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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22:59:42

대한민국의 장로회 교단 분열사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장로회/교단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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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비판4. 역사
4.1. 선교 초기로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설립4.2. 1차 분열: 고려파(예장고신)
4.2.1. 예장계신4.2.2.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4.2.3. 예장재건, 대한예수교장로회(순장), 예장독노회(합동복구)
4.3. 2차 분열: 예장 & 기장4.4. 3차 분열: 예장합동 & 예장통합
4.4.1. 예장보수
4.4.1.1. 예장성합 재확립과 예장총회 개칭4.4.1.2. 예장성합측4.4.1.3. 예장보수 독립4.4.1.4. 예장합동총신측
4.4.2. 1962년: 예장호헌 독립
4.5. 예장고신의 분열4.6. 4차 분열: 예장합동 분열
4.6.1. 1979년 사태: 예장합동(교권파)와 예장합동보수(비교권파)4.6.2. 1981년: 예장합신의 독립4.6.3. 예장합동 비교권파의 이합집산
4.7. 기타 장로교단들의 연원
4.7.1. 예장대신과 예장백석4.7.2. 타 교파에서 장로회로 전향한 교단4.7.3. 기타 군소교단
5. 분열이 아닌 개별적 분리로 형성된 연합단체 및 교단6. 정리: 주요 교단 목록7. 참고 자료8.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개신교의 분파 중 하나인, 장로회의 교단 분열사를 기록한 문서.

한국의 장로회는 여타 개신교 교파에 비해 유독 극심한 수준의 파편화가 진행되었다. 감리회[1], 침례회, 성결교회, 그리스도의 교회[2] 등은 신학 노선 차이로 인해 발생한 2~3개의 교단이 있고 성공회, 구세군, 루터회는 단일 교단을 유지하고 있는 것에 비해 장로회는 관계기관에 등록된 교단만 2018년 기준으로 최하 286여 개에 달한다.#

외국의 장로교를 보더라도 역사가 4백 년이 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4개 교단으로만 분열되었고, 아시아에서 한국 다음으로 큰 대만 장로교회는 단일교단이다. 100년 남짓한 역사의 한국의 장로교회가 1952년 이래 불과 66년만에 286여 개의 교단으로 분열한 것을 개혁주의에 의한 장로교만의 특징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미국 장로교와 네덜란드 개혁교회, 독일 개혁교회, 남아공 개혁교회도 신학 노선의 차이로 한국 장로교처럼 분열의 역사를 계속 겪고 있는 걸 보면 결국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듯.

혹자는 한국의 장로교도 고신, 기장, 예장통합, 예장합동의 4개 정도의 교단으로 유지되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추측하나 후술할 대신과 백석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섣부른 통합은 결국 더 큰 분열만 초래할 뿐이다. 장로회 신학의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다양하며 신학 노선의 차이를 해결할 수 없기에 국교회를 세워서 강제로 교단을 합치고 반항하는 목회자를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종교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결국 교단의 강제 통합은 어림없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신과 백석의 경우는 합동과 통합 정도로 신학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합을 강행한 것이라서 비판이 많았다는 것도 감안해야한다. 의외로 신학적 차이가 없는 교단의 자발적인 통합은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2. 원인

한국은 교단 설립이 너무나도 쉬워서 마음 맞는 사람 여러명만 모여서 창립 총회를 한 뒤 교단 헌법을 작성하고 세무소에 가서 등기 신청 해서 고유번호증을 발급 받으면 그게 끝일 정도로 너무 쉽기 때문에 교단 설립을 어느정도 제약할 필요가 있다.

초기 세 차례의 분열은 사회적으로든(신사 참배)[3] 신학적으로든(성서비평, WCC)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분열한 것이지만, 1979년 이후의 분열사는 박윤선 목사의 예장합신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권 다툼의 성격이 강하므로 교계 안팎에서 큰 비판을 받는다.

본래 손으로 꼽을 수 있었던 국내 장로회 교파 수가 200개에 육박하게 된 것도 1979년 이후 교파의 분열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예장고신, 기장, 예장통합, 예장합동의 형성까지는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 합동 교단 내의 분열에 대해서는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신앙생활을 꽤 오래한 장로교인들도 주요한 너댓 개의 교단 외에는 잘 모르는 경우가 흔하다. 이 문서의 주 출처가 된 한국장로교 교단 분열의 계보: 장로교 중소교단을 중심으로(기독교사상 2015년 9월호)의 저자마저도 그 교단들에 대해 '온전히 파악하기가 어렵'다고 표현하였다.

