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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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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탈릇라 나팔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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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10세
(와치랄롱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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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총리
아유타야 왕조 · 톤부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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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800><colcolor=#D50000>
파일:682px-King_Rama_X_official.png
출생 1952년 7월 28일 ([age(1952-07-28)]세)
태국 방콕
대관식 2019년 5월 4일
방콕 왕궁
재위 기간 태국 국왕
2016년 10월 13일 ~ 현직[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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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e800><colcolor=#D50000> 가문 마히돌 가문
이름 프라밧솜뎃 프라뽀라멘타라 라마티보디시신 마하 와치랄롱꼰 프라와치랄끌라오 짜오유후아
(พระบาทสมเด็จพระปรเมนทรรามาธิบดีศรีสินทร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ฯ พระวชิรเกล้าเจ้าอยู่หัว)(와치랄룽꼰: วชิราลงกรณ์, वजिरालोंगकॉर्न)
부모 아버지 라마 9세 (1927 ~ 2016)
어머니 시리낏 끼띠야꼰 왕비
배우자 왕비 수티다 와치랄롱꼰 나아유타야
후궁 시니낫 웡와치라파크디
자녀 티빵꼰 랏사미촛 왕세자[2]
파차라키티야파 공주
시리완나와리 나리랏 공주
등 5남 2녀
학력 호주 육군참모대학교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 (학사)
수코타이 탐마티랏 개방대학 (법학 / 학사)
종교 상좌부 불교 }}}}}}}}}

1. 개요2. 생애
2.1. 즉위 과정2.2. 재위
3. 비판 및 논란
3.1. 잦은 결혼과 이혼
3.1.1. 첫 번째 결혼 및 이혼3.1.2. 두 번째 결혼 및 이혼3.1.3. 세 번째 결혼 및 이혼3.1.4. 네 번째 결혼3.1.5. 후궁제 부활
3.2. 논란 있는 생활상3.3. 후계자 문제
4. 가족 관계5. 여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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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라마 10세 모노그램.png
라마 10세 휘장

태국 짜끄리 왕조의 제10대 국왕.

1952년 7월 28일 아버지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972년 라마 9세에게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으나, 무려 44년 동안[3] 왕세자로 지냈다. 2016년 부왕의 서거에 따라 그의 나이 64세라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왕위를 계승했다.[4]

2. 생애

방콕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과 영국, 호주에서 유학했다. 왕족인 탓에 1965년부터 태국군에 입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호주 캔버라의 왕립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잠시 태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가 1975년 육군으로 병적을 옮기고 일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1972년, 그가 20세가 되자 푸미폰 아둔야뎃은 그에게 솜뎃프라보롬오라사티랏 짜오파 마하 와치랄롱꼰 사얌마꿋랏꾸만(สมเด็จพระบรมโอรสาธิราช เจ้าฟ้ามหาวชิราลงกรณ สยามมกุฎราชกุมาร)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왕세자로 책봉했다.

2.1. 즉위 과정

2016년 10월 13일 푸미폰 국왕 사망 후 왕위를 물려받아 태국의 차기 국왕으로 즉위할 예정이었으나 사망한 국왕을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즉위를 미루고 즉위 전까지는 추밀원장이 섭정을 하였다.

2016년 11월 29일, 태국 정부는 마하 와치랄롱꼰을 새 국왕으로 승인하였다. # 그 후, 공식 후계자임을 확인하는 서한을 과도 의회인 국가 입법회의(NLA)에 전달했고, 이를 승인해 왕위 승계를 위한 절차를 마쳤다. #

그리고 12월 1일, 현지 시각으로 저녁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승계 절차는 TV로 생중계되었고, 대관식은 부왕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하기로 하였다. #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1L539DOXU3_1_99_20161202084403.jpg
국왕 수락 연설
수락 연설에서 "나는 모든 태국 국민을 위해 선왕의 유지를 받들겠다." 하고 선언했고, 정부는 새 국왕을 "마하 와치랄롱꼰 보딘트라테파야와랑꾼 국왕 폐하"라고 칭했다.

