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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17 23:37:31

봉준호/생애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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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기3. 영화감독 경력

1. 개요

봉준호의 생애 및 활동을 다루는 문서.

2. 유년기

누나(봉지희)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린 시절 봉준호는 '조용하고, 말수가 없었고, 느렸고, 공부는 굉장히 잘하고, 리더십도 있었지만, 특별히 끼가 있다거나 튀지는 않았다'라고 한다. 학창시절, 반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집밥을 먹게 해주는 등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남달랐다고 한다.

아버지 서재에서 시중에 없던 영화, 건축, 디자인 관련 수입도서들과 같은 다양한 책을 읽으며 자랐다고 하며, 봉준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문학, 음악을 다 좋아했다고 한다. 봉준호가 어린 시절이었던 1970~80년대 그 당시의 어른들은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 만화책을 보는 것을 굉장히 금기시하던 분위기였는데, 이례적으로 봉준호의 가족은 모두 모여서 만화를 즐겨보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봉준호가 영화감독이 된다고 했을 때 봉준호의 부모님은 "쓸데없는 짓 하지말고 공부나 해라" 라면서 반대를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해보고 싶은 것은 다 해봐라" 라면서 격려를 해주셨다고 한다. 이처럼, 봉준호의 부모님은 시대상으로 봤을 때 굉장히 진보적이고 열린 사고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대구 남도초등학교 3학년 때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했다.[1] 대구에서 살았을 때는 아카데미 극장에서 '로보트 태권브이'를 봤었다. 또 어린 시절의 대구의 만경관에서 훗날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서울에선 국제극장, 스카라, 명보극장이 생각난다고 했다. 12살 때부터 영화감독을 꿈꾸며 잠실에서 중, 고교 시절을 보내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2]에 88학번으로 진학했던 봉준호는 이장호, 배창호 감독을 보면서 굳이 영화학과를 나오지 않아도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3. 영화감독 경력

파일:bongjoonho_Cannes.jpg 파일:JML4GAZ46JDO7DTJJ4OR5RRKDM.jpg
<rowcolor=#ffd700> 2019년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2020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학 시절에는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다고 한다. 실제 본인도 여러 인터뷰에서 오전에는 수업 듣고, 낮에는 데모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서 자신이 참여한 데모를 다룬 신문 기사를 읽는 게 흔한 일과였다고 밝혔다. 그러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군대에 다녀온 뒤에는 한겨레신문 문화센터에서 개설한 영화 관련 수업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예술에 대한 문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3]

제대 후 교내에서 '노란문'[4]이란 영화 동아리를 만든 봉준호는 16mm 필름으로 첫 단편영화 《백색인(1993)》을 연출했다. 이후 영진위 산하의 한국영화아카데미에 11기생으로 입학했고, 16mm 단편영화 《프레임 속의 기억(1994)》 및 《지리멸렬(1994)》을 연출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봉준호는 1999년까지 충무로에서 조연출과 각본 등의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았다. 우노필름(싸이더스의 전신) 차승재 대표의 눈에 띈 봉준호는 우노필름에서 <플란더스의 개(2000)>로 남들보다 일찍(31세) 장편영화 데뷔를 했다.
파일:봉준호 살인의 추억.jpg
영화《살인의 추억》의 촬영 모습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장편영화 데뷔를 했다. 대중적인 흥행은 실패했으나 작품성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영화 전문가들에게 기대주로 주목받았다.[5] 봉준호의 재능을 믿은 차승재 대표가 다시 기회를 줬고, 이때 연출한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다.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영화계에 충격을 선사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흥행[6]까지 성공하며 한국영화의 미래로 지목받으며 충무로의 최고 전성기를 장식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공으로 봉준호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2006년에 내놓은 《괴물》이 천만 관객을 돌파해 흥행[7]적으로 당대 모든 기록을 깨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대중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는 스타감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오락과 사회드라마 양쪽 모두의 측면에서 비평적 성취까지 이루어내며 전무후무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표본이 되었다.

