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d0000><colcolor=#fff> '''''' | |||
출생 | 미상 | ||
사망 | 1690년 (향년 미상) | ||
폴란드-리투아니아 즈볼린 | |||
재위 | 몰다비아 보이보드 | ||
1차: 1672년 8월 20일 ~ 1673년 11월 | |||
2차: 1673년 12월 ~ 1674년 2월 22일 | |||
3차: 1683년 12월 25일 ~ 1684년 3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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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기독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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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몰다비아 공국 제62대 보이보드.2. 생애
몰다비아 왕실의 수장인 로고파트(Logofăt)를 역임한 토데르(Toader, ? ~ 1663)의 아들이다. 1672년 8월, 몰다비아 보이보드 게오르게 두카가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출진한 파디샤 메흐메트 4세를 카메니타에서 접견했다가, 메흐메트 4세의 분노를 사는 바람에 폐위되었다. 이후 페트리세이쿠가 8월 20일 보야르들의 추대로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올랐고, 메흐메트 4세의 승인을 받았다.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전쟁을 치르던 중이었던 메흐메트 4세는 폴란드인의 정치 운동을 감시하고, 카메니타와 호틴에 주둔한 수비대에게 식량과 군용 물자를 공급하며, 군대에 필요한 다리를 건설하는 임무를 페트리스쿠에게 맡겼다. 그러나 그는 임무 수행을 매우 버겁게 여겼고, 자신과 보야르 및 몰다비아 국민에 대한 오스만 제국 지휘관들의 모욕적인 언행에 반감을 품고 폴란드-라투아니아와 손잡기로 했다.
1673년 11월 11일,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이 호틴에서 오스만 제국군을 쳐부술 때, 그가 이끌던 몰다비아군은 즉시 폴란드-리투아니아군과 손잡고 오스만 제국군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11월 말에 그를 축출하고 이아시를 강제로 점거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로 피신했다. 이후 두미트라슈쿠 칸타쿠지노가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 의해 몰다비아 보이보드로 선임되었다.
얼마 후,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자국 국왕 미하우 코리부트 비시니오비에츠키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 이에 페트리세이쿠가 몰다비아로 돌아와서 두미트리슈쿠를 몰아내고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복위했다. 그 후 그는 오스만 제국의 보복을 두려워 해 루스 차르국과 손잡기를 희망했다. 1674년 초, 그는 대수도원장 페도르를 모스크바로 보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해주면 루스 차르국의 시민이 되겠다고 밝혔다. 모스크바 궁정은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오스만 제국과 정면 대결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즉답을 피했다. 그 대신, 그가 몰다비아 보이보드 직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병력과 물자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674년 2월 22일, 오스만 제국군의 지원을 받은 두미트리슈쿠 칸타쿠지노의 공세에 밀린 그는 친러시아 보야르들과 함께 폴란드로 망명했다. 이후 폴란드에서 10년 가까이 지내던 그는 1683년 9월 12일 오스만 제국군이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패배한 뒤 신성 동맹군의 공세에 밀리는 틈을 타 1683년 12월 25일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의 지원을 받아 몰다비아로 귀환해 보이보드로 등극한 뒤, 요새에 주둔한 튀르크족과 타타르족을 학살했다. 그 후 루스 차르국에 재차 사절을 보내 러시아 시민이 되기를 간청했고, 모스크바에 새로운 대사관을 설립했다. 그러나 루스 차르국은 국제 정세가 복잡하기도 했고, 폴란드에서 10년을 보낸 뒤 폴란드인 덕분에 왕위를 되찾은 그를 불신했기에 대답을 회피했다.
루스 차르국이 도와주지 않자, 그는 자보로제 카자크와 동맹을 맺고 카자크 용병대를 대거 고용했다. 그러나 1684년 3월, 크림 칸국에서 파견한 타타르군에게 패퇴한 뒤 폴란드의 즈볼린으로 피신했고, 두미르티슈쿠 칸타쿠지노가 재차 몰다비아 보이보드에 선임되었다. 이후 즈볼린의 스타로스타 게네랄니를 역임하다가 1690년경에 사망했고, 라리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