사실 한국, 미국 장로회,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이렇게 갈라진 가장 큰 이유는 목사에게 큰 자율권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 장로회는 목사가 교회를 혼자서 개척한 경우가 대단히 많아서 각 교회마다 설립자인 원로목사의 권한이 막강한 편이다. 하지만 감리회, 구세군, 루터회, 성공회는 교단이 교회를 세우고 목사를 임명하기에 교회가 교단의 재산이기 때문에 목사가 교단에서 이탈하면 소속 교회에서 내쫓기는 강력한 패널티가 있다. 단일교단인 해외의 장로회도 이런 경우가 대다수다. 다른 교파라고 파벌이 없는 게 아니라 강력한 패널티가 있기에 나가고 싶어도 참고 잔류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교파에서 갈라져나와 탄생한 중소교단은 재산이 없어서 소멸하거나 교세가 매우 지리멸렬하다. 역설적이게도 한국 장로회의 분열과 자율성이 목사에게 큰 자율권과 자신의 신학 성향대로 교단을 고를 수 있는 이점을 주었기 때문에 한국 장로회에서 목사가 되려는 신학생이 더욱 많아졌고 이는 장로회의 교세가 커진 요인이 되었다.

3. 비판

이러한 교단의 분열상은 개신교 전체 뿐만 아니라, 한국 장로교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상당히 높다. 자유로운 신학을 추구한다기에는 용인하기 심각한 수준의 분열상인 동시에, 결국 교단의 주요 직책(총회장, 노회장 등)을 목사들 끼리 나눠먹기 위한 목적의 행동이 아니냐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새롭게 들어온 신자들 역시, 한국 장로회 분파가 수백 개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는 경우 경악하는 반응이 대부분이기 때문. 10개 정도라면 몰라도, 200개가 넘는 분파는 어떻게 보아도 상식적인 수준이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분파가 되는 과정에서 상황적, 교리적, 학문적 차이가 있었다해도 가장 큰 문제는 외부에서 봤을 경우 개신교의 분파가 그저 교회 내 정치 싸움으로만 비춰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식의 과도한 분파는 개신교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드는데 매우 큰 원인 중 하나에 속하며, 비개신교인이 보기에는 목사 간 세속적인 알력싸움으로 비춰지는 경우가 절대적이다.

또한 이러한 장로교 교단의 난립은 사이비 종교들이 창궐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 일조하는 부분이 있다. 개신교 계열 이단-사이비 종파들은 대개 위장 교회를 세워서 성도들 혹은 새신자들을 유혹하는 경우가 많은데(대표적으로 신천지), 이러한 위장 교회들은 대개 대한예수교장로회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200개가 넘는 교단들이 난립해있기 때문에, 위장 교회들의 교파를 일일이 찾아보기도 힘들며, 대한민국 내에서 가장 많은 신도 수를 가진 교파가 예장 통합과 합동 교단이므로, 위장 교회가 장로회 타이틀을 가짜로 달고 있을 경우, 대개 거부감 없이 새신자들이 유입되기 때문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장로교 교단이 10개 이내의 대형 교단 정도로만 나누어져 있었다면, 장로회 타이틀을 달고 있는 위장 사이비 교회를 발각해내기 훨씬 수월할 것이나, 200개가 넘는 교단들 때문에 일일이 대조해서 그러한 교회를 찾아내는 건 사실 상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이다.

4. 역사

4.1. 선교 초기로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설립

1882년, 만주에서 선교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존 로스 목사가 누가복음요한복음을 조선어로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그 후 1885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로 미국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등 여러 소속의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국권 피탈 전인 1909년 이들 교단의 선교사들은 한반도의 구획을 나누어 선교를 분담하였다.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길선주 목사 등이 참여한 사경회)이 일어났다. 같은 해 한국 최초의 노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독노회)[4]가 창설되었으며,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첫 번째 총회를 개최한다.

1930년대 일제는 기독교단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개신교인들은 저항했으나 많은 목사들이 투옥되고 평양신학교가 휴교당했으며, 결국 일제 패망까지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신사참배에 가담하였다.[5] 1940년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서울에 조선신학교가 생겼다. 그리고 해방 후 1947년 다시금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복원되었다.