2009년마더》는 평단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찬사를 받으면서 미학적 연구대상의 영화 예술가로 인정받는 계기가 됐는데, 이를 증명하듯 그해 각종 비평가협회상을 받고 비평과 흥행면에서 대한민국 대표 감독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 후에는 할리우드 제작진&배우들과의 교류로 대한민국영화산업에 영향을 미친 작품들을 만들었다. 2013년 한국영화 역사상 최고 제작비(437억)를 투입해 만들어진 《설국열차》로 국내에만 한정되어 있던 영화산업을 글로벌하게 확장시키는 데 공헌했다.[8] 2013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2016년 프랑스 문예공로훈장 오피시에(Ordre des Arts et des Lettres, Officier)를 받으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파일:봉준호 옥자.jpg
영화《옥자》의 촬영 모습
그리고 2017년옥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중 최초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였고, 시대의 흐름도 전파하며 국내에 넷플릭스를 알리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국제동물보호협회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등 동물 애호가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이후 2019년에는 《기생충》을제작하여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9]을 수상했고, 국내 개봉 후에는 천만 관객까지 돌파하면서 몇 안 되는 쌍천만 감독[10] 대열에 합류했다. 대통령의 축전을 받고 그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며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파일:봉준호 기생충.jpg
영화《기생충》의 촬영 모습
기생충》으로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100년 역사상 최초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역사적인 수상레이스가 시작된다. 자세한 것은 기생충(영화)/수상 문서 참고. 기생충이 천만 관객 돌파,[11] 1억 달러 돌파에 성공한다. 다음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감 전문이다.
봉준호: I‘m so sorry. I didn’t prepare French.(미안합니다. 프랑스어 연설은 준비하지 못했어요.) 불어 연설은 준비를 못 했지만, 언제나 프랑스 영화를 보며 영감을 얻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에게 큰 영감을 준 앙리 조르주 클루조클로드 샤브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생충>이라는 영화는 영화적으로 되게 큰 모험이었어요. 독특하고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 작업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은 저와 함께한 수 많은 아티스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요. 홍경표 촬영감독님, 이하준, 최세연, 김서영.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많은 예술가들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마음껏, 지원해 주신 바른손(제작사)과 CJ(배급사) 식구분들에게도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생충>은 위대한 배우분들이 없었다면 단 한 장면도 찍을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함께해준 배우분들께 너무 감사드리고요.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준, 가장 위대한 배우이자 저의 동반자인 우리 송강호님의 멘트를 꼭 듣고 싶습니다.
송강호: 배우로서 인내심과 그리고 슬기로움과 열정을 가르쳐 주신, 존경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배우분들께 이 영광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봉준호: 지금 저의 가족이 2층에 있는데, 어딘지 찾지 못하겠네요. 가족에게도 감사하고요. 저는 그냥 12살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기로 마음먹었던, 되게 소심하고 어리숙한 영화광이었습니다. 이 트로피를 이렇게 손에 만지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Merci beaucoup.(감사합니다.)
이후 2020년 1월,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배우 조합상 시상식에선 자신의 작품에 출연한 10명의 배우들과 함께 앙상블상 수상의 현장에 함께했다. 2월 초 영국 아카데미 영화상(BAFTA)에선 한진원과 함께 각본상을, 그리고 작품은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대망의 2020년 2월 9일(현지 날짜), LA 돌비 극장에서 열린 92회 아카데미 시상식(OSCARS)에서 예상했던 대로 각본상국제영화상[12]을 수상했고, 다소 어려울거라 생각되었던 감독상까지 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최고의 하루를 보냈다. 특히나 감독상 부문은 영화 1917샘 멘데스[13]를 제치고 수상한 결과라 더 뜻깊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기대를 모았던 대망의 작품상까지 수상하며 6개 부문 노미네이트 중 4개 부문의 수상[14]이라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기생충의 작품상 수상은 아카데미 92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어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한 케이스이다. 그동안 많은 외국어 영화상 작품이 작품상에 도전했고, 또 번번이 고배를 마셨으나 기생충이 그 한계를 완전히 부수어버리며 새로운 역사의 중심에 섰다. 이후 국민들의 찬사와 박수 속에 화려하게 귀환했고, 청와대에 초청 받아 대통령과 만찬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파일:봉준호 2021.jpg
2021년 4월 12일(현지 날짜), 전년도 수상자[15]가 다음 해의 시상자로 등장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통에 따라 봉준호가 2021년 아카데미에 다시 등장하지 않을까하는 추측들이 있었는데, 역시나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 연출진이 1차로 발표한 시상자 명단 15명에 포함되었다.[16] 2021년 4월 25일(현지 날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년 전 자신이 받은 감독상 시상자로 모습을 드러냈다.[17] 특이한 것은 감독상 후보자 소개 모두 봉준호 감독의 한국어 내레이팅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이 한국어로 말하면 작년 오스카 시상식을 함께했던 최성재가 통역해서 들려주는 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재미있게도 수상자 발표 멘트는 반대로 최성재가 "수상자를 발표하겠습니다" 라고 한국어로 먼저 말하고, 봉준호 감독이 "The Oscar goes to..." 라고 영어로 수상자[18]를 발표했다. #

2021년 5월 13일, 전년도 대상 수상자의 자격으로 제5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대상 시상자로 직접 참석했다. 시상장면. 이후, 2021년 10월 7일,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100분여 간 대담을 나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X 봉준호 감독 스페셜 대담

기생충 이후의 신작은 한국 영화가 하나, 할리우드 영화가 하나 있다고 밝혔다. 한국 영화는 장르가 모호하지만 공포라고 볼 수 있다고 하며, 서울에서 일어나는 '호러 액션'이자 재앙이며, 2001년부터 18년 동안 구상했다고. 할리우드 영화는 2016년 영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이 모티브라고 밝혔다. 한 인터뷰에서 밝히길, 한국어 작품의 각본[19]은 2021년 1월 중에 완성하고 영어 각본을 쓰고 있다고 한다. 두 작품 다 기생충과 비슷한 규모의 영화이며, 둘 중 어느 것이 먼저 발표될지는 고민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극과 멜로물도 언젠가 찍고 싶다고 밝혔다.

