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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2 10:33:00

보포르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7월 31일 영국군이 퀘벡을 공략하기 위해 퀘벡에서 동쪽으로 약 5 km 떨어진 보포르 해안에 상륙하여 프랑스군과 교전한 전투. 몽모랑시 전투로도 불리는 이 전투는 영국군의 패배로 끝났다.

2. 배경

1759년 6월, 영국군은 퀘벡 공략전을 개시했다. 영국군 지휘관 제임스 울프는 6월 26일 퀘벡에 도착한 뒤 보포르 주변의 세인트 로렌스 강 북쪽 해안이 부대의 상륙에 가장 유리한 장소라는 걸 확인했다. 그러나 퀘벡의 프랑스군 지휘관 루이 조제프 드 몽캄은 그곳의 고지에 참호와 요새, 야전포대를 구축해두고 있었다. 따라서 이곳에 상륙하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에, 울프는 다른 장소를 찾기로 하고 수주일간 적합한 상륙지점을 수색했다. 7월 9일 새벽, 영국군은 몽모랑시 폭포로부터 1.2 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했다.

이후 영국군은 상륙 지점 근처에 몽모랑시 진지를 구축해뒀다. 이후 울프는 수주일간 주변 지형과 적의 방비 상태를 조사한 뒤 보포르 해안에 있는 요새들 중 하나를 정면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군이 요새들 중 하나를 공격한다면 프랑스군은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협곡에서 내려올 것이고, 그리 되면 아군은 적과 평지에서 교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적이 그렇게 나오지 않는다면, 그는 모루를 장악한 뒤 몽모랑시 강 인근의 고지를 공략할 지점을 찾기를 희망했다. 그는 적의 주력인 캐나다 민병대를 경멸했고, 자신이 지휘하는 정예 병사들이라면 그들 쯤은 거뜬히 격파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렇게 마음 먹은 울프는 7월 31일 공격을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프랑스군

4. 전투 경과

7월 31일 오전 11시경, 영국 함선 센투리온을 비롯한 세 척의 전함들이 몽모랑시 폭포의 요새를 향해 포격을 개시했다. 그와 동시에 보포르 해안가의 둔덕에 설치된 40개 이상의 야전대포들이 프랑스군의 요새를 향해 포격했다. 그러나 몽모랑시 폭포의 프랑스군 요새는 경사지들로 보호되었기 때문에 대포들은 요새에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한편 영국 보병대는 요새를 향해 출발했다. 울프 장군은 요새를 공격하기 위해 두 개의 무장 수송선 중 하나인 러셀에 탑승했다. 그리고 몽모랑시 강 좌측 둑에 위치한 영국군은 800명의 영국 민병대와 함께 인근 여울을 향한 진군을 개시했다. 오후 1시경, 요새 수비군 지휘관 체발리어 드 레비는 2천 명의 영국군이 몽모랑시 강의 좌측 둑에서 여울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500명의 프랑스군과 500명의 인디언들을 보내면서 로얄 루실론 보병대에게 전방으로 나아갈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잠시 후 울프가 친히 이끌고 있는 영국군 보트들이 보포르 서쪽 해안을 향해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목격한 레비는 로얄 루실론 대대를 그쪽으로 파견해 이들을 저지하게 하면서 몽캄 장군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몽캄은 이 소식을 듣자 영국군이 보포르 해안 근처의 아군 요새를 공격하는 것인지, 아니면 몽모랑시 강을 향해 진군하는 것인지를 가늠하지 못해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곧 몽모랑시 폭포의 아군 요새가 적의 주요 목표라고 확신하고 즉시 휘하 병력을 이끌고 레비의 진영으로 향했다. 오후 2시경 레비와 합류한 몽감은 레비에게 척탄병 2개 중대, 민병대 100명과 함께 기옌 보병대를 파견할 거라고 알렸다. 또한 그는 레비의 군단이 공격받게 되면 자신이 추가 병력을 파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몽캄은 보드레이유 후작과 합류하기 위해 떠났고, 레비는 척탄병들을 몬티리올 민병대와 몬티리올 정규병 대대 사이에 배치했다. 그런 후 레비는 몽모랑시 좌측 둑에서 진군하는 영국군을 감시했다가 그들이 철수하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여울에 배치된 부대를 회수해 요새 방어전에 투입시켰다.

한편 울프는 몽모랑시 강 좌측 둑에서 여울으로 이동하는 듯한 기동을 선보여 적을 유인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들이 임무를 완수하기를 희망했고 전함들의 포격이 적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영국군의 유인책에 넘어가지 않았고 전함들의 포격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게다가 조수가 빠지면서 영국군 보트들은 모래톱에 걸려서 더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이에 울프의 영국군 병사들은 할 수 없이 배에서 내려 오후 6시까지 전열을 재정비한 뒤 몽모랑시 요새를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영국군이 가지고 있던 화약이 젖어 총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문에 영국군은 당황했고, 프랑스군은 그 사이 역습 준비를 완료한 뒤 "국왕 만세!"를 외치며 무작정 요새로 진군하는 적을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영국군은 폭우에 이어 폭풍까지 직면해 전방으로 나아가기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울프는 이 악천후에 직면한 군대에게 전투를 강요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깨닫고 결국 후퇴를 명령했다. 이에 영국군은 해안가로 후퇴했고 오후 7시 30분 경 좌초된 두 척의 선박에 불을 지른 후 질서 정연하게 후퇴했다. 이리하여 보포르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영국군은 이 전투에서 443명이 죽거나 부상당하거나 실종되는 피해를 입었다. 반면 프랑스군의 손실은 사망자 21명과 부상자 4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울프는 이 뼈아픈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퀘벡을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이로부터 2달 후인 9월 13일, 그는 아브라함 평원 전투를 감행해 프랑스군과 격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