대관식은 정식으로 즉위식을 치른 지 2년 반이 지나서 2019년 5월 4일에 사흘에 걸쳐 진행하였다. 5월 4일 당일엔 와치랄롱꼰 국왕이 공식적으로 국왕에 오르는 대관식을 치르고 5일엔 축하 행사를 열었다. 6일에는 궁에서 국왕이 정부 대표단과 외교 사절을 맞이하였다.

2018년 6월 18일에 태국의 현지 언론들은 33조 원에 달하는 왕실 재산의 승계 절차를 마무리했다고 보도했다. #

2019년 5월 4일에 69년 만에 치러진 대관식에서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은 전통에 따라 왕관을 받기 전 흰 옷차림으로 태국 전역에서 길어 올린 성수를 자신의 머리와 몸에 붓는 정화의식을 치렀다. 이후 행사를 주관한 불교 최고 지도자로부터 국왕의 공식 이름과 직함이 적힌 황금 명판과 왕권을 상징하는 왕실 휘장을 받았다. 이어 국왕은 200년 전 제작된 다이아몬드 원석이 박힌 높이 26 cm, 무게 7.3 kg짜리 황금 왕관을 건네받아 머리에 쓰면서 즉위를 공식화했다. 오후에는 병사 16명이 둘러멘 왕실 가마에 올라 왕궁 일대 사원 등을 도는 행진을 한다. 약 7 km에 달하는 가마 행진 과정에서 연도에 모인 시민들은 국왕에게 존경을 표했다. # ##

"모든 국민의 혜택과 영원한 행복을 위해 정의로움 속에서 다스릴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12일에 방콕 시내를 관통하는 차오프라야강에서는 왕실 선박 52척이 참석한 가운데 약 3.4 km에 걸친 행진에 따라 공식적으로 마무리하였다.#

2.2. 재위

2016년 12월 6일, 정치 자문 기구인 추밀원 개편을 단행하였다. 2014년 임시 헌법 2조에 근거해 내린 국왕 명령으로 추밀원 위원 총 11명을 임명했다. 선왕보다 5명이나 줄었는데 군부 2명을 추가 임명하여 군부의 영향력이 커졌다. # 13일, 왕실 모독사범을 포함해 15만 명을 사면하였다. # 2017년을 들어서 개헌안 수정 요구를 발표하면서 군부통치 하에 있는 태국의 민정이양 일정을 늦추는 실정이다. # 탁신과는 친하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군부의 눈치를 많이 보지 않는가 하는 해석이 나왔다.

또, 국왕의 일시적인 부재 시 섭정자를 지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등의 규정을 헌법에 추가했고, 2018년 5월에는 왕실 사무와 경비를 담당하는 5개 기관을 국왕 직속으로 이관하는 법도 제정했다. 2017년에는 '왕실 자산 구조법'을 제정하여, 그동안 태국 정부가 형식적으로나마 관리에 개입해 온 태국 왕실자산을 임금이 직접 관할하고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2019년 3월 24일에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누나 우본랏 라차깐야 공주가 탁신계 정당인 태국 국가구조당 후보로 총리직 도전에 나서기로 한 데 대해 제동을 걸었다. # 결국 칙령에 따라 하루 만에 철회되었지만, # 국가구조당은 이 일로 해산되었다.

2019년 5월 3일, 대관식을 하루 앞두고 왕실 관보에 게재된 칙령을 통해 각종 범죄로 복역 중인 수감자들을 사면 또는 감형할 것을 지시했으며, 사면 대상자는 형기가 1년 이하 남은 수감자 또는 말기 암 등 중증 질병이 있는 수감자, 남은 형기가 최장 3년 이하인 60세 이상 수감자이다.

2022년 태국 농부아람푸주 어린이집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지자 현장에 방문해 유가족을 위로하고 조문하기로 결정했다.

3. 비판 및 논란

3.1. 잦은 결혼과 이혼

어머니와 끝까지 이혼하지 않은 아버지[5]와는 달리 세 번이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한 것도 모자라, 아예 한 세기 동안 없었던 후궁제까지 부활시켰다.

물론 이혼 자체가 잘못인 건 아니지만 부인들이 이혼할 만큼의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니고 이혼을 반대했음에도 헨리 8세처럼[6] 단지 맘에 들지 않는다며 강제로 한 것이다. 말이 좋아 이혼이지 실제로는 왕비 자리에서 내친 것.

