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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업

파일:은관문화훈장 약장.png
은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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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김중업
金重業 | Kim Chung-Up
파일:Kim Chung-Up.jpg
여천(如泉)
출생 1922년 3월 9일
평안남도 평양부
사망 1988년 5월 11일 (향년 66세)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
본관 연안 김씨[1]
학력 평양 경림보통학교 (졸업)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 (건축학 / 졸업)
파리건축대학 대학원 (건축학 / 명예석사)
직업 건축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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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김영필 (1885-1950)
어머니 이영자 (1893-1981)
배우자 김병례 (1942년 결혼)
경력 1948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
1952년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
1956년 홍익대학교 건축미술과 교수
1956년 합동건축 연구소장
1956년-1965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71년-1975년 프랑스 문화부 고문건축가
1975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교수
1975년 하버드 대학교 건축대학원 객원 교수
수훈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63년 프랑스 국가공로훈장
1983년 대한민국 산업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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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유학2.3. 강제추방
3. 작품 목록
3.1. 실제로 지어진 건물3.2. 설계도면만 남은 건물
4. 여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1세대[2] 건축가.

김수근과 함께 20세기 한국 현대 건축을 대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3]

2. 생애

2.1. 초기

1922년 3월 9일 평안남도 평양부(現 평양시)에서 아버지 김영필(金永弼, 1885. 8. 20 ~ 1950. 12. 16)과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이영자(李英子, 1893. 7. 15 ~ 1981. 11. 19)[4]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9년 3월 평양제2중학교를 졸업한 뒤,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横浜高等工業学校, 現 요코하마국립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하였다. 1941년 12월에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마츠다·히라타 건축사무소[5]에서 3년간 건축실무를 익혔다. 1944년 귀국해 경기도 경성부에 있는 조선주택영단(現 한국토지주택공사) 기수(技手)로서 일하였으며, 8.15 광복 전 1945년 시흥군 안양면에 있던 조선비행기제작주식회사에 근무하였다.

광복 후에는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가 되어 건축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6] 1.4 후퇴경상남도 부산시로 내려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사범대학을 비롯하여, 한양공과대학(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이화여자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과 부산공업학교(현 부경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였다.

2.2. 유학

1952년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에 한국건축가 대표로 참석하였으며,[7] 심포지엄에서 한국을 대표하여 강의도 진행한다. 여기서 청중석에 있던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게 되는데, 르 코르뷔지에도 김중업에게 깊은 인상을 받게 되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된다. 김중업은 이때 르 코르뷔지에에게 수학하기를 바란다고 끈질기게 부탁하였고, 이후 3개월여간 이탈리아 건축 답사 후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 찾아가 다시 르 코르뷔지에를 만나는데, 베니스에서 별 뜻없이 한번 와보라고 한 말에 진짜로 찾아온 김중업의 열정에 감복하여 테스트를 받는 특전을 얻는다. 2주간의 테스트를 받게 되었는데 당시 르 코르뷔지에가 진행하던 인도 찬디가르 주정부 청사의 옥상정원이 첫 과제. 김중업은 태극문양의 정원을 제안하고 합격했다. 이후 1년간의 인턴 생활을 포함하여 총 3년 2개월간 수학한다.[8]

수학 이후 약 3개월동안 17개국을 일주하며 세계 건축물 답사를 거치고 1956년 2월에 귀국. 참고로 유학기간 동안 김중업은 거의 매일 새벽 3시까지 사무실에 남아 스승의 설계도를 보며 공부했다고 한다. 쥐꼬리만한 작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사무실 열쇠를 얻기 위해 건물경비에게 용돈까지 떼어주면서 닥치는대로 공부했다고. 당시 사무실에서 설계한 도면에는 작업한 사람의 사인을 귀퉁이에 남겼는데, 후일담에 무슈 김의 사인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스승인 르 코르뷔지에는 그를 아껴 귀국을 말렸다고 한다. 실제 나중에 르 코르뷔지에 사망 후 미국의 건축지에 르 코르뷔지에의 수제자 5명을 꼽아서 실었는데, 그 중에 김중업도 포함되었다. 이런 각별한 인연 덕분에 르 코르뷔지에의 사망 후 프랑스에서 출범된 '르 코르뷔지에 재단'에서 김중업이 재단의 이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중업이 귀국 후 주한 프랑스 대사관 설계에 참여한 것도 스승의 추천이 컸다고 한다. 물론 추천만으로 선정된 것은 아니고, 다른 프랑스 건축가 5명과 경합해서 당당히 선정된 것이다.

