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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04:57:52

바울로

사도 바울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tPaul_ElGreco.jpg
출생
약 기원후 5년
로마 제국 킬리키아 타르수스
사망
기원후 67년 추정 (향년 61–62세)[1]
로마 제국 로마
종교
유대교그리스도교
사인
참수형
축일
1월 25일(회심)[2]
6월 29일(가톨릭, 성공회)[3]
7월 12일(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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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3. 생애
3.1. 출생3.2. 다마스쿠스 도상 회심3.3. 안티오키아 교회에서의 첫 활동3.4. 제1차 선교 여행(47년-49년)
3.4.1. 1차 여행 후
3.5. 제2차 선교 여행(49년-52년)3.6. 제3차 선교 여행(53년-57년)3.7. 제4차 선교 여행 (로마 여행, 58년-67년)
4. 직업5. 건강6. 바울로의 신학
6.1. 이방인의 사도6.2. 동포들의 회심과 교회의 일치6.3. 의인(義認)
7. 바울로 서간8. 바울로와 예수
8.1. 신화론8.2. 반대론
9. 평가와 오해
9.1. 바울로와 유대교9.2. 성관념에 대한 논란9.3. 현실 권력과 제도에 대한 복종
10. 문화에서11. 매체에서12. 여담

[clearfix]

1. 개요

그리스도께서는 ... 맨 마지막으로는 배냇병신[9]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실상 나는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이며 더구나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니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의 나로 있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 덕분입니다. 내게 대한 그분의 은총이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그들 모두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마는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0]
고린토1서 15장 3-10절(200주년 신약성서)[11]
바오로는 신약 성경에서 만날 수 있는 최초의 신학자다. 그가 제2세대 사람으로서 지상 예수를 전혀 알지 못했고 이미 존재하던, 또는 형성되어 가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합류했어도, 이 말은 타당하다. 바오로가 (특정 상황에서 쓴) 서간 몇 편만 남겼고, 완결된 체계를 정립할 기회를 전혀 가지지 못했거나 그저 모색했을 뿐이었지만, 그에게 힘입은 신학적 자극들은 극히 소중하다. 바오로는 선두에 서 있지는 않았지만, 뭐라 해도 갓 출발하던 그리스도교를 결정적으로 꼴짓는 데 함께했다.
요아힘 그닐카 Joachim Gnilka, 《신약 성경 신학》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이종한 옮김, 23쪽
신약성경에 속한 편지(서간, 서신)의 주요 저자이자, 1세기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를 닦은 주요 신학자이다.[12] 비록 바울로는 12사도처럼 사도시대 최초의 인물은 아니었으나 많은 중요한 신학적 지식을 이전 세대로부터 전수 받았으며, 갓 출발하던 그리스도교를 결정적으로 구성하는 데 함께했다.[13] 그리스도교 박해자로서 시작해 회심한 후 이방인의 사도로서 순교한 바울로는 사후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바울로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평은 유대교 학자 Joseph Klausner의 다음 평가일 것이다.
"메시아 왕의 길을 닦는 자"[14]

2. 이름

한글 표기가 바울로[15], 바오로[16], 바우로[17], 바울[18] 등 네 가지나 된다.

히브리어식 이름은 '사울(שָׁאוּל‎ / Šāʾūl)'이다.[19] 이는 사도행전에만 나오는 표기이며, 바울로 자신이 쓴 서간에서는 라틴어식 이름 파울루스(Paulus)의 그리스어식 표기인 파울로스(Παῦλος)를 사용했다.[20] 해당 이름은 현대 그리스어로 파블로스(Παύλος)라고 하며, 라틴어 파울루스(Paulus)는 영어권의 남성 인명인 (Paul)의 어원이다.

학계에서는 통상 바울로를 주명으로, 사울을 별명으로 추정한다.
두 이름의 분류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아무튼 바울로는 성cognomen, 주명主名이고, 반면 사울은 가정이나 친지 동아리에서 사용된 별명supernomen(또는 signum)이었으리라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로써 바울로가 자신의 둘째 이름을 편지에서 한 번도 쓰지 않는 것도 부분적으로 설명된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을 언제나 주명인 바울로로만 소개하면서, 그 이름을 자기 직분들과 결부시킨다(예를 들어 로마서 1장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요 부르심받은 사도인 ··· 바울로"). 어쨌든 로마인에게는 드물고 비로마인 특히 그리스 동방에서도 "극히 희귀한" 바울로라는 이름이 어떻게 해서 아이에게 붙여졌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 로마 시민은 사법私法·소송법·국법상의 특권들을 보유했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경우를 제외하면,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황제가 특별한 공로나 정치적 고려에 터해 개인 혹은 집단 전체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그런 일을 많이 했다. 다른 하나는 속량을 통해 시민권을 얻는 것이었다.[21] 그러나 시민권과 결부된 권리들은 제한될 수 있었다. 이런 사정을 언급하는 것은, 바울로의 부모 혹은 선조가 그런 방식으로 로마 시민권을 얻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22]
요아힘 그닐카 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euge), 이종한 옮김, 38쪽

3. 생애

3.1. 출생

(상략) 나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공동번역 성서, 로마서 11장 1절
베냐민 지파 소속의 디아스포라 유대인[23]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으로 유명한 아나톨리아의 항구도시 타르수스(다르소) 태생이다.[24]

학자들은 보통 바울로가 기원후 5년 즈음에 태어난 것으로 이해한다: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가톨릭 성경, 필레몬에게 보낸 서간 1:9
필레몬서가 친서이고 이 편지가 기원후 61년경에 기록되었다는 가정 하에, 기원후 5년을 바울로의 탄생 기간으로 어림잡을 수 있다. 제임스 D. G. 던은 출생 기간을 기원후 1-2년으로, 제롬 머피-오코너는 기원후 6년으로 추정했다.

또 바울로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제국 시민권이 있었으며, 위기 상황에서 자신이 로마 시민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장면이 성경에도 몇 번 등장한다.[25] 바울로가 로마 시민권을 얻은 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로마의 용병으로서 군에서 복무한 대가로서 그 가문에 주어졌다고 한다(출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26] 이것으로 짐작건대 바울로는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조부 대부터 로마인이 되었으므로 유대인다운 소양은 물론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소양들을 익힌 듯하다.

그런 바울로가 언제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제자격인 루카가 쓴 사도행전에서는 가말리엘[27]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바울로는 당시 진보했던 그리스 철학은 물론, 정통 유대교의 율법학에도 능통할 수 있었다. 실제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그의 철학과 율법학이 상당히 뛰어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엄격한 바리사이파로 활동했던 바울로는, 초기 그리스도교 여러 공동체 박해의 선봉에 섰다. 그 박해 중 하나는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순교 당시 유대인 측의 증인으로 선 것이다. 바울로의 열성 있는 박해 탓에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각처로 뿔뿔이 흩어지자 그는 흩어진 그 그리스도인들까지 열정 있게 추적해 잡아들이려고 할 정도였으며, 바울로는 갈라디아서에서도 자신이 유대교를 주위 사람들보다도 과하게 믿었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28] 즉, 타고난 종교심 자체가 상당히 강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핍박과 옥고 등의 숱한 고난들과 생업에도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이 바울로의 과도한 종교심을 억제하여, 바울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 광신도화 되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도록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3.2. 다마스쿠스 도상 회심

사도 바울로 등의 경칭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제 바울로는 12사도에 포함되기는 고사하고 생전의 예수를 직접 만난 적도 없다.

사도행전을 보면 유대교에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바울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갑자기 번쩍이면서 하늘에서 환한 빛이 바울로를 비추었고, 자연스럽게 엎어졌다. 빛 가운데서 "사울아[29],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이 들렸다. 바울로가 "주여[30],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니라."라고 하였다. 이에 사울은 두려워 매우 떨면서 말하길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라고 하자 "일어나서 도시로 들어가라. 네가 무엇을 해야할지 일러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듣게 되리라."라고 하였다.

바울로와 동행하던 사람들은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안이 벙벙해서 말하지 못하고 그저 서 있기만 하였다. 바울로는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동행하던 주변 사람들이 사울의 손을 잡고 인도하여 다마스쿠스로 갔다. 바울로는 다마스쿠스로 오다가 겪은 경험이 놀랍고 충격스러워서 앞이 보이지 않은 채 사흘 동안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있었다. 환상 중에 나타난 예수의 지시를 받은 그리스도인 신자 하나니아스가 찾아와 사울에게 기도를 해주는 것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이렇게 하여 바울로는 예수가 하느님의 외아들임을 널리 설파하고, 유대인들은 "저거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다가 신고하던 바울로 맞음? 사람이 왜 저렇게 변했음?"하고 당황하게 된다. 이 변화로 바울로는 유대교인들에게 배신자로서 취급되어 살해 위협을 받게 된다.

이후 바울로의 행적은 기록의 디테일이 조금 달라진다. 바울로 자신이 직접 작성한 갈라티아서에서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고 말한다.[31] 그 후 3년이 지나고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지만, 베드로를 만나지 못하고 예수의 형제 야고보만을 만났다고 한다. 반면 사도행전에서는 이러한 디테일이 생략되고, 다마스쿠스에서 곧바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바울로가 그 지역의 유다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꽤 긴 시간이 지나자(사도 9,23)" 유다인들이 바울로를 없애려 들자 제자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 다마스쿠스를 탈출해 목숨을 겨우 건졌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마스쿠스 체험의 연도를 짐작할 수 있다.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제11장을 보면, 유대교인들이 '아레타스 왕'의 관리와 결탁하여 바울로를 죽이려 했다고 이야기한다.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로마 제국 측으로부터 다마스쿠스 통치권을 이양받은 서기 37년에서 아레타스가 죽은 서기 40년 사이로 좁혀진다.

바울로는 자신의 다마스쿠스 체험을 이렇게만 설명했지만 14년이 지난 후 고린토서 후서에서 정말로 자기가 경험했던 것을 이야기한다. 단순히 눈이 며칠 안보이고, 음성이 들리고 한 것이 아니었다. 바울로는 회심한 그날 하늘로 올라가 예수를 직접 보고 내려왔다. 단, 이 체험은 다마스쿠스 체험보다 조금 뒤에, 혼자 있을 때 한 체험일 수 있다.

바울로는 자신이 개척한 고린토 교회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큰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바울로를 부정하고 할례 받고, 유대교의 율법까지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한 것에 많은 신자들이 동조한 것이었다. 이에 바울로는 고린토서 후서에서 이 '거짓 교사'들이 자신을 공격한 것을 하나하나 변호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고린토 교회에 와서 자신들이 행한 기적과 이적을 자랑했던 것 같다. 바울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내가 지금 하는 말은 주님의 명령을 받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렇게 장담하며 자랑하는 것은 내가 어리석어서 하는 짓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속된 것들을 가지고 자랑을 하고 있으니 나도 자랑해 보겠습니다.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지만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비로운 영상과 계시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압니다. -몸째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서 올라갔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을 자랑하려고 하며 나 자신에 관해서는 나의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다른 것도 자랑할 마음이 있어서 자랑한다 하더라도 사실대로만 말할 것이기 때문에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 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게서 보고 듣고 한 것 이상으로 나를 평가하게 될까봐 나는 자랑을 그만하겠습니다.
내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 해서 잔뜩 교만해질까봐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하나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나를 줄곧 괴롭혀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만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고통이 내게서 떠나게 해주시기를 주님께 세 번이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이미 내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번번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게 머무르도록 하려고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약해졌을 때 오히려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토서 후서

3.3. 안티오키아 교회에서의 첫 활동

이후 바울로는 예루살렘을 방문하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전적을 생각해 바울로를 믿지 못하여 만나기를 꺼렸지만, 바르나바(개역성경의 바나바)가 중재하여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다고 한다. 그러고서 바르나바와 안티오키아로 가서 그곳의 교회에서 활동한 듯하다.

3.4. 제1차 선교 여행(47년-49년)

그러다가 47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바르나바와 바울로를 선택하여 선교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려고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게 된다. 유대식 이름 사울이 더 이상 쓰이지 않고 헬라어식 이름 바울로만 기록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초기에는 키프로스와 소아시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우선 키프로스의 수도인 파포스(바보)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예수를 전했다. 이 때 총독 세르기우스 파울루스의 앞에서 자신을 망신 주려는 마술사 엘루마(바예수)[32]를 저주하여 눈을 멀게 한 일화도 존재한다. 이 후 베르게(버가)에 이르렀을 때 마르코가 여로를 버티지 못하고 하차하는 일이 발생한다.[33] 그러나 문제가 있어서 다툰 것 뿐, 바르바나나 마르코와 사이가 악화된 것은 아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바울로가 마르코를 가리켜 '나의 일에 유익한 자'라고 부를 정도이다.

어쨌든 타우르스 산을 건너 피시디아 안티오키아로 도착한 바울로는 회당에서 지속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신도들을 늘려나간다. 이에 유대인들은 귀족들과 세력가들을 충동질해 바울로에게 축객령을 내리려고 했...는데, 이미 바울로는 일 다 끝내고 떠날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바울로는 다음 목적지인 이고니온에서도 열심히 선교활동을 이어나간다. 그런데 본격적인 문제가 이 때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피시디아에서 바울로를 반대했던 그 유대인들이 아예 바울로를 따라다니면서 그 지역 사람들을 선동하며 훼방을 놓기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는 선동당한 사람들이 바울로를 잡아 돌로 쳐 죽이려고 달려들기에 이른다. 때문에 바울로는 이고니온에서는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루스드라로 떠나야 했다.

루스드라에서는 조금 황당한 일이 있었는데, 루스드라에서 선천적으로 병이 있어 서지 못하는 한 앉은뱅이가 설교를 아주 잘 경청하는 걸 보고는 바울로가 그를 걷게 한 일이 있었는데,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바울로를 헤르메스, 바르나바를 제우스의 현신이라고 소리치며[34][35] 두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려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이에 멘탈이 붕괴되어 대경실색한 두 사람이 그만두라고 소리를 지르며 제지하여 다행히 무사히 지나가긴 했다.

그런데 그 후, 위에서 얘기한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또 따라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그런데 하필 그 때 바울로를 발견한 사람들이 문답무용으로 바울로를 잡아 돌로 치고 밖에 내버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소식을 듣고 뒤늦게 바르나바 등이 달려왔을 때, 죽은 줄 알았던 바울로가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이 후 몸을 추스른 바울로는 데르베로 가서 다시 선교활동을 하고, 그 후 루스드라, 이고니온 등의 왔던 길을 다시 되짚어 출발지인 안티오키아로 귀환하는 것으로 제1차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마친다.

3.4.1. 1차 여행 후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바울로 일행은 여기서도 수난을 겪는다. 유대교 출신의 교인들이 안티오키아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인즉 할례는 모세의 법에 정해진 의식이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바울로 일행들과 언쟁이 벌어지는데,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갈라티아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이것을 부정한 바울로는 사기꾼이라는 소리가 나돌고 있으며, 심지어 갈라티아 교회의 사람들 중 일부는 그걸 믿고 할례를 받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로 인해 49년 예루살렘 사도회의, 즉 최초의 총회가 열리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바울로는 크게 실망하여 갈라티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니, 이것이 바로 복음 대헌장이라 불리는 '갈라디아서'이다.[36] 그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지, 아예 갈라디아서 서두부터 노골적으로 "분명히 내가 그렇게 예수를 가르쳤는데 딴 소리가 들어오니까 금방 그걸 또 믿고 배신하시다니 참 대단들 하시오."[37]라며 비판하고 있다.

3.5. 제2차 선교 여행(49년-52년)

1차 여행 항목의 주석에도 짧게 나와 있지만 출발 전부터 작은 트러블이 발생했다. 1차 여행 때 마르코(마가)가 중도에 하차한 것 때문에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이번 여행에도 마르코를 데리고 갈 지 말 지를 두고 크게 다툰 것이다. 바르나바는 마르코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마르코에게 실망했던 바울로는 끝까지 반대를 굽히지 않아서 결국 여행 팀이 둘로 갈라지게 되고,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해로를 통해 키프로스로 다시 향했으며, 바울로는 실라(실바누스)를 데리고 킬리키아(길리기아) 쪽으로 향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선교 팀이 둘로 늘어나는 순작용 아닌 순작용이기도 했다.

