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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2 20:18:01

라인배커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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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배커 II 작전 당시 폭격중인 B-52D

Operation Linebacker / Operation Linebacker II

1. 개요2. 라인배커 작전
2.1. 전개2.2. 결과
3. 라인배커 II 작전
3.1. 전개
3.1.1. 1일차3.1.2. 2일차3.1.3. 3일차3.1.4. 5일차 이후
3.2. 결과
4. 결과와 반응

1. 개요

베트남전 후반에 실행된 대규모 폭격작전.

1차와 2차로 나뉘며, 1차는 대체로 1972년 3월 말부터 10월까지 계속된 북베트남군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 저지를 위한 대규모 항공작전으로, 2차는 연말 파리평화회담 재개를 위한 크리스마스 전후 시기 하노이하이퐁시를 비롯한 북베트남의 도시에 감행했던 11일 간의 공습작전을 의미한다.

작전명의 유래는 미식축구의 수비팀 포지션 중 하나인 라인배커.

2. 라인배커 작전

북베트남의 "부활절 공세"가 발생한 72년 초 당시엔 남베트남에 있는 미군의 수는 9~10만 명 안팎[1]이었으며 69년부터 닉슨 정부가 추진한 '베트남화 정책(Vietnamization)'으로 시작된 단계적 철수로 71년이 끝날 무렵 대부분의 지상군 전투부대는 철군한 상태였다. 인도차이나에 배치된 해군과 공군도 규모가 절반 이하로 축소되어 있었다.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의 남침 징후를 보고받은 상태였으나 우선 평화회담을 통한 해결을 희망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평화적 해결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대화에 임했다. 닉슨 대통령은 지상군은 예정에 맞춰 철수시키는 대신 빠져나간 해군과 공군의 항공력을 다시 불러모아 대응하기로 했다. 불릿 샷 작전(Operation Bullet Shot)으로 명명된 일련의 B-52 폭격기 전진배치가 2월부터 개시되었으며, 태국 및 베트남 지역 주둔 전술기 증강 계획인 콘스탄트 가드 작전(Operation Constant Guard) 또한 북베트남의 침공이 확인되는 즉시 발동할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1972년 3월 30일, 북베트남군은 전차 및 장갑차 700여대의 지원을 받는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3개 축선(DMZ, 중부고원 지대 그리고 사이공 인근지대)에 투입하여 전면 남침하는 "응우옌후에 공세"를 감행한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이에 대응해 정치적 부담이 되더라도 고가치 목표물에 대해 과감한 공격을 수행하기로 결정했다. 린든 존슨 행정부 시절 롤링썬더 작전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대규모 항공기뢰 투하로 하이퐁 항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주요 항만을 봉쇄하였고, 중국 국경지대로부터 육로로 넘어오는 물자에 대해서도 제한없이 폭격을 실시하였다.

2.1. 전개

1972년 3월 30일 정오, 전차와 포병으로 증강된 북베트남군 3개 사단이 DMZ를 넘어 남침했다. 주로 대분란전(counterinsurgency warfare)에 초점을 맞춰 둔 상태였던 남베트남군은 베트남전 사상 최초로 벌어진 재래식 전면 공세에 맥을 못 추고 후퇴했다. 뒤이어 4월 2일에는 라오스캄보디아호치민 루트로 사이공 북방에 투입된 북베트남군 3개 사단이, 16일에는 중부 고원지대로 침투한 3개 사단이 공격을 시작했다. 사실상 남베트남 전역이 전장으로 변한 것이다.

북베트남의 지상군 공세에 미국은 항공력으로 반격했다. 4월 1일 다낭 공군기지에 미 공군 F-4 팬텀 II 9기가 긴급전개한 것을 시작으로 4월부터 5월 사이 총 176기의 팬텀과 12기의 F-105가 증원됐고, 여기 더해 미 해병대의 지상발진 항공대와 해군 항모전단 역시 증파되었다. 북베트남군의 전차와 포병에 계속해서 밀려나던 남베트남군은 미군의 대규모 공중지원에 힘입어 응집력 있는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DMZ를 맞대고 있는 제1군관구에서는 5월 1일 꽝찌(Quang Tri) 함락을 끝으로 북베트남군의 전진이 저지됐으며, 중부고원의 제2군관구에서는 꼰뚬(Kontum), 사이공을 포함한 제3군관구에서는 안록(An Loc)의 남베트남군이 포위 상태에서도 근접항공지원과 공중보급을 받아 거점을 사수하는 데 성공한다. 특히 미 육군항공대의 공격헬기가 전차를 상대로 맹활약했는데, 꼰뚬 지역에서는 개발 도중 사업이 취소된 XM26 공중발사 TOW 대전차미사일 체계 시제품을 탑재한 UH-1 휴이가, 안록 방면에서는 AH-1G 코브라가 다수의 북베트남군 전차를 파괴했다.

