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665년 9월 11일 또는 9월 21일 (향년 미상) | ||
몰다비아 공국 이아시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661년 9월 29일 ~ 1665년 9월 11일 또는 9월 21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미상 어머니: 미상 | |
배우자 | 다피나 푸르투나 | ||
자녀 | 아나스타샤 다비자(양녀), 마리아 다비자 | ||
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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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59대 보이보드.2. 생애
치누트 푸트나 출신의 몰다비아 보야르로, 1657년 보이니크, 술잔 관리인, 반(Ban)의 직위를 역임했다. 1661년 9월 29일 슈테파니타 루푸가 병사한 뒤 보야르들의 추대로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1663년 오스만 제국의 장군 세라스키에(Seraskie)와 왈라키아 공국의 보이보드 그리고레 1세 기카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오스만 제국군 원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에르세쿠이바르 요새(현재 슬로바키아의 노베 잠키 시)를 43일간 포위공격한 끝에 1663년 9월 24일에 함락했다. 몰다비아군과 왈라키아군은 그해 12월 많은 전리품을 실은 마차를 가지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1664년, 다비자와 기카는 르웬츠(현재 슬로바키아 레비체) 요새를 포위하기 위해 사리 후세인 파샤 휘하 오스만 제국군과 함께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들은 지시에 따라 이동했지만, 그해 7월 9일 ~ 19일 베네덱 전투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에 패배한 뒤 귀환했다.
당시 몰다비아 공국은 수십 년간 정계 혼란과 부정부패, 기근, 튀르크족과 타타르족의 습격 등으로 인해 재정 파탄에 시달렸다. 다비자는 통치 첫해에 수체아바에 조폐국을 다시 도입했다. 하지만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평가 절하로 인해 몰다비아 통화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주조소는 주로 스웨덴과 리보니아 실링과 릭스달러를 위조한 주화를 발행했다. 그의 치세 동안 유일하게 위조되지 않은 동전은 시장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쓰이던 구리 동전인 살라이(şalăi) 뿐이었다. 1665년 9월 11일 또는 9월 21일에 사망했고, 이아시 인근의 바르노바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다비자는 생전에 몰다비아의 대 보야르이자 군인인 미하이 푸르투나의 딸 다피나 푸르투나와 결혼했다. 다피나 푸르투나는 그와 결혼하기 전에 몰다비아 재무관 두미트루 부구쉬와의 사이에서 아나스타샤를 낳았다. 아나스타샤는 어머니가 재혼한 뒤 다비자의 양녀가 되어 성을 다비자로 변경했고, 훗날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보이보드를 역임한 게오르게 두카와 결혼했다. 한편, 다비자는 다비나 푸르투나와의 사이에서 딸 마리아를 낳았다. 마리아는 몰다비아 보야르 이오르다케 루세트의 부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