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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쿼모 Rivers Cuomo | |||
<colbgcolor=#fff><colcolor=#000> 다른 이름 | 피터 키츠(Peter Kitts)[1] | ||
출생 | 1970년 6월 13일 ([age(1970-06-13)]세) | ||
미국 뉴욕 주 뉴욕시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가수, 음악가, 싱어송라이터 | ||
소속 | 위저 (1992~현재) | ||
링크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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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 동생 제임스 A. 키츠[2] 이복형 브라이언 쿼모, 이복누나 리사 쿼모[3] 이복동생 섀넌 쿼모, 지나 쿼모, 게이브 쿼모 | ||
배우자 | 쿄코 이토 쿼모 (2006~현재) | ||
자녀 | 슬하 1남 1녀 딸 미아 쿼모 (2007년생) 아들 레오 쿼모 (2012년생) | ||
신체 | 169cm |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학사 | ||
사용 악기 | 보컬, 기타, 피아노, 키보드, 드럼, 베이스 | ||
활동 기간 | 1985년 ~ 현재 | ||
레이블 | Geffen, Epitaph, Republic, Crush, Atlantic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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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밴드 위저의 리더이자 프론트맨. 보컬, 리드 기타, 메인 송라이터를 맡고 있다. 위저의 노래들은 대부분 쿼모가 작곡·작사한 것이다.록밴드의 프론트맨임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뿔테안경을 끼고 셔츠와 가디건을 입는 매우 너드스러운 이미지로 유명하다.
2. 생애 및 활동 내역
2.1. 어린 시절
1970년 6월 13일 뉴욕 주 뉴욕시 맨해튼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리버스의 어머니 베벌리 쇼엔버거는 출산 직후 처음으로 들은 것이 창밖에서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였기 때문에 아들에게 '리버스(Rivers)'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 프랭크 쿼모는 1970년 월드컵에 출전한 세 명의 선수 리벨리노, 리바, 리베라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동생 리브스 쿼모에 따르면 원래 뉴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애플(Apple)'이라는 이름도 후보에 있었지만 아들보다는 딸에 어울리는 이름이라 기각되었다고 한다. 이후 리버스는 약 4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뉴욕 시의 불교 사원인 로체스터 젠 센터에 살았다. 당시 리버스는 천식 때문에 숨소리가 거친 편이었는데, 이 때문에 아버지 프랭크는 아들을 'weezer'라는 별명으로 불렀다.[4]1975년 프랭크와 베벌리가 이혼한 후 베벌리는 두 아들을 데리고 코네티컷 주의 아슈람(힌두교 수행원)인 요가빌로 이사해 스티브 키츠와 재혼했다. 요가빌에서 어른들에게 '라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리버스는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아이였다. 학교에서 거의 웃지 않았기 때문에 선생님이 리버스의 어머니에게 '리버스는 절대 행복해보이지 않는데,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라고 물었을 정도라고.[5] 또 유치원생 때는 또래 친구들보다 키가 30cm 정도 작았을 정도로 체구도 작은 편이었다.
1977년에는 아슈람에서 같이 학교를 다니던 또래 여자애가 키스의 앨범 Rock and Roll Over을 들려줬는데, 기타 사운드를 들은 순간 자신의 삶의 방향이 결정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동생 리브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키스 노래를 틀어놓고 헤드뱅잉을 하면서 락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요가빌은 1980년대 초에 코네티컷에서 버지니아로 위치를 옮겼지만 베벌리와 스티브는 아슈람을 따라 이주하는 대신 코네티컷에 남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리버스와 리브스 형제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롭고 폐쇄적인 종교 공동체를 떠나 공립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이들은 새 학교에 잘 적응하기 위해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체구가 작고 수줍음이 많은 데다 던전 앤 드래곤과 코믹스를 좋아하는 너드였던 리버스는 학창 시절에 괴롭힘을 자주 당했다. 덩치 큰 불리들이 길을 가면서 일부러 어깨로 치고 가는 건 물론 아예 심하게 두드려맞은 적도 많았다고.[7]
2.2. 위저 이전 밴드 활동기
중학생 때 같은 학교 학생들이 메탈 곡을 커버하자 관객들의 반응이 열성적인 것을 보고 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4살 생일선물로 첫 기타를 받은 후 친구들과 함께 키스 곡을 커버하는 밴드 퓨리(Fury)를 결성해 리드 기타를 맡았다. 리버스의 데모곡 앨범인 Alone: The Home Recordings of Rivers Cuomo에 수록된 I Wish You Had an Axe Guitar는 퓨리 결성 직후인 1984년에 리버스가 멤버들과 나눈 짧은 대화를 녹음한 것이다.[8]이듬해에는 본격적으로 자작곡을 만들고 밴드 활동을 하기 위해 동생 리브스, 절친 저스틴을 포함한 친구들과 함께 메탈 밴드 아방가르드(Avant Garde)를 결성했다. 리버스는 퓨리에 이어 리드 기타를 맡았다. 중고등학생들이 결성한 아마추어 밴드였지만 일주일 중 나흘은 모여서 몇 시간씩 연습을 하고 밴드에 전념하지 않는 멤버는 자를 정도로 진지하게 임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리버스가 코네티컷으로 이사한 직후부터 절친이었던 저스틴 피셔마저 파티에서 처음으로 대마초를 한 다음 날 밴드에서 나가고 싶냐는 경고를 받았다고.[9]
어릴 때부터 메탈을 즐겨 듣던 리버스와 친구들은 고등학생 때 찢어진 청바지, 스판덱스, 반다나, 징 박힌 팔찌 등 상당히 메탈스러운 패션으로 옷을 입었으며 머리도 젤을 이용해 잔뜩 세우고 다녔다.당시 사진[10] 특히 1986년에서 1987년 사이에는 이런 패션과 음악 취향 때문에 훨씬 덩치가 큰 운동선수 타입의 학생들에게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길을 가다가 마주치면 밀치거나 위협하는 불리들 때문에 쉬는 시간에 학교 복도를 걸어가는 것 자체가 두려울 정도였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는 학교 내 소규모 메탈 덕후 그룹의 리더격으로 부상해 불리들도 함부로 괴롭히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소심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친한 친구들과는 피가 날 때까지 육탄전을 하거나 가파른 비탈길에서 자동차 시동을 끄고 핸들이 잠긴 상태에서 차 열쇠를 뒷좌석에 던져버리는 등 매우 위험하게 놀기도 했다.[11]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밴드 활동에 전념하고자 1989년 아방가르드 멤버들과 함께 LA로 이사했다. 이때 이름을 다시 피터 키츠에서 본명인 리버스 쿼모로 바꿨다. LA에서는 원래 기타를 더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뮤지션스 인스티튜트의 전신인 GIT(기타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에 등록했지만 LA 생활에 정신이 팔려 할리우드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거나 공연을 보러 다니느라 출석 일수를 채우지 못해 제적당했다.[12]
당시 LA에서 신인 밴드들이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먼저 공연장 측으로부터 공연 티켓을 전부 구매한 다음 사람들에게 직접 티켓을 팔아야 했으므로 관객이 충분히 모이지 못하면 적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방가르드 멤버들은 음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기는커녕 무대에 서기 위해 돈을 써야 했고, 리버스는 파파 존스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아방가르드는 1990년에 밴드 이름을 줌(Zoom)으로 바꾸고 몇 차례 더 공연을 했지만 결국 해체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됐다.