4.2. 1차 분열: 고려파(예장고신)

해방 이후,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투옥되었던 목회자들이 출소, 목회직으로 복귀하는 한편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를 열었다. 이들이 친일 청산 및 회개를 촉구하자 김길창을 중심으로 신사참배에 가담한 다수의 목회자들은 이를 껄끄럽게 여겼다. 저항파 목회자들과 신사참배에 가담한 교권파 목회자들 간의 오랜 대립 끝에 결국 교권파는 1951년 총회에서 일방적으로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 저항파 목회자들을 일제히 축출해버렸다.[6] 원래 독립할 생각이 없었던 출옥 목사들은 졸지에 총회에서 쫓겨나게 되자 1952년 고려신학교(현재의 고신대학교)를 중심으로 별도의 고려파(현재의 예장고신) 총회를 설립하였다.

이 고려파 계열 교단들은 신학적 노선이 보수적이라고 평가받는 장로회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 일치(에큐메니컬) 운동 참여나 가톨릭 정통성 인정 문제에도 가장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다. 예장고신의 교단 신학교인 고신대학교[7]부산에 있고, 고신의 세력이 가장 큰 지역이 부산&경남 지방이라고 한다.

이후 WCC 문제 당시 예장고신은 WCC 반대 측에 동조하여 일시기 예장합동과 통합하였다가 다시금 분리하였고, 몇 차례 자체적인 분열을 겪었다. 아래 '예장고신의 분열' 문단 참고.

4.2.1. 예장계신

4.2.2.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

4.2.3. 예장재건, 대한예수교장로회(순장), 예장독노회(합동복구)

예장재건, 예장순장, 예장독노회(합동복구) 등의 교단들 또한 신사 참배에 저항했던 목회자들에 뿌리를 둔다. 다만 이들은 고신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아니며, 고신처럼 강제 퇴출되어 설립된 교단도 있지만 그 이전에 신사 참배에 저항하여 탈퇴 후 독자적으로 설립한 교단들도 있다.

예장재건은 경남 지방에서 최덕지 전도사를 중심으로, 예장순장은 38선 이북 지역에서 이계실 목사를 중심으로 각각 1938년 장로회의 신사참배 결의에 반발하여 탈퇴 후 독자적으로 노회를 조직하였고 1951년 거제도에서 만나서 대한예수교재건교회의 이름으로 연합하였다가 1969년 각각 대한예수교장로회(재건) 및 대한예수교순장로회로 갈라지게 되었다. 갈라진 이후에도 같은 역사적, 신학적 배경 때문인지 여전히 양 교단 간에 교류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독노회의 경우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평양에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와 해방 후 김일성 정권에 저항하다가 월남한 교인들이 기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와는 별도로 단일 노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으로 설립한 교단이며, 2006년 합동복구로 교단명을 변경하였다. 모교회격인 산정현교회를 비롯한 다수의 교회들이 통합, 합동 등 다른 교단으로 이적하였지만 지금도 소수의 교회들이 신사참배와 공산정권에 저항하던 정신을 승계하며 명맥을 잇고 있으며, 산정현교회 등 다른 교단으로 이적한 교회들도 독노회의 신학적 유산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4.3. 2차 분열: 예장 & 기장

1차 분열로부터 단 1년 후인 1953년,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신학교 출신의 목회자들이 성서비평학을 수용하였다는 이유로, 교계의 보수적 목회자들로부터 성서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8]이라며 공격당하게 된다. 실제로 김재준 목사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 성서비평학은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는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다.[9]

결국 김재준 목사는 총회로부터 장로교 목사직에서 파면당하게 되었다. 또한 53년 총회에서는, 조선신학교와 평양신학교를 통합해 새로운 교단 신학교를 설립하는 안건이 결의되었는데 이때 김재준을 따르면 조선신학교 계열의 목사들이 일체 배제되었다. [10] 또한 장로회 총회는 조선신학교 출신 신학생들의 목사안수를 거부하게 된다. 이에 김재준 목사를 필두로 한 조선 신학교 출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이 설립 된다. 이후 분열된 교단들이 '분열'된 입장이기에 교단 이름을 '대한예수교장로회(○○)'이라는 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반면, 기독교장로회 측은 사실상 교단 간의 분열이긴 하지만 어쨌든 '퇴출'된 입장이라 아예 한국기독교장로회라 하여 표기법을 달리하고 있다. 이후 기장은 대한성공회와 함께 한국의 가장 진보적인 개신교 교단으로 평가받게 되며,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 인권, 노동, 통일운동, 촛불집회에도 적극 참여한다.

