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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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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언어별 명칭
<colbgcolor=#808080> 그리스어 Πρὸς Ρωμαίους
라틴어 Epistola ad Romanos
영어 Epistle to the Romans
한자(한국어) 가톨릭: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로마書)
개신교: 로마書
중국어 간체자: 罗马书
정체자: 羅馬書
일본어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ローマのしんとへのてがみ)
기본 정보
저자 사도 바울로
기록 연대 AD 56-57년경
분량 16장
수신자 로마 교회

1. 개요2.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
2.1. 선교적 목적2.2. 변증적 목적2.3. 교훈적 목적
3. 로마서의 구조와 내용
3.1. 내용 요약
4. 신학적 중요성
4.1. justification의 의미
5. 논란
5.1. 권력에 대한 복종의 문제5.2. 거짓말은 죄가 아닌가?5.3. 간편한 구원?5.4. 온 이스라엘의 구원5.5. 임파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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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5장 8절 (공동번역 성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8장 28절 (공동번역 성서)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1장 33-34절 (공동번역 성서)
성경의 52번째/45번째 권.

신약 성경의 한 권으로 사도 바울이 쓴 서간 중에서 배치 순서로 첫 번째에 해당하는 서간이다. 로마 교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로,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에 있던 기원후 56~57년경 예루살렘으로 올라기기 직전인 3개월 동안 코린토에서 썼다고 여겨진다.

2.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

Et hoc scientes tempus: quia hora est jam nos de somno surgere. Nunc enim propior est nostra salus, quam cum credidimus.
Nox praecessit, dies autem appropinquavit. Abjiciamus ergo opera tenebrarum, et induamur arma lucis.
또한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장 11-12절 (라틴어 성경-천주교 성경)
본서의 내용에 근거하여 학자들이 제시하는 기록 목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2.1. 선교적 목적

바울로는 그의 에페소에서의 활동이 2년 이상 계속되고 그 성과가 주변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때, 자신의 선교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5:23에 근거해 볼 때 아마도 그는 오래전부터 로마 전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바울로가 다른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인들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고(1:5, 6, 13-15), 그곳에서 자신의 선교적 임무를(사도행전 26:16-18) 수행하고 싶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본 서신을 쓰게 된 일차적인 목적이 로마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방문을 미리 알아 준비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가 뵈뵈(포이베) 편에 짧은 편지를 보내어도 되었을 텐데 본 서간처럼 장문의 글을 보낸 이유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을 생각할 수 있다.

2.2. 변증적 목적

바울로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당시 모든 그리스도교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잠재성을 가진 로마 교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대한 올바르고도 충분한 이해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본 서신의 서두인 바울로의 문안 인사(1:1-7)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또한 3:8을 보면 바울로는 그가 전하는 복음을 잘못 이해하는 자들에 대하여 자신과 복음을 위하여 변증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2.3. 교훈적 목적

본 서신은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체계적인 말씀으로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의 믿음을 계도하고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 바울로는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에 관한 심원하고 상세한 교훈을 주고자 하였다. 본 서신에 질문과 권유 형태의 문구(2:1, 3, 23, 26, 27; 3:1, 5, 8, 9, 27; 4:1, 10; 5:1; 6:1-3, 15; 7:1, 7, 13; 8:24, 31, 32; 9:14, 19, 23, 30; 10:14; 11:1, 2, 4, 7, 15; 12:2, 3, 14; 13:1; 14:1, 10; 16:17)가 허다하게 등장하는 것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바울로는 본서를 통해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을 규명하였고 이 기반 위에서 각 개인의 구원과 성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자세, 국가와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의무, 세계 열국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계획 등을 포괄적으로 그리고 세세하게 교훈하였다.

3. 로마서의 구조와 내용

3.1. 내용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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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에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지식적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회개가 선행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자신의 자아를 죽이고, 매순간 성령을 따라 행하도록 만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라는 의견이 다수이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머리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개신교구원파 등에서 주장하며, 대다수의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적인 가르침이라고 여긴다.