리버스는 LA에 이사한 뒤로 본격적으로 작곡 활동을 시작했는데, 20대 초반에는 작곡 능력을 기르기 위해 근처 대학에서 영문학이나 작곡 관련 강좌를 닥치는 대로 수강하면서 매우 좋은 학점을 받았다고 한다. 또 타워 레코드에서 일하면서 픽시즈나 너바나 등 당시 급부상하던 얼터너티브 밴드들을 접하고 이제는 메탈의 시대가 가고 얼터너티브가 대세가 되었다는 판단을 했다.
타워 레코드에서 알바를 하는 동안 리버스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음악을 하기 위해 뉴욕에서 LA로 온 팻 핀을 만났다. 팻은 뉴욕에서부터 함께 음악을 하던 자신의 친구인 드러머 패트릭 윌슨을 리버스에게 소개해줬다. 어린 시절부터 메탈 테크닉에 익숙하던 리버스는 처음에는 펑크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이 많은 패트릭과 합주를 하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꼈지만, 곧 둘 다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사운드를 낼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친해졌다. 리버스와 패트릭은 베이시스트 스코티 채프먼을 영입해 퍼즈(Fuzz)라는 쓰리피스 밴드를 결성했으나 퍼즈는 곧 스코티가 탈퇴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체했다.[13]
퍼즈가 해체한 후 리버스는 패트릭이 팻 핀, 그리고 기타리스트 제이슨 크로퍼와 함께 만든 밴드 식스티 롱 소시지스(60 Wrong Sausages)에 기타리스트로 가입했다. 하지만 60WS 역시 음반사와 계약을 맺지 못하고 몇 번의 공연 끝에 해체했다.
60WS가 해체한 후 리버스는 먼저 밴드를 결성한 후 공연 레퍼토리를 채우기 위해 급하게 곡을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다음 밴드를 시작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곡을 미리 작곡해두기 위해 드러머 패트릭 윌슨과 함께 살면서 50곡의 데모곡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The 50 Song Project'를 진행했다. 결국 처음의 목표치를 채우지 못하고 29곡을 만든 뒤 위저를 결성했지만, 이때 만들어진 노래 중에는 Undone - The Sweater Song, My Name Is Jonas, The World Has Turned and Left Me Here 등 1집 블루 앨범의 수록곡도 있었다.
한편 패트릭은 LA로 이사한 뒤 사귄 친구인 맷 샤프를 리버스에게 소개했다. 당시 리버스가 만들어둔 데모곡들을 듣고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맷은 만약 리버스가 밴드를 만든다면 자신이 베이시스트이자 매니저 역할을 맡아 음반 계약을 얻어내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리버스는 패트릭 윌슨, 맷 샤프, 그리고 60WS의 멤버였던 제이슨 크로퍼와 함께 위저를 결성하고 1992년 2월 14일 첫 리허설을 진행했다.
2.3. 위저 활동기
위저의 역사는 위저 참고.이후 위저 멤버들은 주변 공연장들에 전화를 해가면서 공연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 할리우드 볼리바드의 작은 클럽 Raji's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결성한 밴드 도그스타 바로 뒤에 무대에 오를 클로징 밴드를 급하게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저의 첫 공연이 성사됐다. 당시에는 아직 밴드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클럽 주인이 밴드 이름을 묻자 리버스가 엉겁결에 자신의 어린 시절 별명인 '위저'라고 대답한 것이 밴드명으로 굳어졌다.[14] 첫 공연 당시에는 키아누 리브스를 보러 왔던 사람들이 도그스타의 공연이 끝난 후 전부 떠나는 바람에 겨우 네댓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했다고 한다.
이후 꾸준히 LA 밴드씬에서 입지를 키워나가던 위저는 1993년 6월 25일에 게펜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당시 게펜에서 신인 아티스트를 발굴하던 담당자에 따르면 이미 LA 기반 레코드 회사들은 대부분 실력 있는 신인 밴드인 위저에 관심을 보였지만 당대 유행하던 그런지, 팝 펑크 밴드들의 강렬한 이미지와는 달리 지나치게 너드스러운 리버스와 멤버들의 모습에 계약을 단념했다고 한다. 락스타스러운 이미지를 갖추지 못하면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게펜 레코드 내부에서도 위저의 성공 여부에 회의적인 목소리가 존재했지만 결국 위저 멤버들에게 계약 제의를 했고, 맷과 리버스는 레코드사 관계자에게 스타워즈 시리즈를 함께 볼 것을 강요하는 등 나름대로의 괴상한 테스트를 거친 후 제의를 받아들였다.[15] 하지만 계약을 맺고 1집을 녹음하는 동안에도 리버스는 음반을 찍어낼 수 있는 최소 수량을 물어본 뒤 아마 자신들은 그 정도도 판매하지 못할 테니까 손해를 볼 거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밴드의 전망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1993년에는 뉴욕의 스튜디오로 가서 1집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위저 멤버들의 요청으로 더 카스의 보컬 릭 오케이섹이 프로듀싱을 맡았다. 리버스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릭과 굉장히 잘 맞았다고 하는데, 블루 앨범 녹음 비하인드 영상을 보면 리버스가 릭과 함께 장난을 치거나 합주를 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1집 녹음 중 리버스와 맷의 주도로 60WS부터 함께한 위저 원년 멤버인 제이슨 크로퍼가 밴드를 나가게 됐다. 대신 역시 80년대 후반부터 LA에서 밴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위저 멤버들과 안면이 있던 브라이언 벨이 급하게 합류했다. 브라이언에 따르면 처음에 브라이언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맷이었지만 맷이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계속 딴 이야기만 하자 옆에 있던 리버스가 전화기를 뺏어서 위저에 가입할 의사가 있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마침 원래 소속되어 있던 밴드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던 브라이언이 승낙하자 리버스는 브라이언에게 가장 좋아하는 스타워즈 피규어가 뭔지 질문했고, 브라이언은 '해머헤드'라고 답변했다고.