3.1.1. 첫 번째 결혼 및 이혼

파일:소암사왈리 키티야카라 라마 10세.png
소암사왈리 키티야카라와 라마 10세
1977년 1월 3일 왕세자 시절, 외사촌 동생인 소암사왈리 키티야카라 공주와 결혼하였다. 이후, 딸[7]을 낳았다. 하지만 몇 년 후 1970년대 후반부터, 배우 지망생이던 수자리니 위와차라웡과 바람을 피기 시작했고, 5명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계속 첫째 부인과 이혼하려 했으나, 첫째 부인인 소암사왈리 키티야카라가 이혼을 거부하였다. 결국, 1993년 7월 와치랄롱꼰이 이혼 소송에서 승소하며 이혼하게 된다.

3.1.2. 두 번째 결혼 및 이혼

라마 10세와 수자리니 위와차라웡 그리고 자녀들의 왕실 행사 영상
1970년 말부터 만나오던 배우 지망생 출신 수자리니 위와차라웡과 1994년 2월에 결혼하였다. 결혼 당시, 와치랄롱꼰의 어머니인 시리킷 왕비에게는 축복 받지 못했다. 수자리니는 본명이 아니라, 와치랄롱꼰과 결혼한 후 개명한 이름이다. 수자리니는 결혼 후, 왕립 육군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결혼하고 2년이 지나 1996년에 수자리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연 영국으로 피신해버렸는데, 이유는 와치랄롱꼰이 수자리니가 군 장성과 간통했다는 포스터를 궁전 곳곳에 붙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번째 이혼을 하였다.

3.1.3. 세 번째 결혼 및 이혼

파일:스리라스미 수와디 라마 10세.jpg
스리라스미 수와디와 라마 10세
쉰을 바라보던 와치랄롱꼰은 2001년 2월 10일 평민 출신 비서였던 스리라스미 수와디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무려 19세 연하였다. 이 둘의 결혼 사실은 대중에게 비공개였으나, 2005년 4월 29일 왕자[8] 를 낳았으며, 정식으로 왕세자비로 책봉되며 알려졌다.

하지만, 2014년 11월, 스리라스미 수와디의 친인척 7명이 대규모 비리 사건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와치랄롱꼰은 스리라스미 스와디의 왕세자비의 모든 지위를 박탈을 요청하는 편지를 내무부에 보내었다. 결국, 2014년 12월 스리라스미 스와디는 왕족 작위를 포기하고 공식적으로 이혼하였는데, 결혼한 지 13년 만이었다. 스리라스미는 합의금으로 2억 바트(550만 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이혼 후 스리라사미 수와디는 하사받은 집과 토지를 강제로 몰수당하고 시골에서 비구니 생활을 하며 비인간적인 학대와 가택 연금을 당한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혼 사유도 친척 7명의 부인을 이용한 권력 남용 및 부패라고 하지만 숨겨진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

또한 이혼하기 전에 자신의 애완견 '푸푸'의 생일 파티를 열면서 부인에게 알몸 상태로 티팬티만 입게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기사 (해당 영상이 있으므로 후방주의바람)

3.1.4. 네 번째 결혼

파일:สุทิดา.jpg
라마 10세와 수티다 와치랄롱꼰 나아유타야
대관식을 3일 앞둔 2019년 5월 1일, 와치랄롱꼰은 26년 연하[9]의 승무원 출신 근위대장 수티다와 4번째 결혼을 하였다. 수티다는 1978년생으로 타이항공 승무원 출신으로, 2017년에는 비왕족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작위 '탄푸잉'을 받으며, 와치랄롱꼰을 가까이 모시고 있었다.

