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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12 23:15:17

2차 루텐베르크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작센 동맹군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2년 7월 23일 작센 루텐베르크 마을 인근에서 프랑스-작센 동맹군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1차 루텐베르크 전투에서의 참패를 설욕했다.

2. 배경

1762년 6월 24일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 원수 수비즈 공작은 다음날 풀다로 물러났다. 이후 프랑스군은 카셀 앞에 자리잡은 크라젠베르크에 주둔하여 방어태세를 갖췄다. 한편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적을 공격하는 걸 주저했다. 그의 좌익과의 연락망은 프랑스군이 괴팅겐을 점령한 후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에 그는 적이 별도의 움직임을 보일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적군과 대치했다. 그러던 중 수비즈 공작과 데스트리스 공작은 작센의 프란츠 크사버(일명 크사버 왕자)에게 풀다의 진로를 경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월 21일, 크사큿 왕자는 명령을 받들어 루텐베르크와 뮌덴 사이에 긴 대열을 형성했다. 이런 그들의 움직임을 관측한 페르디난트는 크사버 왕자의 작센군이 지나치게 분산되었다고 판단해 그들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7월 22일 밤, 페르디난트는 자스트로, 길사, 보크 사단을 발드하우젠 군단과 함께 분리하여 작센군을 향한 공세에 투입시켰다. 밤 9시, 그들은 풀다로 향하는 진로를 따라 작센군을 향해 접근했다. 여기에 우슬라에서 출발한 슐리펜 대령의 군단은 헤데문덴을 지나 작센군의 후방으로 접근했다. 이후 양측은 7월 23일 새벽에 격돌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작센 동맹군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

7월 23일 오전 2시, 슐리펜 장군은 헤데문덴에서 베르라를 통과하면서 경미한 저항만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차보트 장군의 적군에 의해 가로막히면서 진격이 심하게 지연되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인 새벽 3시, 다른 연합군 사단들은 할당된 위치에서 풀다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풀다의 여울 앞에 세워진 건물들은 작센 척탄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적이 접근해오자 2시간 동안 적이 강물을 도하하는 것을 용맹하게 저지했다. 길사 사단은 이러한 적을 향해 집중 포격을 가했지만 좀처럼 몰아내지 못했다. 한편 발드하우젠은 보나포트의 여울에서 100명의 작센 척탄병들에게 가로막혔지만 100명의 척탄병들과 30명의 후사르 부대를 파견에 이들을 몰아냈다.

2시간 후, 길사 중장은 마침내 적을 격파하고 건널목을 확보했다. 크사버 왕자는 발드하우젠 군단이 아군 우측면을 위협하고 있고 길사도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걸 깨닫고 그의 다른 두 여단이 위치한 란트베르하우젠 후방으로 후퇴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자스트로 사단은 선두에 대포 2문을 앞세워 빌헬름샤우젠에서 풀다를 지나치고 있었다. 풀다를 통과한 후, 그들은 고지에 대포를 설치한 후 작센 척탄병들을 포격했다. 뒤이어 자스트로 사단의 다른 대대들이 강을 건넜고, 작센군은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점차 뒤로 밀려나 숲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자스트로는 루텐베르크를 향해 전진했다. 반면 보크의 사단은 자스트로 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격렬한 저항을 받다가 자스트로 사단이 도착한 이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대포 5문을 포획했다.

발드하우젠 장군은 루텐베르크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페르디난트로부터 전달받은 뒤 보나포트에 척탄병 3개 대대를 남기고 슈렘머 장군과 함께 루텐베르크 고지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기 위해 모든 기병대 및 보병대를 집결시켰다. 이때 쯤 연합군 사단은 모두 강을 건너 루텐베르크로 집결하면서 여러 명의 작센군 병사들을 생포했다. 발드하우젠 장군은 슈렘머 장군의 척탄병들을 루텐베르크 숲의 변두리에 배치한 후 휘하 기병 8개 대대에게 작센 기병 4개 대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자센군은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란트베르하우젠으로 도주했다. 이후 연합군은 란트웨르하우젠을 향해 진군했지만, 작센군 후위대가 결연한 의지로 저항해 적의 추격을 지연시켰고, 란트베르하우젠 후방의 고지에서 본대와 합류했다.

오전 7시 30분 전투를 종결한 연합군은 프랑스 원군이 근처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자 풀다로 도로 철수했다. 여기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5,800명의 병력이 추가 투입되어 크라젠베르크 기지를 압박했고, 이에 프랑스군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수비에 전념했다.

5. 결과

작센군은 이 전투에서 총 1,344명의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으며 대포 13문을 상실했다. 연합군의 손실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수백명을 넘지 않는 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