1994년 5월에 1집 블루 앨범을 발매했다. 평단의 반응도 긍정적이었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지만 오히려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Buddy Holly의 뮤직비디오가 화제가 된 데다 사람들이 Undone - The Sweater Song 등 가사에 담긴 우울한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유쾌하고 즐거운 음악을 하는 밴드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또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상상하던 락스타의 삶은 마냥 화려하고 즐거울 것 같았지만 투어 때문에 늘 이동하느라 외로운 데다 락스타가 되었다고 수줍음이 많은 자신의 성격이 바뀌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국 리버스는 1995년 가을에 2학년 2학기로 하버드에 편입했다. '전자레인지에 냉동 음식을 돌리는 시간 외에는 노래를 만들 시간이 없다'고 했지만 첫 학기부터 올A를 받았다. 2학기 동안 다니다가 1996년 9월에 2집 Pinkerton을 발매하면서 투어를 돌기 위해 한 학기 동안 휴학했다. 1997년 1월에 보스턴으로 돌아가서 한 학기를 더 다녔으나 Pinkerton이 실패한 후 모든 것에 회의감을 느껴 재등록하지 않았다.
이후 밴드 활동에 전념하다가 2004년 2학기에 하버드에 복학했다. 이때 등록을 포기했던 하버드에 다시 입학하기 위해 재입학 에세이를 썼는데, 위저 앨범을 만들고 녹음 및 발매 과정을 전부 총괄한 경험, 다양한 책을 읽고 명상을 한 경험 등에 대해 읽어볼 수 있다. 이후에는 밴드 활동과 학업을 병행하다가 2006년에 마지막 학기를 이수하고 2006년 6월에 영문학 학사로 졸업했다.
2003년에는 명상을 시작하면서 금욕 선언을 했다.
2006년 6월에 여자친구 이토 쿄코와 말리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위저 멤버인 패트릭, 브라이언, 스콧은 물론 60WS 멤버였던 팻 핀, 위저 초창기 멤버였던 제이슨 크로퍼와 맷 샤프까지도 참석했다. 2대 베이시스트인 마이키 웰시를 제외하면 위저의 역사를 만든 모든 사람들이 함께한 셈.
3. 가족
부계 가족- 할아버지: 안토니 쿼모
이탈리아 포사체시아 출신. 16살에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 주 로체스터에 정착했다. 토론토에서 버팔로를 거쳐서 미국에 들어왔는데, 아마 불법적인 경로로 이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 시민이 아닌데도 2차대전에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 이후 시민권을 받았다. 원래 이탈리아의 재단사 집안 출신이었지만 미국에서 전통을 깨고 제화공이 됐다. 리버스는 망치로 신발을 만들 때 나는 소리 때문에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둣-두(doot-doo)'라고 불렀다고 한다. 로체스터 모란 가에서 신발 가게를 했는데, 70년대 중반에 혼자 가게를 보던 중 강도에게 습격당해 한쪽 눈을 잃었다.
- 할머니: 데니스 쿼모 (1918.4.8 ~ 2008.4.15)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 1937년에 뉴욕 로체스터로 이주했다. 가톨릭 신자였으며 병원에서 일했다.
- 아버지: 프랭크 쿼모
이탈리아계 미국인. 재즈 밴드의 드러머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뉴욕 로체스터 젠 센터에서 소를 키우며 불교 승려가 되기 위해 수행하던 중 베벌리 쇼엔버거를 만나 1969년에 결혼했다. 하지만 둘째 아들 리브스가 태어나고 약 4년 후인 1975년에 베벌리와 이혼하고 독일로 이주해 처음에는 직업군인으로 복무하다가 이후 목사가 됐다. 리버스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연락이 거의 닿지 않았으므로 리버스는 20대 초반까지도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매우 컸다고 한다. 위저라는 밴드 이름은 프랭크가 리버스에게 붙여준 어린 시절 별명이며, 1집 싱글곡인 Say It Ain't So는 가족을 떠난 프랭크에 대한 원망, 새아버지 역시 프랭크처럼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담고 있다.[16]
하지만 이후 아들과 관계를 회복해 리버스는 1집 블루 앨범 발매 후 유럽 투어 중 독일에서 프랭크의 집을 방문했고, 2014년에 9집 Everything Will Be Alright를 발매한 후에는 프랭크가 위저 무대에 올라 함께 드럼을 치기도 했다. 9집 수록곡 Back to the Shack에는 'I made up with my dad'라는 가사도 나온다. 리버스는 자신도 아버지가 된 이후 아버지 프랭크를 용서하게 되었다고 한다. 역시 9집 수록곡인 Foolish Father는 아버지 프랭크에게 영감을 받은 가사인 동시에 리버스가 자신의 딸 미아에게 보내는 사과이기도 하다.
프랭크 역시 아버지 안토니 쿼모와 마찬가지로 괴한에게 공격당해 치명상을 입었는데, 그 이후로 유동식만 먹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고 한다.
- 의붓어머니: 릴라 쿼모
앨러배마 주 출신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 프랭크 쿼모와 재혼해 리버스의 의붓어머니가 되었다.
모계 가족
- 할아버지: 프레드 쇼엔버거 (1922.5.9 ~ 1968.11)
본명은 프레데릭 루이스 쇼엔버거.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프레데릭 쇼엔버거와 헬렌 터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이스크림 회사에서 화학자로 일했지만 종교에 관심이 많아 목사가 됐다. 아내 폴리와 함께 인권 운동에 힘썼다고 한다. 46세에 사망했다.
- 할머니: 폴리 보겔 (1920.4.29 ~ 2017.6.1)
앨러배마 주의 목화 농장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막내로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아 어린 시절 거의 땅을 밟은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69년에 첫 남편 프레드 쇼엔버거와 사별한 후 존 보겔과 재혼했다.
- 어머니: 베벌리 쇼엔버거 (1947.5.8~)
노스 캐롤라이나 주 샬롯에서 태어나 8살 때 조지아 주 애틀랜타로 이사했다. 고등학생 때 1965년 국제 과학대회에서 수상했으며 조지아 주 극본 집필 대회, 미국 남동부 낭독 대회 등에서도 상을 받는 등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다. 플로리다 주 뉴 칼리지에 진학했으나 60년대 히피 문화에 영향을 받아 2년만에 자퇴하고 다른 히피 무리들과 함께 여러 지방을 거쳐 뉴욕으로 이주했다.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서 몇 달 동안 생활하다가 마침내 로체스터 젠 센터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프랭크를 만나 몇 달 후 1969년에 결혼했다.
1975년에 프랭크와 이혼한 후 1976년에 스티븐 키츠와 재혼, 1989년까지 결혼생활을 했다. 현재는 노만 리치와 재혼한 상태로, 산타 모니카에서 첫째 리버스의 가족 근처에 살고 있다.
- 의붓아버지: 스티븐 키츠, 노먼 리치
스티븐 키츠는 1976년부터 1989년까지 리버스의 어머니 베벌리와 부부였으므로 사실상 리버스의 학창 시절을 모두 함께한 아버지였다. 리버스와 리브스 형제는 학창시절에 스티븐의 성을 따라 '피터 키츠'와 '제임스 키츠'로 개명하기도 했다. 현재는 재혼해 새로운 가정을 꾸린 상태인데, 위저 앨범의 thanks to 목록에 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리버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듯하다. 위저 1집 수록곡인 Say It Ain't So 가사 중 'this bottle of Steven's'에서 말하는 '스티븐'이 바로 스티븐 키츠다. 해당 노래는 리버스가 냉장고에서 스티븐의 맥주 캔을 발견하고 쓴 노래이기 때문이다.