4.4. 3차 분열: 예장합동 & 예장통합

한국 장로교의 최대 분열. 1960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를 놓고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장로회의 개교회주의와, 교회 일치 운동 간의 해석 차이를 놓고 WCC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라졌다.[11] WCC 지지파는 연동교회에, WCC 반대파는 승동교회에 모였으므로 연동파, 승동파라고 불렸다. 그 외에 보수파가 있었는데, 현재 성합측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12]

WCC 지지파는 기장측 일부 온건파 인사들과 연합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를 만들었고, WCC 반대파는 1951년 독립해 나갔던 고신 교단과 손을 잡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를 만들었다. 합동이라는 이름은 고신과 승동파가 합동하였으므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신학교 합병 등의 민감한 부분에서 양 교단 간에 의견 차이로 2~3년 만에 다시 분리되었다. 고신 측에선 이를 '환원'이라 하여 독자적인 교단 총회 회기 역시 합동 이전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 분열에서 등장한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은 현재 대한민국의 최대 개신교 교단이다. 두 교단의 교인 수를 합칠 경우 대략 5~600만 명 정도.

4.4.1. 예장보수

4.4.1.1. 예장성합 재확립과 예장총회 개칭
1980년 합동측의 분열 당시 임시총회가 개최되어 많은 목회자들이 합동측이나 타 비주류 교단으로 이탈하였다. 당시 200여개의 교회가 이탈하고 22개의 교회만이 교단에 남아 있었다. 이때 1981년 9월 25일 정봉국 목사, 정남렬 목사 등을 주축으로 수습총회를 개최하고 일부 군소교단 실무자들이 모여 교단을 합동하기로 결의하고 "성령, 성경, 성화로 단합된 총회가 되자"는 의미로 교단명칭을 예장보수에서 예장성합으로 바꾸고 총회장으로 배창선 목사가 취임하였다. 그리고 1984년 제69회 총회에서 신학교도 대구 개혁신학교(강유중), 성도신학교(김치선), 덕성신학교(이계백), 협동신학교(오경신)를 병합하고[14] 대학 인가를 위해 '바울신학교’로 개칭하였다. 1982년에는 대학 인가를 위해 강화 복음실업고등학교도 인수하였다. 80년대 교단 통폐합 및 무허가 신학교 철폐와 같은 정부의 정화운동과 더불어 부흥하여 교세를 증가시키다가 그 후 1984년 예장성합측과 분립하고 신학교 명칭을 '총회신학교'로 개칭하였다. 이후 1988년 7월 교단명을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15]으로 개칭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한기총 가입교단. 2021년 심하보 목사를 주측으로 설립한 예장총회와는 별개의 교단이다. 심하보 목사 측은 한교연 가입교단.
4.4.1.2. 예장성합측
1984년 바울신학교 정봉국 목사를 주축으로 예장총회에서 탈퇴하여 분립하였다. 보수총회에서 정화위원장이던 정봉국 목사를 주축으로 한 교단인지라 정화운동을 했다. 2003년 미국장로회 성합총회가 분립하였다. 이후 정봉국 목사는 사망하였고, 종신학장으로 추대하였다. 한기총 가입교단.
4.4.1.3. 예장보수 독립
1988년 예장총회가 개칭하던 즈음에 분립한 교단이다. 한교연 가입교단.
4.4.1.4. 예장합동총신측
1984년 철산예루살렘교회(현.예수중심교회)의 목사인 이초석이 대한예수교장로회(성합)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87년 베뢰아 학파로 귀신론을 설파하던 이초석이 예장성합에서 제명당하였으나, 그 이후 1993년 명칭만 변경된 예장총회가 이초석목사를 재영입하려 하였고, 이에 따라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경기노회는 임시노회를 인천 가정동에 위치한 성광교회(총회신학교 인천분교)에서 열어 2/3 이상의 찬성으로 탈퇴키로 하였다. 이후 1993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신측)으로 총회명을 정하고 초대 총회장으로 이준원 목사(성광교회)를 총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신학교를 총회신학연구원으로 개칭하였다. 한교연 가입교단.

