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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프랑스대사관 Ambassade de France en Corée | |
<colbgcolor=#000091><colcolor=#fff> 위치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3-12 |
업무 시간 | 월~금요일: 오전 9:30~오후 12:00 |
상급기관 | 프랑스 외무부 |
공관장 | 필리프 베르투 (Philippe Bertoux)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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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공화국이 대한민국에 설치한 외교공관. 위치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로 43-12 (합동)이다.2. 역사
조선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사제들 |
정식 외교관계를 맺기 전인 1835년에 이미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프랑스인 가톨릭 주교와 신부들이 조선에 선교하러 왔다. 당시 조선에 왔던 사제들은 성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1] 주교, 성 모방 나 베드로[2] 신부, 성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이다. 이들은 1839년 기해박해때 새남터에서 순교했으나, 이후로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신부들이 꾸준히 조선에 잠입하여 사목 및 선교활동을 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계속 천주교를 박해하고 있었고, 이후로 입국한 프랑스인 사제들도 1866년 병인박해 때 조선인 신자들과 함께 순교했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인 사제 12명 가운데 9명이 새남터와 갈매못에서 순교했는데, 살아남은 3명 중 하나인 펠릭스 클레르 리델[3] 신부에 의해 조선에서의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인 사제들의 순교가 프랑스에 알려진다. 그 때문에 조선과 프랑스 간에 군사적 충돌이 있었고(1866년 병인양요), 사이가 안 좋았다가 1886년에 비로소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가톨릭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한편 조선에서 순교한 프랑스인 사제들은 조선인 순교자들과 함께 192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 1984년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한국 103위 순교성인).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과 신미양요(1871년)를 겪은 미국과는 1882년에 빠르게 수교한 걸 생각하면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좋질 않았다. 1905년에 을사조약으로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가 1949년에 다시 수교하였다.
1886년 수교 후 건립한 구 프랑스공사관은 정동 28번지에 있었는데 을사조약으로 공사관이 영사관으로 격하되고 경술국치 이후 현대의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는 민영환의 집터 자리로 옮겼다. 이 영사관 부지가 현대의 주한프랑스대사관의 전신이다. 한편 구 프랑스공사관 부지에는 서대문소학교가 들어서면서 공사관 건물을 철거하였다. 이 학교는 서대문국민학교로 전환하였다가 1973년 폐교되고 창덕여자중학교가 이전했다.
3. 건축
대사관이 아름다운 걸로 유명하다. 그냥 다른 대사관보다 예쁜 수준 따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많은 건축가들이 한국 최고의 건축으로 인정할 정도의 걸작으로, 예를 들어 동아일보와 SPACE가 함께 선정한 월간 SPACE 선정 한국 현대건축 명작이라는 순위에선 2위로 올랐다. 건축가는 김중업이다.[4] 조화로운 입지선정, 독창적 디자인 설계, 시공 등 전체적인 건축적 성취는 대한민국 현대건축에 있어서 압도적인 성취이며, 심지어 그 건축 연대가 무려 1960년이라는 사실은 경이로울 정도이다.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구조가 상당히 변했고 건물의 노후화도 피할 수 없었다. 급기야 2010년대 들어서 프랑스 대사관측이 김중업이 설계한 두 동 가운데 사무동을 헐고 다시 짓겠다는 방침을 발표하면서 한국 건축계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적도 있었다. 결국 한국 정부 차원에서 프랑스 대사관측에 건물을 보존해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고 1년에 걸친 협의 끝에 결국 보존 결정이 났다. 이후 몇 년 간의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2023년에 재개관을 하게 되었다. 참고로 리모델링 설계의 책임자가 바로 한국인 최초로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조민석 건축가이다.
서소문로 대사관 건물의 리노베이션 공사가 진행되면서 2021년 1월 8일부터 서소문로 합동 공관이 폐쇄됨에 따라 2021년 1월 13일부터 서울특별시 중구 칠패로 42, 우리빌딩 18층으로 이전하였다.# 재건축이 완료되면서 2023년 4월 6일부터 다시 원래 위치로 이전하였다.