노먼 리치는 뉴욕 주 말론 출신으로, 현재 베벌리와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공군 출신이며 가족 및 부부관계 상담사로 일했다고 한다.
형제자매
- 동생: 제임스 A. 키츠 공식 페이지
원래 이름은 리브스 쿼모. 낙엽이 지는 가을에 태어날 예정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예정일보다 빠른 1971년 8월에 태어났다. 형인 리버스와 마찬가지로 공립학교로 전학을 가면서 학교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 '제임스 키츠'로 개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원래 이름으로 돌아온 형 리버스와는 달리 계속해서 개명 후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다만 위저 앨범 부클릿의 'thanks to' 부분에서 늘 '리브스 쿼모'라고 지칭되는 걸로 보아 리버스를 비롯한 가족들에게는 여전히 리브스라고 불리는 듯.
1992년 오벌린 대학교에서 환경학 학사 학위를, 1995년 미시간 대학교, 1998년 코넬 대학교에서 각각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2001년 코넬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워싱턴 대학교, 다트머스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를 거쳐 현재는 매사추세츠 대학교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는 형 리버스와 달리 음악 산업과 전혀 관련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리버스가 만들었던 키스 커버밴드 퓨리의 리듬 기타리스트였다.
리브스는 위저 노래 가사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다. 1집 블루 앨범의 Say It Ain't So 중 '지미와 레슬링을 하고(wrestle with Jimmy)'에서 말하는 지미가 바로 동생 리브스다. 또 역시 1집 수록곡인 My Name Is Jonas에서 '내 동생이 보낸 깊은 걱정의 편지(words of deep concern from my little brother)'는 당시 대학생이던 리브스가 교통사고 보험 문제 때문에 고민하던 상황을 담은 것이다. 리버스의 데모곡 프로젝트로 발매된 I Was Scared 역시 학창 시절 리브스가 겪은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Buddy Holly 싱글 커버의 변경 후 버전은 안경을 쓴 어린 리버스가 동생 리브스와 나란히 앉아서 찍은 사진이다.
- 이복형 브라이언 쿼모, 이복누나 리사 쿼모
프랭크가 리버스의 어머니인 베벌리 쇼넨버그를 만나기 전에 태어난 자녀들. 리버스의 할머니, 즉 프랭크 쿼모의 어머니인 데니스 쿼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정식 결혼을 거치지 않고 태어난 브라이언과 리사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늘 리버스가 첫 손주라고 말했기 때문에 리버스는 성인이 될 때까지 이들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 이복동생 섀넌 쿼모, 지나 쿼모, 게이브 쿼모
프랭크 쿼모가 독일로 이주한 후 태어난 자녀들. 지나 쿼모는 리버스가 1994년 위저의 데뷔 앨범인 블루 앨범을 발매한 후 유럽 투어 중 독일에 갔을 때 10살 정도였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리버스는 어린 이복동생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줬다고 한다.
배우자 및 자녀
- 배우자: 쿄코 이토 쿼모
일본 구마모토 현 출신으로, UCLA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1997년 가을에 리버스의 솔로 공연에서 처음으로 만났다고 한다. 이후 2005년 12월에 리버스가 청혼해서 이듬해인 2006년 6월에 결혼해 현재까지 산타 모니카에서 함께 살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팬이며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이다.[17] 한국어 실력도 수준급이라고 한다.
- 딸: 미아 쿼모
2007년 5월생. 어린 시절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면서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아픈 적이 있었다고 한다.[18]
BLACKPINK를 좋아한다. 14집 OK Human 수록곡 Screens에서 핸드폰으로 블랙핑크 영상을 본다는 사실이 언급됐다. 게임도 좋아하는 편인데, 특히 최근 원신을 자주 플레이하기 때문에 리버스 역시 딸과 공유할 취미를 만들기 위해 게임을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2014년에는 위저 무대에서 Perfect Situation의 키보드를 연주하기도 했다. 2014년 위저 크루즈 공연
- 아들: 레오 쿼모
2012년 10월생. 출산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쿄코가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포도를 좋아하기 때문에 리버스가 Budouski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한다. 2014년에 누나 미아와 함께 무대에 올라서 기타 모양 장난감을 가지고 에어기타를 선보이기도 했다.
4. 음악
4.1. 보컬
위저의 노래들은 레드 앨범, 틸 앨범의 몇 곡을 제외하면 전부 리버스가 불렀다.원래 리버스는 고등학교 친구들과 메탈 밴드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는데, 자신이 메탈 밴드의 보컬을 맡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래는 부르지 않고 리드 기타리스트 역할만 맡았다. 하지만 위저에서는 밴드의 창립자이자 메인 송라이터로서 자연스럽게 보컬을 담당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부러 목을 긁으면서 거친 목소리를 냈지만,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지금의 보컬 스타일을 완성했다.[19]
밴드 보컬로서 목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듯하다.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의사의 조언에 따라 노래를 거의 하지 않고 목을 쉬는 기간을 가지기도 하며, 개인 유튜브 계정에 보컬 트레이닝을 받는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50대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매우 맑은 편이다. 평소 목소리도 약간 높기 때문에 노래할 때도 소년 같은 느낌이 있다.
4.2. 악기 연주
- 기타
14살 생일에 첫 기타를 선물받은 후 중학생 때 메탈 커버밴드의 리드 기타리스트로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위저에서도 리드 기타를 맡고 있다. 다만 무대에서는 보컬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주로 리듬 기타 담당인 브라이언 벨이 리드 기타 파트를 맡고 리버스는 스트로크 위주의 리듬 기타 파트를 연주하다가 기타 솔로는 리버스가 연주하는 식으로 두 기타리스트가 리드 기타 역할을 분담해서 맡고 있다.
리버스는 어릴 때부터 메탈 밴드를 좋아해 shredding을 비롯한 메탈 장르 특유의 연주 기법과 즉흥 연주에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위저가 활동을 시작한 90년대 초반에는 메탈 장르가 상대적으로 '쿨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고 얼터너티브 장르가 유행하면서 메탈스러운 기타 속주를 할 줄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
1집 블루 앨범 녹음 중간에 기타리스트 제이슨 크로퍼를 내보내고 새 멤버로 브라이언 벨을 영입했는데, 벨이 크로퍼의 리듬 기타 파트를 익혀서 재녹음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리버스가 기타 파트를 모두 녹음했다. [20]
- 피아노
록뿐만 아니라 클래식 음악도 좋아하는 쿼모는 기타리스트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꾸준히 피아노에도 관심이 있었다. 작곡 과정에서도 기타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며, LA 필하모닉과 함께한 OK Human 라이브에서는 아예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쿼모는 현재도 매일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21]
- 드럼
쿼모와 함께 퍼즈, 식스티 롱 소시지스를 거쳐 위저를 창립한 드러머 패트릭 윌슨은 위저의 근간이 된 '50곡 데모 프로젝트'를 통해 리버스와 함께 작곡 활동을 했으며, 1인 밴드인 더 스페셜 굿니스를 만들었을 정도로 뛰어난 기타리스트이자 송라이터이다. 따라서 아직 레퍼토리가 확정되지 않은 위저 초기에는 셋리스트에 윌슨이 보컬과 기타를 맡고, 대신 쿼모가 드럼을 치는 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2008년~2009년의 레드 앨범~래디튜드 투어에서도 가끔 윌슨이 노래를 부르고 쿼모가 대신 드럼을 맡았으며, 윌슨이 부른 레드 앨범 수록곡 Automatic의 경우 쿼모가 드럼을 녹음했다.