4.4.2. 1962년: 예장호헌 독립

예장합동은 1961년 총회에서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와의 우호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의하였다. 국제기독교연합회는 매킨타이어 목사를 필두로 한 보수주의 기독교 단체인데, 예장합동은 미국장로교와의 단절을 우려하여 ICCC와의 관계를 끊은 것이다. 이에 ICCC를 지지하는 박병훈 목사를 중심으로 1962년 독립한 것이 예장호헌 교단이다. 이 호헌 교단은 교리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극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6년, 박병훈 목사의 교단 대표직 연임 문제로 분열되어, 신임 총회장 송재묵이 총회를 탈퇴하였다. 송재묵 총회장 측은 예장환원 교단으로 갈라졌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ICCC는 송재묵 총회장 측을 지지하였으므로, 예장호헌 교단은 ICCC의 지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79년 소장파 목사들과 박병훈 등 원로목사들의 갈등이 심화되어 또 한 차례의 분열을 겪는다. 이후 이들 분리된 호헌계 교단들은 타 교단으로 흡수되는 등의 과정을 겪었고, 일부 파벌은 2010년대 초 합동측과 재결합 논의가 성사되어 합동 교단으로 복귀하였다. 기독교사상 2015년 9월호에 따르면 오늘날 호헌 명칭을 사용하는 교단은 그 역사성이 불분명하다고 한다.

4.5. 예장고신의 분열

고신은 WCC 반대를 기치로 승동파와 합동하였지만, 합동 총회에서 고려신학교 통폐합을 시도하자 1963년 다시금 독립해나갔다. 그 후 고신측도 몇 차례의 분열을 겪는다. 1976년 제26회 총회 당시 고려학원 이사 문제를 두고 벌어진 갈등으로 고신과 고려로 갈라졌다. 신자를 교회 밖 사회의 법정에서 고소하는 문제를 놓고 갈라진 것인데, 교회 밖 사회의 법정을 그들 스스로는 '불신법정'이라고 부르므로 불신법정 문제라고 부른다.

1990년 목사의 이혼 문제를 놓고 예장고려개혁 교단이 갈라져나갔다. 2013년 고려신학교 교장 석원태 목사 문제를 두고 예장고려에서 예장개혁고려 교단이 분리되었다. 예장개혁고려측은 이후 이름을 예장고려로, 2018년에 예장제신으로 바꿨다. 1976년 독립한 원래의 예장고려는 2015년 고신과 통합하였고, 현재는 일부 목회자와 교회가 남아있다.

그러므로 고려파 교단은 예장고신, 예장고려, 예장고려개혁, 예장제신(舊 개혁고려→고려) 등이 있으며, 또한 WCC 문제 이전인 1950년대 후반 고신에서 갈라져나간 교단으로 예장총공회(백영희), 예장계신(이병규)도 있다.

4.6. 4차 분열: 예장합동 분열

세 차례의 분열 이후 기장과 예장통합은 별다른 분열 없이 꾸준히 단일 교단으로 유지되고 있는 반면 예장합동은 1979년부터 40년 넘게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다. 개요 문단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전 세 차례의 분열은 교리적인 명분이 있었지만 1979년 이후의 분열은 신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교권 다툼에서 기인하였다. 그 결과 40여년의 세월 동안 예장합동에서만 120개가 넘는 교단이 갈라져나왔다. 합동에서 분파된 교단들은 예장합동 교인과 목회자들도 잘 모를 정도로 계보가 복잡하다.

4.6.1. 1979년 사태: 예장합동(교권파)와 예장합동보수(비교권파)

본격적인 한국 장로회 분열의 시작인 1979년 사태는 교권 싸움이 주 원인이었다. 평안도 세력(김윤찬), 경상도 세력(이영수)은 신학대학 부실 운영 문제를 들고 나와 기존 합동 교단의 주도 세력이었던 황해도 세력(이환수, 박찬목), 전라남도 세력(정규오)을 누르고 합동 교단의 교권 세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에 이영수를 비롯한 주류 세력과 반 이영수 파인 비교권 세력으로 갈라졌다. 이러한 지역별 세력은 구한말~일제강점기 당시 선교사들의 선교지 분할 정책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갈등은 1979년 대구 동부교회에서 열린 합동 교단 제64회 총회에서 폭발하였다. 교권 세력은 1979년 총회에서 비교권 세력을 배제하고 교회당 문을 걸어잠근 채 총회를 진행하였다. 이 와중에 성찬식 집례를 할 목사가 늦게 와서 못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정규오 목사를 필두로 한 비주류 세력은 대구 은일교회에 모여 별도의 총회를 소집하여 예장합동보수 총회로 갈라졌으며 복구신학교[16]를 세웠다. 오늘날 예장합동보수계의 후신인 예장개혁 측은 당시 총신대학교 신학이 좌경화되었던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4.6.2. 1981년: 예장합신의 독립

예장합동보수가 갈라져나가고 1년 후인 1980년 총회신학교의 내부 문제로 인해 합동 교단 내에 또 분열이 생겼다. 박윤선 목사와 그가 설립한 합동신학교, 오늘날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박윤선 목사는 한국의 1세대 신학자로 일찍이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석사를 한 후 국내에서 고신, 총신 강단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또한 국내 최초의 신구약 주석을 완간한 한국 기독교계가 낳은 비범한 인물이다. 사당동에서 터를 잡은 현재의 합동 측과 훗날 탈퇴하게 되는 백석 측의 분규를 보며 독자 세력을 형성한 것. 여담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목회자들이 박윤선 목사의 주석집을 참고한다.