1차 여행 때는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해 위쪽으로 C자를 그리면서 향했는데, 이번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 곧바로 위로 올라가 루스드라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루스드라에서 바울로와 합류한 제자가 바로 티모데오이다. 이로 인해 바울로 팀의 활동이 더 활발해지게 된다. 바울로는 소아시아 방향의 비두니아 쪽으로 가고 싶어했는데, 성경에 따르면 '예수의 영이 가지 못하게 막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바울로는 비두니아와 동서 반대편에 있는 드로아[38]에서 잠시 머무르게 된다. 이게 무슨 일인고 하니, 바울로의 환상에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우리를 도와달라'고 하고, 그제서야 바울로는 '우리를 마케도니아로 보내시려는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이 때 의사 '루가(루카스/루카/누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1차 선교여행 때 돌팔매질을 당한 것으로 인해 지병을 얻게 된 바울로의 주치의이자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이윽고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의 필립비에 도착한 바울로 일행은 거리에서 한 귀신들린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소녀가 바울로 일행을 만날 때마다 그들을 향해 "이 사람들이 하느님의 종이다"라고 몇날 며칠을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바울로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그 귀신을 쫓아버리는데, 여기서도 문제는 역시 발생했다. 그동안 이 소녀의 예언을 이용해 복채를 벌어먹던 자들이 소녀에게서 귀신이 떠나 더이상 예언을 할 수가 없게 되어 돈을 벌 수 없게 되자 앙심을 품고 행정관에게 바울로를 혹세무민하는 자들이라고 참소한 것이다. 이 행정관은 이 자들의 말만 듣고는 바울로의 변론을 제대로 들을 생각도 않고 다짜고짜 옷을 벗기고 채찍으로 치라고 명하게 되니, 바울로와 실라는 졸지에 매타작을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그 날 한밤 중, 바울로와 실라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자 별안간 지진이 일어나 감옥이 박살이 나 죄수들이 몽땅 풀려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망연자실하여 '난 죽었다'를 외치며 자결하려는 간수장[39]을 소리를 질러 말리고, 그의 배려로 치료를 받은 바울로는 간수장과 그 가족들에게 세례를 준다.[40] 다음날 행정관이 석방조치를 내리자 바울로는 "로마 시민을 재판도 없이 채찍질하고 이제 와서 그냥 나가라고 하는 것이오? 직접 와서 우릴 데려가라고 하시오."라고 요구한다.[41] 이 사실을 알게 된 행정관은 당장 달려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제발 나가달라고 빌었고, 바울로는 별 말 없이 관청을 떠난다.

이후, 바울로는 필립비를 떠나 테살로니카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도 여느 때처럼 선교활동을 하려니 이번엔 또 다른 유대인들이 나타나 불량배까지 동원해 바울로를 박해하기 시작한다. 이 때 바울로는 야손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야손의 도움으로 밤에 몰래 피신하여 베뢰아로 가게 된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테살로니카의 사람들보다 훨씬 신사적이어서 설교를 더 잘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소식이 또 데살로니카에 있던 그 유대인들의 귀에 들어가자 이들도 베뢰아까지 쫓아와 악성 루머를 퍼뜨리기 시작한다. 결국 바울로는 티모데오와 실라를 상황 보고역으로 베뢰아에 남겨두고 혼자 배를 타고 신들의 천지이자 전도 난이도 최종보스급이라 할 만한 아테네로 향한다.[42]

당시 아테네에서는 가는 곳곳마다 우상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고[43] 가는 날마다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간의 토론이 벌어졌는데, 바울로는 티모데오와 실라가 올 때까지 매일 회당에서 사람들과 토론을 즐겼다. 에피쿠로스 학파스토아 학파 등 쟁쟁한 그리스 학자들 앞에서 한 연설에는 바울로의 학문상 배경이 잘 드러난다. 그러던 어느날 바울로의 설교를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린 잘 못 알아듣겠는데, '아레오바고(아레오파고스)'[44]라는 대형 연극장이 있으니까 거기서 대대적으로 설명 좀 해주쇼"라고 하니 바울로는 속으로 기회가 왔다 쾌재를 올리며 아레오바고로 향한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바울로는 그리스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했다고 한다.
22 바울로는 아레오파고 법정에 서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23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24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45]
25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27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28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46] 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다.'[47]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29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낸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무지했던 때에는 눈을 감아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는 사람에게나 다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31 과연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분을 시켜 온 세상을 올바르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 사도행전 17:22~31 (공동번역)

바울로의 노력으로 그리스인(희랍인)들도 그리스도교에 귀의했지만,[48] 그리스도교 내부의 유대인들은 그리스인들도 할례를 위시한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고 바울로는 그리스인들에게 유대인들의 율법을 강요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논쟁 끝에 결국 회의는 그리스인들에게 유대인들과의 친교를 목적해 음식과 할례 문제에 조심하자는 차원에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바울로는 아테네를 떠나 코린토스로 향한다.

코린토스에서 '아퀼라’와 '브리스길라'라는 로마 출신 유대인 그리스도교도 부부를[49] 만난 바울로는 이 부부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는데 이 부부 또한 바울로에게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바울로의 생업이 천막 제작이었는데, 남편인 아퀼라도 마침 천막 제작업을 하는 사람인지라, 바울로는 같이 천막 제작을 도우며 회당에서 선교활동을 지속하게 된다. 그러기를 6개월, 드디어 마케도니아에서 티모데오와 실라가 도착해 교회가 안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런데 아직 테살로니키 성도들에게 아직 미성숙한 면이 보인다는 보고를 들은 바울로는 장문의 편지를 두 통 써서 티모데오 편에 보내 성도들에게 가르치게 해 주는데, 이 편지가 바로 '데살로니가 전·후서'이다.

코린토스에서도 유대인들은 역시 바울로를 반대했는데, 바울로는 아예 자기 옷을 털면서[50] '이제 니들은 벌을 받든지 어떻게 돼도 난 모른다.'라며 두번 다시 회당에 가지 않는다. 그렇게 코린토스에서 가르치기를 1년 6개월을 하고 있었는데, 웬일로 유대인들의 회당장인 크리스보가 바울로에게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분노한 유대인들은 크리스보를 파면하고 '소스데네'라는 자를 회당장으로 앉혀 바울로를 신임 총독 갈리오에게 고소하게 하는데, 이후의 일이 또 골때린다. 유대인들이 총독에게 '하느님을 섬긴다는 놈이 율법을 어기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둥 온갖 고소문을 읊고 나자 바울로의 차례가 되어 변론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갈리오가 변론을 중지시키고는 하는 소리가 "이게 무슨 중범죄나 심각한 일이면 내가 들어야 하는게 맞는데, 지금 고소문 들어보니까 그쪽 유대인들끼리의 종교 문제 아니오? 이런 일로 굳이 나까지 건들지 말고 당신들끼리 처리하시오. 난 그쪽 사정 가지고 재판관 노릇하고 싶지 않으니까."...되시겠다. 한마디로 고소를 각하한 것. 회당장 소스데네는 그 자리에서 속 터진 유대인들한테 몰매를 맞았다.

이렇게 허탈한 재판이 끝난 후, 유대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나서 마음이 바뀐 소스데네까지 새 성도로 맞아들이는 일까지 있은 후에 바울로는 1년 6개월의 여정을 마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간다.

일반적으로 행전 18:1-17의 사건들은 클라우디우스 칙령이 이루어진 기간과 연결짓는다. 오로시우스는 칙령이 기원후 49년에 일어났다고 기록했다:
클라우디우스는 통치 9년째 되던 해에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 요세푸스와 수에토니우스 모두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후자의 기록을 더 선호한다: "클라우디우스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한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분노로 계속해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시우스, Historiae Adversus Paganos VII, 6:15
그러나 게르트 뤼데만은 클라우디우스 칙령을 기원후 49년이 아니라 41년으로 간주했는데, 근거는 다음과 같다:
유대인들이 다시 너무 많이 늘어나서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는 도시에서 그들을 쫓아 내기가 어려웠을 때, 그는 그들을 쫓아 내지 않고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계속하면서 모임을 갖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가이우스가 다시 도입한 모임을 해산했다.
카시우스 디오, Historia Romana LX, 6:6
기원후 49년에 일어났던 유대인 추방 명령과 달리, 디오가 언급한 41년의 사건에서는 유대인들을 추방하지는 않았지만 모임을 금지했다 (Lüdemann, Paulus, der Heidenapostel). 그러나 헬가 보터만에 의하면, 41년과 49년의 명령은 각각 다른 사건이었다 (Botermann, Das Judenedikt Des Kaisers Claudius). 우도 슈넬레는 별개의 사건인 41년의 칙령과 달리, 18:1-17의 사건은 49년의 칙령과 더 잘 조화된다고 결론지었다 (Schnelle, 신약정경개론).

행전 18:12에는 갈리오가 아카이아의 총독이라고 언급되었다: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작당을 하여 바울로를 붙잡아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공동번역성서
제롬 머피-오코너에 의하면, 클라우디우스가 델피로 보낸 편지에서 갈리오의 재임 기간이 언급된다. 또한 클라우디우스가 26번째 임페라토르로 등극되었다고 적혀 있다. 또한 편지는 갈리오의 후임자나 델피의 위원회에게 보내졌다 (Murphy-O'Connor, St. Paul's Corinth: Texts and Archaeology). 한편 구스타프 아돌프 다이스만에 의하면, 27번째 임페라토르 등극은 기원후 52년 8월 1일에 이루어졌다 (Deissmann, Paulus). 따라서 결론적으로 갈리오는 51년 초에서 52년 초여름까지 총독으로 재임했다 (Schnelle, 신약정경개론).

따라서 바울로는 기원후 49-50년에 고린토를 도착했으며, 행전 18:11:
바울로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거기에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공동번역성서
1년 6개월에 대한 설명을 통해, 바울로가 붙잡혀 갈리오에게 끌려갔을 때가 51년 여름 즈음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3.6. 제3차 선교 여행(53년-57년)

준비를 마친 바울로는 드디어 안티오키아를 출발한다. 이번 제3차 선교여행은 바울로의 네 번에 걸친 여행 중 최장거리로 꼽힌다. 바울로는 제2차 여행 때 불발됐던 에페수스 행을 계획했지만, 에페수스에는 브리스길라아굴라 부부가 있으니 일단 뒤로 미루고 우선 갈라티아프리기아로 향한다.

시점을 잠시 돌려서 바울로의 다음 목적지인 에페수스에서는 아폴로라는 언변이 뛰어난 청년이 회당에서 예수에 대해 설교하며 가르치고 있었다. 아폴로의 지인이었던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폴로의 설교를 듣다가 아폴로가 세례 요한의 세례 밖에는 모르고 사도행전의 초반에 나왔던 12사도들에게 성령의 불꽃이 내려온 그 세례는 모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다. 이후 아폴로는 부부에게 그 세례에 대해서 다시 배우게 된다. 이후 성령에 대해 알게 된 아폴로는 그 길로 코린토스로 떠나 더욱 열심히 교육활동에 힘쓴다.

한편 아폴로가 에페수스를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이어서 바울로가 에페수스에 이른다. 바울로는 여기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는데, 그 중 몇몇 사람들이 예수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들에게 예수와 성령에 대해 가르친 뒤,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방 출신인 그들에게도 12사도에게 내려온 것처럼 성령이 내려 방언과 예언을 시작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이 사람들의 숫자가 정확히 12명이었다. 바울로는 그 후로 3개월 동안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바울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바울로를 비난하자 그는 신자들을 데리고 떠나 티란노스(두란노) 서원으로 가서 강의활동을 했다.[51]

그러던 중 코린토스에서 변고가 들려왔는데, 코린토스 교회의 성도들 사이에 이론이 나뉘어 파벌이 생겨 바울로파, 아폴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분열되었다는 것이었다. 경악한 바울로는 편지를 써서 티모데오 편으로 코린토스 교회에 보내니, 이것이 '고린도 전서'다. "한 분이신 예수가 어떻게 넷으로 갈라진단 말입니까? 십자가 처형을 예수님이 당했지 내가 당했습니까?"[52]라며, 성도들을 야단침과 동시에 당론이 나뉘어지면서 생긴 성도들의 의문점에 대해 답변을 하는 내용이다.

어쨌든 그 후, 바울로는 에페수스에 2년간 머무르면서 선교활동과 함께 기적으로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도 계속한다. 이번엔 제법 오래 자리잡고 활동한 덕에 그에 대한 소문과 명성이 꽤 멀리 퍼져나갔다. 명성이 퍼지다 못해 바울로의 옷가지를 멋대로 가져가 사용하기까지 했는데 병이 낫고 귀신이 도망치는가 하면 마술사들도 바울로의 이름을 팔아 귀신이 들린 사람들에서 귀신을 내쫓아 내는 공연을 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유대교의 제사장인 스케바의 일곱 아들들이 이 소문을 듣고는 자기들도 민중들에게 인기를 끌어볼 목적으로 그 거리에서 귀신이 독하게 들려 골치깨나 썩이던 사람을 데려와서 구경꾼들을 불러모으고는 "바울로가 믿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니 귀신은 당장 나오너라"하고 외쳤다. 그런데 그 귀신이 그 형제들에게 말하길 "예수랑 바울로 둘 다 내가 잘 알거든? 니들이 누군데 감히 그 이름을 입에 올리냐?"며 오히려 일곱 형제들을 깔아뭉개면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흠씬 두들겨 패고,[53] 그 형제들은 만신창이가 된 채 알몸으로 도망치면서 오히려 망신만 실컷 당한다. 이 사건으로 바울로의 명성이 더욱 높아지게 된 것도 모자라 사람들이 바울로에게 찾아와 회개하거나 훔쳐갔던 물건들을 도로 가져와 사죄하는 일까지 생기기도 한다. 또한 마술 등을 생업으로 삼던 사람들도 회개하고는 마술에 대한 책을 모두 모아 불태우기까지 하는데, 기록하기를 태운 책 값이 전부 약 5만 드라크마.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일당이 1드라크마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라 할 것이다.

바울로는 에페수스에 머문 지 거진 3년이 다 채워져가자 슬슬 에페수스를 떠나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갈 계획을 세우고 티모데오와 에라스투스 두 사람을 선발대로 삼아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낸다. 그러던 중 또 소동이 벌어지는데, 에페수스의 '데메트리우스'라는 은 장인의 공방[54] 직원들이 바울로에게 전도를 받고 자기가 하는 일이 우상을 섬기는 짓이라며 줄줄이 사표파티를 벌인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혔던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55]으로 대표되듯, 에페수스와 그 근방지역은 그리스 신화의 사상이 팽배하던 때였으므로, 은으로 비싼 신상을 만들어 팔아 부를 유지하는 은 장인들에게는 신상 제작을 못하게 되면 영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다.[56] 이에 화가 난 데메트리우스는 같은 은 장인들을 소집하여 "이 작자 땜시 우리 사업장이 하루아침에 개차반 취급당하게 생겼고, 아르테미스 여신의 위엄이 땅에 떨어지게 생겼다."라고 주장한다. 그러자 장인들도 분노하며 그 자리에서 "아르테미스 만세"를 외쳐대기 시작한다.[57]

이내 민중들까지 덩달아 흥분하여 대국민시위를 방불케하는 일대 소동이 터지고[58], 이들은 연극장으로 몰려가서 큰 소리로 "아르테미스여!"를 외쳐대며 바울로의 제자인 가이우스와 아리스타르쿠스를 연극장으로 연행한다. 소식을 들은 바울로는 급히 연극장으로 가려 하지만 에페수스의 의원들 몇이 찾아와 "지금 나가시면 선생님 짱돌맞아 죽습니다"라며 바울로를 말리고, 거기 관리 중에 있던 바울로의 친구도 급보를 보내 연극장으로 오면 안된다고 주의하니, 바울로도 하릴없이 기다리게 된다. 한편 그 무렵 연극장은 완전히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는데, 그 거대한 연회장을 꽉꽉 들어채운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할 소리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니 누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 된 것이었다. 그렇게 소리지르기를 장장 2시간... 서기장이 나타나 사람들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자초지종을 들은 뒤 사람들에게 연설을 시작한다. "제우스와 아르테미스가 우리 최고의 신인 걸 누가 모릅니까. 그리고 이 사람들이 우리 여신을 모욕이라도 했습니까, 뭘 훔치기라도 했습니까? 고발할 게 있으면 정식으로 고발을 하고, 다른 원하는 게 있으면 의회에 청원을 하세요. 아무 이유도 없이 와서 떠들다가 로마한테 소요죄로 책잡힐 일 있습니까?"라는 논리정연한 연설에 민중들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일시에 모두 흩어진다. 덕분에 바울로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소동이 끝난 후, 바울로는 성도들과 작별을 한 후 계획대로 에페수스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드로아에 도착했다. 거기서 1주일을 머물며 선교활동을 한 후,[59] 필리피아로 가서 제자인 티투스를 기다렸는데, 바울로를 찾아온 티투스가 코린토스에서 바울로를 반대하던 사기꾼교사들이 모두 쫓겨나고, 그들에게 속아서 잘못 생활하던 교인들이 신앙을 회복했다는 희소식을 가져온다.[60] 이에 바울로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다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도 후서'이다. 바울로는 내친김에 아예 다시 한번 더 코린토스로 직접 찾아가 3개월간 교인들을 격려하며 교육을 했다. 그리고 이 근방에서 갈 만한 곳을 다 다녀왔다고 판단한 바울로는 마침내 로마로 갈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코린토스에서 로마 교회에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바로 신약성경 중에서도 유명한 로마서 되시겠다.