- 기타 악기
Alone 시리즈에 수록된 데모곡들은 기타, 피아노, 드럼뿐만 아니라 베이스, 클라리넷, 트럼펫 등 모든 악기를 리버스가 혼자 녹음했다. Longtime Sunshine의 데모 버전에서는 클라리넷도 연주했다.다만 이제 막 클라리넷을 어떻게 부는지 깨달은 직후에 녹음했기 때문에 클라리넷보다는 카주처럼 들린다고 자평했다클래식 곡을 직접 만들고자 한 Victory on the Hill에서는 트럼펫 등 금관악기도 연주했다. 또한 20대 초반에는 무대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4.3. 송라이팅
위저의 거의 모든 노래를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만들어서 녹음했고, 고등학생 때도 이미 메탈 곡을 작곡하긴 했지만 본격적인 송라이팅은 1989년 LA로 이사한 후 20대 초반에 시작했다. 90년대 초반부터는 비틀즈, 비치 보이스 그리고 당시 급부상하던 너바나, 픽시즈 등의 얼터너티브 밴드에 영향을 받은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메탈에 영향을 받은 기존 색채를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어쿠스틱 기타 한 대만 가지고 방에 틀어박혀서 계속해서 멜로디와 리프를 구상하는 식으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데모곡들에 게펜 레코드가 관심을 보이면서 대형 레이블과 바로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블루 앨범의 절반 정도는 기존에 만들었던 노래였지만 나머지 절반은 리버스가 계약 후에 단독으로 작곡했다. 이미 앨범을 발매하기로 되어 있는 상황에서 미리 만들어둔 노래보다 더 좋은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심하게 느꼈다고 한다.[22]클래식 작곡에 관심이 많다. Songs from the Black Hole 프로젝트도 클래식 작곡에 영향을 받았고, 특히 레드 앨범의 The Greates Man That Ever Lived는 하나의 테마를 여러 방식으로 변주하는 클래식 작곡법을 염두에 두고 만든 곡으로, 아예 클래식 작곡 수업에서 과제로 만들었던 노래를 후반부에 활용했다.
데모곡을 무척 많이 만드는 편이다. 2집에서 3집 사이 5년간의 공백 동안 수백 곡의 데모곡을 만들어서 이중 앨범 수록곡을 골랐다고 한다. 이후로도 한 앨범을 위해 최소 수십, 최대 수백 곡의 후보 리스트를 만든 다음 프로듀서 및 멤버들과 함께 수록곡을 고르는 방식으로 앨범 트랙 리스트를 선정하고 있다. 2020년에 무려 2000곡이 넘는 데모곡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업로드해 팬들이 구매해서 들어볼 수 있게 했다.
평소에 리프, 멜로디 등이 떠오르면 코드 진행이나 키, 분위기 등을 기준으로 스프레드시트에 정리해둔 다음 여러 가지를 뽑아 조합하는 식으로 노래를 만든다. 가사 역시 글자 수와 악센트를 기준으로 정리해뒀다가 멜로디에 맞는 가사를 뽑아서 사용한다고 한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솔직하게 노래한 1, 2집과는 달리 의식의 흐름 기법, 스프레드시트에서 가사를 조합하는 방식 등을 활용하는 최근 앨범에는 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뜬금 없는 가사도 많다. 리버스 본인도 노래를 들었을 때 의미를 알 수 없는 곡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한다.
2008년에는 팬들과 함께 노래를 만드는 Let's Write a Sawng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유튜브에 당시 영상이 모두 업로드되어 있는데, 이 프로젝트에서도 당시 리버스가 노래를 만드는 방식이 드러난다. 2016년에는 팟캐스트 Song Exploder에 출연해 화이트 앨범의 수록곡인 Summer Elaine and Drunk Dori를 가지고 자신의 작곡 과정을 상세히 설명했다. 여기에서 팟캐스트를 들을 수 있다.
5. 기타 관심사
5.1. 영문학
영문학에 관심이 많으며, 특히 셰익스피어 덕후이다. 쉬는 날에는 셰익스피어 공연을 본다고 했고 래리 킹과의 인터뷰 중 무인도에 가져갈 세가지로 바흐의 음악과 셰익스피어의 작품, 아내를 골랐다. 팬들에게 셰익스피어 연극 티켓을 무료로 주고 함께 연극을 본 다음 짧은 어쿠스틱 공연을 진행하는 'nerd night'라는 행사를 여러 차례 진행하기도 했다. 위저 노래 중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곡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9집 Everything Will Be Alright in the End의 Cleopatra는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 영감을 받은 곡이며, 같은 앨범의 Foolish Father 역시 <리어 왕>에 영감을 받았다.하버드에 재입학한 후 영문학을 전공했고, 인터뷰에서 자신이 음악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영문학 교수를 했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23]
14집 OK Human에는 아예 분노의 포도라는 제목의 곡이 있다. 자다가 늦은 밤에 깨서 혼자 오디블로 문학 작품을 듣는 순간을 묘사한 노래로, <분노의 포도>를 포함해 <모비 딕>, <피터 팬>, <반지의 제왕>, <1984> 등 다양한 영미 문학 작품의 제목과 등장인물이 언급된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는 <분노의 포도> 출간 82주년 기념일에 맞춰 공개됐다.
5.2. 명상
어린 시절을 힌두교 수행원에서 보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이미 정기적으로 명상을 했다고 한다.하지만 아슈람을 떠난 후에는 명상을 하지 않다가 2003년에 프로듀서 릭 루빈의 권유로 위빠사나 명상을 시작했다. 당시 참여했던 단기 명상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었던 리버스는 명상을 계속하기 위해 2년 동안 자위 행위를 포함한 모든 성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금욕 선언을 했다.[24] 금욕 선언을 했던 2003년 6월부터 현재까지 술과 약을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한다. 2013년에 무릎 수술을 받으면서도 애드빌을 제외한 모든 진통제를 거부했다고.
2003년에 명상을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를 제외하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명상을 하고 있다. 하버드 재학 중에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1시간 동안 명상을 하고, 오후 5시 반에 또 다시 명상을 한다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매년 일정 기간 수행원에 들어가서 묵언수행을 하며, 일반인을 대상으로 명상에 관하여 무료강좌를 하기도 했다.