안정되기 시작하는 지상의 전황과 발맞춰 5월 10일부터는 증강된 항공력에 의한 본격적인 북폭작전이 시작됐다. 이것이 바로 라인배커 작전(Operation Linebacker)이다. 라인배커 작전에서는 강력하고 결정적인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 이전까지 유지되던 대부분의 제한이 해제되었다. 당장 작전 개시 바로 전날인 5월 9일에는 사상 최초로 미 해군항공대가 하이퐁 항에 항공기뢰를 부설했고, 북베트남군의 항공기지에 대한 엄격한 폭격 지침 역시 철폐됐으며, 무엇보다 B-52 중폭격기가 북베트남 공역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중국-베트남 국경지대와 소련, 중국의 화물선이 입항하는 항구는 물론이고 물자집적소, 주요 교량, 철도조차장, 발전소 등 핵심 시설에 대해서 제한없는 폭격이 가해졌다. 특히 68년부터 시험적으로 사용되던 레이저 유도폭탄(LGB)이 북베트남 영토에서 집중 운용되었다. 그동안 라오스 등 안전지대에서만 테스트용으로 활용되었던 이 폭탄을 비롯해 정밀유도무기가 대거 투입되면서 미군은 롤링썬더에 비해서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일례로 롤링썬더 작전 당시 수천 소티를 퍼부었음에도 파괴에 실패한 북베트남군 군수체계의 핵심 목지점(chokepoint)인 폴 두메르 철교와 타인호아(Thanh Hoa) 철교를 LGB/광학유도폭탄(EOGB) 공격으로 완전히 절단하는 데에는 각각 이틀과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북베트남은 남측으로의 공세를 지원할 군수보급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북베트남군 일선 사령관은 계획된 물자의 30%만 실제로 도착할 수 있었다고 토로했다.

2.2. 결과

남베트남 지역에서의 북베트남군 공세는 눈에 띄게 약화되었고, 이에 지상에서는 남베트남군이 공중에서는 미군이 반격에 나서 빼앗긴 자신들의 영토들을 점차 회복해 나갔다. 가을로 접어들 무렵, 남베트남군이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탈환한 가운데 파리 평화회담이 진행되면서 라인배커 작전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이것은 북베트남측이 평화협상에 나올 명분을 주기 위한 작전 휴지기였다.

한편 대규모 북폭작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항공기 손실은 미군측이 더 컸다. 미 공군은 비전투 손실 포함하여 70(51전투+19비전투)기, 미 해군은 54(43+11)기, 미 해병대 10(모두 전투손실)기로 총 134기의 손실을 입었으며 사상자는 불명이다. 남베트남 역시 10기의 손실을 입었으며 북베트남은 63기(그 중 54기가 공중전으로 격추)의 손실을 입었다. 북베트남은 주기중인 기체를 포함 674기를 격파하고 125척의 전투함을 격침시켰다고 주장한다. 한편 미 해군과 미 공군에서 각각 랜디 커닝햄스티브 리치가 5기 격추로 에이스 파일럿이 되었다.

리처드 닉슨헨리 키신저의 '미치광이 전략'을 이용한 도박은 성공했으며 중국과 소련은 미국의 이러한 조치에 대한 비난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조야에서는 미-소 정상회담이 취소될 거라는 관측도 내놓았으나 결국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만나는데 성공한 닉슨은 역사적인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3. 라인배커 II 작전

평화협정안이 실망스럽게 나오자 남베트남의 티에우 총통은 서명을 거부했고 닉슨이 이에 동조하면서 협상은 깨졌다. 그러자 북베트남은 자신들에게 유리했던 안을 공개하면서 언론플레이를 했고, 분노한 닉슨은 2차 폭격을 결정했다. 이것이 라인배커 II 작전이다.