귀국 후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열고 본격적인 건축창작 활동을 하며, 한국의 고전을 현대감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홍익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가르쳤다. 1957년 4월 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김중업 건축작품 전람회를 개최하였고, 1971년 10월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제2회 작품전을 열고 그 동안의 작품과 프랑스 정부가 만든 영화 「건축가 김중업」을 선보였다.

2.3. 강제추방

서울이 당면한 도시계획·건축 등의 문제에 대한 정부시책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1970년 4월, 준공 4개월만에 와우 아파트가 붕괴하자 라디오 동아방송에 출연하여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 때문에 본격 박정희 정권블랙리스트에 올라가게 된다. 이후 1970년 8월 서울시 철거민 이주를 위해 졸속으로 추진되다 대규모 시민 봉기를 야기했던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을 때, 또 다시 동아일보에 기고문을 기재해 양택식 시장을[9] 강하게 비판한다. 사실 김중업은 그 이전에도 5.16 쿠데타 과정에서 육사 생도들이 쿠데타 지지 행진을 하자[10] "지금이 어느 땐데 관제 데모냐" 라고 비판하여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도 있었고, 박정희의 측근이 동빙고동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호화주택을 짓자 '로마 제국 말기 현상'에 비유하며 신문에 비판 칼럼을 쓴 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김중업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이러 저러한 고초를 많이 당했다고 한다.

결국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김중업은 1971년 11월, 갑작스럽게 3개월짜리 단수 여권으로 강제 출국당해 프랑스에 거주하게 된다. 한마디로 정권에 의해 해외로 강제 추방된 것. 3개월 여권이 만료된 후에는 무국적자가 되어 불법체류 신분이 되었지만, 주한 프랑스 대사관 건축으로 받은 프랑스 슈발리에 훈장 덕분에 프랑스에서의 체류는 가능하였다고 한다. 물론 프랑스 밖으로의 출입국은 안되는 반쪽짜리 체류였다. 강제 추방 외에도, 정권의 표적성 세무조사로 인해 거액의 세금이 추징되기도 했고, 이 때문에 31빌딩 설계비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의 시련이 이어졌으며, 이 와중에 성북동 자택도 경매로 날아가고, 소장 석물 등도 모두 매각되어 빈털터리가 된다.

프랑스에 거주하던 1972년 3월에는 르 코르뷔지에 재단의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974년에는 프랑스 공인건축가(DPLG)로 인정받았다. 그 뒤 한국 정부와 편지 등을 통해 실랑이를 하다가, 관계가 어느정도 개선되어 겨우 여권을 발급받게 되었으며,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영주권을 취득했다. 미국 정착 이후에는 지금도 디자인 스쿨 중에 최고로 꼽히는 곳인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 그리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한다. 지금도 되기 어려운 RISD 교수를 인종차별이 심하던 1970년대에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대단하다. 물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뉴잉글랜드 지역의 디자인 스쿨이라지만, 그렇다고 그가 영어를 원어민처럼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을텐데 결국 이 모든 악조건을 제쳐두고 그 정도 위치에 섰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르 코르뷔지에 제자로 이미 명망있던 그의 실력을 믿고 뽑은걸수도 있겠다.

1978년에는 파리건축대학에서 명예석사 학위도 수여받는다. 그 사이 제주 시내 오라지구 종합관광 센터의 설계를 위해 1977년 4월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몇 달 후 다시 미국으로 떠난 적도 있었다. 1978년 10월에는 영구 귀국했다.

3. 작품 목록

3.1. 실제로 지어진 건물

아래 지어진 건물 중 몇 개의 건물에서 부분적인 표현은 아직까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공시설 및 건물에서도 보일 정도로 당시엔 그의 영향력이 대단했었다. 일반주택 같은 경우 개인 재산이다 보니 소리소문 없이 철거되는 경우도 있다. 철거된 건물은 취소선으로 표기한다. 총 64개 작 외 다수 존재한다.