그 후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경유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바울로가 해로를 통해 간다는 정보를 입수해 아예 바다 위에서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온다. 바울로는 할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 육로를 통해 마케도니아로 간 뒤, 드로아를 지나 미틸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에페수스의 장로들을 소집하는데, 장로들이 모이자 바울로는 장로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22 이제 나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거기에 가면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릅니다.
23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어느 도시에 들어가든지 투옥과 고통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나에게 일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내 사명을 완수하고 하느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 예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임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25 나는 이제 분명히 압니다. 여러분은 모두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하느님 나라를 줄곧 선포하였으니ㅡ
- 사도행전 20:22~25 (공동번역)

말을 마치고 장로들과 함께 앉아 마지막으로 기도를 올리고는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그 후 잠시 여러 군데를 돌며 작별인사를 하다가 카이사리아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어느날 유대에서 아가버스라는 선지자가 급히 바울로에게 왔는데, 아가버스가 다짜고짜 바울로의 허리띠를 벗기더니 그 허리띠로 자기 손발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이 허리띠의 주인을 이렇게 묶어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성령의 예언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놀라 바울로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마라고 애원하지만, 바울로는 "자꾸 그러시면 제 마음이 더 아픕니다. 저는 이미 죽을 것도 각오한 몸입니다"라며 뜻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바울로는 배를 타고 떠나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되니, 이것으로 제3차 선교여행이 막을 내린다.

3.7. 제4차 선교 여행 (로마 여행, 58년-67년)

기근 탓에 고통받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배려해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교회들에서 내놓은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61] 간 바울로는 교회에 무사히 헌금을 전달한 후 원로들과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 그간 세 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의 결과를 보고한다. 그런데 원로들이 "당신이 모세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걸 유대인들이 눈치챘으니 당신을 보면 죽이려 들 거다. 그러니 형식으로라도 정결 예식을 치러서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게 하자"는 제안을 한다. 바울로도 이를 받아들여 7일간 정결예식을 치른다. 그런데 정결예식을 치른 보람도 없이, 시내로 나갔을 때 유대인들의 충동에 넘어간 사람들의 폭행에 죽을 뻔했다가, 로마군에 넘겨져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대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맞아죽을 뻔한 찰나, 타이밍 좋게 소란을 듣고 달려온 로마 군대의 천부장 클라우디우스 리시아스가 달려와 바울로를 격리시킨다. 그 후 리시아스가 무슨 일인지 물었는데, 사람들이 하도 제 말만 지껄이니 알아들을 수가 없어 일단 바울로를 진영으로 데려가려 했다. 그런데 바울로가 리시아스에게 '저 사람들에게 말 좀 하게 해주시오.'라고 부탁하니 리시아스가 허락을 했다. 그런데 바울로는 무슨 생각인지 그 사람들에게 대고 "당신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하느님이 나를 이방인들에게 전도를 하라고 명하셨소"라는 비난성 연설을 했고[62], 당연히 민중들은 분노하여 더 날뛰기 시작한다. 이에 천부장이 급히 진영 문을 걸어 잠근 뒤 바울로에게 채찍질을 하여 심문하라고 명령한다. 2차 여행 때 실라와 감옥에 갇혔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바울로는 그 때처럼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며 재판도 없이 날 패겠냐고 반박한다. 물론 로마군 천부장인 리시아스도 로마 시민이긴 했지만, 그는 태생부터 로마인이었던 바울로와 달리 돈을 주고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이라 같은 시민권이어도 위상이 달랐다.[63][64]

리시아스는 바울로가 고소된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다음 날 의회 '시나고그'를[65] 소집하고 바울로를 데려온 뒤,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비롯한 유대인들을 모두 불렀다. 바울로가 서두를 떼자 아나니아가 분기탱천하여 바울로의 입을 때려 닥치게 하라고 길길이 날뛰는데, 바울로는 "회칠한 담이여,[66] 율법을 어기는 놈이 율법에 따라 날 심판하겠다고? 하느님이 먼저 당신을 치실 것이다!"라며 저주한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당신이 감히 대제사장님을 그렇게 욕하시오!"고 항의하자 바울로 왈, "아 대제사장이셨어요? 저는 그런 줄도 몰랐네요. 대제사장님을 존경하라고 성경에도 써 있는데 제가 설마 대제사장님을 욕할까봐요?"라며 쌩을 깐다. 바울로가 몰랐을 리는 당연히 없고 "대제사장씩이나 되는 인간의 행동이 그따구냐" 하는 느낌의 조롱에 가깝다.

그런데 이 다음 바울로의 말 한마디 때문에 별안간 시나고그가 난장판이 되어버린다. "나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아들이고,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부활로 인해 심문받소."[67]라고 발언하는데, '부활' 한마디에 자리에 참석했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유인즉슨 사두가이파는 영적 존재나 부활을 믿지 않고, 바리사이파는 영과 의인의 부활을 인정하기 때문에 "부활같은 게 어딨냐 VS 부활은 있다"의 구도로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68] 물론 바울로는 시나고그에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가 섞인 걸 알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의도로 한 말이었으나, 이게 너무 크게 번져서 폭력 사태로까지 번진다. 바리사이파 일부가 바울로를 적극적으로 옹호[69]한 건 덤. 결국 소란통에 바울로가 말려들 것을 우려한 리시아스는 의회를 중단하고 바울로를 다시 진영으로 데려간다.

그날 밤, 예수가 환상으로 나타나 "용감해져라. 예루살렘에서 증거했듯이 로마에서도 네가 날 증거해야 한다"고 바울로를 격려하였다. 한편 40여 명의 유대인들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 몰려가 바울로를 죽일 때까지 단식투쟁을 벌이겠다 맹세를 하고, 리시아스에게 바울로를 상세히 조사하고 싶으니 보내달라고 말해 길에서 그를 죽이겠다는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바울로의 조카가 그걸 듣고는 즉시 바울로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전한다. 바울로는 간수장에게 부탁해 조카를 리시아스에게 보냈고, 자초지종을 들은 리시아스는 조카에게 엄중히 함구령을 내린 뒤 밤 9시 경, 바울로를 말에 태운 뒤, 보병 200명, 기병 70기, 창병 200명, 총 470명의 대규모 호위부대를 바울로에게 붙여 카이사리아의 총독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펠릭스에게 보낸다. 길목에서 칼을 갈며 매복하고 있던 유대인들은 기껏해야 자경단 수준인 자기들보다 10배는 더 많은데다 군사 훈련까지 받은 정규군에게 덤볐다가 꼬치가 되고 싶진 않으니, 바울로가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광경을 그저 이만 갈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바울로가 안티파트리를 거쳐 카이사리아에 도착해 펠릭스에게 인계되고, 리시아스의 바울로를 변호하는 편지를 받은 펠릭스는 일단 바울로를 관저에 연금시킨다. 5일 후,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변호사 테툴루스를 데리고 찾아오자 펠릭스는 정식으로 재판을 여는데, 테툴루스는 온갖 아부를 늘어놓은 뒤, "이 자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자이자 나사렛에서 생긴 이단 교파의 우두머리다"라며 바울로를 맹비난한다. 그러자 펠릭스는 바울로에게 변론을 시킨다.[70]

바울로가 "제가 예루살렘에 있었던 건 고작 12일 밖에 안되니 그 짧은 동안에 선동이고 나발이고를 할 시간도 없을 뿐더러, 저 사람들은 말은 저렇게 하는데 제가 실제로 그러는 걸 본 적도 없으니 증거도 못 낼걸요. 그리고 내가 정결 예식을 드리는 걸 유대인들도 봤으니 제가 뭘 잘못했으면 그 사람들이 앳진작에 와서 고발을 했겠죠. 저 작자들한테 뭐 본 거라도 있냐고 한번 물어보셔도 좋습니다."라고 완벽하게 변론을 한다. 펠릭스는 리시아스의 편지대로 바울로는 무죄함을 알게 되고, 대신 그냥 놔줬다간 저들이 가만있지 않을테니 천부장 리시아스가 올 때까지 판결을 미루겠다고 하면서 사실상 재판을 무기한 연기한다. 당연히 펠릭스는 그 후 리시아스더러 오라고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펠릭스는 바울로에게 자유행동을 허락하고 가끔씩 식사에 초대해 복음과 관련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순수하게 복음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뇌물을 바라고 한 것이긴 하지만.

이후 펠릭스는 전근을 가고, 포르키우스 페스투스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한다. 페스투스는 부임 후 잠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대제사장 일파가 "쟤 좀 예루살렘으로 이송해주세요"라고 청한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매복해 있다가 바울로가 지나갈 때 죽이려고 한 것. 하지만 페스투스는 "나 어차피 다시 가야 됨. 정 그러면 니들 중에 오고 싶은 사람들이 따라오면 되고."라며 그들의 요청을 씹는다. 유대인들도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가게 되고, 8일 후 카이사리아에서 다시 재판이 열린다. 그런데 이 재판은 열리자마자 광속으로 끝나버렸는데, 시작부터 바울로가 "나는 이 고소죄목들에 대해 무죄하니 재판을 받아야 한다면 로마 황제에게 직접 받겠다"라고 선언해버린 것이다.[71] 수차례 언급했듯 바울로는 로마 시민이니 로마 황제에게 재판을 받는다면 결과는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황제의 판결에 따라 유대인들이 이후로 더이상 바울로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따라서 이 사실을 잘 알고있던 대제사장 일당은 그 자리에서 전원 뒷목을 잡게 된다. 며칠 뒤, 페스투스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인 헤로데 아그리파스 2세가 누나 베르니케와 함께 페스투스를 찾아왔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바로 다음 날, 황제에게 상소를 한 바울로의 공청회가 개정된다. 왕이 온 덕분인지 회장을 무지 화려하게 꾸몄으며, 빈객들은 또 얼마나 많이 몰려왔는지 재판장이 무슨 연회장처럼 보일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윽고 바울로의 자기 변론이 시작된다. 바울로는 간단한 주제로, '내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죽였던 사람이고, 그 후에 회심하여 예수를 전하게 되었으며, 여기저기를 다니며 선교활동을 하는데, 이 일 때문에 유대인들이 나를 고소했다'는 취지의 변론으로 서두를 뗀다. 그러자 페스투스는 바울로의 개인적 신앙이 담긴 변론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네가 네 지식 때문에 미쳤구나"하고 크게 호통을 친다. 하지만 바울로는 이 일들은 헤롯께서도 아시는 일이라며 태연히 반박한다. 이어서 바울로가 헤롯 아그리파스에게도 "예언자를 믿으시겠지요?" 라고 묻는다. 아그리파스는 "네가 말 몇마디로 날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고?"라면서 비웃었지만 바울로는 "말이 많든 적든 여기 있는 모든 분이 저처럼 구원받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렇게 수갑 차는 건 빼구요."라며 재치있게 답변하고, 공청회는 곧 종료된다. 이후 아그리파스와 베르니체, 페스투스는 셋이 모여서 "아무리 봐도 죄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왜 괜히 황제한테 상소를 해서 일을 질질 끌지?"라며 쑤군댄다.[72]

서기 60년 말, 바울로는 마침내 로마로 가는 배에 오른다. 이 배에는 백부장인 율리오가 타고 있었는데 그는 바울로가 친구를 만나러 잠시 갈 수 있게 배려해주는 등 바울로에게 친절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후 시돈에서 뱃머리를 폴리데우케스 상으로 장식한 상선 알렉산드리아 호로 환승하여 항해를 계속하던 중, 폭풍으로 인해 배가 더이상 가지 못하게 되어 크레타 섬에 잠시 정박하게 된다. 그런데 정박이 예상 외로 길어지자 바울로가 "이러다가 폭풍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게 될 테니 그냥 여기서 겨울을 마저 보내고 다음에 출항하십시다."라고 제안했지만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로보다 선장의 말을 더 믿고[73] 항해를 강행한다. 하지만 바울로의 우려대로 화창해진 줄 알았던 날씨는 도로 폭풍 '유로클리든(Euroclydon)'으로 인해 사납게 바뀌고, 배는 아주 낙엽처럼 휘날린다. 우여곡절 끝에 폭풍이 멎고 배는 항로를 완전히 상실하여 졸지에 조난신세가 되고 2주간 바다에서 표류하게 된다. 그 와중에도 바울로는 "하느님이 날더러 '넌 황제한테 가야지 않겠냐. 내가 나의 항해사를 보내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선원들과 탑승자들을 격려하며 생존의지를 잃지 않도록 한다.

이후 육지가 가까워지고 배는 몰타 섬에 상륙했다.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불을 피워주는 등 친절히 대해 주었는데, 바울로가 장작을 모닥불에 넣자 장작 틈에 있던 독사가 불에 놀라 튀어나와서 바울로를 물었다. 원주민들은 이걸 보고 "살인자인갑다. 정의의 신께서 죽이시나 보네." 하고 수군대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독사를 떼어 불에 툭 던져버렸다. 놀랍게도 상처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신이신갑다"라고 놀라워했다. 바울로는 석 달간 섬에 머물며 원주민들을 보살피면서 겨울을 보내며 현지지원을 받은 뒤, 다시 배를 타고 마침내 61년 초, 로마에 입성한다.

그는 아직 재판을 받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수갑으로 로마 군인 한 명과 묶인 채 한 민가에 셋방을 얻어 지내게 된다. 말이 재판대기지 사실상 자유행동 상태였다. 이후 소문이 퍼져 바울로가 있는 셋방에 무지막지하게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하고, 바울로는 그들에게도 밤낮없이 설교를 하며 바쁘게 지낸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로의 마지막 선교여행은 최종 목적지인 로마에서 멈추게 되었지만, 바울로는 거기서 죽을 때까지 선교활동을 하며 살게 되었으니, 바울로의 선교사역은 사실상 성공으로 마무리되었다 할 것이다.

셋방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면서 거기서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골로새서), 필레몬에게 보낸 편지(빌레몬서), 에페수스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베소서), 필립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빌립보서)를 썼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로의 이후 행적은 기록으로 상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대체로 추정하건대 바울로가 1차 석방되었던 듯하다. 이후 바울로는 로마 제국에서 선교하다가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에 다시 붙잡혔고 네로 황제에게 그 주범으로 몰려 서기 65년 또는 67년에 참수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화형이나 십자가형이 아닌 이유는, 로마 제국 시민권을 보유했기 때문이라 전해진다.[74]바울로 본인은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쉬워했다고.

바울로의 마지막 말은 “예수”로 알려져 있다. 처형된 시기를 다룬 의견은 학자마다 다르지만, 서기 62년에서 68년 사이라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바울로가 참수될 때 그 목이 땅에 떨어지며 세 번에 걸쳐 튀었고 그 자리마다 샘이 솟아났다고 전해진다.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 바울로의 참수터에 그를 기리는 트레 폰타네 성당(Chiesa di San Paolo alle Tre Fontane)[75]이 세워졌다. 성당은 5세기에 세워진 후 16세기에 재건축되었다.

평생을 복음 전파에 바쳤다는 이미지와 달리, 바울로의 선교 여행 기간은 48년에서 60년으로 12년 남짓하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바울로를 중심으로 당대의 선교 운동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졌음을 말해 준다.