베트남은 이미 미국 대선이 끝난 후이기도 하고, 닉슨이 남베트남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수개월 동안 방공 전략을 준비하면서 연습을 한 상황이었고, 1972년 12월부터 하노이의 민간인들을 소개하였다. 수개월 간의 철저한 준비 때문에 뒤에 서술된 것처럼 북베트남 측은 미 공군에게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강요할 수 있었다.

3.1. 전개

겨울에 시작된 이 폭격은 11일 동안 벌어졌는데,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시기라 '크리스마스 대공습'으로 불린다. 100대 이상의 폭격기들이 야간 제파공격을 퍼부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미 공군의 초기 전술에는 문제가 많았다.

첫 번째는 축차투입에 가까운 제파식 전술이었다. 당시 B-52의 기본 전술 단위는 3기가 한 개의 편대로 비행하는 밀집 편대대형인 '셀(Cell)'이었으며, 셀 내 기체 간의 고도차는 150m, 거리 차이는 약 1.6km. 이 셀 단위를 만든 이유는 세 기씩 가까이 비행하면서 폭격 효율을 높이고 ECM 전파를 중첩시켜 SA-2 미사일 포대의 레이더를 교란하기 위함이었다. 라인배커 II 초기의 전술은 이 10개 정도의 셀이 1개 제파를 이루며 총 30~40기로 구성된 3개 제파가 4시간 간격으로 하노이 상공에 진입해 20분 동안 폭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축차투입은 폭격기들을 지키는 호위기, 채프 살포기, 와일드 위즐 등의 전력이 분산되며 개별 제파의 생존성 저하를 초래한 것은 물론 북베트남 입장에서는 각 제파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특히 SA-2 지대공 미사일 포대가 한 제파에 장전된 미사일을 다 쏴버리고 난 후 다음 제파가 올 때까지 재장전을 마칠 충분한 시간을 허용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결점이었다.

폭격 후 방공망에 노출되는 시간을 줄이겠다며 급격한 남서쪽 우선회를 지시한 방침 역시 문제를 일으켰다. 선회로 인한 속도 저하와 고고도의 강력한 제트 기류 맞바람 덕분에 B-52들은 선회하면서 100노트 이상의 속도를 잃었고, 그 결과 신속히 방공망 밀집지대에서 빠져나오기는커녕 공중에 떠 있는 표적 신세가 되어버렸다.

여기에 B-52G형의 ECM 문제도 겹쳤다. 전 기체가 강력한 ALT-22 ECM 장비를 탑재한 B-52D과 달리 B-52G는 작전에 참가한 97대 중 41대가 방해전파 출력이 ALT-22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평가를 받던 구형 ALT-6B를 탑재하고 있었는데, 우선회 이탈 지침 탓에 기체 우익에 장착했던 재밍 안테나가 오른쪽 날개에 가려지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안 그래도 출력이 떨어지는 ALT-6B의 방해전파가 거대한 주익에 가려지기까지 하니, SA-2 포대의 추적 레이더들은 우선회하는 순간의 B-52G의 전파방해를 뚫고 자동추적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

3.1.1. 1일차

결국 작전 개시 1일차, 1972년 12월 18일~19일 동안 진행된 1차 공습은 B-52 3기가 격추당하고[2] 2기가 대파되는 정도였다. 한편 북베트남의 미그 21 2대가 폭격 후 이탈하는 B-52를 노렸으나 야간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탓에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B-52의 방어기총에 1대가 격추당했다. 한편 미군은 B-52 급선회 시점에 SA-2 미사일이 집중적으로 날아왔다는 점을 토대로 지대공 미사일의 접근에 겁먹은 파일럿들이 대형을 이탈했다가 격추당했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셀 편대의 ECM 대형 유지를 강조하고 방어기동을 금지했다.

하지만 북베트남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상상 이상의 폭격으로 주요 시설들이 크게 파괴되었으며 SA-2 미사일을 130발 이상 소모했다. 각 미사일 기지에 남은 미사일도 거의 없었다.