합동신학교 세력은 1981년 예장개혁이라는 이름의 새 총회로 독립하였고, 교단명 중복을 피하기 위해 1998년 오늘날의 합신이라는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합동을 비판하며 나간 점, 개혁을 강조하며 이단 척결에 매우 적극적인 점 등의 연장선으로 90년대부터 성향이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서로의 교세 기반지역이 다른 고신 측과의 통합 움직임이 있어왔고,[17] 지금도 꾸준하게 추진 중이다. 한편 이들 고신, 합신과의 통합을 물색하던 또다른 교단이었던 대신은 이들 교단과의 통합 논의가 90년대부터 꾸준히 추진해왔으나 협상이 잘 안 된 것으로 보이며 신학 성향이 판이한 백석과 통합을 진행했으나 결국 결렬되었다.

4.6.3. 예장합동 비교권파의 이합집산

합동보수쪽도 분열을 거듭했다. 초기에는 주로 복구신학교의 주도권을 두고 분열하였다. 신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박아론 목사가 선임되었으나, 1년 후 정규오 목사로 바뀌었다. 박아론 목사 지지측은 예장합동계승으로 독립하였다. 정규오 목사는 후임 이진태 교장 선임 후에도 퇴직을 거부하였다. 이후 손치호 총회장이 선임되었고, 정규오 목사 측은 자신들이 내세운 후보가 탈락하자 반발하였다. 이에 총회가 갈라져서 손치호 총회장 측 총회는 목포제일교회에서 열렸고, 정규오 지지 측 총회는 광주중앙교회에서 열렸다. 후자는 중립 세력과 연합하여 예장개혁이 되었다.

1985년을 기점으로 핵분열이 시작되어 합동보수측은 홍은동, 방배동, 신림동, 봉천동, 냉천동, 응봉동 등 동네마다 교단이 갈라지는 못 볼 꼴을 연출했다. 개혁은 위에서 언급한 광주 교단 외에 1985년 합동비주류계를 중심으로 같은 이름의 교단이 만들어졌고, 편의상 예장개혁, 개혁서울이라고 구분하였다. 1998년 개혁(서울), 개혁(광주), 합동보수(홍은동, 봉천동, 냉천동, 방배동, 신림동, 응봉동), 그리고 1961년 분열했던 예장호헌까지 9개의 교단이 통합하여 예장합동(개혁)이라는 이름의 비주류 통합 총회를 출범하였다. 그러나 불과 2년 후인 2000년 9월 열린 총회에서 노회 정비, 총회장 인선, 신학교 문제 등 이권 문제로 몸싸움을 벌였고,예장 개혁총회 결국 분열 결국 다시 합동개혁연합, 합동개혁 서울(김규섭, 조경대), 합동개혁 광주(정규오), 합동개혁 대전(박만배), 개혁국제(고병학) 등으로 갈라졌다.

비권파 교단 통합이 2년만에 물거품이 된 이후 이들 합동 비주류측(합동개혁, 합동보수) 교단은 사분오열하였다. 합동개혁 서울측은 성내동, 방배동, 시흥, 개신 등으로, 개혁국제는 개혁국제, 개혁연합으로, 다시 각각 개혁국제와 합동보수, 안양개혁과 개혁총연으로 분열하였다.개혁, 79년 이후 53개 교단으로 분열 광신대학교를 소유한 정규오계의 합동개혁 광주측과 방배동측은 2005년 주류측 예장합동으로 통합했다.개혁총회 26년사(1979-2005), 분열 그리고 합동 개혁 광주측이 합동으로 넘어간 후 남은 개혁계열 군소교단 중 그나마 규모가 있던 개혁(서울, 조경대)은 2011년 이단 다락방(종교단체)에 교단을 넘겨주었고, 다락방과의 통합에 반대한 대부분의 교단들이 탈퇴해 또다른 개혁 교단을 만들고, 다락방은 조경대 세력과 합치며 '개혁'이라는 이름을 얻어 정통교단 인 것 처럼 꾸민다. 그러나 여러 논란 끝에 과거 조경대 목사가 세웠던 종암중앙교회개신대학원대학교를 따르는 종암동 파 교회들이 2015년 다락방을 탈퇴해 또다른 예장 개혁 교단을 세운다. 그 외에도 개혁의 후신 군소교단들은 숫자 파악이 불가능할 정도로 군소교단들이 난립해있다.