생전 바울로는 베드로가 있는 로마 교회를 방문한 후 로마 교회의 후원을 받아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를 전교하려고 예정했다. 원래 바울로가 소아시아에서 전교할 때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파송되어 그곳에서 후원받았지만, 아무래도 로마 교회가 히스파니아에 그나마 조금 더 가까운 데다가 당시 히스파니아는 로마의 곡창지대였기에 로마와 히스파니아 간 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히스파니아로 가고자 한 까닭은 이베리아 반도가 유럽 땅 끝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말 그대로 땅 끝까지 가서 전교하려 했던 것. 결국 바울로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사도 야고보가 유지를 이어받아 대신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4. 직업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고린토에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생계를 위해 천막 제조업[76]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례비 등을 받지 않고 자비로 사목을 했으며[77][78], 주야로 일했을 정도로 복음 전파 뿐만 아니라 생업에도 열심이었다.[79] 성경을 보면 바울로의 사역자로서의 측면이 두드러지지만, 만약 실제로 바울로와 함께 지냈다면 그저 묵묵히 열심히 일하는 직업인으로서의 모습이 훨씬 더 많이 보였을 것이다.[80]

5. 건강

갈라디아서 4장 12-14절에서 바울로는 자신의 '병'에 대해 언급한다.
여러분이 나에게 잘못한 일은 조금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전에 내가 병을 앓았던 것이 기회가 되어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체 조건이 여러분에게는 괴로운 짐이 되었지만 여러분은 나를 외면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천사와도 같이, 또 그리스도 예수와도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2-14절
이 '병'의 정체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어왔다.
이 진술은 사도가 어떤 병을 앓았는지 새삼스레 묻는 빌미가 되었다. 사람들이 제시한 답들은 불확실하고 갖가지다. 흔히들 간질이 아닐까 생각하고 율리우스 케사르, 나폴레옹, 표트르 대제, 도스토옙스키 같은 천재 간질병자들을 내세웠으며, 말라리아와 안질眼疾이라 추측하기도 했다. 갈라디아 교우들이 할 수만 있었다면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 바울로에게 주려 했다는 말(갈라 4,15)로 미루어 보면, 눈병일 개연성이 가장 크다고 할 수도 있다. 당시 안질은 지중해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아니면 혹시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는 일종의 은유가 들어 있는 것일까?[81] 간질일 가능성은 거의없다. 왜냐하면 (사도의 편지들이 입증해 주듯이) 바울로는 노년에도 정신의 예리함을 전혀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면 그저 사도의 예민하고 허약한 체질에서 비롯된, 그래서 하나의 병명을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합증후군이었던가?[82] 최근에는 바울로가 자연적 질병을 앓았던 것이 아니라, 돌매질 같은 가혹행위를 자주 당한 결과 고통스러워했다는 견해가 다시 대두되었다.[83] 사실 이 가혹행위들은 사도의 육신을 몹시 괴롭혔다. 갈라디아 교우들은 바울로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 예수의 상흔이라고 말한 그의 육신의 옛 자국과 흉터들을 보았던 것일까?
요아힘 그닐카 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euge), 이종한 옮김, 115-116쪽

비슷하게 갈라디아서 6:17-18에서는 '낙인(상흔)'을 말한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낙인은 그리스어 스티그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기적처럼 생겨난 성흔이라거나 중세수도자들처럼 예수라고 새긴 달군 쇠 인장이라는 해석까지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선교하는 과정에서의 갖은 박해[84]에 따라 몸에 생긴 깊은 상처를 통해 생긴 살아 있는 증거들을 의미했다는 견해가 훨씬 많다.[85]

이 '낙인'에 대해서는 묘하게 카인과 비슷한 점이 있다. 카인은 익히 알려진 대로 동생 아벨을 죽인 죄를 발뺌하다 결국 자백한 뒤 야훼에게 낙인을 받았고 본래 살던 땅을 떠나 자신만의 성읍을 세웠다. 그런데 바울로도 초창기에는 유대교 신자로서 (개종 이후로는 '형제자매에 해당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다가 눈이 머는 경험을 토대로 '개종'했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여 그리스도교의 확대에 공헌하는 등 일생이 비슷하다.

6. 바울로의 신학

바울로의 친서[86]들은 신학 논문이 아니라 사목적(司牧的)인 의도로 쓰인 서간들이기에 그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기는 매우 어렵다. 중요한 신학적 본문이 뜬금없어보이는 타이밍에 갑자기 훅훅 지나가며, 바울로가 '적수'와 논쟁을 하고는 있으나 '적수'에 대한 정보도[87] 그다지 적혀있지 않다. 논문이 아닌 서간이기에 같은 바울로 친서끼리도 진술이 긴장을 이루고[88] 고상하다기보다는 격정적인 파이터의 문체로 글을 썼다는 것도 난이도를 높인다. 따라서 다음은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설명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인 12사도들은, 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했다.[89] 여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합류했고,[90] 마침내 이방인들에게도 교회가 개방되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보듯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문화를 요청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에서 회심을 하고 교회에 합류한 사람이 바울로이다. 바울로는 이방인의 사도[91]로서 당대의 코스모폴리 분위기에서 그리스 등 지중해 지역을 중심으로 로마 제국 전역에 선교하여, 그리스도교가 세계종교로 발돋움하는 촉매를 마련하였다.

6.1.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는 통칭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며, ‘유대인의 사도‘라 불렸던 베드로와 대비되고는 한다. 이는 베드로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도록 힘썼던 것에 반해, 바울로는 아예 유대인이 아니었던 이들을 대상으로 포교하는데 힘썼기 때문이다. 바울로의 신학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도 유대계가 아닌 이민족 출신 그리스도인에 친화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갈라디아서 2장의 이른바 '안티오키아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11그러나 게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책망받을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12그의 책망받을 일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게파가 이방인 교우들과 한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들어오자 그는 할례를 주장하는 그 사람들이 두려워서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물러나갔습니다. 13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파와 함께 물러나갔고 심지어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14나는 그들의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맞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게파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다인이면서 유다인같이 살지 않고 이방인같이 사는 당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11-14절(공동번역)
유대계 그리스도인과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공존하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유대계 그리스도인 앞에서 베드로가 율법을 준수하자 바울로가 항의한[92] 사건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데, 초기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베드로는 이방계 그리스도인에 친화적인 축에 속했다는 것이다.
게파는 두 맷돌, 야고보와 바울로 사이에 끼었다. ... 게파는 유대인답지 않고 이방인다운 자신의 생활 방식을 통해 모세 율법은 구원에 본질적인 의의를 더 이상 보유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분명히 드러냈다. 그 확신을 이제 버렸던가? 그렇지 않았음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그는 이 충돌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에게 부추겨져, 율법을 이스라엘 역사를 틀짓고 유대인의 고유성을 꼴지어 온, 유대인들이 언제까지나 보존해야 할 제도와 문화적 생활 공간으로 인정하려 했을 수 있다. 게파는 유대인 선교를 책임진 사람으로서 이런 상황에선 (게파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기까지 한) 바울로와의 충돌을 결연히 감수하고자 했을 것이다. 게파는 바울로와는 달리, 기꺼이 타협할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필경 그는 훗날을 위해 그런 타협을 바랐을 것이다.
이 충돌이 어찌 끝났는지 바울로는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결말이 낫다면, 그에 관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입 다물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게파는 자신의 입장을 견지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uege), 분도출판사, 2008. 160쪽
요컨대, 이 사건에서는 대략적으로 세 가지 노선이 있었다. 하나는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보여주는 율법 친화적 관점이고, 또 하나가 바울로가 보여주는 율법 비판적 관점이며, 마지막이 베드로가 보여주는 중도파의 관점이다. 베드로는 비록 율법이 구원에 본질적 의의를 보유한다고는 여기지 않았으나, 중도파의 관점이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실상의 율법 강요로 흐를 수 있었고, 이것을 바울로는 비판했다.
바울로가 게파에게 항의한 것은, 그의 처신으로 자신이 대변·옹호하는 복음이 부여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장 14절에 압축되어 있는 항의는, 약간 바꾸어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게파, 당신은 당신 처신으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 생활 방식을 강요하고 있소." 실상 이제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가 회복되려면, (게파가 자기 처신을 되돌리지 않는 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 음식 규정들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울로는 이것을 거부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uege), 분도출판사, 2008. 159쪽

6.2. 동포들의 회심과 교회의 일치

그러나 바울로가 이방인들에게 친화적이라고해서, 동포들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은 아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93]
-로마서 9장 3절(공동번역)
올리브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몇 개가 잘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를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접붙인 가지들은 올리브 나무 원 뿌리에서 양분을 같이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이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잘려 나간 가지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생각이 날 때에는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저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이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할지언정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 가지들도 아낌없이 잘라내셨으니 여러분들도 아낌없이 잘라버리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도 하고 준엄하시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여러분에게는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지 않을 때에 한한 일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여러분도 잘려 나갈 것입니다. 믿지 않았던 탓으로 잘려 나갔던 가지들이 믿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그 가지들도 접붙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에 잘라내셨던 가지들이라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원래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였던 여러분이 잘려서 제 나무가 아닌 딴 좋은 올리브 나무에 쉽사리 접붙여졌다면 잘려 나갔던 가지들이 제 올리브 나무에 다시 접붙여지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94]
-로마서 11장 17-24절(공동번역)
바울로에게 있어서 이방계 그리스도인은 접붙여진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였으며, 예수를 거부한 유대인들은 잘려나간 '원 가지'였다. 그러나 바울로는 하느님이 '원 가지'들을 다시 쉽게 접붙일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라는 실로 무시무시한 고백까지 할 정도였다.

이러한 바울로에게 있어서 매우 슬프고 비참했던 사실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이 갈등을 했다는 것이다.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는 인정했으나) '2등급 신자들'로 여겼으며,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 11장이 암시하듯) 유대 민족을 업신여겼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바울로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을 일치시킬 회심의 카드로 준비한 게 의인 교리이다.

6.3. 의인(義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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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의 신학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은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하느님께 판결 받는다는 의인(義認)이다.[95]이다. 그 사람은 믿음으로써 의화되어 '믿음의 조상'으로 선포된 아브라함의 사례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의로움에 이르려는 그 어떤 인간의 노력에도 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임을 들어 이것을 입증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교가 수행과 공덕 같은 의로운 행위을 이용한 구원의 완성을 주장하는 여타 종교와 구분된다고 주장하는 근본이 되는 교리 중 하나이다.[96]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로마서 13:8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바울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교의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주장해 율법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에서 중요한 바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이웃을 향한 헌신과 사랑이지, 외면에 관계된 율법 행위의 시행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역설했다. 예컨대면 반드시 할례한다거나 안식일과 정결 규정을 반드시 지키는 것 등이 있다.

7. 바울로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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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교회 이래로 바울로가 썼다고 알려진 서간 중 신약 정경에 포함된 것만 해도 총 열네 편에 달하며, 이는 단어 기준으로 신약의 28%를 차지하며 네 편의 복음서 다음으로 신약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저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히브리서를 제외한 열세 편을 바울로 서간으로 칭하는 일이 많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부터 현대의 성서비평학에 이르기까지 바울로 서간과 히브리서의 저자가 과연 바울로가 맞는지, 언제 어디서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학계 대부분이 바울로의 저작으로 인정하는 서신은 일곱 편이며, 나머지 여섯 편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바울로의 이름을 빌려 다른 누군가가 썼다는 논란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히브리서의 경우 바울로가 저자가 아니라는 것이 학계에서는 거의 확실시된다.

신약성경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뒤에 오지만 바울로 서간 중 친저성이 인정되는 편지들은 대체적으로 복음서보다 앞서, 신약 정경 중 가장 먼저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데살로니카전서처럼 이른 시기의 서신은 그 연대가 기원후 50년 정도로 여겨지는데 네 편의 복음서는 연대측정을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60년 이전으로는 잡지 않는 편이다.

8. 바울로와 예수

사도 바울로가 역사상 예수를 배제하고 예수의 신화상 상징에만 관심했다는 학문상 의견이 있다. 이것을 신화론(Mythicism)이라 부르고 많은 학자 간에서 논의되어 왔다. 연원을 따지면 1927년의 로버트슨(J.M.Robertson)의 이론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신화론자라고 딱히 무신론자도 아니고 반대론자라고 다 신자도 아니다. 일례로 바트 어만(B.D.Erhman)과 같은 학자는 신자가 아니고 복음서를 비판하지만 신화론에 반대한다.

출전은 제목과 페이지, 가능하면, 원문까지 실어서 원 저자의 '맥락' 확인이 가능해야 한다. 이글을 찬반으로 나눈다.

8.1. 신화론

신화론의 주장은,

성경에서, 바울로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한 그리스도에게만 관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심은 전체에 걸쳐 신비한 가르침에 중점을 두는데 바울로는 역사상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고 스스로 분명히 밝힌다. 그는 쓰기를,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게 계시하신 것입니다."[99]

바울로는 예수를 역사상 어떤 시대나 장소와 전혀 관련하게 하지 않는다. 디모데서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를 언급하지만, 데살로니카 제1서 제2장에서는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만 말할 뿐이다.

바울로는 나자렛을 상대로 삼아서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고 나자렛 예수라는 말조차 쓰지 않는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교를 세례 종교로 묘사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아폴로에게 예수를 전도할 때 아폴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었다"는 언급 외에는 접점이 없다.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 특정한 산에서 설교하는 예수, 그 사람의 비유, 바리사이인들과의 논쟁, 로마 제국 관헌과의 충돌도 바울로는 언급하지 않는다.

바울로가 예수를 신화상 아나그램으로서의 상징이 아니라 실제 예수의 생애를 잘 알았다면, 그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정식으로 당연히 인용했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로는 예수의 생애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예수의 말을 단 한 번만 인용한다. 그 인용문은 현재 가톨릭의 미사와 정교회성찬예배, 성공회 감사성찬례, 그리고 개신교의 성만찬 때 사용하는 공식 문구다.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토 제1 서 제11 장 제24 절에서 제25 절 (공동번역성서)

바울로가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그 사람은 예수가 '잡히시던/배반당한 밤에'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느 쪽 번역이든, 그런 번역은 '예수의' 역사성'을 부여하고자 그리스어 원문을 왜곡한 것이다. 원래 그리스어로는 '넘겨지는(delivered up)' 때에 그렇게 말했다. 넘겨진다는 것은 '세상의 죄'를 대속하려고 죽음으로 넘겨지는 자, 곧 파르마코스의 운명을 언급할 때 사용되던 말이다[100].

자신의 가르침을 지지하고 싶을 때는 사복음의 예수의 말이 아닌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예수의 말을 인용해도 효과가 마찬가지이거나 예수의 말이 훨씬 유효했을 상황에도, 구약성경만을 인용한다. 천국을 목적해 혼인을 포기한 자를 예수가 칭찬한 구절이 있지만, 바울로는 자신의 독신 생활을 변호하고자 그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다. 또한 부활할 때 사람의 육체가 변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마가복음 12장 25절).'[101]

또 다른 주장으로는 바울로의 가르침은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상충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이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권력자와 세상을 향한 태도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당하겠지만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제16 장 제33 절)'고 언급하여 세상의 권력자나 집권층에 굴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그 자신도 공회나 사제 가야파대제사장안나스의 뜰 안에서 그 사람들의 권세에 굽힌 바가 없다.

물론 바울로가 예수에게 계시받았다고 예수의 생애까지 세세히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예수를 직접 만난 적 없이 사도의 구전과 서간을 이용해 접하였으니 쉽게 언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반대되게 말한다든지 아예 자신이 익숙했을 구약성경에만 의존하는 것은 그냥 넘어가기에는 문제가 많다. 예수의 일생을 자세히 모른다고 해서 예수의 가르침까지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비약하자면 바울로는 예수에 관해 많이 알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전파하는 것에 예수의 이름을 도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주류 문헌 비평가들과 성서 연구가들은 이쪽을 지지한다.

예수를 실존한 하나의 윤리에 관계된 인간으로 파악하는 역사상 예수를 다루는 시각에서 보면, 바울로는 철저히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바트 어만[102]은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 바울로는 분명히 예수를 실존했던 인물로 믿는다고 말한다. 알고 보면, 이것은 '신화론'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다. 바트 어만은 바울로가 예수를 실존한 인물인지 실존하지 않은 인물인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이미지만을 중시하고 역사상 진짜 예수를 대해서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수 왜곡의 역사>에서도 왜 사도 바울로가 '내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온다'고 주장하는지를 다룬 이유도 나와 있다.

사실 신화론이 제시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는, 신약성경에서 바울로의 신학자로서의 비중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사도로서의 비중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서술하는 신학자로서의 비중으로 국한해서 본다면 이 부문에서 바울로보다 비중이 큰 인물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당장에 신약성경 내의 서간문들 중 대다수를 바울로가 작성한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 바울로 본인은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한 인물이 아니고, 역사적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아무리 바울로가 당시 가장 높은 식자층의 일원이었다고 해도 신약성경의 신학적인 부분들이 12사도들이나 아니면 적어도 예수의 공생애를 함께했던 이들이 아니라 분명히 이방인이었던 바울로가 주도하여 서술되었다는 점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인상을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8.2. 반대론

위 신화론은 그 근거를 사도 바울로의 전체 행적이 아니라 바울로의 편지에만 한정한다는 문제가 있다. 현재 바울로를 다룬 자료가 사도행전과 그 사람이 쓴 두 가지의 편지 뿐인데, 편지만을 근거로 바울로를 분석 한다면 그 결과는 '바울로' 자체를 다룬 분석이 아니라 바울로의 '편지 쓰는 스타일'을 다룬 분석이 되어 버린다.

