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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5:27:10

박태준/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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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국 및 군인 시절2. 포항제철 창립3. 삼성 이병철과의 인연4. 정치인 시절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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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국 및 군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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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준과 아내 장옥자 여사
1927년 10월 24일부산광역시 기장군에서 아버지 박봉관과 어머니 김소순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일본으로 떠나서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여 2학년 과정만 마치고 귀국하였다.
청암(靑巖) 박태준(朴泰俊) 포항제철 회장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국가 건설자(state-maker)입니다. 1927년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따라 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초중고교를 다녔고 와세다대 공대 2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아 중퇴·귀국했습니다. - 조선일보
1947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교하여[1] 1948년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생도 시절 제1중대장이자 탄도학 교관을 담당하던 박정희 당시 포병 대위와 인연이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탄도학 강의를 진행하다가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내던 박태준을 눈여겨본다. 박태준이 소위로 임관한 후에도 인연을 유지하면서 박정희와 박태준은 서로를 믿으며 의지한다. 이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기 전에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만약 일이 잘못되면 자신의 가족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하였다.

임관 후에는 6.25 전쟁에 참전하며 초창기 대한민국 육군의 일선에서 활동하였다. 휴전 이후에는 제5보병사단 작전참모,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 국방부 인사과장, 제25보병사단 참모장연대장을 지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으로 취임한 박정희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된다. 정작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는 경제인으로 활약했을 뿐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걸 고려하면 다소 묘한 부분.[2] 동시에 경제 분야의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어 경제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다. 1961년 단국대학교에 편입, 1963년 8월 정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육사 6기이던 그를 비롯해 당시 국군 장교로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부의 조치로 4년제 정규대학교의 학사 학위과정을 이수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이후 국군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정규 학위과정을 이수하지 못한 채 현역으로 복무했고, 또 정규 학사과정 육군사관학교(설립 당시 남조선경비사관학교)가 뒤늦게 신설(11기 이후) 되어 정부차원의 학사 학위과정 위탁교육이 필요해서 취해진 조치였다.[3]

1963년 소장으로 전역하고 국영기업인 대한중석의 사장에 취임하여 1년만에 흑자기업으로 전환한다. 2년 후인 1965년에 진행한 한일수교에서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일본 정부에게서 얻어낸 배상금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여 포항제철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한다.

태백산맥을 쓴 소설가 조정래가 작성한 박태준 전기에 따르면, 군수품을 몰래 빼돌리는 일이 만연하던 시절에 복무한 군인임에도 박태준은 군수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부사관 이상의 간부라면 자택에 군용 모포를 하나 이상은 갖고 있던 시절임에도 박태준은 그러지 않았다. 박태준이 유일하게 가져온 군수품은 반창고인데 이유는 오래도록 농사를 짓느라 갈라진 어머니 김소순 여사의 손에 감아드리려는 목적이었다. 김소순 여사가 갈라진 자신의 손을 보고는 "군대에서 쓰는 반창고를 감으면 잘 낫는다던데..."라고 혼잣말을 하였는데 어머니의 혼잣말을 들은 박태준이 다음 날에 반창고를 가져와서 감아드린 것이다. 그리고 군인 시절에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이 박태준의 형편을 둘러보고는 아내인 장옥자에게 "군 장교가 왜 이렇게 초라하게 사는가? 저 아래 다른 집은 없는 게 없던데. 청렴결백 지켜봐야 헛일이니 새댁이 남편 설득 좀 하시오."라고 질타할 정도로 이때만 해도 청백리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납비리를 저지르던 군수업자를 추방하고 정직한 군수업자와 다시 계약한 일화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톱밥 고춧가루 사건. 박태준이 제25보병사단연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병사식당을 순찰하는데, 병사들이 김치를 아예 먹으려고 하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보급 장교를 호출한다. 박태준은 양동이에 물을 부은 다음 보급장교에게 창고에서 고춧가루를 가져와 물에 풀으라고 지시했고, 빨간색 색소가 빠지면서 하얀 톱밥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를 보고 분노한 박태준은 톱밥이 섞인 뻘건 물이 든 양동이를 보급장교의 머리에 부어버리고는 "너는 민족의 반역자다!"라고 일갈하였다. 이후 상부에 군납비리를 보고하지만 적극적인 조치는커녕 군수업자를 바꾸는 선에서 좋게좋게 마무리하라는 지시만 왔다. 문제의 고춧가루, 아니 톱밥을 납품한 군수업자도 나중에 찾아와 돈봉투를 내밀며 일을 무마하려고 하자 분노가 폭발한 박태준은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꺼지라며 군수업자를 쫓아냈다. 믿음직한 납품업자를 찾은 박태준은 "3일 내로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도록 고춧가루를 가져오시오."고 지시했고 그제야 먹을 만한 김치를 부대에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군납비리 이야기는 이대환 작가가 서술한 박태준 평전에도 등장한다.