3.2. 설계도면만 남은 건물

아래 계획안들은 설계도면으로만 남아있으며 실제로는 건축되지 않았다. 몇몇은 실제 건축되었다면 상당한 볼거리가 되었을 듯.

4. 여담

르 코르뷔지에의 제자답게 아파트 문화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마포아파트와 관련된 좌담회에서 김중업은 아파트는 한국 주거 생활의 혁신이라 극찬했고, 아울러 85%가 산악지대라 주택건설을 위한 공지 조성이 매우 힘든 한국의 주택 정책은 가능한 한 집단 주거 위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55]

김중업의 작품 중 하나인 유유산업(현 유유제약)의[56] 제약공장이 경기도 안양시에 있었는데, 공장이 충청북도 제천시로 이사를 가면서 공장이 텅 비게 된다. 이에 이것을 어찌 하나 고민하다가 2007년에 안양시에서 이 공장이 세워진 땅을 통째로 매입해서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해 2014년 시민에 개방했다. 박물관 이름도 이를 기념해 김중업건축박물관이라 지었다. 또한 이 박물관 안에는 그의 일대기와 그가 기록한 낙서들과 글, 그가 설계한 건축물 등을 볼 수 있는 김중업관이 있는데, 그의 기록물들은 전자화 작업을 통해 쉽게 볼 수 있게 해 놓았고, 그가 설계한 건물들 중 일부는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되었는데, 그 건물 모형들 중 일부는 나무로 만들어져 그런지 상당히 고급스럽다.[57] 관람료도 무료니 한번쯤 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5. 관련 문서



