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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9 21:50:03

평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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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성과 연혁3. 역임 인물


平章事

1. 개요

고려 중서문하성의 정2품직으로 재추에 해당한다.

2. 구성과 연혁

평장사는 수상문하시중 다음가는 재신(宰臣)으로 문하시중이 없을 경우 평장사 중 판이부사가 수상, 판병부사가 아상(亞相, 부총리)이 되었다. 각부의 판사 등을 겸직했고 도병마사(도평의사사)와 같은 재추회의에서 국가 중대사를 논의했다.

성종당나라 관제를 수용하면서 중서문하(정사당)의 평장사직도 함께 들어왔다. 고려의 평장사는 중국사와 달리 중서·문하시랑직과 일치된 형태였는데, 평장사직은 처음부터 중서성과 문하성의 합좌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나타내던 호칭에서 유래되었으므로 고려 중서문하성의 단일 기관적 성격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내사(중서)평장사가 상위직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후 문하평장사가 상위직이 되었다. 문종 때 내사성을 중서성으로 개칭하면서 내사평장사도 중서평장사로 개칭하였다.

고려사 백관지에 따르면 정2품 각 1인씩으로 문하시랑평장사, 중서시랑평장사가 있었고, 또 중서·문하에 각각 평장사를 두었다는 애매한 문장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으로는 평장사직이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 - 문하평장사 - 중서평장사 4종류로 구성되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고려사 개별 기사나 금석문에 따르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이하 동평장사) - 중서시랑 동평장사 - 문하시랑 평장사 - 중서시랑 평장사 순의 4종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에는 중서평장사나 문하평장사는 단순히 중서·문하시랑 (동)평장사의 줄임말이었다.

그러나 원 간섭기로 인해 시행된 충렬왕 관제에서는 중서문하성이 첨의부로 바뀌고 평장사도 찬성사로 바뀌면서 길고 복잡한 동중서문하평장사의 명칭이 사라지고 단지 첨의시랑찬성사 - 첨의찬성사로만 구분하게 되었다. 공민왕 관제에서는 문종 관제를 복구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문하평장사와 중서평장사가 정식 관명이었다. 고려사 백관지의 애매한 설명은 이러한 요인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평장사직의 구성은 복잡했지만 어떤 큰 차이가 있다기 보다는 연공서열에 따른 대우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에 꼭 4명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고, 정원도 들쭉날쭉해서 여러 사람이 같은 평장사직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평장사는 고려 후기에 여러 번 개칭되는데, 1275년 충렬왕이 중서문하성을 첨의부로 고치면서 찬성사(첨의시랑찬성사, 첨의찬성사)로 고쳤고, 1298년 충선왕이 재상이 너무 많다며 찬성사직을 전부 폐지했다가 다시 복원하였다. 1308년부터 잠시 중호(中護)로 개칭하고 정원을 3명 둔 적도 있었다. 공민왕 때 다시 평장사로 고쳤다가, 이후 평장정사(平章政事),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건국 후 의정부 찬성사로 이어졌다가 좌·우 찬성으로 바뀌었다.

3. 역임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