4. 대사
2023년 7월 필리프 베르투(Philippe Bertoux) 대사가 취임했다.4.1. 국방무관
랑젤라 육군대령이 맡고 있다.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제1차 세계 대전 프랑스군 참전자를 추모하는 행사를 했는데 왼쪽의 한국 영현병들 뒤에 선 육군예복 차림의 남성으로 추정된다.
4.2. 영사관
따로 영사관은 없지만 부산광역시 동구, 동래구, 해운대구에 각각 명예영사관이 존재한다.5. 기타
주한프랑스대사관 산하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은 초기 한국 시네마테크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8년 설립되었는데 당시 증언에 따르면 프랑스대사관은 한국 법률이 적용되지 않아 독재 정권의 검열에서 자유로웠다. 1960년대 중후반 프랑스 영화는 전위적인 성격이 강한데다 정치적 성향 때문에 제대로 수입이 안 되었다.[5] 이 경향이 제일 강한 장뤽 고다르 같은 경우엔 프랑스문화원에서밖에 볼 수 없었다.이런 영화 외에도 라붐과[6] 같은 극장 개봉 (혹은 개봉 예정, 즉 극장보다 먼저) 상업영화라던가 검열과는 무관한 예술, 오락영화지만 흥행성 관계로 국내 개봉을 하지 않은 영화 등을 보기 위해서도 프랑스문화원을 찾았다. 웬만한 소극장[7] 크기에 관람료 500원이라 주머니가 가벼운 청소년층들도 많이 찾았다. 당시엔 무자막으로 필름 상영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 당시 프랑스 문화원 상영회를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박건섭인데, 이 사람은 다양한 상영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는 등 김기영과 유현목에 이은 한국 시네필 문화의 중흥을 이끌었던 인물로 꼽힌다. 프랑스로 따지자면 앙리 랑글루아나 앙드레 바쟁 같은 인물이었다. 자연히 훗날 유명해질 영화인들도 나왔는데, 정성일, 김홍준, 듀나, 배창호가 프랑스문화원 세대로 꼽힌다. 살 르누아르는 80년대 중반부터 쇠퇴해 1999년에 폐관했다.
이러다보니 에피소드도 많은데 1985년 프랑스에서 제작 지원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상영 했을 당시 일본 사극을 프랑스어 더빙에 영자막 상영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일본 문화 미개방+검열 문제+치외법권이라는 특성상 한국어 자막을 달 수 없는 [8] 프랑스문화원 상황이 겹친 희비극인 셈이다. 영화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자국 영화 상영회 협찬에 상당히 적극적인 대사관이다. 이외엔 일본문화교류기금을 통해 지원하는 주한일본대사관과 주한이탈리아대사관이 있다.
6. 사건사고 및 논란
6.1. 종부세 납부 면제 요청 및 거부 논란
주한프랑스대사관 측이 2020년 10월 외교부에 "서울시에 있는 직원용 사택에 부과된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종부세를 면제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사관 측은 외교부에 "프랑스에는 종부세 개념의 세금이 없고, 프랑스 정부가 현지 재외 공관에 부과하는 재산세와 비교해도 과도하다는 취지로 항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항의했다고 한다. 외교부는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에 대사관 측 민원을 전달했지만 재정 당국은 면제가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본지 통화에서 “상호주의 원칙에 따라 양국이 별도의 협약을 체결하지 않는 한, 세금 면제는 어렵다”고 했다.주한프랑스대사관은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당시 부과된 종부세 1억 5천만 원에 대해 "프랑스에는 종부세가 없다"며 거부를 했었다. 그러자 국세청이 반포동 빌라 등에 대해 압류조치를 내리면서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된 적도 있었다.