위 신화론에서 문헌 연구가들과 성서 비평학자들의 예로서 언급된 바트 어만(B.D. Ehrman)도 자신의 저서 〈예수는 실존했는가?(Did Jesus Exist?)〉 제4 장에서 사도행전에 실린 바울로의 발언들을 중요한 자료로서 취급하고 그 가치를 인정한다.(p.109-113)

위 신화론에서는 갈라디아 편지와 사도행전에 모순이 '장난이 아니다'란 이유로 사도행전을 불신하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위에서 바울로의 저작한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로는 예루살렘으로 절대로 가지 않았다고 하지만"이라고 썼는데 바로 다음 줄인 갈라디아서 제1장 제18절에 분명히 "그리고 3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사람과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하고 예루살렘 방문 사실이 적혀 있다. 사도행전에도 바울로가 회심 후 일정 기간 활동하고 그 후에 예루살렘을 방문 한 것으로 나와 있다. 모순이란 두개의 명제가 양립하여 참이 될 수 없는 것을 나타낸다고 볼 때,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서의 "서술 관점의 차이" 정도는 양립이 불가능하진 않다. 즉, 모순이라 할 수 없다.

사도신경 및 바울로의 편지의 일부에 따르면, 바울로는 이방인 및 유대인들과 활발히 토의하는 과정에서 나자렛 예수[103], 예루살렘[104], 본디오 빌라도[105], 세례자 요한[106]을 모두 언급한다.

바울로가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을 직접 인용한 적이 없는 점에 대해서도 학자들 사이에서 토의의 대상이었다. 명확한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107] 로마서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라는 고백이 '주님의 기도/주기도문도 모른다'에 바로 연결되기에는 비약이 심하다. 여기서 주장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는, 전체 문맥으로 볼 때 구원에 대한 내용이다. 반면 마태오 복음서 6장에 언급된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은 일상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할 때 가져야 하는 자세와 함께 언급되었다. 자신을 경건하다고 드러내면서, 또는 마음이 담기지 않거나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로의 편지에 자신에 대한 사적인 복음의 내용이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반신화론다운 여러 학설이 있다.

때마침 출현하기 시작한 도케티즘 곧 가현설假現說과는 정반대로 바오로는 복음 선포를 그 역사성 안에 계속 뿌리박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그 복음 선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역사에 호소하기를 거부한다. 잘 알다시피 그는 예수의 생애를 전혀 서술하지 않고 그 몇몇 중요한 자료들을 회상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는 "여인에게 태어나 율법 아래" 있었다(갈라 4,4).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다(로마 1,3).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1코린 11,23-25) 그는 십자가에 처형되었으며 죽으시고 묻히셨다(1코린 2,2.8; 15,3.4; 갈라 2,20; 3,1; 필리 2,5). 또 그가 인용하는 주님의 말씀도 겨우 몇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1코린 7,10; 9,14; 1테살 4,15ㄱ).[108] 그러니까 바오로가 예수의 사건을 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사건을 냉혹한 객관성에 입각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메시아라는 표현으로 묘사한다(1코린 1,18.23). 그러나 최후의 만찬(1코린 11,23-24)의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바오로는 예수의 사건을 자세하게 그려주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침묵의 이유는 무엇인가? 바오로의 편지는 저마다 복음서가 증언하는 구원의 전갈을 계속 메아리치게 하면서도 어떤 설화나 상징의 표현 수단으로 구세주의 인물을 역력하게 보여 주거나 그려 주지 않는다. 이 이상한 사실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그러니까 예수의 역사를 전하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사건을 말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이 있어서 그랬다는 말인가?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예수와 역사》개정판, 가톨릭출판사 2012, 80-81쪽
몇몇 유다계 그리스도교 집단들이 내세우는 예수, 그들이 회상하는 이 예수의 말씀과 동작들이 혹시 바오로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가 선택한 선교관과 그 실천적인 방법을 직접적으로 문제시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의 모습은, 교회 내의 여러 가지 갈등과 모순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한데 모아 놓고 있는 복음서의 본문에까지 반영되어 있다. 그 한 가지 예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하는 마태오 복음서 5장 18절을 들 수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역사"라고 하는 것이 바오로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물론 바오로는 십자가에 못 박인 예수의 살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제시'는 기본적이었다. 역사란 시간이 밀어 주는 압력으로 비로소 개막된다. 바오로에게는 십자가가 바로 이 시간의 압력이다. 바오로의 선포가 '무시간' 속에 가라앉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도 파스카의 통과라는 사건 이전의 역사는 그에게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역사는 바오로의 복음과는 다른 어떤 복음을 '육에 따라' 정당화할 수 있으리만큼 조작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바오로가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마태 10,5)와 같은 예수의 말씀을 자신의 친서에 인용할 수 있었으리라고는 한순간도 생각해볼 수 없다.
같은 책, 83-84쪽
바울로가 수용한 전승들을 가려내는 또 하나의 길이 있다. 이 길은 근본적으로 20세기에야 역사비평적 주석학이 열어 주었다. 역사비평적 주석학은 바울로가 "나 역시 전해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같은 정식적 표현을 명시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에서도 전승들을 수용했음을 밝혀냈다. 주석학자들은 다른 여러 곳에서도 바울로 이전에 생겨난 것이 틀림없는 텍스트들을 찾아냈다. 그런 것들로는 찬가 혹은 신앙고백 양식의 텍스트들, 그리스도론적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텍스트들, 때로는 그저 텍스트 단편들이 있다. 필립비서 2장 6-11절의 그리스도 찬가가 최초의 것들 가운데 하나다. 이런 전승들의 식별 기준들은 특히 다른 어투, 바탕에 깔려 있는 비바울로적 구상, 요컨대 형식적·내용적 관찰들이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로는 바울로가 사람들이 추측했던 것보다 꽤 많이 전승들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혀 주었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285쪽
바울로 사도의 선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다. 나아가 바울로는 결정적 구원 사건들, 특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이 성취한 구원은 서로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바울로 서간들을 일별하며 해당 진술들을 찾아보면, 사도가 기존 전승에 많이 의존하고 있음이 눈길을 끈다. 물론 직접적인 예수 전승, 즉 공관복음서 전승은 크게 밀려나 있다. 여기 속하는 것으로는 주님의 성찬 전승(1고린 11,23-25; 참조: 루가 22,19-20)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주님의 말씀들(1고린 7,10-11; 9,14; 1데살 4,15)[109]을 들 수 있다. 공관복음서 전승의 후퇴는 바울로가 뒤늦게 사도로 불리었고, 열두 제자처럼 지상 예수와 함께 다니지 않았으며, 팔레스티나 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관계가 있다.
-같은 책, 338쪽
바울로는 가현설과는 정반대로 복음 선포를 역사성에 뿌리박게 하였다. 서간에서 예수를 적게 언급한다는 것이 곧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시는 아니며, 서간에서 예수의 역사적 행적을 적게 언급하는건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바울로의 활동기에는 지금과 같은 복음서 체계가 완비되지 않았다. 현재 그리스도교의 성경을 시대상으로 배열할때 마가복음을 비롯한 4복음서가 바울로의 편지보다 먼저 쓰였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바울로의 편지가 더 먼저였다. 즉,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로가 예수의 어록과 행적을 정리하고 연구하여 신학을 전개하는 동안, 다른 방향에서 예수의 어록과 행적을 정리한[110]또한 공관 복음서 중 가장 늦게 작성된 요한복음은 바울로가 죽고 30년 정도가 더 지나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서기 40~6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바울로가 복음서를 충분히 습득했을 가능성이 적다. 그리고 바울로는 랍비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구약 구절들이 당연히 더 익숙했을 것이다. 바울로가 활동 당시는 12명의 사도를 비롯하여 "예수를 직접 접했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었던 시기였고, 이런 사람들의 증언이 후대의 "문서화된 복음서"를 대신하여 "살아있는 복음"으로 쓰였다.

지배층에 대한 바울로의 가르침이 예수와 배치된다는 주장에도 반론이 있다. 당시 상황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시기였다. 이 상황에서의 처세는 최대한 윤리적인 모범을 보이면서 은신하는 것이 최선이며, 그 대표적인 예가 카타콤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전에 언급하는 말은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을 전제로 주장하고 있다.

로마서 13장을 쭉 읽어보면 이후에는 예수의 말 중 하나인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마르코 복음서 12장 17절)'와 유사한 '여러분은 그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국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국세를 바치고, 관세를 바쳐야 할 사람에게는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할 사람은 존경하십시오(로마서 13장 7절).'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지배층을 하느님의 사자로까지 묘사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또, 바울로가 예수의 언행을 인용한 고린도 11장 23-24절의 경우, 위의 신화론에서는 "잡히시던/배반당하시던" 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어휘가 "넘겨지다(handed over[113])"라는 추상적, 상징적 의미를 가지므로 역사적 사건을 반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화적 상징이라면, 그 "넘겨짐" 사건이 발생한 게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11장23절은 예수가 '밤'에 성찬에 대해 언급했음을 분명히 한다. 이것은 바울로가 최후의 만찬과 그 후의 '넘겨짐'을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바울로가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한 사례는 다음 예시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7,1-5

예수의 위 가르침은 바울로도 역시 따라한다.
그러므로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2,1-2
그대가 누구이기에 남의 종을 심판합니까? 그가 서 있든 넘어지든 그것은 그 주인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서 있게 하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4

찬성론에 B.D.Ehrman이 전거로 언급된 것은 다소 의외인데, 이 양반은 단순히 '바울로가 예수의 실존을 믿었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고, 바울로의 편지들을 근거로 역사적 예수의 실존을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인물이기 때문. <예수는 실존했는가> 130 페이지를 보자.
"- 바오로의 발언들은, 그가 예수를 몇 년 전에 살았던 역사적 (historical) 인물로 믿고 있었음을 분명히 한다(makes it very clear). 바오로는 예수의 탄생,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 다윗 왕에서 이어지는 가계, 형제의 존재(그 중 하나의 이름이 야고보인 것), 유대에서의 활동, 12명의 사도, 스승으로서의 역할, 죽음을 예지함, 최후의 만찬, 유대인에 획책된 죽음, 십자가형에 대해 언급했고, 가끔, 그 가르침도 언급했다."

어떤 사람 A가 자기가 본 적도 없는 다른 어떤 사람 B의 출생, 가계, 가족, 행적, 죽음에 대해 알고 있고 언급했는데, A가 B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면 논리적 무리가 따른다. 위의 신화론에서 "바트 어만은 바울로가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허구의 인물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의 이미지만을 중시하고 진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자세한 출전을 밝히지 않아서 확인이 불가능하다.

바울로가 자신만의 사상 표출을 위해 예수를 이용했다고 하는 상당한 억지 주장이 만약 존재한다면,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거룩한 전승(Sancta Traditio)의 필터링에 걸렸을 것이기에 지금까지 성인으로 공경 받아오기에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114] 간단히 말해,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들은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바울로에게 그거 예수님이 가르친거 아닌데? 이렇게 한 마디만 하면 끝났을 문제라는 거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이 바울로의 서간을 인정한 것이다.

이상은 신화론에 대한 대략적인 반박이다.

9. 평가와 오해

초기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기여하고 그리스도교의 체계적인 사상을 수립한 바울로였지만, 생전에도, 그리고 사후 수천 년이 이르도록 갖가지 논쟁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바울로는 사후에 그리스도교의 중요 인물로서 존경을 받았지만, 마르틴 루터종교개혁으로 인해 논쟁의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바울로와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향을 받은 마르틴 루터는, 바울로 서간에서 의인론과 같은 종교개혁 사상의 원천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바울로 신학 및 개신교 신학을 "온갖 악행을 다 해도 믿음만 있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라는 식으로 엉뚱하게 해석하는 독자들이 있지만[115] 바울로도 개신교도 그런 식의 사고와는 거리가 있다.[116]

비록 특히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주석에 "종파 간의 신학적인 논쟁이 개입됨으로써 해석상 견해의 차이도 더욱 크게 벌어지고, 또 다른 문제들도 일어나고 확대됨으로써 바울로의 신학사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주고 있"[117]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에서 바울로의 위상은 공통적으로 확고하다. 그는 굉장히 높은 그리스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신학을 정리한 최초의 인물이다.

수 천년 동안 여러 가지로 서양 사상사에 영향을 크게 끼친 인물답게 갖가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당시 바울로의 사도성은 매우 크게 수용되었다. 사도 바울로는 사도 베드로, 사도 요한, 예수의 형제 야고보 등을 만나서 그들에게 자신의 신적 권위를 인정받고, 때로는 그들의 잘못을 대담하게 훈계하기도 했으며, 그의 서신들은 여러 교회에서 읽혀지며 대량으로 필사하곤 했는데, 이는 바울로에 대한 인식이 매우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후대의 확고한 위상에도 불구하고, 생전의 바울로는 자신의 신학적 정당성을 설득해야 했고, '사도'라는 칭호가 거부되기도 했다. 사도행전에서는 첫 머리에서 사도의 조건을 나름대로 정의하는데, 이 조건에 따르면 바울로는 도저히 사도라 할 수가 없다.[118]
아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울로가 루가에게는 여느 사도들처럼 진짜배기 사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는 열둘이니,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부터 예수 부활까지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들이다(1,21-22 참조). 루가는 사도 칭호를 이 열두 사람에게 국한하기 때문에, 바울로에게는 사도 칭호 부여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루가가 바울로와 바르나바를 사도로 칭하는 경우가 한 번 있는데(14,4.14), 사도 칭호를 좀 헐값에 내주었다고 하겠다.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사도들, 즉 교회가 선교 과업을 위해 가려내어 파견한 "사자들"(13,2-3), 안티오키아 그리스도인들의 사자들이다.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바울로》, 분도출판사, 2008, 467-468p
사도 개념을 폭넓게 이해·사용하는 경우 ―예컨대 루카 복음서 11,49나 바르나바와 바오로(순서 주목!)를 사도로 지칭하는 사도행전 14,14[119] ― 는 아주 드물다. 열두 사람 사도직이라는 강령적 의미에서는 바오로도 당연히 사도일 수 없다. 열두 사도는 바오로의 활동에 앞서 존재하는 일종의 제도다. 열두 사도는 사도회의와 거기서 내려진 결정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언급되는데(사도 15,22-23; 16,4), 바로 이 대목 이후에는 오로지 바오로의 선교 활동만 보도된다.[120] 열두 사도의 활동 장소는 예루살렘이다. 여기서 그들은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고(4,33; 참조: 2,43),교회 지도 직무를 맡았다(4,35 이하 5,2 등). 또한 필리포스의 선교 활동을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냈다(8,14).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갑자기 들이닥친 박해가 그리스도인들을 그 도성에서 쫓아냈으나, 사도들은 예외였다(8,1). 사도들은 그곳에 계속 남았다. 베드로는 리따와 야포의 교회들을 방문하고(9,32.43), 이방인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를 최초로 교회에 받아들였다(10,1-48). 이 일은 한편으로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적극적 선교 결정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15,7-11). 예루살렘은, 그러니까 루카 이부작의 전체 구도에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장소일뿐더러, 열두 사도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그들의 특출한 대표자다. 그는 그리스도교 최초의 설교를 하고(2,14 이하)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방문하여, 성령에 부추겨져 이방인을 최초로 교회에 받아들인다. 갈라티아서 2,7.9에 따르면 루카는 사도회의에서 확증된, 베드로에게는 유다인 선교를 그리고 바오로에게는 이방인 선교를 할당한 결정을 알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사도행전에서 이 결정은 베드로(그리고 다른 사도들)는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에서 활동하고, 바오로는 땅끝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사도 1,8 참조).
사도행전의 바오로상은 양면적이다. 한편 바오로는 열두 사도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 이 책 둘째 부분에서는 열두 사도의 과업을 이방인 지역에서 속행하는 권위 있는 증인이 된다. 물론 바오로상의 좀 더 상세한 규정에는 논란이 많다. 사도행전의 묘사는 저술 당시 교회 내의 분규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연구 경향이 있다. 이단적·영지주의적 동아리들이 바오로를 빙자하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그의 자유와 독자성을 끌어댔다는 것이다. 그래서 루카는 이에 맞서 바오로를 대교회에 맞춰 넣으려는, 요컨대 길들이려는 목적으로 사도행전을 저술했다는 것이다.[121] 이 역사적 배경의 재구성은 매우 가정假定적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신학적 관심사들이다. 또한 루카가 바오로 사후 약 30년이 지난 자기 시대 교회의 바오로상에 부합하는 바오로의 모습을 많이 전해 주고 있음을 셈에 넣어야 할 것이다. 바오로 활동의 방사력放射力은 과장되어 있다. 바오로는 총독과 임금들 면전의 탁월한 연설가(사도 24-26), 대단한 이적가(19,11-12), 아레오파고스에 등장하고 그 옛날 소크라테스처럼 아테네 아고라에서 철학자들과 논전을 벌이는 철학자로 나타난다(17,16-34). 바오로는 시종일관 그리스도인 2세대 사람으로, 그러나 사도들의 전승을 계속 교회에 전해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사울/바오로가 열두 사도에게 결부되어 있음은 두 차례 예루살렘 방문을 토해 표현된다: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었다"(9,28; 참조: 11,30; 12,25).[122] 세 번째 방문의 목적인 사도회의에 바오로는 물론 참석했지만, 중요한 결정을 한 이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다: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 결정하였다"(15,22). 또한 바오로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15,2-3)뿐 아니라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15,22)의 사절 역할도 했음을 유념해야 한다. 부활화신 그리스도에 의해 종과 증인으로(26,16) 그리고 '이민족들의 빛'으로(13,47) 세워진 바오로는,교회일치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사도들과의 결속을 통해 자기 교회들에 보증한다. 역사상 바오로에게는 복음의 일치가 확실히 중요한 관심사였는데(참조: 갈라 2,1-2; 1코린 15,11), 루카는 자신의 바오로상에서 독자성과 자주성을 많이 깎아 냈다. 루카는 자기 교회들(예전 바오로 교회들의 영향권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이 예루살렘이라는 원천에 정향되어 있는 질서로서 구상된 교회일치를 받아들이게 하려고 노력한다.
-'루카계 문헌의 신학적 구상', 요아힘 그닐카(Joachim Gnilka), 《신약성경신학》, 분도출판사, 2014, 293-295p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도그마) 상에서 예수는 부활했으며, 승천을 하여 지상에서 모습은 감추었지만 그 영향력은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지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나타나는 것도 가능하다. 따라서 바울로는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는 가능성을 그리스도교 교리 내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영적으로 예수를 직접 만나는 체험을 겪었다는 사람은 바울로 이후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한 것 때문에[123] 돈 벌 능력이 없는 약자들에게 가혹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기독교 우파에서 복지제도,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근거 구절로 인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구는 주로 사회에 생산적인 공헌은 하지 않으면서 실제로 힘들게 일해서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들을 착취해서 호의호식하는 특권계급과, 일하지 않는 게으름뱅이를 비판하는 데 사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일할 능력이 없어 일하지 못하는 약자를 박해하는데 사용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 본문에서는 일하지 않고 오히려 일만 벌이는 데살로니가 공동체 내의 경향을 비판하는 문맥에서 쓰였으며 아울러 그가 활동한 로마 제국 시대에는 현대보다도 훨씬 비생산적인 특권(귀족) 계급의 병폐가 심했고, 초기 그리스도교가 일종의 급진주의적 공동체 역할을 하면서 도시 빈민들 사이에서 급속히 세를 불려나갔음을 생각하면 이건 좀 지나치게 나간 비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를 반대하는 소련에서도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 구절을 원칙으로 써먹었다.