5.3. 코딩
하버드의 공개 코딩강좌 CS50를 수강했고, 매일 취미로 코딩을 한다고 한다.코딩강좌 수강 당시 과제로 '드라이브타임스'라는 이름의 투어 스케줄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위저 멤버들이 등장하는 소개영상도 찍었다.
개인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 역시 직접 만든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매일 갱신되며, 개인 홈페이지 'Mr. Rivers' Neighborhood'[25] 역시 직접 만들었다. 홈페이지에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들어온 데모곡을 모두 업로드하고 팬들이 직접 선택해 구매할 수 있게 한 '마켓', 리버스의 개인사 및 위저의 역사와 관련된 다양한 정보들을 올린 '리버피디아', 추후 리버스의 솔로 공연 및 위저의 소규모 공연 셋리스트를 짤 때 참고하기 위해 팬들의 선호를 조사하는 '셋리스트 서베이', 팬들과 리버스가 자유롭게 채팅을 하는 '리버챗', 인스타그램과 비슷하게 팬들이 자신의 일상 사진을 공유할 수 있는 '리버그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공식 디스코드 페이지를 개설하면서 채팅 및 친교 기능은 디스코드로 옮겨갔고 홈페이지는 구매한 데모곡을 바로 듣고 별점을 매기거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 수 있는 음악 플레이어 위주로 개편됐다. 도메인은 그대로지만 홈페이지 이름도 스포티파이를 패러디한 Weezify로 바뀌었다.
디스코드 페이지를 오픈한 후에도 다양한 봇을 프로그래밍해 추가하고 팬들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채팅 서버를 만드는 등 서버 관리자로서 꾸준히 열일하고 있다.
2021년에는 홈페이지 Weezify를 모바일 앱으로 출시했다.
최근에는 블록체인, NFT, 메타버스 등에도 관심이 큰 듯하다.
5.4. 스포츠
어릴 때는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선천적인 허벅지뼈 문제로 인해 자랄수록 양쪽 다리 길이의 차이가 커졌기 때문에 꿈을 포기해야 했다.[26] 비록 축구선수 대신 락스타가 되긴 했지만 위저 활동 중에도 스튜디오나 대기실, 화보 촬영장 등에서 혼자 축구공을 차고 있는 영상이나 사진이 많다. 공연 전후에 시간이 비면 팬들을 초대해 풋살을 하기도 했다. 개인 유튜브 계정에 축구 기술을 배우는 짧은 영상도 여러 개 올라와 있고, 위저 크루즈 Q&A에서는 음악을 하지 않았으면 축구선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해당 영상 20살부터 살았던 LA를 연고지로 하는 로스앤젤레스 갤럭시 서포터로, 한때 시즌권을 사서 경기를 보러 갔다고 한다.축덕답게 월드컵에도 관심이 많은데 2006년, 2010년에는 직접 경기를 보러 갔을 뿐만 아니라 월드컵 미국 대표팀을 위한 응원가를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데 2006년의 My Day Is Coming의 경우 이미 미국 대표팀이 예선에서 탈락한 후에 만들었기 때문에 응원가라는 성격에 맞지 않게 매우 슬픈 느낌이다.
2010년에는 월드컵 이전에 미국 대표팀의 성적이 꽤 좋았기 때문에 기대하는 마음으로 경기 전에 미리 응원가 Represent를 발매했다. 미국 축구 대표팀 역시 이 노래를 비공식 응원가로 인정했고 공식 영상도 공개했다. 또 대표팀 선수들이 경기 전에 이 노래를 듣기도 했는데, 선수들이 노래를 듣고 치른 첫 경기부터 잉글랜드를 상대로 1:1로 비긴 것 때문에 리버스가 매우 행복해했다고.[27]
2008년에 MTV에서 The Greatest Man That Ever Lived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는 멤버들과 함께 농구를 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또 1989년에 LA로 이사한 뒤에는 할리우드에서 스케이트보드를 자주 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지만 2013년에 무대에서 무릎을 다친 이후로 격렬한 운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그 이후로는 거의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인 골프를 자주 치는 편이다. 폴 아웃 보이의 피트 웬츠와 함께 골프를 치기도 했다.
6. 디스코그래피
6.1. 위저 디스코그래피
- Weezer(Blue Album) (1994)
- Pinkerton (1996)
- Weezer (Green Album) (2001)
- Maladroit (2002)
- Make Believe (2005)
- Weezer (Red Album) (2008)
- Raditude (2009)
- Hurley (2010)
- Everything Will Be Alright in the End (2014)
- Weezer (White Album) (2016)
- Pacific Daydream (2017)
- Weezer (Teal Album) (2019)
- Weezer(Black Album) (2019)
- OK Human (2021)
- Van Weezer (2021)
6.2. 솔로 디스코그래피
Alone 시리즈는 리버스가 만든 노래들 중 위저 앨범에 실리지 못한 곡들이나 앨범 수록곡의 데모 버전 음원을 담은 앨범이다. 모든 악기를 리버스가 직접 연주했다. 이중 Alone과 Alone II, 그리고 Not Alone은 CD로 발매되었으며, Alone III는 2011년에 한정 수량으로 출간된 책 Pinkerton Diaries에 CD 형태로 동봉되어 있었다. 그 이후의 앨범들은 모두 리버스의 개인 홈페이지에서 구매 가능하다.[28]- Alone: The Home Recordings of Rivers Cuomo (2007)
- Alone II: The Home Recordings of Rivers Cuomo (2008)
- Not Alone – Rivers Cuomo and Friends: Live at Fingerprints (2009)
- Alone III: The Pinkerton Years (2011)
- Alone IV: Before Weezer (2020)
- Alone V: The Blue-Pinkerton Years (2020)
- Alone VI: The Black Room (2020)
- Alone VII: The Green Years (2020)
- Alone VIII: The Maladroit Years (2020)
- Alone IX: The Make Believe Years (2020)
- Alone X: The Red-Raditude-Hurley Years (2020)
- Alone XI: The EWBAITE Years (2020)
- Alone XII: The White Year (2020)
- Alone XIII: The Pacific Daydream Years (2021)
6.3. 스콧&리버스
밴드 알리스터(Allister)의 멤버 스콧 머피와 리버스가 함께 만든 밴드. 모든 노래를 일본어로 부른다.- 1집 スコット と リバース (2013)
- 2집 ニマイメ (2017)
6.4. 기타 콜라보레이션
7. 여담
- 내향인 같지만 의외로 다른 뮤지션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이고, 팬들과도 활발히 채팅을 한다. 위저 앨범 부클릿의 Thanks to 명단을 보면 거의 언제나 네 명의 멤버들 중 리버스가 쓴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 인생에 다양한 phase가 있다. 데뷔 초기에는 너무 소심해서 인터뷰에서 다른 사람과 눈도 잘 못 마주쳤다.[29] 공연할 때도 신발을 보고 연주하거나 가만히 서서 노래했다. 2006년 결혼 이후 아빠가 되자 중년의 위기
오춘기를 겪었는지 콧수염을 기른 것을 시작으로 이전과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30] Hurley 발매 당시까지 무대에서 활달한 모습을 보이다가 메모리즈 투어[31] 이후로 다시 차분해졌다. 현재는 인터뷰에서 말도 잘하고 무대에서도 여유로운 자세로 공연한다.
