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1768년 12월 20일 | ||
몰다비아 공국 바슬루이 주 로시에슈티 | |||
사망 | 1846년 12월 18일 (향년 77세) | ||
왈라키아 공국 수체아바 슬로티나 수도원 | |||
재위 | 몰다비아 카이마캄 | ||
1차: 1807년 1월 ~ 1807년 8월 4일 | |||
2차: 1821년 3월 29일 ~ 5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8d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그리고레 코스타체 어머니: 마리아 칸타쿠지니 | |
가문 | 코스타체슈티 가문 | ||
종교 | 기독교 | }}}}}}}}} |
[clearfix]
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카이마캄(Caimacam: 임시 통치자), 몰다비아 대주교.2. 생애
1768년 12월 20일 몰다비아 공국 바슬루이 주 로시에슈티 마을에서 출생했다. 그가 속한 코스타체슈티 가문은 17세기 후반부터 몰다비아 궁정에서 고위 관직을 차지한 대 보야르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그리고레 코스타체이고, 어머니는 마리아 칸타쿠지니였다. 세속명은 친할아버지의 이름인 바실레(Vasile)였다. 178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15세의 나이로 후시 주교구의 수도자가 되었다. 그는 이때 베냐민(]Veniamin)이란 수도명을 채택했고, 이아콥 스타마티(Iacob Stamati)를 대부로 모셨다. 3년 후 이아콥 스타마티에 의해 집사에 선임되었다.1788년 9월 26일 레온 구카(Leon Gheucă)가 이끄는 몰다비아 대교구의 대집사이자 수도자로 선임되었다. 1789년 이아시에 있는 성 스피르돈 수도원장에 선임되었고, 1792년 6월 26일 몰다비아 대주교가 된 이아콥 스타마티에 의해 후시 주교로 발탁되었다. 그는 후시 주교로서 수도회 교회 및 학교의 개선 사업을 단행해 인망을 얻었다. 1796년 6월 로만 주교가 되었고, 이아콥 스타마티가 사망한 직후인 1803년 3월 13일에 몰다비아 대주교로 선임되었다. 1803년 5월 24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알렉산드루 모루지에게 서신을 보내 아래의 제안을 건넸다.
1. 몰다비아 대주교와 2명의 대 보야르로 구성된 에포리아가 학교를 관리하기 위해 설립된다.
2. 6개의 루마니아 카운티 학교가 몰다비아의 주요 도시에 설립된다.
3. 학교는 내국인과 외국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돈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많은 장학금을 제공한다.
4. 학교 유지를 위해 성직자들로부터 징수하는 4 레이 세금 외에도 상당한 금액이 국가 재무부에서 공제된다.
2. 6개의 루마니아 카운티 학교가 몰다비아의 주요 도시에 설립된다.
3. 학교는 내국인과 외국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돈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많은 장학금을 제공한다.
4. 학교 유지를 위해 성직자들로부터 징수하는 4 레이 세금 외에도 상당한 금액이 국가 재무부에서 공제된다.
1803년 이아시 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그는 학교의 원활한 운영이 이뤄지도록 힘썼고, 젊은 수도자들을 해외로 파견해 학업을 계속하도록 도왔으며, 교회와 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번역하고 인쇄하기도 했다. 또한 사제 교육을 조직하고 소콜라에 신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신학교는 나중에 "베냐민 신학교"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리고 교회 음악 학교도 별도로 설립했다.
1807년 1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요르다케 루세트로즈노바누의 뒤를 이어 몰다비아 카이마캄에 선임되어 새 통치자가 올 때까지 몰다비아의 내정을 돌봤다. 1807년 8월 4일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스카를라트 칼리마치가 선임되면서 물러났다.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자크와 프루트 강 동쪽의 몰다비아 동부 절반이 러시아 제국에 할양되어 베사라비아로 편성되었다. 이에 베냐민 코스타체는 오스만 제국 궁정에 서신을 보내 자국의 3분의 1 이상이 러시아 제국에 넘어간 것에 격렬히 항의하면서, "몰다비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충실한 봉신이니 주군으로서 몰다비아 국경을 보장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1세에게도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821년 3월 29일, 몰다비아 보이보드 미하이 수추 2세가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의 그리스 혁명군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로 진입하는 걸 도왔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몰다비아로 진입하자 가족과 함께 베사라비아로 피신했다. 이후 베냐민 코스타체가 카이마캄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5월 그리스인의 독립을 꾀한 필리키 에테리아(Φιλική Εταιρεια: 친구 협회) 인사들이 몰다비아 도처에서 봉기에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면서 혼란이 극에 달하자, 어쩔 수 없이 키시너우로 피신했다.
1823년 2월 오스만 제국이 혼란을 수습한 뒤 몰다비아로 돌아와서 정교 활동에 전념했다. 특히 1833년 이아시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건설을 시작했고, 다수의 교의 서적, 교회 예배에 필요한 서적, 교회사 저작물을 번역본으로 발간했다. 그러나 몰다비아 보이보드 미하이 스투르자가 종교에 간섭하자 이에 맞섰지만 힘에 부치자 1842년 1월 18일 왈라키아 공국 수체아바의 슬라티나 수도원으로 은퇴했고, 4년 뒤인 1846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