일부에서는 바울로가 예수의 가르침을 종교로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유명인으로 프리드리히 니체, 토머스 제퍼슨, 레프 톨스토이가 있고, 일부 이슬람 신학자들 또한 그렇게 주장해왔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내 일부 급진 진보파(예: 문동환 목사)도 마찬가지라서, 그들은 바울로를 정통 사도가 아닌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한 사이비로 보는 경우도 있다.

바울로가 로마가 예수 공동체를 왜곡시키기 위해 투입한 프락치라는 주장[124] 하지만 만약 바울로를 거짓 사도로 취급한다면, 신약성경 중 절반 가량이 위경으로 규정되어야 하며[125], 로마가 당시 이스라엘을 완전히 장악했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용납되기 어렵다. 바울로는 가말리엘의 수제자, 즉 당시 이스라엘의 온건 바리사이파의 수장의 수제자 급의 인물로 철저한 종교 엘리트 계층이었으며, 로마의 지배에 대해서 중도적 입장이었다. 이런 사람이 로마의 프락치라면 이스라엘은 완전히 로마에 종속되어 문화적 다양성을 상실하고, 폭동 등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게다가 루가 복음서를 쓴 루가가 쓴 사도행전에서도 바울로의 행적이 자주 언급되기 때문에 사도로서 바울로의 자격을 부정하기는 곤란하다. 사실 초기 교회 시대에도 바울로의 사도 자격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있었던 듯, 신약성경의 바울로 서신에서도 이를 의식한 내용(고전 9:1)이 언급되어 있다.

바울로가 예수를 '신격화'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생각이다. '신격화'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실상은 정반대이다. 후대의 세계공의회들이 그리스 철학적인 용어를 동원해가며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과 유일신론을 조화롭게 말하려고 애썼듯이, AD 1세기 그리스도교에서도 유일신론은 민감한 문제였고, 예수에 대한 신앙 고백이 다신론으로 오해 받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있어서, 바울로는 예수를 신격화하는 동기를 발명해내려는 축이 아니라 유일신론을 자극하는 일탈을 피해가려는 쪽이었다.
변모 이야기(마르 9,1-9)가 보여 주듯 시나이 동기는 유다 그리스도인들의 사고의 중심을 차지하고 여기에 수집된 일련의 표상들이 바오로 서간(1테살 4,13~17; 2코린 3장; 로마 10,6~7)에도 나타난다. 물론 이 소재들은 유다계 그리스도교적 표상의 언어로 표출된다. 그것은 단순한 상상의 언어가 아니라 현실과 함께 현실 너머의 것을 번역하기 위해 히브리적인 방식의 상징과 이미지들로 반죽된 언어인 것이다. 바오로는 이 단편적인 소재들을 수용하여 재편성하고 어느정도 순화시킴으로써 유일신 신앙을 자극할 수 있는 일탈을 피해갔다. 사도는 흔히 말하듯 예수를 신격화하는 동기를 발명해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우상화의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 희랍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최대한 도움을 주기 위하여 초대 유다계 그리스도인의 교리 교수 내용을 유다·희랍계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샤를르 페로(Charles Perrot),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백운철 옮김(서울: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01), 352쪽

9.1. 바울로와 유대교

그 유다인들은 주님이신 예수와 예언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몰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 모든 사람의 원수가 되었습니다.[126]

또 그들은 우리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얻게 해주는 일까지 방해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죄는 극도에 달해서 마침내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내리게 되었습니다.
공동번역성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장 15~16절.

바울로의 생전에도 그 시각이 지배적이어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난동에 휘말리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그를 반유대주의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이 남아 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
로마서 9장 3절.
그러나 유대인에 대한 바울로의 가혹한 언명은 기본적으로 '예수를 거부한 경우'에 해당한 것이지 근대적인 혈통적 반유대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바울로는 타지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 유대인이 먼저 복음을 접할 우선권이 있다고 보고 반드시 유대인 회당에서 유대인을 상대로 먼저 복음을 전했으며, '내 동족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겠다'고 할 정도로 동포애가 강했다. 이는 단순 립서비스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로마 공동체에게 보낸, 따라서 이방인 수신자들을 상정하고 있는 로마서 11장에서 바울로가 이방계 그리스도인을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로, 유대인을 '원 가지'로 비유하고는, '원 가지'가 다시 접붙여지기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로에 대한 유대교 학자들의 입장은 어떨까? 놀랍게도, 긍정적인 시각들이 발견된다.
바울로는 유대교 학자들에게도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은 근년에 들어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 발전은 거의 2천 년간 계속된 침묵 이후의 일이기에 그만큼 더 기뻐해야 마땅하다. 여기서도 몇 가지 사례만 언급하자. 클라우스너는 당시 유대인들이 바울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재구성하고, 나아가 자기 견해를 밝혔다. 유대교가 바울로의 교설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물론 없지만, 바울로에게서 귀중하고 숭고한 사상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클라우스너는 그것들을 참 유대교적이라고 평가하고, 그리스도교 문화에 대한 유대교의 영향을 촉진시키는 데 기여한 공로를 사도에게 돌렸다. 심지어 그에게 바울로는 "메시아 왕의 길을 닦는 자"이기도 하다.[127]
쇱스의 판단은 다르다. 쇱스는 바우어와 연계하여 바울로를 에비온파(유대계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대립시켰다. 이 대립으로부터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는 바울로의 선포와 신학은 비유대교적이라고 본다. 만일 바울로가 유대교 품속에 머물러 있었다면, 유대교의 전령이 되었을 테고 유대교를 민족적 편협함에서 해방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128] 반대로 벤-코린은 (클라우스너보다 더) 바울로에게서 유대교 신학자를 알아보거니와, 사도의 신학은 선교에서 태어나 자라났다는 것이다. 벤-코린은 율법에 대한 자신의 고뇌에 터해 바울로에게의 극히 개인적인 접근로를 열었다. 바울로가 의인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저 평화를 자신은 율법의 정통적 준봉에서 얻지 못했다는 벤-코린의 언명은, 바울로를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대화에 들여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벤-코린은 바울로 사도로 인해 유대교 신앙 방식의 소외가 발생했다는 부버의 주장도 배척한다. 바울로 메시지의 새로움은 유대교 유산이 보존해 온 힘을 증언해 준다는 것이다.[129]
요아힘 그닐카 Joachim Gnilka, 《바울로》(Paulus von Tarsus: Apostel und Zeuge), 이종한 옮김, 22-23쪽

9.2. 성관념에 대한 논란

고린토1서 11장 2절~16절 :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남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기도를 하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할 때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머리, 곧 자기 남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민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된다면 머리를 깎아버려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니 무엇으로든지 머리를 가리십시오. 남자는 하느님의 모습과 영광을 지니고 있으니 머리를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여자에게서 남자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이 보고 있으니 여자는 자기가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는 표시로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 세계에서는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이 상대방에게 서로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창조되었지만 남자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은 채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여러분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자연 그 자체가 가르쳐주는 대로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수치가 되지만 여자의 긴 머리는 오히려 자랑이 되지 않습니까?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그 머리를 가려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딴소리를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하느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고린토1서 14장 32~35절 :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심령을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무질서가 아니고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가 하고 있는 대로 여자들은 교회 집회에서 말할 권리가 없으니 말을 하지 마십시오. 율법에도 있듯이 여자들은 남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 돌아가서 남편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십시오. 여자가 교회 집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수치가 됩니다.
디모테오1서 2장 11~15절 : 여자는 조용히 복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나는 여자가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먼저 아담이 창조되었고 하와는 그 다음에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하와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계속하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바울로를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은 신학보다는 보수적인 성관념이다. 바울로가 남긴 서간은 그의 의도가 어땠든 간에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독교적 성관념이 구축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기한 내용들처럼 바울로가 쓴 서간에는 가부장적이라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 상당수 등장하며, 이는 오늘날에도 가톨릭과 다수의 개신교에서 여성을 성직자로 임명하지 않는 근거 중 하나로 사용된다. 이러한 성경 해석에 대한 비판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교단에서 여성의 성직은 허락되지 않고 있다.

고린토1서 11장의 구절 때문에 생긴 풍습이 미사보이다. 항상 예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바울로가 고린토서에서는 전형적인 당시 남자처럼 가부장적인 발언을 한다. 디모테오서는 저자에 관해 논쟁이 있지만 고린토서는 대다수 신학자가 바울로를 저자로 생각한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를 읽은 다음 고린토서의 성차별 내용을 읽으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로의 본 마음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바울로가 왜 고린토서에서 다른 서신들과 전혀 다른 소리를 하는지 해석이 필요하다. 순서는 대다수 신학자가 갈라디아서가 고린토서보다 먼저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고린토서 편지 한 장 안에서도 말이 꼬이는데, 11장 앞 부분에서 아담과 하와를 증거로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남자의 권위를 존중해야한다고 말하다가, 11장 뒷 부분에선 출산을 예로 들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오므로 여자와 남자가 서로에게 속해 있고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왔다고 말한다.

결국 이런 부분으로 인해,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바울로의 발언을 어떻게든 납득하기 위해 많은 신학자와 성경학자들은 오늘도 머리를 쥐어짜는 중인데, 그 노력들을 대충이나마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인간이 이렇게 타락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부끄러운 욕정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여자들은 정상적인 성행위 대신 비정상적인 것을 즐기며 남자들 역시 여자와의 정상적인 성관계를 버리고 남자끼리 정욕의 불길을 태우면서 서로 어울려서 망측한 짓을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한 응분의 벌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26~27절(공동번역성서)
사악한 자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잘못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여색을 탐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133]나, 도둑질하는 자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주정꾼이나 비방하는 자나, 약탈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고린토1서 6:9-10(공동번역성서)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을 하는 자, 위증하는 자와 그 밖에 건전한 교설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자들을 다스리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입니다.
디모테오1서 1:10(공동번역성서)

또한 기독교 계열 종교가 동성애를 죄악시 하는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 중 신약에 해당하는 구절은 전부 바울로가 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실 신약,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복음서에는 여성이나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거의 등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서간에 담긴 바울로의 보수적인 관념은 여성 성직자 문제를 포함하여 현대에 와서 많은 부분 비판을 받고 있는 가톨릭을 비롯한 기독교 전체의 가부장적인 남성우월주의나 성 억압적인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9.3. 현실 권력과 제도에 대한 복종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13장 1절)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니 복종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여성관 못지 않게 현대에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바울로는 어차피 그리스도가 재림하면 이 세상 체제는 끝날 테니까[134] 그러기까지 얼마 안되는 시간 동안 현실 권력에 불필요하게 맞서기보다, 순응하며 복음을 최대한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바울로는 예수의 재림을 자기 생전에 보려고 한 사람이다. 만방에 복음을 펼치면 예수의 재림이 앞당겨질까 생각해서 평생동안 이방인 선교를 하였다. 데살로니카서에서 신자들이 예수 재림 전에 세상을 떠난 신자들은 어떻게 되는거냐며 바울로에게 걱정하는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의 재림을 자기들 생전에 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로마서 13장에 기술된 지도자에 대한 복종 구절은 마르틴 루터가 독일 농민 전쟁 당시 제후 편에 서는 근거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수백 년 뒤에는 나치 독일에 동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대통령의 정치성향에 따라 이 부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해석이 밥먹듯 바뀌며, 한 사람이 대선 결과에 따라 로마서 13장에 대한 말을 바꾸는 것도 쉽게 볼 수 있다.

바울로는 특별히 노예제를 옹호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서간 가운데 배경 이해 없이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내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필레몬서에는 그리스도인 필레몬에게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가 바울로를 찾아와 주인과 중재를 요청했는지, 이 노예를 회심시킨 뒤 '이제 노예가 아닌 형제처럼 대해주라'면서 필레몬에게 도로 돌려보낸다. 도망쳤다 도로 잡힌 노예는 심한 경우 사형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필레몬의 인성과 자신의 사도로서의 끗발을 믿고 벌인 모험에 가깝다. 다행히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용서받았는지 골로사이서에서도 등장하고, 교회 전승에 따르면 훗날 에페소스의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바울로는 고린토서 전서에서 노예 신자들에게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노예였다 하더라도 조금도 마음 쓸 것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몸이 될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이용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바울로가 현실의 불완전한 체제에 무력으로 저항하기보단 복음 전파와 그리스도교식 사해공동체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바울로의 생각엔 이 세상의 체제는 곧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올 것이므로 그때까지 주인이나 노예나 교회 안에서 서로 형제처럼 지내고 있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보다 이 세상의 체제는 훨씬 오래 갔고, 근대에 오면 노예를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바울로가 쓴 내용을 핑계삼아 노예제를 옹호하는 일이 빈번했다. 노예제가 폐지된 현대에서는 이 내용을 시대적 한계로 해석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민주주의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가하고 시사에도 관심을 갖기는 하되,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전 거쳐가는 중간 통로일 뿐이므로 여기에 지나치게 매몰되지 말고 정체성을 확실히 하라 정도로 적용시킬 수 있다. 즉 그쪽에 집착하여 시간과 정력을 지나치게 쏟다가 보다 중요한 신앙생활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라는 것. 이는 비단 이 영역 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내용에 대해 '성스러운 정의의 계율'을 지키는, 즉 하느님의 뜻에 맞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권력에만 복종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레위기에서는 이에 반대되는 견해를 표명한다: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레위 19,15)

그러나 이것은 권력자들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정의에서 일탈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레위 19,15)

통치자가 성스러운 정의의 계율을 지키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세는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가 성스러운 정의에 반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는 경우처럼, 지상의 권세는 때때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다: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 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음모를 꾸미는구나." (시편 2,2) "너희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기뻐하며, "우리가 우리 힘만으로 두 뿔을 차지하지 않았느냐?" 하는구나." (아모스 6,13)

사도들과 순교자들은 통치자와 권세에 대항했으나 영벌에 처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상을 받았다. 사도 바오로는 지금 하위 권력에 대항하는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스러운 질서는 예를 들어 왕에게 반하여 공작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이 상위 권력에 반하여 하위 권력에 복종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인간이 가진 모든 권세는 성스러운 권력의 하위 권력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반하여 지상의 권세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로마서 주석. 1022, 1028

10. 문화에서

이마고 데이(Imago dei) - 하느님의 모상: 한국 가톨릭에서 2008년 제작한 뮤지컬이다.

