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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16 08:02:22

풀다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3.2. 뷔르템베르크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Schlacht bei Fulda.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11월 30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프랑스군과 합세하려던 뷔르템베르크군과 격돌한 전투. 뷔르템베르크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자국 방비에 전념하느라 프랑스군과 합류하지 못한다.

2. 배경

1759년 11월 말,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카를 외젠이 지휘하는 약 1만 명의 뷔르템베르크 군대는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풀다로 이동했다. 이들은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의 좌익 측면을 위협하고 풀다 지역에서 공급되는 물자를 연합군으로부터 차단하는 임무를 맡았다. 프랑스 기병대 천여 명은 라우터바흐와 허부슈타인에 주둔해 이들을 지원했고, 외젠 공작은 1개 보병대대와 흉갑기병 분대를 전진 배치시켜 이 프랑스 기병대와 협력하게 했다. 또한 뷔르템베르크군은 풀다 강을 따라 배치되었고 각 순찰대는 서로 밀착했다. 연합군 지휘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7개 보병 대대, 12개 기병 대대를 파견하여 뷔르템베르크군을 풀다에서 격퇴하고 프랑스 주력군과의 연결망을 차단하기로 했다. 11월 28일,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군대는 마르부르크에서 출발하여 키르토르프까지 진군했고 다음날 안거스바흐와 라우터바흐까지 진군했다. 11월 29일 오전 6시, 외젠 공작은 연합군이 접근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외젠 공작은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전 병사들에게 풀다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양군의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3.2. 뷔르템베르크군

4. 전투 경과

11월 30일 새벽 1시,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의 군단은 풀다를 향해 진격했다. 그들은 풀다에서 조금 떨어진 고지에 배치했고 후사르 분대는 적을 향해 접근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풀다 마을에 주둔한 적을 정찰했고 후사르 및 드래곤 분대는 풀다 마을 서쪽의 텅 빈 길을 따라 뷔르템베르크 군의 야영지 앞까지 나아갔다. 또한 나머지 연합군 군대는 움푹 패인 도로 반대편으로 나아가 뷔르템베르크군의 측면에 자리잡았다. 오전 9시, 뷔르템베르크군 소속 흉갑기병대가 연합군 전위대와 교전을 펄였으나 곧 풀다 마을 앞 다리로 패주했다.

한편 외젠 공작은 풀다 강을 따라 분산 배치된 군대에게 소집령을 내렸지만 아직 1,200명의 보병대와 흉갑기병대 외에는 도착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8천 내지 1만 이상의 연합군에게 공격받게 생기자, 그는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하나는 후방으로 퇴각하여 작센에 주둔한 오스트리아군과 합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풀다에서 오랫동안 다리를 사수하면서 아군의 합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후자를 선택하고 병사들에게 다리를 끝까지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뷔르텐베르크 보병대는 대포 3문과 함께 풀다의 돌다리 3개를 점거했고, 한 연대는 흉갑기병대를 지원하기 위해 강을 건너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르시 장군이 이끄는 이 보병연대는 출격하여 적의 공세를 저지해내 적군의 진격을 오후 1시경까지 지연시킬 수 있었다.

오후 1시경, 흉갑기병대는 결국 적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다. 이때 오르게 장군 여단의 제1부대가 풀다 근처에 도착하여 풀다 강의 우측 둑에 전열을 갖추었다. 한편 연합군은 보병대와 강력한 포병대를 풀다의 좌측 둑에 배치했다. 뷔르템베르크 보병대는 적을 저지하려 애썼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포격과 보병대의 전투력에 밀려 풀다 마을 광장으로 밀려났다. 이후 연합군의 곡사포들이 그들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고, 후사르, 드래곤 분대들이 뒤이어 마을로 진입해 적 보병대와 격전을 벌였다. 얼마 후, 연합군은 오르게 여단의 진지로 통하는 마을 정문을 점령했고, 이에 따라 뷔르템베르크 척탄병 500~600명이 마을 내부에 고립되었다가 늦게 도착한 베르네크 보병 대대와 합류하여 다른 관문을 통해 간신히 빠져나왔다.

한편 외젠 공작은 뷔르템베르크 척탄병들이 다리에서 적에 맞서 싸우는 동안 병력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연합군 후사르 분대와 드래곤 분대가 이들을 향해 진격했고, 뒤이어 베베른 장군이 이끄는 보병대가 뷔르템베르크군의 측면을 강타했다. 여기에 연합군 포병대의 거센 포격까지 이어지자, 뷔르템베르크군은 삽시간에 많은 병력을 잃고 패주했으며 마을에 남겨진 병사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모든 다리가 연합군의 수중에 들자, 외젠 공작은 아직 풀다에 도착하지 않은 군대를 수습해 휜펠트로 철수했다. 그동안 그는 추격하는 적을 막기 위해 후위대를 남겨뒀고, 고렌 장군이 지휘하는 후위대는 적의 추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이리하여 풀다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6명의 전사자와 14명의 부상자를 입었다. 반면 뷔르템베르크군은 여러 명의 사상자와 923명의 포로를 상실했고 2개의 대포를 포획당했다. 특히 척탄병 절반이 베르네크 보병 대대 전체와 함께 실종되었다. 이후 뷔르템베르크군은 오스트리아군과 합세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본국에 돌아가 수비에 전념하느라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와 합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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