3.1.2. 2일차

작전 개시 2일차, 90대의 B-52가 투입되었으며 미군의 전술은 1일차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북베트남 방공군의 각 미사일 기지에는 평균 6발의 미사일밖에 없었으며 약 80발의 미사일을 소모하고도 전과를 내지 못했다. 이 결과로 북베트남 방공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에 북베트남에서는 전날의 2배 인원을 동원해 미사일 공급망을 강화했다, 또한 첫 이틀간 B-52들이 계속 동일한 경로와 패턴으로 공격해 왔다는 점, 그리고 상숭한 B-52G 자체의 ECM 재밍 문제[3]를 이용해 B-52들이 폭격을 마치고 이탈하기 위하여 급 우선회를 할 때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것으로 바꿨다. 또한 전파방해 상황에서 SA-2를 무유도 발사했을 때의 명중률을 높이기 위해 미그 21들을 폭격기 편대에 미행시켜 경로, 고도, 속도를 측정시켜 지상관제소에 전달하도록 했다.

3.1.3. 3일차

그렇게 똑같은 제파폭격 전술을 유지한 12월 20일 3일차 밤.[4] 미 공군은 악몽을 맞이하게 된다. 단 하룻밤에 B-52가 6대나 격추당하고 1기가 지근탄 손상을 입었다.[5] 당연히 미 공군은 전략공군 총사령부부터 현장 조종사와 승무원들까지 전부 공황 상태에 빠졌으며, 이들은 출격거부는 물론 사보타주까지 일으켰다.[6] 반대로 예상을 뛰어넘는 전과를 올린 북베트남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으며, 미 공군에 감당 불가능한 손실을 가해 라인배커 II 작전에서 손을 떼도록 강요함으로써 공중에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흥분에 휩싸였다.

이는 애초에 대규모 제파폭격을 원하지 않던 현지 제7/제8공군 사령부의 기획안을 무시하고 전략공군사령부가 공중 충돌을 방지하겠다고 편대간 분리가 쉬운 제파폭격을 밀어붙인 탓이 컸다. 사실 전략공군 내에서도 저런 제파폭격은 훈련 매뉴얼에도 없는 것이었다. 정작 일선의 폭격비행단과 제7/제8공군은 폭격기 승무원들의 훈련도로 볼 때 공중충돌 방지는 고도 분리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3.1.4. 5일차 이후

결국 미 공군은 5일차부터 하노이 폭격을 중단하는 대신 하이퐁 항 등 하노이에서 더 멀리 떨어진 목표물들에 폭격을 집중하면서 재정비 시간을 갖고, 크리스마스 당일에 주어진 24시간의 휴식시간을 통해[7] 전략공군사령부 대신 야전의 제7/제8공군 주도로 전술을 바꾸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8일차인 12월 26일부터 재개된 하노이 폭격은 전술적으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집중된 F-105F-111로 구성된 개별 폭격 편대가 비행장, 발전소 등의 목표를 빠르게 타격하고 빠지고, 채프 살포 임무 역시 F-4 팬텀 전투기들이 8기 정도로 선행해 좁은 채프 "회랑"을 만들던 것과 달리 24기의 대편대가 하노이 근처 상공에 채프를 뿌려 채프 '이불'을 까는 방식으로 크게 변화했다. 작전의 주역인 B-52들은 채프가 바람을 타고 이동해서 통칭 '채프 이불'이 하노이 위에 깔리면, 약 10개 편대의 와일드 위즐 F-105와 F-4들의 호위를 받으며 15분 사이에 110기가 다방면에서 셀 사이의 고도만 분리한 채 동시 진입, 확인된 목표에 폭격을 퍼부었다. 제파폭격은 사라졌다.

이 같은 전술 변경에 더해 ECM 재머의 약점이 명확하게 드러난 B-52G형들을 하노이에서 떨어진 하이퐁 폭격에 투입시키고, 폭격 후 급 우선회 방침도 하노이에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선회하는 것으로 변경하자 피해는 급격히 줄었다. 다만 8일 동안의 고강도 작전으로 미 공군의 정비 역량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면서 기체가 제때 정비되지 못해 표준 3기 셀 대신 B-52D 2기로 이루어진 셀이 몇 개 생겼고, B-52 3기에서 나오는 충분한 ECM 보호를 받지 못한 이 셀에서 2기가 추가로 손실되었다[8].