11. 매체에서

2018년 3월 23일, 부활절을 앞두고 영화 <바울로, 그리스도의 사도(Paul, Apostle of Christ)>가 개봉했다. 바울로가 로마에서 잡힌 후 처형당하기까지의 모습을 그렸다. 제임스 포크너가 바울로 역을, 짐 커비즐[135]이 루가 역을 맡았다. 한국에서는 2018년 10월 31일 개봉했다. CBS로 개신교 쪽에서 배급했다.

2020년 영화 <글래디에이터: 레전드 워리어>에서 주인공 노레노(리 파트리지 분)가 코르불로(미키 루크 분)를 만나러 가는 길에 만나 도움을 받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 "사도 바울로(Apostle Paul)" - 워너 브라더스에서 제작 중인 영화. 사도 바울로 역에 휴 잭맨의 캐스팅이 확정되었고 그 외에 벤 애플렉, 맷 데이먼이 공동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렸는데 직접 배역 출연의 가능성도 있다.

개신교 연예인과 성우들이 열연한 드라마 바이블에서는 성우 설영범이 바울로 역을 맡았다. 출처

예로부터 조각상, 성화나 영화를 비롯한 시각적 매체에서는 유난히 대머리로 등장하는 빈도가 높다는 국룰이 있다. 한결의 만화에서도 사도행전에서 그와 바나바가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착각받는 대목에서 "한 분은 빛나리로 오셨네?"라는 칭송인지 디스인지 알 수 없는 대사로 강조된 바 있다.

12.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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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앞 조각상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앞 조각상