3.1.5. 후궁제 부활

파일:라마 10세 시니낫.jpg
라마 10세와 시니낫 웡와치라파크디
와치랄롱꼰이 수티다와 네 번째 결혼식을 치르고 나서 두 달 뒤, 33세 연하 후궁 시니낫 웡와치라파크디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알렸다. 후궁을 둔 태국 국왕은 약 100년 만에 처음이었다. 시니낫은 육군 출신으로, 2008년 왕실 육군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조종사 교육을 받았다. 2015년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정글전과 낙하산 훈련등을 받았고, 2019년 5월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나이 34세에 매우 빨리 승진한 것이다. 하지만, 후궁으로 임명된지 얼마되지 않았을 무렵, 시니낫의 사진 수십장이 왕실이 운영하는 온라인에 올라왔다. 그 사진 중에는 스포츠 브라를 입고 찍은 것도 있고, 총을 쏘는 모습, 국왕의 개를 안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태국에서는 국왕을 모독한 죄는 최대 15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2019년 10월 태국 왕실은 시니낫의 행동이 국왕에 불충하고, 왕비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는 이유로 후궁에서 쫓아낸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후궁에서 쫓겨난 지 열 달만에 다시 후궁으로 재임명되었다.

3.2. 논란 있는 생활상

방탕한 사생활을 즐기는 등 널리 알려진 인성 문제 탓에 즉위 전부터 말이 많았다. 후술할 기행은 선대 대대로 내려온 잦은 근친혼[10]의 부작용으로 정신병이 생겨서 그런 것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실제로 보여주는 행동들을 보면 단순히 개인의 취향, 인성의 문제라고는 보기 힘든 모습들을 보여주기 때문.

태국 내에서는 즉위에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고, 군부와 대립하며 라마 9세와 은근 불편한 관계였던 탁신 친나왓과도 나름 친분이 있기 때문에 즉위 전에는 실권을 쥔 쁘라윳 짠오차 총리 등 군부 세력이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처럼 국왕 자리를 무기한 공석으로 두고 섭정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냐고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왕이 정한 정식 후계자였기 때문에 왕위를 물려받아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라마 10세는 국왕 즉위 후 태국에서 거주하지 않고 독일 시골의 호텔 전체를 빌려 호화스럽게 생활하고 주말마다 런던에서 엄청난 쇼핑을 즐긴다고 알려졌다. 물론 독일에 계속 지내지 않고 일시적으로 살다가 태국으로 돌아와서 업무를 처리하지만 문제는 외유가 잦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부인과 함께 해외를 누비며 배꼽티 탱크탑 차림으로 공항에서 쇼핑을 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그때 주변 수행원인 태국 관료들의 황당한 표정이 압권. # 상술한 옷차림은 주로 젊은 여성들의 옷차림인데 그것을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입었다니 코미디 프로그램에나 나올법할 정도로 당연히 엄청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외교적으로도 행패를 부린 적이 있다. 對일본 외교를 위해 1987년 방일 당시 자신의 본처가 아닌 내연녀에게 국빈 대우를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가, 일본 정부가 거부하자 노발대발하며 온갖 패악질을 일삼았다. 그래서 당시 운전기사만 수차례 교체되고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돈므앙 국제공항으로 들어설 때 일본정부전용기 앞을 왕세자 자신이 조종하는 기체를 포함하여[11] F-5 전투기 5대가 접근을 방해해 20분 동안 일본 사절이 공항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버리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를 저질렀다. 그저 내연녀를 국빈 대우해주지 않는단 이유로 이러했으니 기가 막힌 노릇.

게다가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태국에서 국왕의 정치 개입과 권력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여러 가지로 보이면서 실권자인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왕실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의혹이 있어 비판이 늘고 있으나 전제군주제적인 불경죄 적용으로 강한 탄압을 자행하기 때문에 태국 내에서는 공개적인 비판이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태국에서도 라마 10세의 인식이 나빠졌다. 태국 영화관에선 영화 시작 전 왕실가를 틀어주는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보니 왕실가가 끝난 후에 입장하는 관객들이 굉장히 증가했다고 한다. 또한 왕실가 상영 시 기립하지 않는 관객들이 증가하여 논란이 일자 태국의 한 영화관 브랜드는 왕실가 상영 중에는 존경심을 표해야 하고, 당사는 왕실가 상영 시 관객의 퇴장을 허용하는 정책이 없다고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불경죄로 기소되는 사람의 수가 라마 9세 대비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

2019년 9월 30일 자로 경찰청에서 대외비로 국왕 근위대의 선발 및 지휘를 국왕이 직접 맡는다는 문서가 유출되어 논란을 일으켰다. 경찰관 873명이 6개월간 훈련 캠프에 강제적으로 참가해야 하나 이를 거부한 100명을 무슬림 분리세력이 창궐하는 분쟁 지역인 남부 얄라주[12] 기율 교육대로 보낸다는 발표를 하였다.

