민주국가나 무슨 국가를 막론하고 더군다나 백성이 주인이 된다는 나라에 있어서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결심하고 각오해 가지고 우리나라를 꾸려가는 재정, 우리의 세금으로 다 마련하는 우리 의무를 진 것입니다.

세금, 세금의 의무는 우리들의 거룩한 힘으로 우리들이 다 지고 있어요. 그렇지만은 오늘날 이 세금제도의 소위 인정과세라고 하는 것은 당신은 이만큼 벌 것이라고 이만큼 내라는 경우라니, 이런 제도 이게 무슨 제도입니까. 우리나라 이외 다른데서 별로 보지 못하는 제도입니다. 세금이라는 것은 얼마를 벌면 얼마를 내라는 그 비율이 결정 됐단 말입니다. 그런 제도이기에 모든 가지 폐단이 여실히 있어 가지고 제게 달갑게 하면 많이 벌어도 세금을 적게 내라고 하는 것이고 제가 밉게 보는 처지라면 아무리 돈을 벌지 못하는 형편이라도 세금을 많이 무겁게 부과시켜 가지고 못살게 하는 이거야말로 무엇이겠습니까?

국가의 세입이 마련 없이 줄게 되고 전 국민이 이 세금 난리에 눈, 코를 뜨지 못해 못살게 되는 지경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정과세의 제도라는 것은 하루바삐 폐지해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모든 가지 잡부금, 농촌에도 도시에도 기가 막히는 잡부금, 될 수 있는 한 경감해 가지고 우리 전 국민에게 고통이 적도록 마련해야 되겠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더군다나 우리 도시에서 서울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전 시민 동포동지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문제이겠지만 은행에서 빚 쓰는 문제, 옛날에 은행이 없을 때는 말할 것 없지 만은 국가에서 은행을 가지고 있는 의무가 우리 돈 버는 사람들이 집에다 그대로 돈을 두기에 편치 않으니 은행에 갔다 두고 이자를 붙여서 돈을 맡기는 것도 그 목적이겠지만, 그 것보다 더 주요한 문제는 생산업의 밑천으로 은행에서 빚을 내서 자기가 저당을 하거나 신용대부를 해서 크거나 적거나 사업에 종사를 해서 은행에도 이가 되고 장사하는 이들 공업하는 이들 공장하는 이들도 많은 이익을 받게 되어서 이것이 개인의 살림살이도 늘러 갈 뿐더러 국민의 경제가 발전이 되고 전 국가 경제가 번영하는 까닭에 이것은 전 국민의 기가 막히는 긴요한 관계를 가진 은행문제인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 은행의 융자, 은행의 빚 쓰는 관계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계획적입니다.

자기에 가까운 사람만이 은행에 가서 돈을 얻어 쓸 수 있고 자기네가 밉게 보고 자기네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얻어 쓸 수 없게 하는 형편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정부 방면에서 특권으로 은행융자를 이렇게 저렇게 좌지우지하게 되는 형편이라면, 우리의 국민경제의 우리의 산업발전, 우리의 재정경제가 정상적으로 발전되리라는 우리가 기약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오늘과 같이 은행의 문을 닫고 좁다 하게 뒷문으로 옆문으로 드나들게 되는 이와 같은 기현상은 하루바삐 고쳐서 은행의 대문을 활짝 전 국민 앞에 열어 놓아야 될 것이다 하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여 적어도 도시의 소규모의 생산업자에 큰 이익을 주어 앞으로 유지하고 발전이 터전이 되게 하는 것이 그분들을 위하는 유일한 길이라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우리가 다 같이 생각해야 할 것은 농촌문제의 일로서 우리나라는 농업국가로서 전 인구의 7할 이상 8할이 농민입니다. 농민들이 잘 살아서 농촌이 번영해야 우리나라는 잘된다는 이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러하니 우리 농촌에 제일 먼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은 토지소득세라는 것, 이것도 6ㆍ25사변 직후로 군대 양식이라든지 모든 가지로 해서 단 1년 2년 동안에 임시로 현물로서 토지소득세를 받겠다는 것이 정부방침의 토론 설명하는 얘기로서 국회의 통과를 받던 것이지만 오늘날까지 꼬박꼬박 토지소득세 현물로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여러분! 이것 돈으로 금전으로 받아야 된다는 것을 국회에서 몇 번을 통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오늘날까지 그대로 현물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토지소득세를 폐지해야 되고 이것을 계속해서 나간다고 하면 우리 농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잡부금. 농촌의 잡부금 많은 데는 백 삼 십 여 가지, 적은 데라야 오십여 가지, 이 잡부금. 이건 과연 우리 농민의 기름과 우리 농민의 땀을 그대로 긁어서, 더 못살게 하는 것이니 우리는 하루바삐 안 받도록 마련해야 되겠다는 주장입니다.