그러나 북베트남 방공망은 100대가 넘는 B-52의 일제 돌입에 완전히 압도당했으며, 미 공군에 견딜 수 없는 손실을 가해 라인배커 II 작전을 포기시킨다는 승리 공식도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이날의 폭격이 끝난 후 북베트남은 1월 8일부터 파리에서 평화협상을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닉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의 제안에 대해 1월 2일부로 협상을 재개하고 8일에는 헨리 키신저가 파리에서 북베트남측 대표와 회동하는 것으로 하자고 역제안을 날렸다. 그리고 이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공군에 폭격작전을 계속 수행할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개시된 9일차의 폭격에서 미 공군은 북베트남의 맹렬한 저항에 맞닥뜨렸다. 일부 조종사들은 다른 그 어느 날보다도 많은 SAM이 날아왔다면서 이날이 "최악의 날"이었다고 증언했다. 실제로 미 공군은 27일 작전에 투입된 B-52 60기 중 실수로 셀 대형에서 벗어난 2기를 잃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10일차부터 미사일이 다 떨어진 북베트남 방공망의 SAM 공격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고, 어떻게든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날아오른 MiG-21은 아무 전과도 올리지 못한 채 오히려 호위중이던 F-4 팬텀에 한 기가 격추당하고 말았다. 11일째 밤 역시 마찬가지로 B-52들은 아무 피해 없이 폭격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제 B-52가 자유롭게 하노이 상공을 날면서 마음껏 목표를 타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이날 폭격을 끝으로 1월 2일부터 평화협상의 "기술적 사안"에 대해 논의를 재개하자고 제안했다. 하노이 표준시 기준 1972년 12월 30일 0659시, 라인배커 II 작전은 목표를 완수하고 종료되었다.

그 와중에도 또 진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바로 B-52D 2기의 후방사수가 미그기를 건킬[9]한 것. 심지어 이 두 기종의 후방기총은 20mm 벌컨이 아닌 4연장 .50구경 브라우닝 터렛이었다.

3.2. 결과

폭격 11일째가 지나가자 북베트남에서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1,000기 이상의 지대공 미사일이 바닥났고, 미군에서는 더이상 폭격할 가치있는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1972년 12월 22일, 미국 측은 1973년 1월 3일에 다시 협상에 돌입한다면 12월 30일 이후에는 폭격을 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12월 26일, 북베트남은 미국의 적대행위가 중지된다면 레득토와 쑤언투이가 모두 1973년 1월 8일에 미국 측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응답하였다. 이 제안은 주미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을 통해서도 확인되었고, 미국도 동의하였다.

소련과 중국은 공개적으로는 라인배커 작전을 비난했으나 수면 아래에선 북베트남에게 미국과 협상하라고 조언하였다. 12월 31일,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을 방문한 쯔엉찐, 그리고 파리로 가는 레득토에게 닉슨은 어차피 베트남에서 나가려 하니 괜히 자극해서 나가려는 미국을 붙잡지 말고 진지하게 협상하라고 조언하였다.

1973년 1월 27일, 파리에서 파리 강화 협정이 조인되었다.

4. 결과와 반응

라인배커 I, II는 성과 달성 면에서 매우 성공적이었다. 지지부진하고 간섭많은 롤링썬더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임무 달성 과정에서 항공기들의 적잖은 손실은 있었다. 롤링썬더에 비해서는 현저히 줄었고 공중전에서의 우세도 나아졌지만, B-52의 제파 폭격같은 정치적 고려가 들어간 무리수 작전은 심각한 피해로 돌아왔다.

미군이 집계한 바로는 11일 간의 라인배커 II 폭격작전에서 B-52 15기를 손실하고[10] B-52 승무원 33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으며 역시 33명이 포로로 잡혔다. 구조된 승무원은 26명. 다른 기종(12기)까지 합치면 43명이 사망 또는 실종, 49명이 포로가 되었다. 대규모 작전인데다 폭격기의 투입이 많았던 까닭에 대령급 비행대장들의 손실도 제법 있었다. 한편 북베트남은 B-52 폭격기 34기와 F-111 4기를 포함해서 총 81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미군측의 손실 집계가 정설로 취급된다. 북베트남 공군은 미 공군 주장으론 6기의 MiG-21이 격추됐고 북베트남 주장으로는 3기의 MiG-21을 잃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로 북베트남측 손실 발표가 정설이다. B-52D의 후방 기총에 2기, F-4 팬텀 II에 1기가 격추됐다.