4. 신학적 중요성

로마서는 단순히 justification만 중점적으로 바라다보면 안 된다. 물론 로마서 자체도 바울로의 모든 신학이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울로의 신학 사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 이용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에 근거하여 원죄에 대한 신학을, 칼뱅(칼빈)은 로마서 9장에 근거하여 예정에 대한 신학을, 가톨릭 교회는 로마서 2장에 근거한 자연법에 대한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When any one understands this Epistle, he has a passage opened to him to the understanding of the whole Scripture.
누구든지 이 서간을 이해할 때에, 그에게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장 칼뱅, "Commentaries o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中
역사적으로도 이 로마서는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개신교에 큰 의미가 있는데 종교 개혁 운동의 원동력이었고, 감리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에게는 기적적인 회심의 체험을 맛보게 했으며, 현대 신학자 칼 바르트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를 폭파시킨 폭탄이 된 것도 로마서다.

4.1. justification의 의미

가톨릭정교회, 개신교는 이 로마서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justification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한국어 번역 역시도 차이가 난다. 서방교회라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을 바탕으로 바울로의 justification을 매우 중요한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두 종파는 미세한 관점의 차이를 갖고 있는데 개신교는 이를 '칭의', 천주교는 '의화'로 번역했고 이 둘이 내포하는 의미는 차이가 있다.

justification 개념은 로마서 3장 23~24절에 나오는 개념인데, 대부분의 한국의 개신교 종파에서 사용하는 개역개정 4판 성경과 한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 성경에서는 여기서 명백하게 차이 나는 번역을 보여주고 있다.
천주교 (성경) 개신교 (개역개정 4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13][14]
로마서 3장 23~24절

이 번역의 차이는 어찌 보면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 종파들의 교리 차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의 칭의와 가톨릭의 의화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단순하다. 칭의는 원래 인간이란 작자들은 절대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가 수난과 부활로 인간의 죄를 사해 주었고 그를 통해 하느님의 은혜가 인간들에게 미쳐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의인이 아니었던 자가 예수의 죄사함을 믿으면 하느님의 은혜를 얻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의화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진짜로 의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결국 가톨릭과 나머지 개신교 종파들의 구원관이 여기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들은 "인간은 의인이 될 수 없는데 예수를 믿으면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의인으로 칭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니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해석은 로마서 1장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과도 모순이 없고 마르틴 루터 역시 이 구조의 이신칭의를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개신교 종파들의 구원관이 흔히 오해되기도 하는데, '칭의'는 믿기만 하고 아무 짓 안 해도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절대로 아니다. 이런 주장은 구원파가 즐겨 하는데 전형적인 도덕무용론으로서 개신교에서도 이단 취급 당한다.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칭의 이후에는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선하게 살려 노력한다'는 설명이 뒷받침된다.

그러나 칭의론 자체가 잘못 해석하면 구원파스러운 해석으로 빠지기 십상인 신학적 이론이라 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루터를 대신하여 칼뱅과 웨슬리는 중생(거듭남)과 성화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들을 재정립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15]

반면 가톨릭의 의화는 의인들은 구원을 받고 그 의로움이 믿음에서 온다는 것 자체는 같은 그리스도인 만큼 동일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는 이들이 정말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톨릭 신자도 나쁜 짓 할 수 있던데요?"라는 당연한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로마서의 또 다른 구절은 5장 1-5절을 덧붙여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1-5절(한국천주교주교회의 번역본)

즉 가톨릭에서 말하는 의화의 내용은 '죄의 용서와 내면적 쇄신'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인간은 이 은총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은 인간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와 선행을 개신교보다 더 강조하는 편이다.

간혹 가다 가톨릭이 인간의 행위를 믿음과 동등한 구원의 조건으로 여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일부 가톨릭 비판자들의 잘못된 교리해석 혹은 악의적 왜곡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똑같은 믿음이지만 가톨릭에서는 행함 자체를 믿음의 한 측면이라고 보기 때문에 행위와 믿음을 분리해서 보는 대다수의 개신교 종파들과는 차이가 있다. 사실 믿음이 행위를 포함한다고 보든 아니든 성경 해석 자체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신교 종파들은 행위는 믿음의 열매와 같은 것이며 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선행으로 그 믿음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결과론적으로 놓고 보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관점 차이는 사실 교리상으로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며 결국 표현상의 차이로밖에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둘과 정교회 사이의 교리적 갭이 더 큰 편이다. 야고보서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가톨릭의 교리와 개신교의 교리로 모두 설명 가능하다. 결론적으로는 가톨릭의 교리의 핵심도 결국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고, 행위구원론은 일찍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발라버려서 박멸시켰기에 가톨릭에서도 이단이다.