6.2. 무슬림 주한프랑스대사관 협박전단 사건
2020년 11월 1일 밤, 외국인 무슬림 2명이 주한프랑스대사관의 담벼락에 협박성 전단 5장을 붙이고 도주하였다. 이에 프랑스 대사 부부가 위협을 느껴 한국 경찰에 신고했고, 한국 경찰이 범인 추적에 나섰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협박성 전단에 상당한 압박감을 받았다고 한다. 12, 342020년 말 유럽 내 무슬림들의 테러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중동 등 이슬람권에서 거센 반프랑스 감정 확산에 대한 반응이 있었는데 0, 1, 2 그런 분위기의 여파로 보인다.
협박성 전단물의 내용은 한국어와 영어로 '우리 종교를 파괴하지 말라',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 그 칼에 죽임을 당하리라', '무슬림을 무시하지 말라' 등이 적혀있고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의 얼굴에 신발자국과 함께 빨간색으로 X자를 그린 전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범인은 러시아, 키르기스스탄 출신 무슬림 남성 2명이고 '외교 사절에 대한 협박 혐의'를 받고 있었다.
범인 중 1명이 먼저 충청남도의 한 도시에서 검거되었으며, 그는 최근 프랑스의 이슬람에 대한 정책에 불만이 동기였다는 진술을 했다고 한다. 얼마 후 나머지 1명도 검거되었다. 범인 2명 모두 경기도에서 거주하며 충청 지역 공장에서 일해왔다. 범인 1명은 학생비자로 입국해 국내 한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학하고 있었고, 나머지 1명은 불법체류자로 밝혀졌다.
이에 외국사절폭행등죄 중 하나인 외국사절협박의 점으로 기소되었다. 범인들은 1심 재판에서 정당한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무슬림을 모욕하지 말라"는 항의 의사를 전달할 목적이었을 뿐 협박을 고지할 의사가 없었으므로 대사관 직원이 위협을 느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 전단을 붙인 행위는 종교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사회통념상 용인할 수 있을 정도라고 주장했다. 또 범행 배경으로 지목됐던 프랑스 교사 참수 사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며 연관성을 부인했다. #
이에 대해 1심 법원은 대사관 관계자들에 대한 협박죄는 유죄로 인정, 외국사절협박죄는 무죄로 하여 징역 6월과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2심 법원은 1심 법원의 판단을 대부분 인용하면서도 형량이 과하다는 피고인측 주장을 받아들여 벌금 300만원의 선고유예를 내렸다. 2021년 12월 6일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을 확정했다.#
7. 관련 문서
[1]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2]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최방제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지만, 김대건과 최양업은 무사히 살아남아 신부가 되었다.[3]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6대 교구장[4] 참고로 1위는 김수근이 구 사옥, 장세양이 신 사옥을 설계한 건축 사무소 공간의 사옥이었는데, 이게 당시 공간 건축의 자회사인 SPACE에서 진행한 설문인지라 공정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애초에 김수근이 항목에도 있듯 건축가로서의 실력을 둘째치고라도 독재정권에 영합한 건축가였다는 점과 김수근과의 사적인 인연 관계가 있는 인물들의 작품이 여럿 실리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 그랬다.[5] 추가로 당시 외화 수입은 20편 정도로 제약되어 있어서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미개봉한 영화들도 많았다. 이 시절을 보낸 나이 지긋한 시네필들은 영화 토양으로써는 최악이었다고 회고할 정도였다.[6] 참고로 라붐은 프랑스 문화원 세대로 따지면 말기~이후 과도기에 속한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랑스 문화원 세력이 약해지고 카페에 있는 비디오테크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기 때문. 라붐은 비디오로만 출시했다가 2013년에야 정식 개봉했다.[7] 살 르누아르(Salle Renoir)라는 명칭이었고 지하 1층에 있었다고 한다.[8] 여기다 타국 프랑스문화원에도 상영해야 했기 때문에 붙박이 자막을 달 수 없었다. 당시엔 자막 프로젝션 프로그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