1972년 북폭을 강화한 닉슨 대통령은 라인배커 II 작전 당시 하노이와 하이퐁에 10만 발에 달하는 폭탄을 투하했다. 특히 폭격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많이 나왔는데 1,624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2,000채 이상의 민가가 파괴되었다.[11][12] 심지어 하노이 인근의 박마이 병원이 폭격을 맞아 직원 28명이 사망하기도 했는데, 후일 조사에 따르면 이는 근처의 박마이 비행장에 폭탄을 투하하던 도중 SA-2 미사일 두 발에 맞아 격추된 B-52(콜사인 블루 01)의 폭탄이 추락의 여파로 광범위한 영역에 흩뿌려진 탓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북베트남은 이를 프로파간다에 요긴하게 써먹었으며, 워싱턴 포스트 역시 이 폭격에 대해 '전쟁 역사상 가장 야만적이고 몰상식한 행위'라고 표현했다. 이외에도 일부 미국 언론들은 헤드라인으로 제노사이드, 석기시대 수준으로 야만스러운 행위, 미치광이(madman)[13] 등의 단어를 써 가며 미군의 폭격을 비판했다. 당시 하노이에서 미군의 폭탄 세례를 목격했던 하반라우는 그때의 하노이 상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 병사들은 대공포 진지나 로켓포 발사대에서 하노이의 무심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24시간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는 매일 비상사태 속에서 B-52 폭격기가 쏟아붓는 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다. 미군은 인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공습을 감행하고 있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550