[1] 다만 사도 바울로가 사망한 때는 약간씩 다르게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바울로가 태어난 해를 서기 10년으로,사망한 해를 율리우스력 서기 65년 6월 29일(그레고리력 서기 65년 6월 27일) 토요일로 제시하고 있다.[2] 그의 회심(개종)을 기념하는 축일이다.[3] 공식 축일은 베드로와 함께 6월 29일이다. 이 둘을 기념하는 축일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천주교), '성 베드로와 성 바울로 축일'(성공회)이다.[4] 신약성서에서는 '사울로스(Σαῦλος)'로 자주 표기되었으나 이는 히브리어식 이름 '사울'의 그리스어식 표기이다.[5] 현대 그리스어 표기는 Σαύλος Ταρσεύς (Sávlos Tarséfs).[6] 신약성서에서는 '파울로스(Παῦλος)'로 자주 표기되었으나 이는 라틴어식 이름 '파울루스'의 그리스어식 표기이다.[7] 현대 그리스어 표기는 Απόστολος Παύλος (Apóstolos Pávlos).[8] 현대 그리스어 표기는 Άγιος Παύλος (Áyios Pávlos).[9] 선천적 기형을 낮잡아 이르는 말.[10] 원문(UBS GNT5): "Χριστὸς ... ἔσχατον δὲ πάντων ὡσπερεὶ τῷ ἐκτρώματι ὤφθη κἀμοί. Ἐγὼ γάρ εἰμι ὁ ἐλάχιστος τῶν ἀποστόλων ὃς οὐκ εἰμὶ ἱκανὸς καλεῖσθαι ἀπόστολος, διότι ἐδίωξα τὴν ἐκκλησίαν τοῦ θεοῦ χάριτι δὲ θεοῦ εἰμι ὅ εἰμι, καὶ ἡ χάρις αὐτοῦ ἡ εἰς ἐμὲ οὐ κενὴ ἐγενήθη, ἀλλὰ περισσότερον αὐτῶν πάντων ἐκοπίασα, οὐκ ἐγὼ δὲ ἀλλ᾽ ἡ χάρις τοῦ θεοῦ [] σὺν ἐμοί."[11] 바울로의 자기 비하적 진술을 매우 강렬한 어감("배냇병신 같은 나")으로 번역했기에 이 역본을 인용하였다.[12] 전통적으로는 가톨릭에서 14권을, 개신교에서는 13권을 바울로의 저작으로 간주한다. 오늘날의 주석학에서는 대략 7권을 바울로 저작으로 보고, 나머지는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바울로 서간 문서 참조.[13] 가령 필립비서 2장에서 선재 그리스도론을 고백하는 그리스도 찬가는 성서학계에서 바울로가 선배들에게 전수 받은 전승으로 본다. 또한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베드로가 개방된 입장을 보였다.(참고: 사도행전 10장)[14] Joseph Klausner, Von Jesus zu Paulus(Jerusalem 1950) 553-61. 참고로 Klausner는 유대인이며 또한 유대교 신자였다. 어째서 그가 이런 극찬을 했는지는 아래 참조.[15] 공동번역성서에서 사용한 표기로 '페트로스'가 '베드로'가 되었던 구한말의 음역 방식을 '파울로스'에 적용하면 자연히 '바울로'가 된다. 한때 가톨릭에서도 공동번역을 채택하던 시절 이 표기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도 2005년부터 공동번역을 공식적으로 쓰지 않게 되면서 현재까지 공동번역을 채택하는 정교회성공회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되었다.[16]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전통으로 사용하는 표기법으로서 이탈리아어식 표기인 파올로(Paolo)에서 비롯되었다. 공동번역성서를 썼을 때는 일시로 '바울로' 표기를 사용했다. 2005년 가톨릭 성경이 새롭게 나오면서 세례명으로 쓰일 때든, 전례에서 성경을 낭독할 때든, 신학에 기초해 이야기할 때든 '바오로'로 일관되게 지칭한다.[17] 한국 성공회에서 사용하는 표현. 전례 등에서는 바울로로 지칭하지만 신명으로는 옛 번역어인 바우로가 혼용된다.[18] 개역성경과 새번역성경, 그리고 현대어성경에서 사용한 표기법으로서 성공회를 제외한 나머지 개신교 종파 대부분에서 사용하는 표현.[19] 구약성경의 임금 사울과 공통점이 있다면 이름과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것이다.[20] 비슷하게 사도행전에 실라스(Σιλᾶς, 공동번역: 실라)로 표기된 바울로의 동료도 바울로 서간에선 라틴어식 이름 실루아누스(Silvanus)의 그리스어식 표기인 실루아노스(Σιλουανὸς, 공동번역: 실바노)로 표기되었다.[21] (책 속 주석)Max Kaser, Das römische Privatrecht 115-9. 293-301 참조.[22] (책 속 주석)Hengel, Der vorchristliche Paulus 202-8. 로마 시민은 세 개의 이름을 지녔다: praenomen(개인 이름), nomen gentilicium(본관) 그리고 cognomen(성). 속량된 자는 후견인의 praenomen과 nomen gentilicium을 물려받았다. 바울로의 praenomen과 nomen gentilicium이 무엇이었는지 머리를 쥐어짜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후략)[23]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아간 이스라엘 밖의 유대인 공동체를 말한다.[24] 자신이 필립비서 3장 5, 6절에서 말하길, "나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고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고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1:39에 보면 자기소개를 하면서 "나는 길리기아의 다르소 출신의 유다인으로 그 유명한 도시의 시민입니다."라고 표현한다.[25] 사도행전 22장 22-29절에 보인다. 「(전략) 군인들이 바울로를 결박하자 바울로는 거기에 서 있던 백부장에게 "로마 시민을 재판하지도 않고 매질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하고 항의하였다. (중략) 파견대장은 바울로에게 가서 "당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사실이오?" 하고 물었고 바울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파견대장은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소." 하고 말하자, 바울로가 "나로 말하면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고 밝히니 바울로를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물러갔다.」(공동번역성서)[26] 물론 몇몇 유대인의 선동을 곧이곧대로 믿게 된 로마 집행관에 의해 억울하게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나중에 풀려나자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린 경우도 있었다(사도행전 16:22~39).[27] 당시의 유명한 랍비로 온건파 바리사이파의 수장이었다.[28] 나는 그 때 내 동족 중 동년배들 사이에서는 누구보다도 유다교를 신봉하는 데 앞장섰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도 훨씬 더 열성적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4절)[29] 바울로의 히브리어식 이름. 바울로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히브리어·라틴어 두 개였다.[30] 고전 그리스어 '퀴리오스'라는 말로 주님이나 주인님을 뜻한다.[31]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아라비아를 아라비아 반도가 아니라 요르단 강 동안에 소재한 나바테아로 해석할 때는, 바울로가 요르단 강 동안에서 지내면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32] 엘루마는 '마술사'라는 뜻이다.[33] 이 일은 후에 2차 여행에서 바울로와 바르나바가 길을 갈라져 떠나는 계기가 된다.[34] 개역한글 판에서는 허메 신, 쓰스 신이라고 나온다(...). 의외로 개역개정판에서는 현대적인 표기로 수정되었다.[35] 이런 특이한 번역을 이상하게 여길 것은 없다. 개역한글판은 일제강점기, 그러니까 외래어 표기법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 출판된 성경을 개량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르바나'를 '바나바', '마르코'를 '마가'로 쓰거나 '팔레스타인'을 '블레셋'이라고 음차 표기하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36] 갈라디아서의 집필 시기를 제3차 전도여행 중 바울로가 에페수스에 길게 체류하던 서기 56-57년 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37] 갈라디아서 1장 6~7절[38]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Alexandria Troas). 지금의 튀르키예 달리안(Dalyan)에 해당한다. 안티고노스 1세가 건설한 항구도시.[39] 죄수가 탈출하면 그 책임은 그 죄수를 감시하던 간수에게 돌아가기 때문. 일찍이 사도 베드로가 헤롯 아그리파에게 붙잡혀 투옥돼 있던 중 천사의 도움으로 탈옥하자 분노한 헤롯에 의해 베드로를 지키던 간수들이 처형된 적이 있었다(사도행전 12장 6절~19절).[40] 여기에서 매우 유명한 구절인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네 집안이 다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16. 31)이 등장한다.[41] 당시 마케도니아도 로마의 영토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권을 보유한 사람은 굉장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고, 특히 정식 재판을 받기 전에는 형벌을 받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재판도 없이 채찍질을 했으니 그 행정관은 '죽었구나'를 외쳐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42] 참고로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아덴이라고 등장하여 예멘의 도시와 이름이 같아지게 되었다(...). 영어식 표기 Athens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43] 마음속에 몹시 화가 나 있었다고 한다.[44] 그리스어로 '아레스의 언덕'이라는 뜻.[45] 야훼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 중 하나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문맥상 우상천지인 아테네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가깝다.[46] 기원전 6세기의 크레타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인용이다.[47] 기원전 3세기의 킬리키아 시인 아라토스의 인용이다.[48] 이 중에는 놀랍게도 아레오바고의 대법관인 디오누시오도 있었다.[49] 당시 로마에서도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과 정통파 유대인들이 분쟁을 일으켜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유대인을 로마 시에서 추방했는데 이 부부도 그래서 로마를 떠나 코린토스로 오게 되었다. 이 일은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도 기록하고 있다.[50] 옷/신발을 턴다는 것은 "나는 할만큼 했는데 안 듣기로한 건 니들 선택이니까 결과가 어찌되도 나는 책임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퍼포먼스다. 나중에 예수를 사형에 처한 이스라엘 총독 빌라도도 물에 손을 씻는 것으로 비슷한 퍼포먼스를 했는데, 이 역시 죽일만한 죄가 없는 사람을 죽이라고 강요한 건 유대인 너네들이니까 그 죄 값은 너네가 치르고 난 상관없다는 뜻이다.[51] 그리스도교 서적이나 그리스도교 백화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두란노'다. 과거에 있었던 수사학자이며 이 서원에는 다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52] 고린도전서 1장 12~13절[53] 성경에서 묘사되는 귀신 들린 이들은 단순히 미친 사람A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레기온처럼 수천의 귀신이 한 사람의 몸에 들러붙어 사슬을 끊는다든가 불길이나 깊은 물에서 뛰어들기를 반복했던 예시가 있듯이 평범한 사람들은 고치기는 커녕 해코지 당하지 않게 피해다니는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예수의 제자로 있던 시절의 12사도들도 귀신들린 아이를 쉽게 구원하지 못해 예수에게 꾸지람을 들을 정도였다. 이 정도면 살아난 게 천만다행인 수준.[54] 공방에서 제작하는 은세공품이 가구나 기물 같은 그냥 고가의 사치품이 아니라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신상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만들었던 사인검 같은 주술적 의미가 담긴 은세공품이 고가에 주문 제작된다.[55] 여기서의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순결을 상징하는 그 신과 기원은 동일하나 성격이 다르다.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는 여러 개의 유방을 가진 다산과 풍요의 신으로, 최고신급의 위상을 지닌 신으로 알려진다.[56] 당시 에페수스인들은 에페수스가 아르테미스에게 바쳐진 도시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굉장했다고 한다.[57] 참고로 개역개정 성셩에서의 표기는 '아데미'.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개역개정에서 고쳐졌는데 아르테미스는 고쳐지지 않았다.[58] 과장이 아니다. 바울로를 따라다니며 죽일 듯 굴던 유대인들이 찍 소리도 못하고 (속된 말로) 짜져 있을 정도였다.[59] 사도행전에 따르면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키고 강론을 하는데 에우디쿠스라는 청년이 밤중에 3층 창문에 걸터앉아 졸면서 설교를 듣다가 떨어져 추락사한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 바울로가 살려내어 돌려보냈다. 일이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후에 사람들이 에우디쿠스를 위로하러 많이 찾아왔다는 것을 보면 청년의 충격이 컸던 듯.[60] 사연인즉, 고린도 전서를 써서 코린토스에 보냈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바울로가 직접 코린토스로 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기꾼들에게 속아 코린토스 교인들이 바울로를 경계하게 되어버렸다. 결국 허탕을 치고 돌아온 바울로가 에페수스에서 다시 편지를 써서 티투스 편에 들려 코린토스로 보냈는데(디도서) 그 결과가 마침내 희소식으로 돌아온 것이다.[61] 앞서 얘기했듯 바울로는 로마서를 코린트에서 저술했다. 바울로는 로마에 가기로 예정했으나 예루살렘에 헌금을 전하는 것이 먼저라 판단하고 예루살렘으로 간다. 코린트에서 로마와 예루살렘은 반대 방향이고 로마가 훨씬 가까웠는데도 로마를 먼저 들리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간 것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경제 상황이 매우 나빴던 듯하다.[62] 구체적으로 쓰자면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한 것을 두고, 주님이 너네들 먼저 구원해 주라고 하셔서 왔는데 너네들 스스로가 "우리는 생명 구원 받을 자격도 없어요" 라면서 부적격자로 자처하고 거부하니 너네들 버리고 이방인한테 간다(...) 라고 해버렸다.[63] 로마 군단의 정규 군단병은 로마 시민권이 있어야 입대가 가능했다. 리시아스도 군에 입대해 군대에서 출세하려고 돈을 주고 시민권을 산 사람인 듯.[64] 좀 더 쉬운 예를 오늘날의 미국에서 끌어오자면, 귀화로 미국 시민이 된 사람에게는 피선거권이 일부 제한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 대선 출마 불가. 리시아스가 지닌 로마 시민권이 바로 이런 경우와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쉽다.[65] 고전 그리스어로 '함께 모이다'이라는 뜻으로, 기원전 587년 네부카드네자르의 바빌론 유수로 바빌론에 끌려갔던 유대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던 모임에서 유래한다. 예배소인 성전과는 달리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해석하는 집단이었다. 훗날 유대인들이 모여 안식일을 지키는 장소로 변하게 된다.[66] 겉만 화려한 위선자라는 뜻. 당시 거리에 벽으로 세우던 담들은 상당히 부실하고 보기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겉에 회반죽을 칠해 말끔하게 보이게 했다. 한마디로 겉만 화려하고 속은 구려터진 속빈 강정이라는 비난.[67] 거짓말은 아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이기 때문.[68] 해묵은 떡밥이며, 예수도 사두가이파에게 이 주제로 질문을 받았었다.[69] 옹호라기 보다는 아주 깎아내리기까지.[70] 거만한 건지, 귀찮았던 건지 사도행전 24장 10절에 따르면 머리를 까딱해서 턱짓으로 바울로에게 말하라고 표시를 했다고 기록한다.[71] 재판없이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이 로마 시민의 권리라는 점이 앞서 몇번 나왔듯이 가이사(황제)에게 직접 재판을 요구할 수 있는 것도 로마 시민의 권리다.[72] 아마 이 때 바울로의 로마행 계획에 관한 계산이 들어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로마까지 가는 길이 상당히 장거리이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차라리 그냥 로마에서 재판을 받기로 하고 군사들에게 둘러싸여서 로마로 압송되면 그 지긋지긋한 유대인들을 비롯한 방해꾼들로부터 벗어나 안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73] 이성적으로 보면 맞는 판단이다. 율리오가 바울로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바울로는 죄수 신분이었고 뱃일을 오래했던 전문가인 선장이 더 잘 알 것이라고 판단한 것.[74] 네로는 대화제 이후 퍼진 '네로황제 방화 음모론'을 무마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방화죄를 뒤집어 씌우려 했지만 정작 로마 시민들 반응은 저 미친 황제가 지 살겠다고 멀쩡한 사람들 잔인하게 죽이네지가 불지른 게 맞으니까 저렇게 날뛰지 로 나뉘었다.[75] 성 바울로 세 샘물 교회라는 뜻.[76] 사도행전 18:3[77] 고린도전서 9:11-12[78] 당장 목회행위에 돈 문제가 걸리게 되면, 이윤창출을 위해 교인들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성경내용을 와전시키는 등 범죄행위를 저지를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현대의 목회자들이 반드시 되돌아보고 깊이 회개해야 할 부분이다.[79] 데살로니가후서 3:8[80]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직업적 소명은 자아실현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별로 내키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냥 해야 하니까 그래도 감사한 마음과 자신이 한 일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는 것일 뿐이다. 바울로도 자신의 인생의 목표가 천막 제조 명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전파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적으로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버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더 모범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묵묵히 생업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오히려 일 자체를 너무 좋아하면 그 일을 통한 성공과 인정 등이 우상이 될 수가 있다.[81] (책 속 주석)"할 수만 있었다면"이라는 표현 덕분에, 우리는 이 견해를 반박할 수 있다.[82] (책 속 주석)Martin Dibelius, Paulus, W.G.Kümmel(Hrsg.),(Berlin 21956) 39 참조.[83] (책 속 주석)Jürgen Becker. Paulus. Der Apostel der Völker(Tübingen 1989) 185f 참조.[84] '고린토인에게 보낸 둘째 편지 11장 24-25절을 보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 다섯 번, 태장으로 맞은 것 3번, 돌에 맞은 것 한 번' 폭행당했다고 한다. 여기서 '사십에 하나 감한 매'는 율법이 40대를 초과하여 때리지 못하게 금했기 때문이다. 이에 유대인들은 혹시나 숫자를 잘못 세서 41대를 때릴까봐 1대를 감해서 39대까지만 때렸다. 이러면 실수로 1대 더 때려도 40대가 되기 때문에 율법을 범하지 않게 된다.[85] Ignatius Catholic Study Bible에서는 갈라 6,17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Property and slaves in the ancient world were branded with a mark of ownership. Paul views himself as a slave of Christ (Rom 1:1) who bears physical scars from the many persecutions that accompanied his apostolic work (Acts 14:19; 16:22; 2 Cor 11:23-29).[86] 로마서, 고린토 1서, 고린토 2서, 갈라디아서, 필립비서, 데살로니카 1서, 필레몬서[87] '적수'가 누구인지, 단일 집단인지 복수의 집단인지, 구체적으로 뭐라고 주장했는지, 혹시 바울로가 적수에 대한 정보를 편파적으로 보도하는 건 아닌지 등.[88] 가령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율법을 다루는 논조가 다르다. 갈라디아서는 적수를 논박하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갈라 3장 10절, 공동번역)"라고 매우 부정적으로 율법을 언급한다. 반면 로마 공동체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는 그보다 훨씬 차분한 어조로 "율법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입니다. ...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자체는 영적인 것입니다.(로마 3장 12-14절, 공동번역)"라고 말한다. 굳이 두 서간이 모순된다고 볼 필요까지는 없더라도, 구체적으로 조화시키는 건 아마추어 독자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89] 후대의 교회 전승에서는 신약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사도들이 흩어져 스페인이나 에티오피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나라에 전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그 근거가 사도들의 시대보다 훨씬 후대를 출처로 하는 경우가 많아 신빙성이 떨어진다.[90] 사도행전 6장의 일곱 보조자들이 이 사례이다.[91] 로마서 11:13 ‘이제부터는 이방인 여러분에게 말씀 드립니다.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 내가 맡은 직책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공동번역)[92] 바울로가 구원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의 대속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애써 가르쳤는데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이방인 형제들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꼭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잘못된 교리를 주입시키는 바람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베드로가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앞에서 떡하니 율법을 지켜버리니 팀킬을 당한 셈. 이는 초기 기독교인들 중에 구원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 되는건지 예수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건지 그 핵심교리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사람이 많다보니 생기는 일이다. 오히려 바울로는 올바른 신앙관이 정립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율법을 지키면 유익하다고 봤다.[93] 원문(UBS GNT5): "ηὐχόμην γὰρ ἀνάθεμα εἶναι αὐτὸς ἐγὼ ἀπὸ τοῦ Χριστοῦ ὑπὲρ τῶν ἀδελφῶν μου τῶν συγγενῶν μου κατὰ σάρκα"[94] 원문(UBS GNT5): "Εἰ δέ τινες τῶν κλάδων ἐξεκλάσθησαν, σὺ δὲ ἀγριέλαιος ὢν ἐνεκεντρίσθης ἐν αὐτοῖς καὶ συγκοινωνὸς τῆς ῥίζης τῆς πιότητος τῆς ἐλαίας ἐγένου, μὴ κατακαυχῶ τῶν κλάδων· εἰ δὲ κατακαυχᾶσαι οὐ σὺ τὴν ῥίζαν βαστάζεις ἀλλ᾽ ἡ ῥίζα σέ. ἐρεῖς οὖν, Ἐξεκλάσθησαν κλάδοι ἵνα ἐγὼ ἐγκεντρισθῶ. καλῶς· τῇ ἀπιστίᾳ ἐξεκλάσθησαν, σὺ δὲ τῇ πίστει ἕστηκας. μὴ ὑψηλὰ φρόνει ἀλλὰ φοβοῦ εἰ γὰρ ὁ θεὸς τῶν κατὰ φύσιν κλάδων οὐκ ἐφείσατο, [μή πως] οὐδὲ σοῦ φείσεται. ἴδε οὖν χρηστότητα καὶ ἀποτομίαν θεοῦ· ἐπὶ μὲν τοὺς πεσόντας ἀποτομία, ἐπὶ δὲ σὲ χρηστότης θεοῦ, ἐὰν ἐπιμένῃς τῇ χρηστότητι, ἐπεὶ καὶ σὺ ἐκκοπήσῃ. κἀκεῖνοι δέ, ἐὰν μὴ ἐπιμένωσιν τῇ ἀπιστίᾳ, ἐγκεντρισθήσονται· δυνατὸς γάρ ἐστιν ὁ θεὸς πάλιν ἐγκεντρίσαι αὐτούς. εἰ γὰρ σὺ ἐκ τῆς κατὰ φύσιν ἐξεκόπης ἀγριελαίου καὶ παρὰ φύσιν ἐνεκεντρίσθης εἰς καλλιέλαιον, πόσῳ μᾶλλον οὗτοι οἱ κατὰ φύσιν ἐγκεντρισθήσονται τῇ ἰδίᾳ ἐλαίᾳ."[95] 이 개념은 가톨릭개신교의 입장에서 해석의 차이가 있다.[96] 그리스도의 계명에 부합하는 선행 없이 그저 입으로 '믿는다'고만 고백한다고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그리스도교 어느 종파에서도 인정하지 않으며, 성경에서도 부정된다. 야고보서에 이런 내용이 있는데 니가 진짜 믿는다면 행동으로 너의 믿음을 증명하라는 것이다. 선행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될 수 없지만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선행이 따라나와야 정상이라는 것.[97] 현대 학계에서는 지극히 소수설이다.[98] 모르몬교나 여호와의 증인 측에서는 여전히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울로임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 측에서는 히브리서가 로마서의 바로 다음에 오는 필사본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그런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하는데, 설사 그런 필사본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책의 순서를 정하는 것은 필사자의 마음대로이니 히브리서가 로마서 다음에 오는 것이 히브리서의 저자가 로마서의 저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애초에 그런 필사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여호와의 증인 뿐이다.[99] 갈라디아서 제1 장 제12 절 (공동번역성서)[100] 이 주장은 잘못되었다. 바울로 서신뿐 아니라 복음서들에도 유다의 배반 직전의 장면에서 똑같은 단어인 '파라도시스' 즉 '넘겨주다'가 사용되었다. '내가 예수를 너희 중에 넘겨 주리니...(마26:15)' '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넘겨 주리라)...(마26:21)'.[101] 다만 신학자들은 예수 사후에 50년 즈음(약 서기 80년경)에 이르러 신약성서의 초본이 정리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바울로는 64년에서 67년 즈음에 죽었기 때문에 '전승'으로서는 예수의 행적이 당연히 전해졌겠지만, 그것이 체계화한 서간의 형태로서 정리되진 않았을 것이다.[102] 신약성경 본문비평학자 브루스 메츠거의 제자이다.[103] 사도행전 26장 9절에서 아그리파에게 자기 과거를 회고하며 나자렛 예수의 이름을 말한다.[104] "그리고 3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갈라디아서 1장 18절)."[105]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앞에서와 본디오 빌라도에게 당당하게 증언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나는 그대에게 명령합니다(디모데서 6장 13절)."[106] 사도행전 19장 1절부터 4절에 걸쳐 에페소 사람들과 세례자 요한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사도행전 13장에서도 세례자 요한과 예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강론한다.[107]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작성된 마르코복음에는 기도와 전례에 대한 많은 내용이 있지만, 주님의 기도/주기도문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108] (책 속 주석)바오로 사도와 예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특히 다음 책을 참가하라. J.BLANK, Paulus und Jesus, München 1968; D. L. DUNGAN, The Sayings of Jésus in the Churches of Paul, Philadelphia 1971; G. N. STANTON, Jesus of Nazareth in the New Testament Preaching, Cambridge 1973; J. D. G. DUNN, Jesus, Paul and the Law, London 1990.[109] (책 속 주석) 1데살 4,15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다. 또한 바울로가 서간에 나타나는 것 이상의 공관복음서 전승을 알고 있었는지도 확실히 말할 수 없다. 그랬으리라 추측해도 안 될 것은 없겠다.[110] 실제로 시간상 가장 이른 마르코 복음서 작성 시기 조차도 예루살렘 함락 시기인 서기 70년 정도로 추정된다. 즉 마르코가 복음서를 만들기 위해 예수의 어록과 행적을 정리하고 취재하는 동안은 충분히 예수라는 인물을 실제로 만나본 사람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바울로는 이런 정리보다는 이론가로써 신학을 전개하는데 주력하고 예수의 실제 어록에 대해서 엄격하게 조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111] 심지어 무신론적인 관점에 따라 단지 환상을 봤더라고 가정하더라도[112] 예를들어 마태 10,5의 발언은 그 전승을 바울로가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울로의 신학이 예수의 어록에 부합하느냐 마느냐와는 별개로, 굳이 언급할 이유가 적었을 것이다.[113] <예수는 실존했는가> 122페이지[114] 당장 교황 성 클레멘스 1세(97년경 순교)의 서간이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104년경 순교) 서간만 봐도 베드로 편지와 바울로 편지를 동시에 인용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베드로와 바울로를 두 사람 모두를 자기가 직접 만났을 때의 이야기까지 한다.[115] 실제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자유인답게 사십시오. 그러나 악을 행하는 구실로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섬기는 종입니다 (베드로1서 2장 16절).",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좋다는 말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로마서 6장 15절)."을 생각해 보길 권한다.[116] 루터가 신약에서 야고보서를 비하하면서까지 바울로 신학을 편향적으로 읽는 경향은 있었지만, 일단 야고보서에 명시적으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야고 2장 26절)라고 적혀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의화(칭의)론은 차이가 매우 미묘하다. 오히려 가톨릭과 루터교(+감리교)의 공동 선언을 보면, 문외한은 "도대체 이 둘이 무슨 차이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공통점이 많다고 느낄 것이다: 가톨릭 루터교 공동선언(+이후 감리교에서도 참여), 가톨릭 루터교 공동선언 부록[117] 이영헌 《로마서 강해》, 11쪽[118] 루가 복음·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의 조건을 매우 엄밀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119]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4,4 참조. SCHNEIDER(Apg I 228)는 14,14에서 사도 칭호가 없는 서방 텍스트의 '더 어려운 이문(異文)'을 우대한다.[120] (책 속 주석) 사도행전 18,24-28에 삽입된 아폴로의 활동에 관한 짧은 보도는 전적으로 바오로에게 정향되어 있다.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 바오로는 한 명의 사도도 만나지 못하고 (주님의 아우) 야고보만 만난다(21,18).[121] (책 속 주석)참조: G. GLEIN, Die Zwölf Apostel(FRLANT 77) (Göttingen 1961) 특히 11-188: J. ROLLOF,Apostolat ― Verkündigung ― Kirche(Gütersloh 1965) 199-211; C,BURCHARD, Der dreizehnte Zeuge (FRLANT 103) (Göttingen 1970); G.LÜDEMANN, Paulus, der Heidenapostel I (FRLANT 123) (Göttingen 1980); K. KERTELGE (Hrsg.), Paulus, in den ntl. Spätschriften (QD 89) (Freiburg 1981) 중 P.-G. MÜLLER(157-201)와 K. LÖNING(202-234)의 논문.[122] (책 속 주석)갈라티아서 1,18-19에서는 바오로가 사도회의 전에 한 차례만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123]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3장 8-10절[12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에서도 누가 봐도 바울로를 모티브로 한 사람이 예수를 모티브로 한 혁명가가 '독수리' 제국에게 처형당한 후 자기가 그의 수제자라고 자칭하며 제국에 충성하라는 내용으로 교리를 왜곡해 퍼트려 그게 정통교리로 변질되는 내용이 나온다.[125] 바울로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입장에서 바울로 서간은 좋게 말해봤자 바울로 개인의 해설서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는 얘기다.[126] 모든 사람에게 원수가 되었다는 부분은 영문판에서는 ‘opposed to everyone’이라고 번역된다.[127] (책 속 주석)Klausner, Von Jesus zu Paulus(Jerusalem 1950) 553-61.[128] (책 속 주석)Schoepes, Paulus, die Theologie des Apostels im Lichte der jüdischen Religionsgeschichte(Tübingen 1959), 특히 299-314.[129] (책 속 주석) 같은 책 9f,89,214[130] 애초에 현대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서간이 경전에 수록되어 수천년 넘게 읽힐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 한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봐도 당연한 일이다. 서간은 한 마디로 편지고, 바울로는 철저하게 그 당시의 특정 교회를 대상으로 물음에 친절히 답을 해주었을 뿐이다.[131] 그러니까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33절을 해석하자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132] 이 해석으로 40절 까지를 연결하면 이렇게 된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들에겐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났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만 내렸습니까? 누구든지 자기가 예언자이거나 성령을 은사로 받은 사람이라면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누구든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자건 남자건)예언하기를 구하십시오, (그 사람이 여자건 남자건)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133] 원문을 직역하자면 남자와 침대에서 동침하는 남자[134] 그는 자기가 죽기 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리라 여겼다.[135]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 역을 맡은 배우 맞다.[136] 바울로를 흠모한 성녀 테클라가 그 사람의 선교 여정을 뒤따르면서 벌어지는 모험을 그린 신앙 팬픽이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아시아의 장로가 쓴 팬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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