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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27 16:40:24

클로스터 캄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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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력비교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0년 10월 15일 라인강 서쪽 클러스터 캄펜 근교에서 프랑스군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프로이센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적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전략적 승리를 쟁취했다.

2. 배경

1760년 9월 22일 서부 독일 일대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베젤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라인강 하류 지역에서의 공세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리페-뷔르케부르크 공작의 지휘 아래 대규모 포병대가 게이스마르를 지내 베젤로 진군했고, 9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1만 5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르부르크에서 베젤로 향했다. 며칠 후,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에게 보병대 12개 대대, 기병대 4개 분대를 추가로 보냈고 9월 30일브라운슈바이크 공자의 군대가 베젤에 도착하여 요새를 포위했다.

한편 캐스트리스 후작 샤를 외젠 가브리엘 드 라 크루아는 베젤 요새를 구하기 위해 요새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지점에서 도로를 따라 북상했다. 10월 12일, 캐스트리스 후작은 쾰른에서 라인 강을 건넜고 10월 13일 32개 보병대대와 38개 기병대대를 노이스에 배치했다. 10월 14일, 캐스트리스 후작은 선봉대를 라인베르크로 보내 연합군을 위협하게 했다. 적 구원병이 접근해오고 있다는 보고를 접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이들을 요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요새를 포위할 병력을 남겨둔 채 21개 보병대대와 22개 기병대대를 이끌고 적을 향해 진군했다. 10월 15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오센베르크에 진을 쳤고, 캐스트리스 후작도 같은날 겔덴에서 라인베르크까지 운항하는 유진 운하 후방에 군대를 배치시켰다.

캐스트리스 후작은 유진 운하 뒤편에서 라인베르크를 우편으로 삼고 클로스터 캄펜을 좌편으로 삼아 군대를 배치했다. 좌익 바로 앞에는 정원과 도랑, 울타리가 있는 집들로 이루어진 캄펜브뤼크 마을이 있었다. 캄펜브리크 마을의 전방과 좌측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사이로 운하의 반대편에 있는 수도원과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브라운슈바이크 공자가 프랑스 진영으로 침투할 수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카스트리스 공작이 배치한 2,000명 이상의 비정규 부대를 격퇴해야 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이를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10월 15일 오후 10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프랑스 우익 앞에 3개 보병대대와 4개 기병대대를 남겨두고 18개의 보병대대와 20개의 기병대대를 이끌고 클로스터 캄펜을 향해 소리없이 진군했다. 그의 군대는 5개 사단으로 나눠졌다. 제1 로얄 드래곤 부대와 제6 로얄 드래곤 부대, 프로이센 후사르 부대는 선두를 맡았고, 하이랜더 2개 대대가 그들을 지원했다. 여기에 발드그레이브 장군이 지휘하는 본대, 하워드 장군 휘하의 예비군, 그리고 제10 드래곤부대와 하노버 10개 기병대, 헤센 10개 기병대대가 후위대를 맡았다. 이후 10월 16일 새벽,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프랑스군을 급습한다.

3. 전력비교

프랑스군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 캐스트리스 후작 샤를 외젠 가브리엘 드 라 크루아
병력: 16,000명,야전대포 6문.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
병력: 7,500명(한 대대당 평균 250명), 대포 22문

4. 전투 경과

10월 16일 새벽 2시, 연합군 선봉대는 클로스터 캄펜 북쪽 2km 지점에 잇는 프랑스 전초기지에 도착했다. 이때 그들은 경솔하게도 이 전초기지를 공격해 버려 자칫하면 프랑스군이 기습을 조기에 눈치채버릴 위험을 자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숲에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단순히 적 순찰대가 발포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이후 연합군은 유진 운하를 넘어 다리까지 진군하여 수도원에 있는 비정규부대 2,000명을 프랑스 본군으로부터 단절시킨 뒤 공격했다. 이에 비정규부대 지휘관 피셔 장군은 대부분의 부하들을 모아 겔더르로 후퇴했다. 이렇듯 선두 부대가 수도원을 공략하고 있는 동안,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캄펜브뤼크 마을을 향해 숲을 헤쳐나갔다. 그는 매우 신속하고도 조용히 진군하여 니더캄프에서 운하를 건너 적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채기도 전에 캄펜브뤼크 마을을 점령했다.

그 후 영국 척탄병들은 캄펜브뤼크 앞 둔덕에 배치되어 있던 아우베르그네 보병대를 습격했다. 이때 아우베르그네 보병대 장교 슈발리에 아자스 대위는 적에게 총검으로 찔러 쓰러지기 직전에 "아우베르그네여, 저들은 적이다!"라고 외쳤다. 아우베르그네 보병대 지휘관 로샹보 후작은 즉각 본대에 이 사실을 알린 후 아우베르그네 보병대를 이끌고 캄펜브뤼크 마을을 탈환하려 했다. 카스트리스 후작은 로샹보 후작에게 아우베르그네 보병대 4개 대대를 운하를 따라 배치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의 극좌측은 캄펜브뤼크 마을 근처의 습지에 주둔했다. 그후 카스트리스 후작은 알자스 보병대를 좌익으로 이끌고 아우베르그네 보병대를 지원했고, 두 여단은 캄펜브뤼크 마을을 점거한 적을 향한 공격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연합군의 진격이 저지되자, 캐스트리스 후작은 적을 몰아내기 위해 라 튀르 뒤 팽 보병대를 연합군의 후방인 클로스터 캄펜에 투입시켰으며 포병대에게 연합군 좌측면에 포격을 퍼붓게 했다. 이후 양측은 클로스터 캄펜 숲에서 격렬하게 맞붙었다. 연합군은 이에 맞서 알자스-아우베르그네 보병 여단을 여러 차례 격파하고 클로스터 캄펜 숲을 끈질기게 사수하며 예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예비군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투가 3시간 이상 지났으나 승패가 가려지지 않자, 캐스트리스 후작은 직접 라 투르 뒤 팽 보병대에게 가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때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말이 총에 맞아 죽는 바람에 낙마했고, 연합군은 이에 동요하다가 정오 무렵에 마침내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적이 후퇴하자 사기가 크게 올랐다. 하지만 모두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무시한 채 적을 향해 무질서하게 추격했다. 이때 엘리엇 장군의 영국 기병대가 이들을 급습하여 2개 보병대대를 섬멸했고, 나머지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진 채 후퇴했다. 이에 아벳 장군 휘하의 보병 여단이 후위에서 대열을 갖추고 있다가 도망치는 아군을 향해 추격해오는 영국 기병대를 향해 일제사격을 가해 그들을 몰아냈다. 그 사이 연합군은 북쪽 강기슭에서 전열을 재정비했고, 예비군이 이때서야 클로스터 캄펜에 도착해 이들을 지원했다. 이후 페르디난트 원수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은 그들은 라인강 너머로 철수했고, 프랑스군은 그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클로스터 캄펜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10명의 장교와 220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68명의 장교와 812명의 병사들이 부상당했으며 7명의 장교와 430명의 병사들이 포로가 되었다. 여기에 대포 1문과 영국군 깃발 1개, 탄약 마차 14개가 포획되었다. 또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이 전투에서 말이 죽어 낙마하는 바람에 다리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다. 반면 프랑스군은 192명의 장교와 2,470명의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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