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2년 5월 12일 작센의 되벨른에서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격돌한 전투. 프로이센군이 대승을 거두었다.2. 배경
1761~62년 겨울, 작센에서 오스트리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프로이센 공 프리드리히 하인리히는 국왕이자 자신의 친형인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적에 비해 병력이 매우 부족하니 증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프리드리히 대왕은 장기화된 전쟁으로 국내 사정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데다 러시아군이 포메른 지역으로 쳐들어오는 걸 저지해야 했기 때문에 동생에게 병력을 보내줄 여력이 없었다. 거듭된 요청이 모조리 묵살당하자, 하인리히는 지휘권을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장군에게 넘기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마저도 거절했다. 이제 1762년 봄에 오스트리아군이 공세를 개시한다면, 그는 속절없이 무너질 게 자명했다.그런데 이 상황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1762년 1월 5일에 즉위한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에게 아무 조건도 달지 않고 그동안 빼앗은 영역을 돌려주고 군대를 철수시키는 내용의 종전협정을 제의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당연히 이를 수락했고 러시아군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본국으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게다가 표트르 3세는 그동안 포메른 지방을 놓고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스웨덴을 설득해 그들까지 종전 협정을 맺게 했다. 이리하여 러시아와 스웨덴 모두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이탈하자, 포메른 지방에 주둔하고 있떤 병력이 작센으로 내려와 하인리히의 군대와 합세했다.
그러나 상황이 금방 호전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상대하는 오스트리아군은 6만 4천명에 달한 반면 자신의 군대는 3만 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 3만 명은 전투 경험이 없는 작센 신병들과 신뢰할 수없는 의용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던 1762년 5월 초, 제트비츠 남작 요한 프란츠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되벨른으로 이동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하인리히는 이 신뢰할 수 없는 군대를 이끌고 5월 5일까지 되벨른에서 북쪽으로 23km 떨어진 오츠하츠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군의 동향을 조사한 끝에 적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당시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제트비츠 남작은 적과 야전을 벌이기 보다는 유리한 지형에 주둔해 적의 공격을 회피하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그는 낮에는 요새에 자리잡았고 밤에는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보루를 순찰했다. 그는 자신이 요새에 박혀 있는 한 열세한 전력인 프로이센군이 공격할 리 없다고 여겼다.
이에 하인리히 왕자는 적이 방심한 틈을 타 좌익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5월 11일 오후, 프로이센군은 계획된 공격을 위해 할당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5월 11~12일 밤, 프로이센 예거 부대는 되벨른에서 남쪽으로 6km 떨어진 니더스트리예기스에서 50명의 그렌저 용병대가 지키는 전초기지를 제압했다. 이후 하인리히 왕자는 5월 12일 오전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 사령관: 프로이센 공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 병력: 보병 18개 대대, 기병 52개 대대, 자원병 600명, 예거 200명, 대포 29문, 곡사포 8문
3.2. 오스트리아군
- 사령관: 제트비츠 남작 요한 프란츠
- 휘하 부대
1) 경무장 부대
- 국경 보병 연대
- 국경 후사르 연대
2) 보병대
- 마인츠-람베르크 보병 연대
- 클레리치 보병 연대
- 니콜라스 에스테르하지 보병 연대
- 피콜로미니 보병 연대
- 루짜라 보병 연대
3) 기병대
- 드 빌 흉갑기병 연대
- 프리츠 알브레히트 경기병 연대
- 츠바이브뤼켄-비르켄펠트 드래곤 연대
- 야지기에-쿠마니에 후사르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