[1] 공부전서공파(工部典書公派)-평양 종중(平壤宗中) 26세 업(業) 항렬. 공부전서공파종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2] LH 블로그에 1세대 건축가로서 소개된 바 있다. 물론 정세권 등처럼 올라가려면 더 올라갈 순 있다.[3] 여러모로 김수근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김중업은 박정희 정권에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정권과 늘 싸우고 불화하여 급기야 해외로 쫒겨나기까지 했지만, 반대로 김수근은 독재정권에 밉보이지 않고, 심지어 남영동 대공분실은 직접 설계까지 했을 정도로 독재 정권의 철권 통치에 영합해 당시 여러 국가 사업을 도맡은 건축가였다.[4] 이운조(李雲朝)의 딸이다.[5] 현재의 (株)松田平田設計(마츠다 히라타 설계)[6] 이 때 학생으로 김수근이 있었다고 한다.[7]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로 일본으로 간 후 비행기를 8번 갈아타고 베니스에 도착했다고 한다.[8] 이 당시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김중업이 일하며 그린 그림이 바로 과거 스위스 10프랑 지폐 뒷면에 그려져 있던 르코르뷔지에의 대표적 설계작 중 하나인 '찬디가르의 법정'이었다. 다시 말해, 김중업의 스케치가 스위스의 지폐에 그려져 있었던 것.[9] 광주 대단지 자체는 전임 김현옥 시장이 추진한 것이지만, 사건이 터진 당시의 책임자는 양택식 신임 시장이었다.[10] 5.16 쿠데타 직후 뜬금없이 벌어졌던 육사 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행진은 전두환의 작품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된다.[11] 현재 언어교육원으로 쓰이고 있다.[12] 현재 철거되었다.[13] 현재 인문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등록문화재 지정.[14] 현재 후문으로 쓰이고 있으며, 등록문화재 지정.[15] 1993년 철거된 이후 이듬해 농림축산검역부 건물이 세워졌다. 해당 건물은 이후 민간에 낙찰되어 한 식품회사가 사용 중이다.[16] 1997년 내부수리를 거쳤으며, 문화재로 지정.[17]세종대학교. 2002년 광개토관 건설로 철거되었다.[18]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사.[19] 김중업의 대표 작품. 스승인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과 한국에 귀국해서 그 동안 고뇌한 한국에 어울리는 자신만의 담론을 조합하여 최대한 끌어 올린 작품으로 평가된다. 콘크리트로 지붕 처마선을 직선과 곡선으로 처리한 형태와 단아한 전체구성 및 공간처리는 한국의 얼과 프랑스다운 우아함이 잘 어우러진 건물로서 한국 현대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월간 SPACE 선정 한국 현대건축 명작에서는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며 이 작품으로 62년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고, 1965년에는 샤를 드 골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프랑스 국가 공로훈장과 슈발리에(騎士) 칭호를 얻었다. 이때 받은 슈발리에 서훈으로 나중에 강제출국 후 무국적자 신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체류가 가능했다. 김중업에 이어 한국인으로 슈발리에 서훈을 2번째로 받은 사람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20] 3호선 독립문역 근처에 소재했으며 수십번의 리모델링에 의해 외관이 너무 많이 변경되어 초기 형태 가늠할 수 없다. 2016년에 철거되었다.[21] 가평군 청평면 호반로 811 부근에 위치했다. 현재는 철거되어 관리동으로 추정되는 건물만 폐가처럼 남아있다.[22] 세계 박람회 최초의 한국 자국관. 박람회 이후 철거됨.[23] 서울 중구 장충동1가 50-22에 위치. 2022년 무렵 철거됨. 다만 1층을 짓던 중 공사가 중단되고 다른 설계자를 불렀다는 증언이 있어 기존에 존재하던 주택도 김중업의 작품이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24] 청평산장과 마찬가지로 전 대한방직 회장인 설원식의 의뢰로 설계되었다.[25] 지금은 없어진 구본관이다. 용담동 캠퍼스 본관이라고도 부른다. 제주대학교가 아라동으로 이전한 이후 제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에서 사용했었다. 건축계에서 철거를 극구 저지했으나 결국 1995년에 헐렸다. 공식적인 철거 이유는 바닷바람의 소금기로 인한 건물 노후화지만 철거를 밀어붙인 높으신 분이 "꼴보기 싫은 거 밀어버리니 속 시원하다"는 등의 말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 안전 문제보다는 정치적 문제로 헐렸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건축계와 학계에서 현장답사와 보존방안 모색을 위한 세미나를 각각 92년 12월과 93년 2월에 여는 등 보존을 위해 열의를 보였지만 당시 제주도의 의사결정자는 이를 묵살하고 밀어버렸다.[현재] 서귀중앙여자중학교로 쓰이고 있다.[27] 평면도를 보면 산부인과의 컨셉에 맞게 남성의 성기와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 자궁의 모습을 형상화한 건물.[28] 병원이 없어진 후 이런저런 점포건물로 쓰여지는 등 수난을 겪다가 지금은 아리움이라는 디자인 회사가 입주하여 사용 중이다. 덕지덕지 붙어있던 간판 등이 없어지고 원형에 충실.