- 성장하면서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44mm 짧아졌고, 비대칭인 다리 때문에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다리 문제 때문에 정형외과에 자주 방문했는데, 1981년 5월에 검진을 받은 후 정확히 어떤 문제인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리버스의 어머니가 쓴 편지 어릴 때부터 오른쪽 다리를 움직이는 데도 문제가 있었으며 20대 초반에는 양쪽 신발의 밑창 두께가 차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집 블루 앨범 발매 후 얻은 수입으로 다리 수술을 받았다. 이후 한참 동안 '다리에 화살을 7발 정도 맞은 것처럼' 심한 고통에 시달렸으며 오른쪽 허벅지에 통형의 거대한 금속 외고정기를 낀 채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1집 유럽 투어 중 수술을 받았는데, 특히 영국 공연에서는 서 있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서 공연 중간에 의자를 가져왔지만 교정기 때문에 의자에 제대로 앉지도 못했다고. 당시 공연을 보면 교정기 때문에 전혀 사이즈가 맞지 않는 거대한 바지를 입은 것을 볼 수 있다. 1995년 라이브
이후 하버드 재학 당시에도 수업 중간에도 진통제를 먹었고, 다리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수업 사이에 여유가 생기면 기숙사에 가서 침대에 누워있어야 했다고 한다. 2집 Pinkerton의'The Good Life'는 이런 리버스의 상태를 표현한 곡인데, The Good Life 싱글 후면에 있는 X-레이 사진은 수술을 받은 후 교정기를 착용한 리버스의 다리를 찍은 것이다.[32] 생긴 것 답게학력도 매우 좋아서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 학사 출신이다.[33] 다만 밴드 활동과 학업을 병행했기 때문에 졸업까지는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다. 휴학-복학도 여러차례 했을 정도. 대신 성적은 상당히 좋았는지 하버드에서 보낸 첫 학기에 올A를 받았으며 쿰라우데로 졸업한 데다 파이 베타 카파 클럽 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위저 데뷔 이전에도 이미 지역 대학에서 작곡, 영문학 관련 강의를 들으면서 올A를 받는 우등생이었고 UC 버클리에서 월급과 집까지 주는 장학금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34] 한때는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17살 때 버클리에서 5주 동안 여름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했고, 이후에도 클래식 작곡 교수에게 사사하는 등 다양한 경로로 음악을 공부했다.
- 두꺼운 뿔테 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인데, 실제로 어릴 때부터 시력이 안 좋았기 때문에 안경을 써야 했다. 리버피디아의 '시력' 항목에 따르면 근시가 아닌 원시이며, 1999년에 시력 교정을 위해 레이저 수술을 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거의 교정 전 시력 수준으로 돌아왔다고. 원래도 원시였던 데다 50대인 현재는 노안으로 인해 시력이 더 안 좋아졌으며, 어두울 때는 앞을 보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
- 한국 문화와도 관련이 깊다. 20대 초반부터 LA에 살았기 때문에 한국인 친구들도 많고, 비빔밥을 비롯한 한국 음식도 자주 먹는다고 한다. 페스티벌로 내한해서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를 한국어로 불렀다. 아내 쿄코가 방탄소년단을 좋아해서 가끔 인스타그램에 BTS 굿즈와 함께 찍은 사진도 올린다.
- 채식주의자다. 아슈람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채식을 했다. 비건 메뉴를 먹는 것으로 보아서 아마 비건인 듯. 다만 일본 도쿄에서 바베큐를 먹은 적은 있다고 한다.
- 2021년에 고양이 2마리를 입양했다. 검은 고양이 남매로, 보호소에서 지어준 원래 이름은 스파이시와 튜나였다.
[1] 본명은 리버스 쿼모지만 10살 때 요가빌을 떠나 공립학교에 입학하면서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개명했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하기 위해 LA로 이사한 이후로 다시 본명을 쓰기 시작했다.[2] 어린 시절 이름은 리브스(Leaves) 쿼모.[3] 리버스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4] 소아천식 환자를 부르는 'wheezer'라는 이름에서 h를 뺀 것이다. 'wheeze'는 숨을 쌕쌕거리면서 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만 리버스는 인터뷰에서 사실 자신은 어린 시절에 천식을 앓은 적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프랭크 쿼모는 가족들은 물론 다양한 물건에도 독특한 별명을 짓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프랭크가 지은 다른 별명들은 리버스가 만든 사전 페이지인 리버피디아에서 확인할 수 있다.[5] 그래서 리버스의 어머니 베벌리는 '웃는 거 한번 볼까?(Let me see that smile)'라고 말하면 웃을 거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이 이 말을 반 학생들 모두에게 가르쳐줘서 동급생 모두가 뒤돌아서 리버스를 쳐다보며 선생님과 함께 'let me see that smile'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줍음이 많은 편이었던 리버스에게는 꽤 끔찍한 기억이었는지 20대에 인터뷰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목소리가 약간 떨렸을 정도라고... 위저 11집 Pacific Daydream 수록곡인 Feels Like Summer에 'let me see that smile'이라는 가사가 나온다.[6] 단순히 가명을 쓴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개명했던 듯하다. 키츠는 의붓아버지 스티브의 성이고, 리버스가 고른 이름인 '피터'는 키스의 멤버 피터 크리스에게서 따온 것이다. 이후 학창시절 동안 쿼모 형제는 다른 친구들에게 각각 '피트', '지미'라는 애칭으로 불렸다.[7] 위저 데모곡 East Coast or West Coast에는 어린 시절 불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울곤 했다는 가사가 나온다.[8] 키스 멤버들 같은 머리스타일을 하고 도끼 모양 기타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열심히 설명하는 쪽이 리버스다. 머리스타일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친구한테 '가발이지, 멍청아(A wig, you fool)'라고 까칠하게 꼽주는 대답하는 14살 리버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9] 저스틴은 아방가르드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락밴드에 대해 갖는 이미지와는 달리 대마초는 물론 술도 마시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밴드의 실질적 리더인 리버스가 합법적 음주가능 연령인 만21세까지 한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을 정도로 술을 싫어하는 성향인 것도 한몫했을지도 모른다.[10] 미용실에 가서 처음으로 이 머리스타일을 한 날 집에서 5마일 정도 떨어진 미용실까지 리버스를 태워주셨던 어머니는 너무 화가 나서 리버스를 미용실에 두고 혼자 가버리셨다고 한다. 어머니께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즉흥적으로 결정한 머리스타일이라 놀라셨던 듯..