오늘날 합동보수, 합동개혁 등의 교단 이름은 여러 교단에서 쓰고 있으며, 같은 이름의 교단이 많아 각 총회가 위치한 지역으로 구분을 하거나 합동보수A, 합동보수C 식으로 구분을 하고 있다. 합동보수보수(…) 등 별 해괴한 이름의 교단들이 난립하고 있으며, 2010년대 들어서는 합동과 아무 관련 없는 교단이나 심지어 사이비 종교까지도 예장합동OO의 이름을 달고 활동하고 있다.

4.7. 기타 장로교단들의 연원

분열사의 큰 줄기와는 별개로 성립된 장로회 교단들도 있다.

4.7.1. 예장대신과 예장백석

예장대신은 김치선 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야간신학원으로 세운 대한신학교에서 배출된 목회자들이 설립한 교회들이, 합동과 통합의 분리 당시 독자적인 길을 선택하여 모인 교단이다. 애초에 예장대신은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가 시초이다. 이 과정에서 ICCC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문서 참조.

예장백석은 역사가 약간 복잡하다. 다만, 합동측이 총회신학교 내에서 분열할 당시 방배동에 설립된 비주류파의 총회신학교와 관련이 깊다. 교단 측에 따르면 1978년 장종현 목사가 세운 예장복음총회를 시초로 한다. 1979년 예장합동 교단의 분열 당시 비주류 측 목회자들이 가입하였으며, 또한 연합, 은혜 등 군소 여러 교단을 통합하며 대형 교단인 예장합동정통으로 성장하였다. 한때 에어장으로 유명한 장효희 목사[18]가 총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2009년 백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0년대에 대신의 김세창 총회장이 대한신학교의 운영권을 김영실에게 넘겨버려 대신에서 축출당하자 대신개혁을 세우며 분리독립했다. 대신개혁은 정통대신으로 이름을 바꾼다.

2015년 예장백석과 예장대신이 통합하여 예장대신으로 통합이 이루어졌을 뻔 했다. 통합에 반대한 잔류파 목회자와 교회가 예장대신 교단에 남아있어, 예장백석대신(통합 측)과 예장대신(수호 측), 통합에 반발하여 독립해 나간 예장대신석수로 나뉘었다 2017년에는 백석대학교 출신 목회자들이 설립한 예장합동진리가 예장백석에 통합되었으며, 백석과 통합한 대신 통합측은 법원에서 "통합 과정에서 교단 헌법에 규정된, 의결에 필요한 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하여 통합 결의는 무효"라는 판결을 받으면서 대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2018년 백석대신으로 교단명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결국 백석대신은 구 백석계와 구 대신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백석 명칭으로 되돌아갔으며, 일부 대신출신 목회자가 대신으로 돌아가거나 백석에 잔류하였다. 게다가 백석총회의 행태에 반감을 지닌 목회자들이 모여 백석대신 총회를 재설립하기도 하였다. 한편, 통합을 주도했던 전광훈 목사는 여기저기서 다 목사직을 제명당한 상태이기에 자신의 목사직분 유지를 위해 어거지로 대신복원이란 교단을 세웠다. 이는 위와 같은 흐름과는 별개의 문제로 취급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전광훈은 백석과 대신의 통합의 진통 과정에서 교단을 두개도 아닌 세개도 아닌 다섯개로 갈라버린 장본인이다.

결국 대신과 백석의 통합 논의는 백석과 대신의 갈등과 대신의 분열을 초래했으며 다시는 통합 논의가 없을듯 싶다.

한편 대신복원도 전광훈 목사에게 실망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전광훈 목사와 결별하여 대신호서 교단을 세운다. 그리고 대신호서는 예장 개혁 종로측과 합동하여 예장 개혁대신이 된다.

현재(2022년 기준) 교단 목록

백석계 교단대신계 교단

4.7.2. 타 교파에서 장로회로 전향한 교단


이들 교단들은 안상홍이 설립한 '하나님의 교회 예수증인회'에 뿌리를 두고 장길자가 현재 대표로 있는 사이비 종교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와는 아무 상관 없다.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이라는 이름의 교단은 전세계적으로 여러 곳이 있다.