[29] 사무실로 기능 변경.[30] 김중업의 지인 이경호 씨를 위해 지어진 건물은 이후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게 되는데, 80년대 초 3년여간 이탈리아 대사관저로 쓰이기도 하고, 이후 사립 한국미술관이 들어왔으나, 미술관이 용인으로 이전하며, 개인 김주현 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김주현 씨는 20여년 넘게 거주하며 가족이 줄어 작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그냥 매각하면 건물을 철거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 2011년 국내최초로 건물이 경매로 나오게 되었다. 경매가로 나온 가격은 원형유지 조건에 300억원. 지가를 감안해도 대단한 가격이다. 2021년에 다시 한국미술관 측에서 매입을 했는지 네이버 및 카카오맵 상에는 한국미술관 미술연구원으로 등록되어 있다.[31] 현 씨티은행 뱅크하우스. 한때 호화관사 논란으로 시끄럽기도 했다.[32] 후술하는 도큐호텔과 같은 건물이다. 도큐호텔이 이 건물의 설계 변경인지, 다른 설계인지는 불분명.[33] 현 안국빌딩.[34] 이전 자료에 서술된 제1공학관은 엄덕문 작품.[35] 현 인문사회관 A, B, C동[36] 1980년도에 대규모 증축되어 증축부분의 건축양식이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37] 관광전망대로 건축되었으나 이후 음식점 등을 거쳐 현재 문화공간 리모델링 계획 중이다.[38] 한국 최초의 마천루, 현대적 유리궁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미스 반 데어 로에씨그램 빌딩의 데드카피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김중업 본인도 씨그램 빌딩을 모방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39] 위의 유유산업 창업주이자, 유한양행 유일한 창업주의 막내동생이다. 많은 인연이었는지, 안양공장터가 김중업박물관으로 개장되었다.[40] 현재 리모델링을 해서 외관은 많이 바뀌었다. 원형이 많이 사라졌다며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 1981년까지 일본의 대형 사철 회사 도큐에서 호텔로 운영하다 폐업했다.[41] 1999년 무렵에 철거되었다. 현재 서교동 효성해링턴타워 자리[42] 한때 마포구 양화로15안길 6에 위치한 카페아벨롭(구 라이너 노트)을 홍명조씨 주택으로 추정하였으나, 해당 주택의 정초는 1968년으로 되어 있으며, 김중업이 설계 당시 제작한 평면도 및 주택 모형과도 완전히 상이한 건물이다. 하지만 건물 설계는 수준이 높다. 따라서 알려지지 않은 김중업의 다른 작품이거나 수준있는 다른 건축가의 작품인듯 하다.[43] 해외에서 원격 참여.[44] 70년대 중반 외유 시기의 건물은 외유 이전에 설계했거나, 우편으로 진행해서 현장시공을 맡지 못했다.[45] 자료마다 기록이 불분명하지만, 시기나 위치로 보아 김중업 후기의 걸작으로 꼽히는 욱일빌딩(박시우 치과의원) 의 건축주 박시우씨의 주택이다. 서울시가 매입[46] 2011년 담장을 허물고 커피숍 '에스프레소 하우스'로 약 10여년간 영업되다 폐업된 이후 다시 일반 주택으로 회귀한 듯 하다. 건물의 입구에는 김중업의 1980년대 초 작품이라는 설명이 씌인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47] 건물주 장석웅은 일반 고객이 아니라 김중업의 제자인 장석웅으로 보이는데, 김중업이 설계한 건국대학교 구 도서관(현재 언어교육원)을 대신해서 새로 지은 상허 도서관을 설계한 인물이다.[48] 아래 예술의 전당 현상설계 후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랬는지 정확한 연도 파악이 되지 않는다.[49] 통칭 (여의도) KBS 신관. 구 TBC 사옥인 별관이 아니다! KBS 본관 뒤에 있는 빌딩으로, 현재는 보도본부와 기타 사무공간이 들어서 있다. 즉 우리가 흔히 보는 KBS 뉴스 9가 이 건물에서 제작된다.[50] 1차 당선기준 연도, 올림픽공원의 상징적인 조형물. 이 때 즈음엔 건강이 많이 약화되어 주된 구성원리만 짚어주고 거의 다른 실무자에 의해 설계되었다. 1차 당선 이후 기념성이 약하다는 비난이 일자, 정부는 86 아시안 게임 조형물 설계자인 조각가 김세중에게도 각기 다른 안을 제출하라고 하였다. 김중업은 이후 처음의 것을 엄청난 스케일로 확대시켜 무려 높이 90m의 안을 제출했다고... 주위에서 모두가 만류하였지만 매우 쇠약한 상태에서도 그는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높이 45m 등 여러가지 요소가 수정된 후 최종적으로 김중업의 안이 당선되었다.[51] 이후의 작품들은 그의 건강상태가 더욱 나빠져 건물에서 그와 관련된 작품성이 짙게 나타나진 않는다.[52] 같은 현상설계에서 정림건축의 설계가 선정되고 김중업이 낙선되어 이대로 현 KEB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이 된 건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53] 200m 산 위에 400m짜리 초고층 교회를 세워 도합 600m의 건물을 세운다는 계획이었다. 후보지로는 북한산 등이 모색되었다.[54] 이 현상설계에서 억울하게 낙선 되었다고 생각하여 충격을 받아 쓰러졌다. 입원할 정도로 위중했고, 사경을 헤매다 건강이 호전되어 퇴원하였으나 예전 같은 활동을 하지 못했다.[55] 경향신문 1963-04-18, 《아파트와 입식생활을 위한 좌담회: 주택난 해결의 길》.[56] 김중업은 유유제약 사장을 지낸 유특한과 인연이 깊은 편이었다.[57] 특히 주한프랑스대사관 모형은 예술적인 자태를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