여러분! 뿐만 아니라 비료를 싸게 때에 맞게 우리 농민들에게 배급을 해줘야 될 것은 물론이고 정부에서 양곡을 사들인다고 하는데도 강제로 매상하는 제도를 치워버리고 적어도 쌀 한 섬에 농민이 얼마만큼 밑천을 들였다는, 그 밑천을 정부에서 주고 그대로 사들이는 공정한 이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주장입니다.

다음에 군사문제입니다. 이 문제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데 조국을 방위하고 우리 전 민족을 수호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공산침략을 방지하는 유일한 우리의 힘은 군사역량일 것입니다. 원래 국민의 의무로서 큰일의 의무 세 가지 중의 하나로서 병역에 복무하는 의무가 누구나 우리가 다 각오하고 있는 것이지만 여러분 오늘날 우리나라에 병역이 공정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관대작의 아들 손자, 부자장자의 아들 손자, 특권계층의 아들 손자들이 얼마나 병정으로 전방에 가서 지내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십니까? 징용이다, 징병이다, 하는 이 두 가지 어느 것을 물론하고 어떤 계층이나 종류나 물론하고 다 똑같이 공정하게 우리는 이 징용 징병에 복역해야 되겠다는 이 의무를 우리는 공정하게 져야 되겠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하므로 우리들은 병역에 가게 되는 것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즐겁게 우리나라를 위하고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가 당연히 질 우리의 의무일 뿐더러 누구나 다 같이 하는 의무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사기는 앙양되어 가지고 우리의 전쟁은 최후의 승리로 반드시 우리가 갖게 된다는 신념이 또한 이러한 것에 있는 것으로 여기에 붙여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현대의 우리 전쟁은 수효가 많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핵 신무기나 원자탄이나 수소탄이라는 과학무기가 있을 까닭에 극히 적은 수효의 군사를 가지고서도 최후의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물며 옛날로부터 병부재다(兵不在多)요, 병(兵)이라는 것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재어정(在於精)이다. 정(精)한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앞으로 군대에 관한 정병주의로 지금 있는 군대의 수를 훨씬 줄여서 거의 반가량을 간발해 가지고서 우리나라의 병역을 공정히 하고 우리 군대의 군기를 천명하게 잘해 가지고 보면 최후의 승리는 반드시 우리에게 온다는 신념을 우리는 다 같이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나는 특별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 교육문화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도 시간이 너무 걸려서 미안합니다마는 우리나라에서는 의무교육이라, 해놓고 실제로 우리가 의무교육을 하고 있습니까? 사친회비니, 소위 학교의 잡부금이니, 다른 중고등학교하든지 대학교 학생들을 차지해 놓고서도 초등학교 학생아이들까지도 이 부담에 학부형 되는 이들이 기가 막혀 머리가 빠진다는 것은 도리어 허식된 비유의 얘기고 그 아주 못살 지경이란 말이에요! 자 그러하니, 어떻게 됐고 좀 깨끗하게 해봤으면 하는 주장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대학교 관계에 있어서도 학원의 모리배처럼 법규에 맞지 않는 대학이라는 것을 합리화하고 적법하게 정비해야 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징집문제, 이것은 소집이거나 징집이거나 다 응용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국가의 생명은 무한한 것입니다. 언제나 신진대사에 모든 방법을 아무리 국보가 가난하고 위험한 경우에 있다 하더라도 위정 하는 사람들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위기로 후방에서 당장 전국에 미만한 화약내 나는 전시판이라 하더라도 후방에서 교육받고 있는 학생들은 적어도 보류되어야 된다는 거의 원칙인데 요새는 징집에 관한 보류문제가 대단히 시끄러워진 모양입니다. 나는 후방의 국가의 동량의 재목으로 부흥재건에 간부 양성하는 본의로 고등학교이상 대학교 학생동지들의 징집문제를 반드시 보류하는 것을 고려해야 되겠다는 주장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회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간과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더군다나 우리 서울 같은 도시들이예요. 기술자, 한 사람의 기술자면 하루 이틀에 양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술자의 대접이 우리 대한민국처럼 초라한 나라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기술자는 정부에서 보장해서 취직문제나 모든 가지가 기술자 이외의 다른 사람보다는 특별히 잘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을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전체의 실업자의 구제문제니 취직문제니 하는 것도 사회문제의 큰 문제이겠지만 기술자를 우선적으로 실업의 구제문제를 우리는 유의해야 되겠다는 것을 먼저 말씀 드리면서 이 가운데에 포함되고 있는 문제이겠지만 수많은 상이용사 더군다나 전란에 전몰한 우리 군경장병들의 유가족의 구호문제 거기에 부수해서 성질은 다르다 보겠지만 형편에 있어 같은 것이 6ㆍ25사변 때 무참하게도 이북에 납치되어간 가족들의 구호문제, 이런 등등의 문제가 아무쪼록 합리적이고 적절하게 대대로 우리 정부, 우리 국가, 우리 전 국민의 동정 거룩한 동족의 사랑으로 바라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불쌍한 수많은 우리 동포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부드러운 손이 닿도록 우리는 노력해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으로 동족의 의리로 반드시 이렇게 아니하면 안 되겠다는 말입니다. 극히 적은 문제이겠지만 하도 말썽이 많은 문젠데 도시의 미관도 우리 서울, 대 서울 이런 도시에 그렇게 무시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산 사람의 사회의 일인 만큼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대 서울 도시의 미관이라는 것보다는 수많은 전재민 동포의 집 없는 고충을 좀 알아줘야 되지 않겠어요.