4.7.3. 기타 군소교단

5. 분열이 아닌 개별적 분리로 형성된 연합단체 및 교단

예장통합에서 탈퇴한 목회자들이 형성한 연합단체 및 교단은 아래와 같다.

6. 정리: 주요 교단 목록

교단명독립연도연원신학교비고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본 목록에서는 크게 기장, 통합, 고신계, 합동계, 백석계, 대신계, 기타 교단으로 분류하였다.

7. 참고 자료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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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대한감리회 외에 예수교대한감리회라는 교단이 있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서 한 명의 목회자가 나간 것이기 때문에 분열이라고 보기엔 어려움이있다.[2]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국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부터 무악기파와 유악기파로 갈라져서 들어온 것이며, 침례회도 미국에서부터 성서침례친교회가 갈라진 후 들어온 것이다.[3] 단 신사참배 문제 자체가 아니라, 고려파 목사들의 가입 불허가 직접적으로 문제되었다. 다소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던 셈.[4] 하나뿐인 노회였으므로 독노회라고 불렀다.[5] 장공 김재준, 추양 한경직 등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6] 참고로 주기철 목사는 생존 중이던 1939년 이미 일제의 압력에 굴복한 장로회 총회에 의해 교단에서 축출되었다.[7] 정확히 말하면 고신대 학부는 현재까지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에 있으며, 고려신학대학원은 부산에 있다가 1998년에 천안으로 이전했다.[8] 18세기 독일을 위시로, 계몽주의사상에 영향을 받아 등장한 신학의 한 부류. 문화개신교신학이라고도 한다. 성서비평학이 처음으로 도입되었고, 성문서 연구나 역사적 예수 연구 등 이후 신학의 연구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신학이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인본주의를 우선하였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자 이들중 약 80%가 나치 독일에 손을 들어주며 히틀러를 지지하였다. 이들의 제자 세대였던 칼 바르트를 비롯한 여러 독일 신학자들이 이들을 비판하며 신정통주의 신학을 만들어내었고, 이후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일침을 가하자 자유주의 신학 붐은 사라지게 되었다.[9] 칼 바르트는 성서비평학은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권위는 인정해야 한다며, 자유주의 신학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새로 신정통주의 신학을 만들었다.[10] 이 부분에서 장로교 개별 교단별로 교단사 서술이 갈린다. 통합의 교단사에서는 이것을 '평양신학교의 단독 승계와 조선신학교의 폐쇄'로 서술하고, 기장의 교단사에서는 '조선신학교와 평양신학교의 합병으로 장신대 설립'으로 이해한다. 즉, 통합의 입장에서는 평양신학교가 장신대가 되고 조선신학교가 교단의 폐쇄명령에 불응한 한신대로 이해되는 반면, 기장의 입장에서는 조선신학교의 역사까지 통합이 가져가고 한신대가 새로 설립된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11] 여기에 더해 WCC 반대파의 수뇌부인 박형룡 목사가 3000만 환을 사기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두 파벌 사이의 불신과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12] 이 성합 교단도 1984년 성합측(정봉국 목사)과 예장(정남렬 목사, 초기에 성합이라는 명칭을 쓰다가 훗날 성합측과의 구분을 위해 예장으로 개칭) 두 개로 갈라졌다. 이하 서술.참고자료1참고자료2참고자료3[13] 성합측, 합동총신측 연혁상은 1960년이나, 예장총회 연혁상이나 기타 연혁상은 1963년 호헌측에서 분파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성합측의 기록 중 정기총회 기록이 남아있어 60년일 가능성이 더 크다.[14] 1980년에 통합한 타 군소교단에 뿌리를 두었던 신학교로 추정된다.[15] 보통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줄여 말해 예장이라 부르는데, 여기는 그 뒤에 붙는 별칭도 예장이다.[16] 이름은 총회신학교이나 오늘날 총신대가 된 당권측 총회신학교와 구분이 안 되므로 편의상 이렇게 부른다.[17] 고신은 부산경남, 합신은 수도권 지역[18] 통합 교단 소속인 일산든든한교회 당회장 장향희 목사의 쌍둥이 친형이다.[19]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와 다르다![20] 정작 아들인 박흥석 목사는 현재도 예장고신의 목회자(사상교회)로 남아있다고 한다.[21] 실제로 브니엘신학대학원대학교가 브니엘학원 사태로 인하여 개교가 완전히 무산되었을때 예장고신에서 상당히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22] 전두환 정권 시기의 내부 갈등, 신동아그룹과 연관된 횃불트리니티 재단과의 갈등이 겹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