이어 10월 17일에는 태국 의회의 내년 예산안 심사 중 총리실에서 발의한 태국 육군 최정예 부대인 제 1사단 및 11사단을 국방부 소속에서 국왕 직할로 이전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태국 기사 그래서 제 2 야당인 미래전진당의 사무총장이자 헌법학자 삐야붓 쌩까녹꾼(ปิยบุตร แสงกนกกุล)[13]은 해당 분야 전문가답게 해당 법안은 발의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부족하다며 강하게 우려했다.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태국의 정치체제에 빗대어 볼 때 해당 두 사단의 지휘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생각해 보면 해당 이슈는 심각하다.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에선 명목상 군 통수권자가 영국 국왕이지만, 영국의 군주에게는 실질적인 지휘권이 없다.

2009년에는 자신의 애완견인 미니어처 푸들 '푸푸'에게 태국 공군 대장직을 수여했다. 푸푸는 2015년에 죽었다.

미국 CNN은 라마 10세가 내실 담당 경호 장교 2명을 포함하여 궁실 관리 4명을 또 파면했다고 10월 30일 보도했다. #

2020년 코로나19로 국가적 위기가 닥쳤음에도 지속적인 독일 외유를 하여 태국 내 논란은 계속되었고 급기야 반 왕실 운동까지 벌어졌다. # 코로나19 확산으로 태국 경제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왕실이 헬리콥터항공기 총 38대를 보유했고 유지비가 6400만 달러나 된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왕실 지출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

이렇게 지속적인 논란과 국민들의 불만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결국 2020년 태국 민주화 운동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태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라마 10세가 애완견 30마리와 후궁이 포함된 수행단 250명을 이끌고 호화 여행을 떠나 논란이 일어났다. #

그나마 즉위 후에는 즉위 전의 사건사고 및 논란들이 즉위 후에 퍼진 것들을 제외하면 비교적 얌전히 지낸 편이나 세자 시절의 비행이 평생 그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3.3. 후계자 문제

사실 크나큰 비판을 받은 이유는 왕세자 시절 해온 상식밖의 행적이 즉위 후에 본격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으로 유명한 탱크탑 옷차림도 즉위 전인 2011년 촬영된 것이다. 즉위 후에는 비교적 잡음없이 조용히 공무를 수행하고 있다.

왕당파 중 깨어있는 부류들은 라마 10세의 나이를 고려해서 머지 않은 시일에 라마 10세가 고령으로 인해 퇴위하거나 서거하여 자녀들애게 왕위를 물려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상술한 수많은 이혼들과 승계권 박탈 남용 때문에 후계 구도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일단 후계자로는 티빵꼰 랏사미촛이 왕세자로 내정되어 있지만 정신 장애가 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라마 10세에 의해 쫓겨난 왕자들이 최근 태국으로 귀국해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에 후계 구도의 변수가 되었다. 이런 불안정한 후계구도는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자식들의 계승권을 박탈시켰다가 복원시키는 등 라마 10세 본인의 실책이 가져온 결과이다. 부왕 라마 9세는 부부관계는 소원했어도 끝까지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살았고, 처음부터 라마 10세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계승에 잡음이 없었다.

4. 가족 관계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소암사왈리 소생 (1977년 결혼 / 1991년 이혼)
1녀 파차라키티야파 1978년 12월 7일 생존[14] ([age(1978-12-07)]세)
수자리니 비바차라웡세 소생 (1994년 결혼 / 1996년 이혼)
1남 유타바차라 비바차라윙세 1979년 8월 29일 생존 ([age(1979-08-29)]세)
2남 와차라에손 비바차라윙세 1981년 5월 27일 생존 ([age(1981-05-27)]세)
3남 짜끄리왓 비바차라윙세 1983년 2월 26일 생존 ([age(1983-02-26)]세)
4남 밧치라위 비바차라윙세 1985년 6월 14일 생존 ([age(1985-06-14)]세)
2녀 시리완나와리 나리랏 1987년 1월 8일 생존 ([age(1987-01-08)]세)
스리라스미 스와디 소생 (2001년 결혼 / 2014년 이혼)
5남 티빵꼰 랏사미촛 2005년 4월 29일 생존 ([age(2005-04-29)]세)