소련중화인민공화국은 당연히 이 폭격 작전에 대해 미국을 강력하게 규탄했다. 공산권뿐만이 아니라 당시 서방 진영에 속한 국가들 중에서도 이 폭격 작전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대해 미국을 비판하는 나라들이 있었는데 당시 스웨덴수상 올로프 팔메는 연설에서 미국의 이 라인베커 폭격 작전은 게르니카 폭격,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바비야르 학살, 카틴 학살, 리디체 학살, 샤프빌 학살(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정권이 흑인 시위대를 학살한 사건)과 다를 바가 없다며 미국의 폭격을 대차게 비판했다. 이 연설을 듣고 빡친 닉슨은 스웨덴에 있던 미국 대사를 철수시키고 미국에 있던 스웨덴 대사도 쫓아내는 걸로 대응했다. 이 연설로 미국에게 단단히 찍힌 올로프 팔메는 이후 1986년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데, 이때 미국의 CIA가 암살의 배후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수상 고프 휘틀럼은 닉슨에게 편지까지 보내서 이 폭격 작전을 비판했으며 노동당 내각의 주요 장관들은 '워싱턴은 미치광이들의 통치를 받고 있다', '호주와 미국 동맹관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다' 등의 선 넘는 발언을 쏟아내었다. 편지를 받은 닉슨은 또 머리 끝까지 빡쳤지만 장관들과 달리 휘틀럼 본인은 자신의 비난 메시지를 친전을 통해서 보내고, 공개화하지 않는 자제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스웨덴처럼 미국 대사를 철수시키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이번에는 조용히 전직 인도네시아 대사 마셜 그린을 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대사로 임명했는데 이 인간은 인도네시아 대사 재임 당시인 1965년 당시 수카르노 정권을 전복시킨 쿠데타를 뒤에서 사주한 흑막이라는 평가를 받는 자로 '쿠데타 마스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셜 그린이 오스트레일리아 대사로 부임하고 나서 몇 년 후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독 존 커(John Kerr)가 수상 휘틀럼을 해임하여 휘틀럼의 노동당 정권을 실각시킨 사건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CIA가 총독을 사주해서 휘틀럼을 실각시키도록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 이 때 잔존 미군의 대부분은 전투지원 및 근무부대들로 남베트남군을 보조 및 지원하거나, 그들에게 인계하는데 초점이 맞춰졌고, 아직 철군하지 않은 소수의 미군 전투부대들은 일선전투가 아닌 잔존 미군을 경비하는 역할을 맡았다. 부활절 공세에서 지상에선 남베트남군에 배속 및 연계된 미군 (군사고문관, 항공통제관 등) 을 제외하면 미군의 직접적 교전은 드물었다.[2] 격추된 B-52는 모두 G형으로 첫 제파의 차콜 1(Charcoal 1), 두 번째 제파의 피치 2(Peach 2), 마지막 제파의 로즈 1(Rose 1)이였다.[3] 첫날에 날아든 3개 제파의 폭격 중 두 번째 폭격 이후 하노이 남부를 방어하던 제257방공연대 제71대대가 이 약점을 찾아냈다.[4] 사실 미군 승무원들도 슬슬 같은 작전을 계속하는 것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5] 당시 미군은 손실률 3%도 최악의 상황이라 평가했는데 99기 중 6기가 당했으니 손실율 6%의 대참사였다.[6] 당시 B-52 폭격기의 대당 가격은 794만 6780달러였다.[7] 작전 7일차. 이때까지 B-52는 11기가 격추당하고 5기가 손상되었다.[8] 에보니 2(Ebony 2)와 애쉬 1(Ash 1). 둘 다 2기 짝 셀에서 나온 손실이였다. 에보니 2는 왼쪽 주익에 S-75를 정통으로 맞고 공중 폭발했고(기적적으로 6명 중 2명이 비상탈출에 성공했다), 애쉬 1은 우측 주익에 S-75가 명중했으나 그대로 폭격 임무를 완수한 뒤 태국 우타파오 기지에 착륙 도중 추락했다.[9] 기총으로 격추[10] 북베트남에서 10기 격추되고 5기는 피격 상태에서 태국라오스에서 추락. 북베트남MiG-21이 1기 격추했으며 이를 포함한 총 34기 격추,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26대 이상의 B-52 폭격기 격추를 주장했다. 그러나 북베트남 측의 전과 주장은 모든 전과 기록이 그렇듯 과장과 오인이 다수 섞여있고, 마이클 매클리어의 추정은 아예 정체불명이다. 정설은 미 공군의 집계 결과인 라인배커 II 이전 아크라이트 작전 중 1기, 라인배커 II 기간 도중 15기.[11] 사실 민가폭격을 엄격하게 금지했다고 하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가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1972년 라인배커 작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작전 1일차에도 몇 기의 분노한 B-52D 파일럿들이 폭격이 금지돼 있던 자람 국제공항에 폭탄을 투하했고(다만 이쪽은 폭격을 예상한 각국 항공사들이 미리 시설을 소개시킨 탓에 인명피해가 크진 않았다. 오히려 이 공항이 MiG-21의 은신처로 사용되고 있음을 의심한 미 공군은 B-52 승무원들을 격려했다), 라인배커 II 작전이 드디어 돌파구를 마련한 8일차에도 B-52 한 기가 실수로 시장을 폭격해 250여명이 사망했다. 물론 민간인 사망자 추정치가 십만단위로 나온 롤링썬더 작전에 비하면 적은 편이다.[12] 사실 베트남 전쟁 당시 폭격 희생자의 추정치는 투하한 폭탄의 양에 비해 너무 적게 잡힌 추산이긴 하다. 무엇보다 그 시기 북베트남은 폭격 희생자에 대한 공식적인 추정치를 안 밝혔다. 따라서 앞의 각주에서 언급된 롤링썬더 작전 당시 2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망자 추정치는 로버트 맥나마라가 그 시기에 냈던 통계였다. 그러나 맥나마라 또한 생각을 바꾸었는지, 1990년대 들어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으로 군인과 민간인 가리지 않고 1년에 사망자가 100만 명씩 나왔다고, 통일 베트남측 인사들과의 회담에서 주장했으며, 이후 대학 강연에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다고 주장했으며 그렇게 믿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의 언론학자인 에드워드 허만은 1970년 기준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폭격 및 군사작전으로 사망한 남북베트남 민간인이 최소 100만 명이 넘는다고 추산했다.[13] 여기서 나온 말이 닉슨(정확히는 키신저)이 베트남전에서 처음 사용한 전략인 미치광이 전략(madman theory)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