물론 가톨릭에서 개인의 선행과 보속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이웃에 대한 자선 등의 선행을 강조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 다만 부정적 효과도 낳았는데, 자선의 본 의미가 퇴색되고 신자들이 이를 마치 일종의 퀘스트마냥 인식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이런 부작용의 가장 극단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터 시대에 독일을 뒤집어놓은 면죄부다.[16] 그리고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는 개신교가 유럽에 출현하는 계기가 된다.

당연히 가톨릭 입장에서는 훗날 개신교를 반박하면서도, 신자들이 선행을 퀘스트로 인식하는 부작용을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제6차 회기 전체를 의화에 대한 회의에 할당했으며, 그 결과로 '의화에 관한 교령(Decretum de iustificatione)'를 선포한다.[17] 가톨릭 교회의 의화론에 대한 상세한 정리는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를 참조하는 것을 추천한다.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justification의 해석에 대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가 늘어나고 있다. 루터교회, 감리회와 의화교리 공동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종파들이 기존 교리를 수정하였다기보다는, 서로 공통되는 사항들을 정리한 것에 가깝다.

의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영문 위키백과 참조.

정교회는 바울로가 말한 justification을 다른 뉘앙스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동방 서방 교회의 교리상의 강조점 차이에서 기원한다. 정교회의 구원론은 '테오시스'(神化)라고 칭한다. 자세한 내용은 예정설 문서의 '정교회의 구원론' 문단 참고.[18]

5. 논란

5.1. 권력에 대한 복종의 문제

로마서 13장의 1~7절의 경우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복종해야 하며 이를 거스르는 자는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에 지나치게 유착된 성직자들이나 신자들은 마치 국가 권력에 무조건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식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런 국가주의적 해석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내리는 편이다.
권력자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정의에서 일탈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
통치자가 성스러운 정의의 계율을 지키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세는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성스러운 정의에 반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세는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시편 2,2)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통치자와 권세에 대항했으나 영벌에 처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을 받았다. 사도 바울로는 지금 하위 권력에 대항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스러운 질서는 예를 들어 왕에게 반하여 공작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이 상위 권력에 반하여 하위 권력에 복종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모든 권세는 성스러운 권력의 하위 권력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반하여 지상의 권세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로마서 주석. 1022, 1028

가톨릭 교회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무작정 권력에 복종하는 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어디까지나 '성스러운 정의의 계율'을 지키는, 즉 하느님의 뜻에 맞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권력에만 복종해야 한다는 것.

한편 그리스도교는 초기에 고대 로마의 이교 희생제와 황제 신격화를 거부해서[19] 박해의 명분을 주기도 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참조.

5.2. 거짓말은 죄가 아닌가?

나의 거짓으로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돋보여 그분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로마서 3:7
그리스도교에서는 거짓말이 죄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바울로가 거짓말을 합리화하는 설명을 한다고 하여 바울로의 사도 정당성을 부인하는 소수 사람들도 있고, 이 구절을 이상하게 써먹어 거짓말은 죄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한 사이비 단체도 있다. 하지만 이 오해는 문맥을 무시한 인용이다. 좀 더 길게 보면
나의 거짓으로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더욱 돋보여 그분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더 나아가서 “악을 행하여 선이 생기게 하자.”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어떤 자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면서 우리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은 합당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로마서 3:7-8

즉 이 말은 이렇게 거짓말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자신은 그런 주장을 한 적 없다는 내용이다.