[11] 고등학생 때는 리버스가 부모님의 자동차에 친구들을 태우고 운전을 했는데, 가끔씩 아주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갑자기 시동을 끄고 차키를 뽑아서 뒷좌석에 던졌다고 한다. 도요타 터셀은 차키를 빼면 핸들이 자동으로 잠기기 때문에 자동차가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방향을 조절할 수 없었다. 따라서 뒷좌석에 앉은 친구들은 차가 어딘가에 부딪히기 전에 급하게 열쇠를 찾아서 리버스에게 넘겨줘야 했다. 위저 6집 레드 앨범 수록곡인 Everybody Get Dangerous는 이런 십대 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곡이다. 당시 리버스와 친구들이 평범하게 놀다가 갑자기 위험한 놀이를 시작하는 것을 'get dangerous'라고 불렀다고 한다.[12]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던 리버스는 학교 측으로부터 제적 통지를 받고 학비를 내주신 부모님께 매우 죄송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은 20대 중반에 하버드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에 '기타 인스티튜트에서 퇴학당하고 하버드를 졸업한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13] 스코티는 퍼즈의 홍일점이었는데, 패트릭은 스코티가 자신과 리버스가 너무 심한 너드라는 사실을 깨닫고 질려서 밴드를 나갔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적도 있다.[14] 이후 정식으로 밴드명을 정하기 위해 멤버들이 모여서 온갖 이상한 이름들을 브레인스토밍해봤지만 더 나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위저'가 그대로 정식 이름이 됐다. 이후 리버스는 밴드 이름을 질문받고 바로 '위저'를 떠올린 것이 당시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이 작용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했다. 위저는 어린 시절 리버스의 아버지 프랭크가 아들에게 붙여준 별명이기 때문이다. 사실 리버스는 밴드 이름이 결정되기 전에도 이미 위저를 밴드 데모테이프 제목으로 쓴 적이 있다고 한다.[15] 리버스는 밴드 리더이자 거의 모든 노래를 만드는 송라이터이기도 했지만 음반사 관계자와 만날 때마다 무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고 대화는 베이시스트이자 임시 매니저 역할을 맡기로 한 맷이 주도했고 한다다.[16] Say It Ain't So 가사 중 'Dear daddy, I write you, in spite of years of silence...' 부분은 아예 가족을 떠난 프랭크에게 말을 건네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17] 리버스는 리버챗에서 아내 쿄코가 꼭 보라고 해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18] 7집 Raditude 수록곡인 I'm Your Daddy의 'You are my baby tonight, and I'm your daddy'라는 구절은 원래 리버스가 미아의 병상을 지키면서 딸을 안심시키기 위해 '오늘밤 너는 내 아가고, 난 네 아빠야'라고 계속해서 되뇌인 경험에서 나온 가사라고 한다.근데 정작 노래 분위기는 이런 기원과 아무 관계 없다[19] 위저 활동 이전에 녹음된 데모곡들을 들어보면 마치 커트 코베인 모창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어느 순간 '락밴드 보컬도 그냥 원래 목소리를 내도 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 산타 모니카 컬리지 합창단에서 불렀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노래하게 됐다고 한다.[20]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앨범 작업을 얼른 마무리해야 하는 시점이라 다들 기타 파트를 어떻게 해결할지 걱정이 많았는데, 리버스가 '제가 한번 해볼게요'라고 말하더니 혼자 녹음 부스에 들어가서 순식간에 리듬 기타 녹음을 끝냈다고 한다. 물론 애초에 1집 수록곡을 모두 작곡한 송라이터로서 리듬 기타 파트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겠지만, 물론 애초에 자신이 만든 노래인만큼 리듬 기타 파트에도 익숙하긴 했겠지만, 임박한 데드라인에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짧은 시간 안에 앨범 수록곡 전체의 기타 파트를 모두 녹음한 것은 꽤 인상 깊다.[21] 본인의 디스코드 채널을 통해 피아노 연습을 실시간으로 송출하기도 한다. 주로 한국 시간으로 12시~2시 사이에 들을 수 있다.[22] 리버스의 데모곡 앨범에 수록된 Chess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곡이다.[23] 빌보드 인터뷰[24] 당시 리버스가 참여하고자 하던 명상 프로그램 지도자는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안정적인 애정 관계를 형성하지 않은 사람은 2년 동안 금욕을 실천해야 프로그램에 받아들인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리버스는 처음에는 2년 금욕이라는 조건에 부담을 느껴 얼른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생각보다 금욕의 긍정적인 효과가 커서 2년을 채우고도 6개월 동안 더 지켰다고 한다. 하지만 금욕 기간 중에 배우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뜻밖의 결실을 맺었다. 갑자기 1997년에 아는 사이였던 쿄코를 떠올리고 다시 연락을 한 지 1년만에 결혼했기 때문이다.[25] 미국 어린이 프로그램 Mr. Rogers' Neighborhood의 패러디. 리버스는 위저의 블랙 앨범 수록곡인 High As a Kite 뮤직비디오에서 미스터 로저스 코스프레를 했다.[26] 뉴욕에서 자란 이탈리아계 미국인인 리버스의 아버지 프랭크 쿼모는 축구를 매우 좋아했는데, 리버스는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그리움 때문에 축구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27] My Day Is Coming은 리버스의 솔로 앨범 Alone II에 수록되어 있으며 Represent의 경우 따로 싱글로 발매됐으나 이후 8집 Hurley 딜럭스 버전에 Represent - Rocked Out Mix라는 이름으로 편곡해서 수록했다.[28] 각 번들은 수록곡 숫자와 무관하게 모두 9달러로 가격이 책정되어 있다. 번들을 구매하면 메일로 번들에 대한 리버스의 설명, 수록곡 목록과 함께 드랍박스 링크가 전송된다. 따라서 드랍박스 페이지 내에서 음원을 듣거나 파일을 mp3로 다운받을 수도 있으며, 혹은 리버스의 홈페이지 Weezify 및 Weezify 앱에서 재생할 수도 있다.[29] 이것 때문에 당시 위저 인터뷰어들이 인터뷰 진행에 곤혹을 겪었다. 프론트맨이 말을 안해서 다른 멤버들이 대신 말했다. 이러한 경향은 90년대 극에 달했으나 2000년대 들어 다소 완화되었다.[30] 무대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물을 내뿜거나 소품을 던지고 매우 어색하고 웃긴 동작을 하다가 배를 뒤집어 까는 등의 이상행동?을 보였다. 예시 성격도 바뀌었다. 자신이 troublemaker 이고 파티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등...의 노래를 만들기도 하였다.[31] 위저의 1집과 2집 전곡을 연주하며 진행했던 투어[32] [33] 원래 산타 모니카 컬리지를 다니다가 하버드에 편입했다. 처음 전공은 음악이었는데 2집 발매 후 자퇴했다가 재입학한 후 영문학으로 전과했다고 한다.[34] 따라서 리버스는 당시 위저의 매니저 역할을 했던 베이시스트 맷 샤프에게 '1년 안에 음반 계약을 따내지 못하면 UC 버클리의 장학금 제의를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