3차례 결혼 후 이혼하였으며 전 배우자들 사이에서 5남 2녀를 두었다. 왕족 자격이 있는 자녀로는 태국 검찰청 검사와 주오스트리아 태국 대사를 재직한 적이 있는 파차라키티야파 공주[15],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 승마에 출전해서 한국에 알려진 시리완나와리 나리랏 공주[16], 티빵꼰 랏사미촛 왕세자가 있다.

2019년 5월 1일, 대관식에 앞서 자신의 여성 근위 대장이던 수티다 나아유타야(Suthida Bajrasudhabimalalakshana)를 4번째 아내이자 왕비로 책봉하고 결혼식을 거행했다. 수티다 왕비는 타이항공 승무원 출신으로 2010년 근위대에 입대, 2014년부터 근위대장 직을 맡아왔으며 2016년 대장 계급을 받았다. 라마 10세보다 26세 연하이다. # 왕비 책봉 전에 이미 염문설이 나돌기도 했지만, 그 동안 왕실은 두 사람 간의 관계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

2019년 7월에는 육군 조종장교 출신으로 현역 육군 소장인 시니낫 웡와치라파크디(สินีนาฏ วงศ์วชิราภักดิ์, Sineenat Wongvajirapakdi)를 후궁(Royal Noble Consort)귀비?에 정식으로 책봉하고 시니낫의 군 생활 등 일상생활 사진도 공개했다.# 시니낫 후궁은 34세로 라마 10세보다 33세 연하, 수티다 왕비보다 7세 연하이다. 이전까지 후궁을 둔 태국 국왕은 라마 6세(재위 1910-25)가 마지막이었다.

이에 따라, 수티다 왕비는 이탈리아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라마 10세 본인은 후궁과 독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2019년 10월 21일, 갑자기 시니낫이 후궁 자리에서 폐위되고, 육군 소장 직위도 박탈되었다. 기사 이유는 시니낫의 왕실에 대한 비존중과 불충이라고. 기사에 따르면 시니낫이 수티다를 왕비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대신 왕비가 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궁궐에서 들리는 비공식 소문으로는 당시에 10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현재 12월까지 연기된 왕실 바지선 퍼레이드의 행사시 국왕의 옆자리를 수티다 왕비가 아닌 본인이 차지하려고 노력을 엄청 했다고...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본인이 스스로 기획하여 실행한 게 아닌 궁궐내 반대세력의 모략이었고, 거기에 넘어갔다고 한다. 쓰리랏사미 전 세자빈처럼 무기한 연금 등의 중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세간에서는 시니낫이 태국 국왕의 개인 감옥에 수감되었단 예측이 있었으나[17] 지방의 어느 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2020년 9월 3일, 왕명으로 시니낫은 다시 복위되었다. # 국왕은 시니낫을 자신이 거주 중인 독일 모 호텔로 불러왔으며 공항에 직접 마중을 나갔을 정도로 시니낫에 대한 국왕의 신임이 회복된 듯하다. 수티다 왕비의 향후 거취가 주목된다.