5.3. 간편한 구원?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 10:9-10)

이 구절을 들어 머리로만 믿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 받는다고 주장하는 교파들종종 있다. 이런 강경 침례파에서는 구원 영접기도라 칭하기도 한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등 개신교 계열 사이비 종교도 다 구원 받아야 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이단 사이비 종교들이 퍼지는 것을 기뻐해야 할 것이다. 물론 25억 그리스도교 인구 중 90프로 이상은 이런 주장을 하는 교파에 속해있지 않다.

이 구절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을 믿고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그 고백대로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절대적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자신의 육신의 욕망대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시인하는 것은 거짓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5.4. 온 이스라엘의 구원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로마서 11:25-27

종종 로마서의 이 구절을 들어 말세에는 현재 존재하는 국제법상의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주장되기도 하나, 현실적으로는 이루어지기 쉽지 않아보인다.

로마서 11장 14절[20]을 보면 바울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른 것을 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도록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차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충분한 숫자의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이른 것을 유대교인들이 보게 된다면 모든 유대교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전 세계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난 후에도 대부분의 유대교인들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내세운 거대 집단들이 대부분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오히려 종교를 내세워 각종 만행들을 저질러서 유대교인들의 반감만 샀기 때문이다. 로마서 11장 26-27절에서 인용된 이사야의 예언 처럼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 자체는 꽤 있게 되었지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이 충분히 많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유대교인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5.5. 임파테이션?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로마서 1장 11절 (개역개정)

개신교의 해석 중 일부인 신사도 운동에서는 이 구절을 들어 안수 등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장 10-11절 (개역개정)

위와 같은 주장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성령의 은사는 성령께서 사람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시는 것이며, 로마서 1장 11절은 단순히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구원, 사랑 등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길 원하시는 은혜 이외의 것[21]을 어떤 절차를 따르면 100퍼센트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주장이다. 임파테이션 믿고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안수 받은 후에 초능력자 행세하며 당최 맞는 게 없는 엉터리 선지자 노릇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에서는 모세-여호수아, 엘리야-엘리사 같은 케이스들이 임파테이션의 예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사역을 다 마친 사람이 하느님의 뜻대로 세워진 후계자에게 바통을 넘겨준 것이지 사람 마음대로 아무에게나 은사를 전이시킨 것이 아니다.

신사도 운동에서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안수하자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장면과 디모데전서 4장 14절[22], 디모데후서 1장 6절[23]에 나오는 안수를 통해 은사를 받는 디모데와 관련된 내용을 들어 임파테이션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수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성령을 못 받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안수를 받기만 하면 성령을 무조건 받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안수를 통해 성령을 받는 장면은 단순히 하느님이 안수받는 사람의 믿음을 보고 성령을 안수 받는 타이밍에 주신 것이고 안수라는 행위 자체는 단순히 사도들의 영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디모데가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은사를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이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에 디모데에게 은사를 주기를 원하셨는데, 하느님이 그것을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통해 선포하신 것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안수를 통하여 디모데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도록 하겠다는 말 역시 단순히 간절히 디모데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린도전서에는 분명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의 여부는 하느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나오는데, 임파테이션 등을 통해 초능력 놀이를 하는 신사도 운동의 행태는 상당히 불건전하며 하느님의 주권을 침해한다.