누구인들 좋은 집에서 살고 싶지, 판잣집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주택문제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구라파에서도 있는 문제로써, 이들이 문제한 나라라고 해서 도시 미관상이니 위생상이니 하고 오늘날 우리나라와 같이 몇 만 호를 갑자기 헐어버리는 때는 없습니다.

이 문제만 하더라도 정부에서 외자물자를 많이 받아들여 공동주택을 하루바삐 지어서 그들에게 싼값으로 주는 것이 옳은 방법인데도 불구하고, 산 설고 물 다른 타향살이에 갑자기 판자 집을 헐라고 하니 그들이 갈 곳이 어디냐 말입니다.

이것이 모두 주책없는 정책이란 말입니다. 아니 심하게 말하면 판자 집을 헐라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은 양옥집에서 사니까 남이야 집 없이 헤매든 말든 아랑곳없다는 듯이 도시의 미관이니 위생상 나쁘다는 구실을 붙여 가지고 전재민들을 못살게 하는 것 밖에 안 된단 말입니다. 이것 안 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앞으로 우리의 정부는 반드시 거국일치의 내각으로 전국의 인재를 망라해 가지고 인재 본위로 옛날에 한말과 마찬가지로 야무유현격으로 적재적소로 무슨 당파에 속한 사람이거나, 민주당에 당적을 가진 사람이나, 자유당에 당적을 가진 사람이나, 그 이외에 또 무슨 당의 당적을 가졌다는 사람들이거나, 나하고 친한 사람이니 그렇게 친하지 않는 사람이나, 내가 평소에 그렇게 예쁘다고 곱다고 생각을 한 사람이나, 아주 마땅하다 가깝다 생각한 사람이거나 다만 자격이 있어 다만 이만한 인재라면 한국에 다 들러붙어서 우리나라를 어떻게 잘 해갈 수 있고, 우리의 이 국민을 어떻게 잘 살려 갈 수 있으며, 우리의 조국을 어떻게 해야 하루바삐 통일되며, 우리 전 국민이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루 바삐 안정시킬 수가 있느냐 하는 이 일을 함께 해나가자는 말입니다.

이러함으로 나는 정당의 관계로 나를 괴롭혔다, 나를 무시했다, 나를 모욕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선거라는 것은 대통령 선거라고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국회의원 선거보다 참 욕설이 큽디다.

국회의원 선거 때 각 지방을 돌아다녀보면 서로 입후보했다는 사람들이 자꾸 같이 욕을 해서 나는 그때에 그분들에게 얘기하기를 “당신들은 선거 운동하는 요령을 모르니 내 얘기 할 테니 들어보라”하고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입후보한 사람이 여럿이거든 당신은 그 입후보한 사람을 자꾸 칭찬해 주라. 마음껏 칭찬해 놓고 맨 나중에 아무리 그분들이 잘났고 좋다고 하드라도 나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조금 못하다는 얘기로 결론 내라” 나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아나 모르나 모르되 선거운동의 요령은 그래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새 듣고 보니 대통령 선거라 그런지 도무지 욕설이 너무 많고 듣기 어려운 욕이 많습니다. 그렇지만은 욕하는 사람이 죄지, 욕먹는 사람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리 욕하던 사람이라도 내가 대신 욕하고 싶지 않고 또 만일 내가 앞으로 전 국민 동지들에게 찬성을 받아서 지원을 받아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고 하더라도 나를 욕한 사람들을 원망스럽다, 괘씸하다, 보고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하겠다.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끝으로 만일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서울 근처의 속담 한마디 마찬가지로 내가 만일 광주(光州) 유수(留守)를 하면은 남한산성에서 줄 불을 놓겠다. 그런 얘기와 마찬가지로 내가 만일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하면 우리 전 국민의 주인 되는 우리 전 국민 동포 동지들의 심부름꾼으로 충실하게 일할 작정입니다. 그 말입니다.