또한 박태준은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자여서 결혼한 후에도 당번병을 두지 않았다. 다른 장교들은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 당번병을 늘리는데 박태준은 반대로 한 것이다. 당시 존재한 야간통행금지를 지키느라 병에 걸린 맏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개인적인 사유로 부대의 차를 사용할 수는 없고 통행금지가 적용되는 시간이라 조금만 기다리려고 한 것인데 결국 아이는 통행금지가 해제되고 박태준이 귀가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사망한다. 맏아이를 보내고 시간이 흘러서 둘째도 병에 걸려 위독한 상황이 찾아오는데 톱밥 고춧가루 사건 이후로 박태준과 계약한 군수업자가 찾아와서 사람의 도리를 하기 위함이라며 박태준의 아내와 아이를 태워서 병원으로 이동한다.

2. 포항제철 창립

그의 진면목(眞面目)은 포항제철 건설 자금 마련을 위한 협상에서 드러났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1965년부터 종합제철소 건설을 추진했고, 이듬해 11월 미국·영국·독일 등 5개국 8개 회사 연합체인 대한(對韓)국제제철차관단(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발족했습니다. KISA는 그러나 1969년 상반기 “한국에서 종합제철소 건설은 채산성이 없다”며 ‘최종(最終) 불가(不可)’ 결론을 내리고 붕괴했습니다. 세계은행(IBRD)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은 제철소 건립 자금을 모을 방법이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 처지가 됐습니다. 여기서 청암은 ‘농림수산업 지원 용도’로 정해져 있는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포항제철 건설 자금으로 일부 전용(轉用)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자신이 ‘해결사’로 나섰습니다. 이 제안에 완강하게 반대하던 오히라 마사요시 대장상(大藏相·우리나라의 기획재정부 장관)을 1969년 8월 1주일 동안 세 차례 만났습니다. 청암은 일본 정부간행물보관소를 찾아가 샅샅이 뒤져 일본 사례를 분석한 뒤 “한국에 제철소를 지으면 일본 안보에 큰 도움된다”는 논리를 설파하며 설득해 냈습니다. 전 세계가 하나같이 “한국에서 제철 산업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할 때, “난국에 빠진 조국을 구하겠다”는 청암의 순정하고 강렬한 애국심이 일본 지도층을 감복시킨 것입니다. 그의 완벽한 일본어와 일본인의 문화적 특성과 심리를 꿰뚫는 실력도 이를 뒷받침했습니다. 당시 그를 만났던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총리는 “나는 박태준의 단호함에 너무 놀랐고, 그래서 당신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감정적인 반일(反日) 데모가 끊이지 않던 1960~70년대, 청암은 “일본을 알고 일본을 활용해 일본을 극복하자”는 ‘지일(知日)·용일(用日)·극일(克日)’의 3단계 일본 대응을 주창했습니다. 청암은 포항제철의 ‘스승’이던 신일본제철을 1990년대 추월해 그 타당성을 증명해 냈습니다. 1978년 중국의 덩샤오핑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을 만나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하자, 요시히로 회장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라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이 일화는 박태준이 한국을 넘어 최소한 ‘아시아적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 조선일보
포항 제철소 건설에 대한 제반 준비에 착수한 박태준은, 자금 원조를 해 줄 모든 외국 기관들로부터 '불가' 판정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1967년 제철소 건설의 첫 삽을 떴지만, 정작 외국에서 차관 불가 입장을 내려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와중에 한일국교정상화 때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을 유용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내서 상황은 급변하고, 한일각료회담을 앞둔 시점 일본을 찾아가 당시 야와타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제철의 나가노 시게오 사장,[4] 일본강관의 아카사카 다케시 사장 등 일본 철강산업의 주역들을 만나 일일이 설득한 결과로 결국 일본은 한국에 기술을 제공하기로 했고, 포항제철로 신일본제철의 기술과 자금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5]

