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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0:32:41

머농거힐라 전투



파일:EmanuelLeutze-AAA.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프렌치-인디언 전쟁 시기인 1755년 7월 9일 피츠버그에서 동쪽으로 16km 떨어진 펜실베이니아 주 머농거힐라 강 인근의 평원(현재 브래독스 필드)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맞붙은 전투. 이 전투에서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이 전사했으며, 이때부터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군사 충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2. 배경

1754년 7월 네세시티 요새 전투가 벌어진 이후 영국과 프랑스 간의 북미 식민지를 둘러싼 대립은 고조되었다. 당시 영국 수상인 뉴캐슬 공작 토마스 펠햄은 이듬해에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결의하고 육군 소장 에드워드 브래독을 지휘관으로 선정했다. 이 사실은 프랑스 스파이에 의해 누설되었고, 루이 15세는 6개 연대를 디스카우 남작 장 에르망의 지휘 아래 북미 대륙으로 파견했다. 1755년 봄에 북미 식민지에 도착한 브래독은 5월 29일 메릴랜드 주 컴버랜드 항구에서 출발해 오하이오 주의 듀케인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진군했다. 이때 전년도에 오하이오 주에서 프랑스군과 교전한 바 있었던 버지니아 대령 조지 워싱턴이 그의 부관으로서 함께 했다.

6월 11일, 브래독 소장의 영국군은 앨러게니 산맥에 도달했고, 이후 그들은 숲을 헤치며 듀케인 요새로 진군했다. 6월 19일, 브래독은 1,200명의 병력을 선발해 군수품을 실은 마차를 몰고 가며 선두에서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서 따라갔다. 7월 7일, 브래독의 원정군은 터틀 클릭의 하구에 도착했다. 이 개울은 알레게니 강과의 분기점에서 약 13km 떨어진 머농거힐라 강으로 흘러들어갔다. 브래독은 이 개울을 따라 머농거힐라 강으로 들어간 뒤 듀케인 요새로 향해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이 오고 있다는 걸 사전에 인지한 프랑스군은 듀케인 요새에서 수마일 떨어진 숲 속에 매복한 채 영국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7월 9일 영국군이 모습을 드러내자 프랑스군은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7월 9일 정오, 브래독은 머농거힐라 강을 건넜다. 이때 그는 이 시점에서 습격당할 수도 있음을 충분히 예상하고 반대편 강둑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먼저 파견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그들이 강을 건너는 걸 훼방놓지 않았고, 영국군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질서정연하게 강을 건넜다. 이후 영국군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강과 평행한 좁은 선로를 따라 가파르고 숲이 우거진 언덕으로 진군했다. 브래독은 여전히 기습받을 것을 우려해 6명의 버지니아 출신 경비병들과 여러 명의 길잡이를 보내 적의 매복 여부를 탐색하게 했다. 그러던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길잡이들과 경비병들이 갑자기 뒤로 쓰러지더니 인디언 복장을 한 한 프랑스 장교가 전방에서 모자를 흔드는 광경이 포착되었다. 그 직후 인디언들의 거친 함성과 함께 영국군의 선로 양 측면에서 프랑스-인디언 연합군이 벌떼처럼 일어나 영국군을 향해 총격을 퍼부었다. 이에 영국군은 신속하게 보급 마차에 몸을 숨긴 채 맞서 싸웠는데, 그 와중에 프랑스군을 지휘하던 보주 대위가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지휘관이 죽어버리자 캐나다 민병대는 대부분 듀케인 요새로 도망쳤고 이어지는 교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한편 영국군은 꾸준히 전진해 매복공격을 해온 적을 오히려 밀어붙였다. 그들은 "신이여, 왕을 보우하소서!"라고 외쳐댔고 보주 대위 대신 지휘를 맡은 장 다니엘 뒤마 대위는 철수 여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프랑스 정규군은 굳게 버텼고 그와 동료 장교들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인디언들을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인디언들은 영국군의 양측면을 공격해 영국군 병사들에게 총탄을 퍼부었다. 영국군은 보이지 않는 적이 쏴대는 총탄이 앞, 옆, 뒤쪽에서 계속해서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상황에 직면했고, 결국 막심한 피해를 입은 채 후방으로 패주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방에서 선두를 따라가고 있던 브래독은 선두 부대가 매복한 적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제44보병 연대에게 짐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는 전방으로 가서 매복한 적을 몰아내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다 지나치게 흥분한 병사들이 피아식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군을 오인사살하는 등 영국군의 혼란은 갈수록 심해졌다.

하지만 브래독은 포기하지 않고 병사들에게 결연히 맞서 싸우라고 지시했으며 도망치려는 병사들을 손수 칼로 죽여 동요를 잠재우려 애썼다. 그러던 중 그는 우측 언덕에서 적의 공세가 가장 강력하다는 걸 눈치채고 제 48보병 연대에게 이들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버턴 대령은 100명의 병사들을 수습해 언덕으로 진격했지만 적의 거센 반격으로 패퇴했다. 그 후 44보병 연대장 피터 할켓 경이 총에 맞아 전사하는 등 피해가 막심해지자, 3시간 동안 고군분투했던 브래독은 마침내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 순간, 총탄 여러 발이 날아와 그의 팔과 폐를 관통했다. 그는 치명상을 입은 채 스튜어트 대위와 다른 장교들에게 이송되었고 살아남은 영국군은 즉시 후퇴했다. 프랑스군은 이들을 추격하지 않고 듀케인 요새로 돌아갔다. 그러나 50여 명의 인디언들은 머농거힐라 강으로 도주한 적을 추격해 손도끼와 스캘핑 나이프로 공격했고, 영국군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이리저리 뿔뿔이 흩어졌다.

한편 조지 워싱턴은 후방 경비대를 결성해 원정군의 뒤를 따르던 중 원정군이 패퇴하자 그들의 후미를 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병사들을 잘 통솔해 그들이 패주하지 않게 했고, 덕분에 영국군 잔여 부대가 성공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해가 질 무렵, 살아남은 영국군은 부상자들을 업고 자신들이 건설한 도로를 따라 퇴각했다. 인디언들은 추격을 중단하고 시체를 불태우고 포획한 럼주 200갤런을 퍼마셨다. 이 전투에서 다수의 영국 군인과 여성이 포로로 잡혔다. 병사들 중 일부는 대부분의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건졌지만, 제임스 스미스라는 이름의 한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12명 가량의 군인들은 인디언들에 의해 고문을 당하다가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또한 브래독 역시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7월 13일에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네세시티 요새가 세워졌던 장소 인근에 매장되었다.

5. 결과

영국군은 457명이 전사하고 45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하녀와 요리사로 동행했던 50여 명의 여성들 중 4명만이 귀환했다. 프랑스군은 장교 3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당했으며 병사들의 피해는 알 수 없다. 인디언 측의 사상자는 27명이었다.

브래독의 죽음과 원정군의 대패는 영국 정부에게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프랑스 역시 영국의 예상되는 공세에 맞서기 위해 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 이후 양국은 북미 대륙의 패권을 둘러싼 전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