결코 내가 잘났다, 내가 이렇거니 우리 국민들은 따라와라, 이런 죄스러운 생각과 죄스러운 말은 아니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전 국민 동포 동지들과 같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웃음이나, 울음이나, 먹으나, 굶거나, 똑같이 여러분과 지내보리라는 약속입니다.

높직한데 들어앉아서 국민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국민이 우는지 웃는지 도무지 모르고 너는 너, 나는 나의 격으로 그대로 살아가지는 아니할 뿐더러 언제나 여러분을 자주 자주 찾아서 어떻게들 지내시며,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일이 있소 하는 얘기를 묻기도 하려니와 동시에 여러분은 부단히 나를 찾아서 우리 주인 되는 국민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당신은 이렇게 일해주소 하는 부탁으로 여러분이 자주 찾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이러한 형편으로 나는 언제나 대통령이 있다는 집이라면 언제든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여러분을 기다리겠습니다.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좌석도 불편한 모래사장에 수많은 여러분이 차례 없이 지껄이고 있는 이 사람의 말을 재미있는 것처럼 잘 들어주시니 특별히 고맙습니다.

내 말은 여기서 끝내기로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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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망

연설 후 조금만 더 유세를 하면 이승만을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가 민주당 내에 조성되었다. 당시 신익희의 건강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었으나 신익희도 이러한 상황에 고무되어 측근의 만류에도 유세 일정을 줄이지 않았다. 1956년 5월 5일 선거를 10일 남기고 전주로 가기 위해 전라선 열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호남선 구간인 함열역 부근에서 뇌일혈로 졸도했고 이리역에 급히 내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열차 안에서 이미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죽기 이틀 전인 1956년 5월 3일 한강 백사장 연설에서 너무 흥분해서 효자동 자택에서도 흥분이 가시지를 않아 위험했다고 한다. 넥타이를 매다 졸도한 뒤 깨어나 홍차를 마시고 종손이자 비서인 신창현에게 뒤지(휴지)를 달라고 말한 것이 그의 마지막 한마디가 되었다. 이승만의 독살설도 있지만 정황을 보면 음모론으로 봐야할 듯 하다.
해공 국민장 (1956)

진보당은 신익희 사망 후 박기출을 부통령 후보에서 사퇴시키고 민주당의 장면에게 민주당과 진보당이 합동하여 선거를 치를 것을 제안했으나, 민주당은 이를 거부하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남은 두 사람의 대통령후보는 그 행장이나 노선으로 보아,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 우리는 부득이 정권교체를 단념하고 부통령선거에만 전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그러면서 지지자들에게 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던져달라고 호소해 조봉암에 대한 반대 입장을 명백히 표명했다.[6] 이로 인해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185만에 달하는 무효표가 발생했는데 총 투표수의 20.5%로 대부분 신익희의 추모표였다. 미국 대사관은 본국 정부에 발송한 보고서에서 제3대 대통령 선거를 분석하면서 조봉암 득표의 대부분이 신익희에게 갈 표였다고 평가했다. 만약 단일화를 했다면 조봉암의 210만 표에 신익희 추모표까지 합쳐져서 부정선거의 의혹에도 불구하고 500만 표를 받은 이승만을 위협했을 것이다. 이후 신익희의 지역구인 경기도 광주군 보궐선거에서는 아들 신하균이 당선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 삼국지연의를 못 읽는 청나라 사람에게 대신 삼국지를 읽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 고려대학교의 전신[3] 그가 동료들과 함께 화북으로 가지 않고 충칭으로 간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한시준 교수의 저서 <독립운동 정당과 해공 신익희>에 따르면 신익희는 화북 진출에 반대하던 사위 김재호가 전위동맹원들에게 감금되어 린치를 당했기 때문에 그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신익희의 딸인 신정환의 회고 '해공 그리고 아버지'에 따르면 신익희는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위동맹원들이 연안행을 결정해버린 것과 사위 김재호가 연안행을 반대했다가 집단 폭행을 당한 것에 배신감과 분노를 품고 전위동맹과 결별했다고 한다.[4] 원래 선거에서는 서울지역에 할당된 3석 모두 한국민주당이 가져갔고 특히 김성수가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로 무효가 되어 재선거가 실시된 것이었다.[5] 사실 5~8대 총선 때는 못해도 3선 이상, 11대 총선 이후론 못해도 5선 이상이 국회의장의 필수 조건이 되었는데 다선 의원 자체가 없을 수밖에 없던 이 시절엔 초선만 해도 국회의장이 될 수 있었기에 명성만 있다면 30~40대 국회의장도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6] 그러니까 민주당은 조봉암을 당선시키느니 차라리 이승만이 한번 더 하는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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