[1] 율법에서 요구하는 안식일, 할례 등등도 다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로마서 13장 8절에서 말하고 있다. 원래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만 지키면 되고, 그것이 최상위법이다. 그리고 그 밖의 율법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위법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육신의 힘으로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없기에, 믿음을 통해 성령을 따르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아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로마서의 가르침이다. 모세의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각종 종교적 의식을 통해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훈련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회개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2] 양심은 인간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인간의 행동에 대한 제어장치의 역할을 할 뿐이지, 믿음을 따르지 않았다면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고 해도 그것은 죄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양심적으로 길가에 떨어져 있는 쓰레기를 주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은근히 치켜세우는 마음을 품었다면 그것은 죄이다. 믿음은 회개로써 마음 속의 교만을 없앤 상태이므로, 믿음으로 행하는 자는 선한 일을 행할 때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3]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려는 성향이 있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의 죄를 대부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4]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의 요구가 삶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5] 육신 그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죄로 더러워진 육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는 이상 육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짓는 것 밖에 없다는 뜻이다.[6] 믿음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율법에 나와있는 선한 일을 하려고 할 때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뒤에 나오는 로마서 8장은 이와 대비하여 사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바울로가 거듭나기 이전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 이후의 상황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 부분의 핵심은 믿음을 따르고 있지 않을 때의 상황에 대한 묘사이므로 이러한 논란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7] 율법에서 요구하는 안식일, 할례 등등도 다 지키라는 것이 아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로마서 13장 8절에서 말하고 있다. 원래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만 지키면 되고, 그것이 최상위법이다. 그리고 그 밖의 율법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위법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육신의 힘으로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없기에, 믿음을 통해 성령을 따르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아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로마서의 가르침이다. 모세의 율법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각종 종교적 의식을 통해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훈련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회개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8] 이 부분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은데, 칼빈주의 예정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구원 받을 사람들은 하느님이 일부러 구원 받도록 창조하셨고, 구원 받지 못할 사람들은 하느님이 일부러 구원을 받지 못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반면, 칼빈주의 예정론을 지지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하느님은 각 개인의 특성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여 믿음을 가지게 될 것으로 예지된 사람은 미리 긍휼히 여기셔서 하느님의 자녀로 택하시고, 기회를 주어도 어차피 그 기회를 거절할 것이 뻔한 사람은 택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9] 로마서 참조[10] 우상숭배 강요 등 그리스도교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요구까지 순종하라는 것은 아니다.[11] 여기서 권세로 나타나는 표현 중 'the powers that be(TPTB)'라는 표현은 이후 영어에서 당국(the authorities), 책임자(the people in charge), 권력층(the establishment) 등을 의미하는 관용구적 표현의 유래가 되었다.(로마서 13:1)[12]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를 믿지만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자신의 의로 삼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정죄하지만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그런 사람한테 억지로 돼지고기를 먹도록 해서 그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거리끼는 마음을 품는 죄를 짓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13]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 '칭의(稱義)'. 다시 말해 '의로움을 칭함받는 것'이다.[14] 한편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하느님과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어 상당히 애매하게 번역하였다.[15] 사실 위의 설명은 로마서 해석차의 간단한 설명일 뿐이고 개신교 종파들은 출발부터가 가톨릭 교리의 대다수를 뒤엎어버리고 새로 출발한 교파들이라 각주에 덧붙인 믿음과 행위에 관한 사소한 시각 차이 외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나 예정설, 그리고 가톨릭의 구원관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교리인 연옥과 성사 등 무수하게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로마서와 칭의/의화의 관계에 관한 간단한 설명만 덧붙인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에 사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다.[16] 사실 이것 역시도 파고들면,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기부하면 보속으로 취급해 드립니다'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일 지역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선행이 퀘스트로 인식되었던 부작용의 가장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17] 간혹 현대 가톨릭루터교와 대화하기 위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선언을 포기했다는 이상한 인식이 있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같은 세계 공의회에서 말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선언들은, 무류성을 지닌다고 가톨릭은 해석한다. 따라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뜻에 반하는 순간, 그 즉시 가톨릭 교리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된다.[18] 다만 실질적으로는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가톨릭 교회에서도 의화의 도달점인 성화는 곧 신화(神化)이고, 천국은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를 누리는 상태'로 설명된다. 걍 뉘앙스 차이가 요렇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이자.[19] 3세기 말에 그리스도교 인구가 늘기 시작하면서 동방 속주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공직에 진출하기 시작했지만, 297년경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따라 이교 제의에 참석한 그리스도인 관료들이 성호를 그어서 황제에게 찍혔다. 테베스테의 성 막시밀리아노처럼 입대 시 그리스도인이라며 황제 숭배와 군입대를 거부했다가 처형된 사례도 있었다.[20] 나는 아무쪼록, 내 동족에게 질투심을 일으켜서, 그 가운데서 몇 사람만이라도 구원하고 싶습니다.[21] 가장 흔한 은사라고 하는 방언도 여기에 포함된다.[22]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23]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