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367년 (향년 불명)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359년에서 1365년 사이 ~ 1367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상 어머니: 미상 | |
아내 | 마리아 | ||
자녀 | 슈테판, 라슈쿠, 무사타 | ||
가문 | 보그다네슈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clearfix]
1. 개요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몰다비아 공국 제3대 보이보드.선대인 드라고슈와 사스는 생몰년은 물론이고 재위기간마저 불분명한 반면, 이 인물 대에 들어서부터는 비교적 재위기간이나 생몰 등의 행적이 보다 확실해져 실존인물로 인정받는다.
2. 행적
초기 생애는 불분명하다. 일부 학자들은 보그단이 마라무레슈에 거주하는 블라흐족 출신 귀족이라고 추정하며, 다른 학자들은 다른 곳에 있다가 마라무레슈로 이주한 인물이라고 추정한다. 1335년 10월 6일, 헝가리 국왕 카로이 로베르트는 왕실 헌장에서 칼로차 대주교 얀키 라슬로를 다뉴브 협곡에 3차례 파견해 미콜라의 아들 보그단을 '자신의 나라'에서 헝가리 왕국으로 이주시킬 준비를 시켰다고 밝혔다. 헝가리 중세 역사가 팔 엥겔(Pál Engel, 1938 ~ 2001)은 보그단이 이때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이주한 대규모 블라흐족 집단을 이끌었다고 추정했다. 반면 루마니아 역사가 빅토르 스피네이(Victor Spinei, 1943 ~ )는 미콜라의 아들 보그단이 보이보드 보그단과 동일한 인물인지는 불확실하다고 주장했다.1342년 7월 카로이 로베르트의 아들 러요시 1세가 헝가리 왕위에 올랐을 때, 보그단은 이미 마라무레슈의 보이보드였다. 1343년 10월 21일자로 작성된 러요시 1세의 헌장은 보그단을 "우리에게 충성하지 않은 마라무레슈의 전 보이보드"라고 언급하여 보그단이 왕 또는 왕의 대리인과 갈등을 빚어 직위를 잃었음을 암시했다. 그가 직위를 상실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루마니아 역사가 라두 카르치우마루(Radu Carciumaru, 1975 ~ )와 빅토르 스피네이는 러요시 1세가 보이보드의 특권을 제한하려 하자 보그단이 반발했을 거라고 추정했다. 스피네이는 러요시 1세가 블라흐 귀족들을 포섭해 보그단을 폐위함으로써 보그단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는 걸 저지했다고 주장했다.
보그단은 폐위된 후에도 마라무레슈를 떠나지 않았다. 러요시 1세는 1349년 9월 15일에 발행한 왕실 헌장에서 보그단을 "우리의 뿌리 깊은 불충실한 신하"라고 재차 언급하면서, 그가 블라흐 크냐즈(Knyaz, 공작)인 줄레스티의 줄러와 여섯 아들을 설득해 자신과 합류하려고 시도했고, 줄러가 거부하자 보그단과 그의 조카 슈테판이 마라무레슈에 있는 그들의 영토를 침략해 그들을 몰아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러요시 1세는 마라무레슈의 보이보드이며 슈테판의 형제이자 보그단의 또다른 조카인 이오안에게 줄레슈티 가문을 그들의 영지에 복귀시키라고 명령했다. 1353년 5월 14일, 헝가리 왕실 헌장은 쿠레아에 있는 보그단의 두 조카 슈테판과 이오안의 영토 경계를 결정했다. 이 문서는 슈테판과 이오안을 러요시 1세의 "충성스러운 하인"이라고 언급했고, 그들의 삼촌을 "보이보드 보그단"이라고 언급했지만, 그의 불충실함은 언급하지 않았다.
헝가리의 성직자이자 왕실 역사가 쿠쿨로이 야노시(Küküllòi János, 1320 ~ 1393)는 "마라무레슈의 블라흐인 보이보드 보그단이 이 지역에서 블라흐족을 모아 헝가리 왕국에 속해 있었지만 타타르족과 가까워서 주민들에게 버림받았던 몰다비아로 비밀리에 이동했다"라고 기록했다. 거의 모든 몰다비아 연대기에 따르면, 당시 몰다비아는 드라고슈가 1340년대 후반에 그곳에 이주해서 나라를 세웠고, 그와 그의 후계자 사스 모두 러요시 1세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동시대의 어떤 자료도 보그단이 몰다비아로 이동한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러요시 1세에게 반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몰다비아로 이동했을 거라고 추정했고, 빅토르 스피네이 등은 드라고슈의 사례를 본받았을 거라며, 몰다비아에 거주하는 블라흐족이 러요시 1세의 권위에 반대한다는 걸 잘 알았을 거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러요시 1세가 1360년 3월 20일에 발행한 문서에는, 블라흐 족이 몰다비아에서 공공연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보그단이 전에 축출했던 상대인 줄러의 여섯 아들 줄 한 명인 줄레슈티의 드라고슈가 그들을 토벌하고 몰다비아에서 왕의 통치를 회복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1365년 2월 2일자 헝가리 왕실 헌장에 따르면, 보그단과 그의 아들들은 헝가리에서 은밀하게 도망친 뒤 몰다비아를 공격했다. 몰다비아 보이보드 사스의 아들 발슈는 그들에게 저항하려 했지만 중상을 입었고, 많은 부하를 잃은 뒤 마라무레슈로 피신했다. 러요시 1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라무레슈에 있던 보그단의 영지를 몰수해 발슈 일행에게 넘겨줬다고 한다. 보그단이 언제 몰다비아로 넘어갔는지에 대해서는 1359년, 1363년, 1364년, 1365년 등 다양한 년도가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옳은지는 불분명하다.
쿠쿨로이 야노시는 러요시 1세의 군대가 종종 몰다비아를 침공했지만, 그 땅에 거주하는 블라흐족의 수가 늘어나서 국가로 변모했으며, 말년에 가서야 몰다비아를 복속했다고 설명했다. 빅토르 스피네이는 러요시 1세가 1370년 폴란드 왕국의 국왕을 겸한 후에야 보그단의 아들 라슈쿠를 자신에게 귀순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고 추정했다. 보그단은 헝가리의 간섭을 회피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꾸리다가 1367년경에 사망했고, 라다우치에 있는 보그다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407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기록된 보이보드 목록에는 드라고슈와 사스가 언급되지 않고 보그단부터 시작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이 몰다비아 공국의 건국자는 헝가리 왕국을 추종한 드라고슈가 아니라 보그단이라고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3. 가족
- 마리아: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