복귀한 후궁 시니낫 웡와치라파크디의 정적들이 시니낫의 나체 사진들을 퍼뜨렸다#

2022년 12월 14일, 장녀 파차라키티야파 공주가 심장질환으로 쓰러졌으며 위독한 상태라고 한다.# 마이코플라스마에 감염된 후 심장 염증으로 인한 심각한 부정맥으로 의식불명 상태라고 전했다. 2024년 7월 현재까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2023년 8월 6일, 수자리니 소생의 2남 와차라에손이 27년 만에 타이에 귀국했으며, 마치 왕실 외부 행사처럼 귀국 직후부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18] 그가 왕자 지위 회복 및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관측이 있다.# 그리고 3남 짜끄리왓까지 귀국했다. 2024년 3월에는 아예 태국 여권을 회복한 채 입국하여 송크란까지 머물며 여타 왕실 인사들의 행사처럼 각지를 돌아다녔다.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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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왕위에 오른 날은 동년 12월 1일이지만 명목상 즉위일은 라마 9세가 사망한 날로 소급된다.[2] 태국 왕위계승서열 1위, 3번째 부인이었던 스리라스미 수와디의 아들[3] 사실 왕의 아들로서는 태어날 때부터 64년 동안 왕세자였으나 정식으로 책봉된 1972년 기준으로는 44년인 것.[4] 이보다 더한 사례로 찰스 3세가 있다. 여왕의 장수로 70년간을 왕세자 신분으로 지내다 202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로 70세가 훌쩍 넘은 나이에 즉위했다. 물론 찰스 3세 역시 여왕의 아들로서는 70년이지만 왕세자 책봉으로부터는 64년이다. 라마 10세보다 10년 가까이 늦었다.[5] 아버지도 대외적으론 어머니와 금슬 좋은 척 했지만 실제론 부부사이가 냉담했다.[6] 물론 헨리 8세는 개인적으로 싫증나서 이혼한 면도 없진 않지만, 어쨌든 간에 정치적으로 이득이 될 때만 결혼과 이혼을 했다. 그러나 라마 10세는 오로지 개인적인 이유로만 왕비를 여러 차례 갈아치웠다. 특히 헨리 8세는 후계가 될 아들을 낳아 준 제인 시모어를 자신의 유일한 진정한 아내로 여겨 사후 그녀와 합장할 것을 지시하였던 데 비해, 아들을 넷이나 낳은 둘째 부인 수자리니와 현재 유일한 적법한 왕자이자 계승 순위 1위인 티빵꼰 랏사미촛 왕자를 낳은 수와디도 내쳤다. 특히 수와디를 내친 것은 후계자의 지위와 안정성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임에도 본인의 변덕으로 강제 이혼 후 박대해서 왕세자의 생모가 사실상 감금 상태로 살고 있다는 의혹마저 일게 만든 것은 군주로서는 매우 부적절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7] 파차라키티야파 공주[8] 현재 왕위계승 순위 1위 티빵꼰 랏사미촛[9] 자신의 장녀와 동갑이다![10] 고조부 라마 4세는 조카손녀(이복형 라마 3세의 손녀)와 결혼했고, 증조부 라마 5세이복 여동생인 사방 바다나와 결혼했다. 오히려 "대왕"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치감각이 뛰어난 부왕 라마 9세가 나온 것이 기적일 정도.[11] 마하 와치랄롱꼰은 공군에서 복무한 적이 있어 비행기를 조종할 줄 안다.[12] 태국에서 내전이 벌어지는 지역인데 잦은 이슬람 반군의 테러와 게릴라전으로 군경과 민간인 사상자가 흔하게 나오는 지역이라고 한다.[13] 태국의 명문대라 불리는 쭐라롱껀 대학교와 더불어 태국 최고의 법대인 탐마삿 법대 조교수 출신이자, 왕실 모독법의 개정을 주장하는 법학자 그룹 소속이기도 하다.[14] 마이코플라즈마 페렴으로 인한 혼수상태[15]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장녀. 1978년생이며 영국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기에 영어를 잘한다. 현재 태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한다. 참고로 어머니인 첫 번째 부인은 라마 10세의 사촌으로 이혼했어도 공주의 직위를 유지하고 있다.[16] 두 번째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4남 1녀 중 고명딸.[17] 만약 사실이라면 살아서 나올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고 한다.[18] 현재는 미국 뉴욕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있다.[19] 인종차별의 의도는 확실치 않다. #[20] 스님이 새겨주는 이 ‘싹 얀‘ 문신의 존재 때문에 태국이 문신에 아주 관대한 사회라는 오해가 있지만 사실과는 좀 다르다. 문신이 있으면 정상적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인 일본이나, 한국 중년층 이상 세대에 비하면 관대하다고 볼 수 있지만 서양권만큼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서 심하지 않은 문신은 거의 용인되는 사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싹얀 문신도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은 군인/경찰들이나 불법적인 일에 몸담은 사람들이 자주 한다는 인식이 있으며, 특히 여성이 문신을 하는 경우 심한 편견을 감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