2021년 5월 13일, 차차기작 관련 기사가 공개되었다. 국내 VFX 전문 회사와 함께하는 순수 한국 프로젝트이며, 심해 생물과 인간들이 얽혀 있는 드라마를 다루는 CG 애니메이션이다. 2018년부터 구상하고 준비한 작품으로, 2021년 1월 시나리오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친분이 있는 배우에게 목소리 연기를 부탁했다는 후문이 있다고 한다. 이와 별도로 봉준호 감독은 현재 차기작인 영어 라이브액션(실사) 작품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으며, 한국 프로젝트(애니메이션)는 미국 프로젝트인 차기작에 이어서 그 다음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나게 될 예정이라고 한다. #

2021년 6월 인터뷰에 따르면, 런던에서 일어난 실화 기반 영화는 2년동안 자료 조사와 구상을 했지만 실제 사건의 당사자 가족들과 만나 대화한 이후 실화를 다루는 것의 부담감과 어려움 때문에 폐기했다고 한다. 차기작은 미국에서 찍을 예정으로, 미출간 소설을 원작으로 2021년에 시나리오 집필을 마치고 계획대로라면 2022년 촬영에 들어갈 예정. 차차기작인 심해어 애니메이션은 포스 크리에이티브 파티와 협업중이며 2021년 1월에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고 2026년을 목표로 진행중이다. 서울을 모티브로 한 공포영화는 당장은 만들 준비가 되어있지 않지만, 피가 낭자한 작품이 될 것이며 이미 시나리오 버전이 3개나 있는 야심작인 만큼 언젠가는 반드시 영화화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파일:봉준호 미키 17.jpg
영화《미키 17》의 촬영 모습[20]
2022년 1월에 워너 브라더스와 손잡고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을 원작으로 한 SF 영화 《미키 17》을 연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주연은 로버트 패틴슨이 내정되었고#, 스티븐 연, 토니 콜렛, 마크 러팔로, 나오미 애키도 참여한다.# 제작진으로는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 정재일 음악감독의 합류가 확정되었다. 2022년 8월부터 12월까지 촬영되었으며, 2025년 3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21]#[22] 여담으로, 기생충의 성공 덕분에 전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받은 덕에 제작비가 무려 1억 달러 이상이나 된다. 웬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못지않은 거대한 스케일이 기대된다.



[1] 당시 살던 곳은 현재의 앞산카페거리에 있는 카페 '앞산주택' 인근으로 대구 남구 현충로3길에 위치해 있다. #[2] 여기서 교지 '연세춘추'에 만화 <연돌이와 세순이>를 연재했다.[3] 당시의 이야기를 대학 1년 후배인 경향신문 정용인 기자가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 수상 직후 본인 페이스북에서 밝혔다.#[4] 이를 다룬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가 2023년 10월 공개되었다.[5] 이후 인터뷰에서 정작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부끄러운 마음에 극장을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한다. 영화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6] 2003년 국내 박스오피스 1위[7] 2006년 국내 박스오피스 1위[8] 역시 비평과 흥행도 성공시키며, 비평적으로는 새로운 SF영화로서 연구대상이 됐고, 흥행적으로는 컬트적인 인기를 모으며 미국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는 관심도까지 이끌어냈다.[9] 아시아 영화 최초 만장일치 수상[10] 천만 관객 돌파 작품 모두 칸 영화제에 초청받은 유일한 감독.[11] 본인 영화 중에서는 괴물에 이어 2번째.[12] 2019년 제91회 아카데미 시상식까지는 '외국어 영화상'이었다.[13] 영화 1917로 DGA(미국감독조합), BAFTA골든 글로브, 크리틱스 초이스 (크리틱스 초이스에선 봉준호 감독과 공동수상) 등 거의 모든 감독상을 휩쓸면서 감독상 최유력 후보로 떠올랐었다.[14] 각본상, 국제영화상, 감독상, 그리고 작품상[15] 보통 전년도의 남우주조연, 여우주조연상 수상자와 감독상 수상자.[16]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시상한 이병헌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두번째 아카데미 시상식 시상자다.[17] LA 현지에 직접 참석한 것은 아니고, 메가박스 코엑스 돌비 시네마관에서 촬영된 영상으로 연결되었다.[18] 노마드랜드클로이 자오[19] 앞에서 언급한 호러영화는 아니다.[20] 옆에 있는 사람은 다리우스 콘지 촬영 감독.[21] 한국에서는 2025년 2월 28일에 전세계 최초로 개봉한다.[22] 송강호제75회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직후, 영국 런던에서 축하문자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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