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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훈자 | |
한갑수 韓甲洙 | |
출생 | 1913년 6월 26일[1] |
경기도 양평군 북상도면 위곡리 (현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 |
사망 | 2004년 11월 21일 (향년 91세)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청주 한씨[2] |
상훈 | 은관문화훈장 (1992년 10월 9일)[3] |
가족 | 한홍석(韓鴻錫) (아버지) 한상대[4] (아들) 박화서[5] (며느리) |
직업 | 관료, 한글학자, 방송인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재부역 관료, 교수. 음악 관련 전공을 하였으나 독재에 부역하여 얻은 지위로 한글학자 행세를 하였다. 호는 눈메, 왈례(曰禮), 목원(牧原). 성악가로 대학/대학원교육을 받았으며 대학교 교강사 생활 역시 예체능 분야에서 하였다. 독재정권에 부역한 관료로서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한글 관련 학회분야 지도직을 역임하였다. 이후 이 경력을 바탕으로, 또 성량이 풍부한 달변을 무기로 하여 '바른말 고운말' 같은 류의 방송과 강연을 많이 하였는데, 강연에서는 상당 부분을 정치적 주장과 청년들의 문화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채우기도 했다.[6] 근본적으로 한국어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관변 연설가에 불과한 사람이었기에 왜곡되고 편향된 오류를 주입시키고 다녔다는 혐의가 있다. 관련내용은 '논란' 부분 참조.2. 생애
1913년 6월 26일, 경기도 양평군 북상도면 위곡리(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서 아버지 한홍석(韓鴻錫, 1899. 9. 24 ~ 1955. 2. 9)과 어머니 진천 송씨(鎭川 宋氏, 1873. 8. 26 ~ 1943. 4. 17)[7] 사이에서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 고창고등보통학교,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 주오음악학교 성악과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이후 귀국해 1948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강사로 출강했고, 이어 중앙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국회의장 이기붕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후 5.16 민족상[8] 이사, 민속음악협회 회장, 한글기계화연구소 이사장, 한글학회 회장, 한글재단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2004년 11월 21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뉴스데스크)
3. 논란
3.1. 언어규범주의
잘못된 사실에 기반한 규범주의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규범주의와 기술주의 문서 참조.1945년부터 37년 동안 KBS 1라디오 프로그램 '바른 말 고운 말'에 출연하였다. 이때 닭도리가 일본어의 잔재라느니 요즘(즉, 70-80년대) 세대의 한국어 파괴현상이 심각하다느니 등, 잘못된 사실관계에 기반한 규범주의에 경도된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다.
며느리의 언어생활을 단속하고 가스라이팅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3.2. 독재부역
한갑수는 이승만 정부 시기 정치에 관여하였다. 실제 한갑수는 이승만 팔순을 기념해 이승만을 극찬하는 송축시를 지어 서예작품으로 남긴 바 있다.임은 누리의 길이시요 겨레의 등불이시니이다
하늘 높이 솟은 달이 즈믄 가람에 비최옴 같이
임의 높으신 덕은 이 겨레의 가슴 깊이 스미어 가실줄이 없으리이다
임이시여 비옵기는 부디 오래 사오셔서
어두운 이땅 위에 높이 현 등불 다외소서
(작품보기)
하늘 높이 솟은 달이 즈믄 가람에 비최옴 같이
임의 높으신 덕은 이 겨레의 가슴 깊이 스미어 가실줄이 없으리이다
임이시여 비옵기는 부디 오래 사오셔서
어두운 이땅 위에 높이 현 등불 다외소서
(작품보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포천군·연천군·가평군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홍익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2년에는 제3차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 개헌투표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국민들을 독려하는 국민투표지도 계몽연설회 연사로 활동하였고 1975년에는 유신헌법 유지 및 정부 신임에 대한 찬반을 묻는 제4차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지도록 연설하며 국민투표 계몽담당자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이는 아들 한상대는 4.19 혁명으로 투옥되었던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한갑수의 가족들의 표현에 따르면 한갑수는 '다른 민족을 인정하지 않고 폄하하며', '국수주의적 세계관을 자랑'하던[9] 자폐적 전체주의자 이며,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차가 아니면 출근하지 않던 속물(snob)이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선거구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63 | 제6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포천군·연천군·가평군[10] | | 13,775표 (17.56%) | 낙선 (3위) |
[1] 음력 5월 22일.[2] 공안공파(恭安公派) 31세 수(洙) 항렬.[3] 국어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수훈#[4] 시드니대학 한국학과 교수. 前 명지대 교수[5] 前 명지대 이민학과 교수[6] 청년문화 전반에 대해서 그리했지만 특히 호칭에 있어서 극심한 편향성에 집착하였다. 70년대 부터 젊은이들 사이에서 애인을 "자기"라 부르는 호칭이 유행하였는데 이를 두고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며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기도 하고,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 "어른"이란 호칭을 쓰는 것이 좋다, 아내가 시부모에게 남편을 지칭할 때는 "걔"라고 해야만 한다는 등 당시 가치관으로서도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7] 송순형(宋淳亨)의 딸이다.[8] 5.16 군사정변을 기념하는 상[9] 그의 강연을 들어 본(직장이나 관공서의 행사 등으로 강제로 들어야 했다) 사람에게 이 부분은 의외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의 강연에서 숭미주의가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숭미 사대와 국수주의가 공존하는 정신세계는 사실 대한민국에 아주 흔한 보수적 가치 체계이다.[10] 제6지역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