그러나 제철 기술을 전수받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신일본제철 기술자들은 어떻게든 적은 내용만을 보여주려고 했다. 이에 박태준은 제철소 기술자 몇명을 데리고 공장 안을 산책하듯이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거나 메모도 하지 않는 행동으로 일본 관료들의 의심을 피하며, 자신들이 보는 모든 것들을 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후에 포항제철이 제철소를 예상보다 빨리 짓자 일본 철강업계, 정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줬다"는 불만이 나왔다. 이때 야와타 제철의 이나야마 회장은 “많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워낙 잘한 것”이라며 불만을 일축했다고 한다. 일본으로부터 제공받은 차관과 기술로 마침내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호기 공사가 시작됐다. 박태준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 배상금은 조상의 피의 대가이므로, 제철소가 실패하면 오른쪽으로 돌아 나아가 영일만에 빠져 죽자"는 말을 포스코 직원들에게 자주 말했다.[6]

예정보다 일정을 1개월 앞당긴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흘러나왔고 조업 첫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달러, 순이익 1,200만달러(약 46억원)를 달성했다. 이로써 박태준의 리더십으로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 역사에서 제철소를 가동한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 됐다.[7]

이후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건설해 왔으며, 1992년 결국 양 제철소 8개 고로 건설을 완성함과 동시에 포스코 창업자로서 역사를 마감하였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는 포스코의 명예회장으로 타계하기 전까지 경제계의 원로로 자리했다. 한국 기업인의 전형적인 문제점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강 불모지에서 1968년 16억원의 차관으로 포스코를 이끌어 국가 철강산업의 기틀을 다진 거물 기업가 중 하나는 분명하다.

3. 삼성 이병철과의 인연

이병철 회장과 박태준 명예회장은 17년 나이 차이에도 끈끈한 우정을 쌓았다. 호도 각각 호암과 청암이다. 청암은 이병철 회장이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선물한 아호다. 선배는 사업보국, 후배는 제철보국에 매진하며, 조국 산업화를 이끌었다. 둘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경제인의 길에 들어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업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깊은 교분을 나눴다. 호암은 청암에게 삼성그룹 경영에 대한 의견도 묻곤 했다. - 매일경제
일본 철강회사들이 '부메랑 현상'을 이유로 포스코를 견제했을 땐 호암이 방패막이 역할을 했으며 1981년 11월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부메랑 현상'을 경고할만큼 박태준은 기술 이전을 꺼리는 사이토 신일본제철 사장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때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박태준을 와세다대학 후배라면서 불러서 신일본제철 사장과의 골프 기회를 주선해 제공했다. 이병철 회장이 이나야마 신일본제철 회장과 만든 작품이었고 얼마 후 일본 철강업계는 광양제철소에 간접 방식으로 기술협력을 하기로 결정되었다. 한국 철강의 역사를 바꾼 골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심지어 삼성중공업을 박태준에게 맡기려고 까지 했었다.

4. 정치인 시절


박정희 정부 시절 박태준은 포항제철을 경영하면서 최대한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고 했다. 이 시기 포항제철은 다른 기업들과 달리 정치자금(사실상 불법뇌물)을 단 한푼도 안내면서도 무사했는데, 최고 권력자 박정희가 여긴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자 박태준은 "최소한 포항제철의 울타리는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렇게 내켜하지 않던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거쳐 민정당 창당 멤버로 11대 국회에 입성했지만, 이때도 포항제철 경영에 집중하면서 정치 활동에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고, 1985년 12대 총선에선 아예 빠지게 된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13대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돌아왔고, 당 대표로 노태우 대통령을 대리해 민정당의 운영을 맡았다. 그리고 1990년 삼당합당 이후에는 민정계를 대표하는 최고위원으로서 자연스레 김영삼과 대립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상당수 민정계 인사들이 박태준 주변에 모여들었고, 박태준도 나름 대권 꿈을 꾸었던 것 같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중도 포기하였다.#

김영삼이 민자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후, 선거대책위원장 제안을 거절한 채 1992년 10월 민자당 최고위원 및 포항제철 회장직을 모두 사퇴하고#, 제14대 대통령 선거 전날인 12월 17일에는 국회의원직 사퇴서까지 제출했다.# 김영삼을 도울 수 없다는 명확한 의사를 표시한 것.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국세청이 포항제철에 대한 세무조사를 시작하자, 박태준은 1993년 3월 출국하여 해외를 떠돌다가 1994년 10월 모친상을 당하면서 귀국하였다. 그리고 포항제철 계열사와 협력업체에서 약 3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 도중인 1995년 특별사면되면서 공소기각 결정을 받았다.

그 후로는 일본에 머무르면서 야인으로 있다가 1996년 11월 귀국했다. 1997년 4월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허화평의 의원직 상실로 인해 같은 해 7월 24일 실시된 1997년 재보궐선거에서 포항시 북구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되면서 국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당 총재로 추대되어 김대중김종필 간의 연합(DJP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끌어낸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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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준과 김종필 그리고 김대중

1998년 이후 공동여당인 자유민주연합의 총재로서 국민의 정부를 뒷받침했고, 2000년 1월 13일 김종필의 후임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4개월 만인 2000년 5월 18일부로 사임했다.

5. 말년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후 자유민주연합을 탈당하고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2004년 중앙일보에 90회에 걸쳐 회고록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연재했다.[10]

2011년 들어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되어 입원했고, 12월 13일 세브란스병원에서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 17묘역에 안장되었다.


[1] 입교할 당시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2] 국방부 인사과에 있을 당시 하도 청탁을 많이 받아서 간접적인 정치판 경험을 해 질렸기 때문이란 설도 있다.[3] 박태준은 이 외에도 군생활을 하면서 육군대학교, 국방대학원을 수료하였다.[4] 야와타제철과 후지제철은 1970년 합병하여 현재 일본제철의 전신인 신일본제철이 된다. 원래 2차대전 전의 구 일본제철을 분리시킨 것으로 재통합한 것. 이후 신일본제철과 후신인 신닛테쓰스미킨, 일본제철은 포스코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며 2006년부터는 상호 지분 보유를 하고 있으나, 반대로 2012년부터는 기술유출 문제로 분쟁중이기도 하다.[5] 당시 제철소도 짓기 전에 사원복지를 위하여 사원주택단지 건설을 시작하는, 당시 관점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벌였다. 당연히 사방에서 질타가 쏟아졌지만, 박태준은 "사원 복지 잘해 망한 회사는 없다"며 일축했다. 물론 이때부터 이미 공기업적 측면이 있어서 가능했던 발상이기도 하지만, 하여튼 지금도 지곡동에 가면 사원 주택단지가 잘 돼 있다. 이 때 유일하게 한일은행만이 박태준의 의견을 존중하여 "담보는 중요하나, 사장님의 열정은 담보보다 더욱 중요하다"며 자금을 대출해주었는데, 이는 지금까지 포스코의 주거래은행이 우리은행인 이유라고 볼 수 있겠다.[6] 다만 후술되어있듯 정작 진짜 일제피해자들이 보상해달라고 요청한 관련 면담에는 참석을 거부해 비판받기도 했다.[7] 포항제철이 맨 손에서 빠른 속도로 철강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로 박태준의 완벽주의를 꼽는다. 포항 제철소를 지으면서 부실공사 불허라는 확실한 원칙을 제시했다. 1977년 3기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발전송풍설비를 폭파한 일화가 있다. 당시 박태준은 발전송풍설비 공사 현장을 감독하던 중 10cm가량 콘크리트가 덜 쳐진 곳을 발견하고 다음날 건설현장 책임자와 간부, 외국인 기술 감독자, 포철의 임직원을 모두 부른 가운데 공사가 이미 80%까지 완성된 콘크리트 구조물 폭파식을 거행했다. 이 폭파식은 모범적인 경영관리의 사례로 하버드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MIT 경영학 교재에 소개되기도 했다.[8] 그러나 김영삼과의 불화가 심해지면서 결국 당선 7개월만에 사퇴하였다.[9] 그래서 DJT 연합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사실상 박태준과 TK쪽 세가 너무 약해서 DJP 연합으로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박태준의 지역구였던 포항시에서 김대중 후보가 10% 이상(...) 득표로 TK 치고는 나름 선전해, 박태준의 영향력을 조금이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10] 2024년 3월부터 더중앙플러스에서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시리즈로 재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