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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니엘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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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법인 정선학원
고등학교중학교
브니엘고등학교브니엘여자고등학교브니엘예술고등학교브니엘예술중학교브니엘중학교1
사건 및 사고
1 1998년 폐교
파일:K3JaqT2.png
최고 전성기인 1981년의 사진으로 신리삼거리→연산로타리 방향으로 촬영하였다. 좌측의 건물이 브니엘중학교로 우측의 건물은 옛 브니엘고등학교 건물이다.
파일:tHwjJpg.jpg
몰락 직전인 1990년대 초중반의 사진으로 연산교차로→신리삼거리 방향으로 촬영. 좌측의 건물이 옛 브니엘고등학교 건물, 우측의 건물이 브니엘중학교 건물이며 옛 브니엘고등학교와 같은 부지에 있었기에 사진에는 브니엘고등학교 학생들과 브니엘중학교 학생들이 동시에 모여있다.[1]
(교표)
교명 브니엘중학교
개교 1966년 3월 5일[2]
폐교 1998년 2월 28일[3]
유형 일반계 중학교
성별 남녀공학
운영형태 사립
학교법인 브니엘학원
소재지 부산광역시 연제구 월드컵대로114번길 20 (연산동)
1. 개요2. 역사3. 학교 상징
3.1. 교표3.2. 교훈3.3. 교가3.4. 교목3.5. 교화
4. 특징5. 학교 시설6. 출신 인물7. 이 학교의 후신은?8. 여담

1. 개요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에 있었던 사립 남녀공학 중학교. 1970~80년대 당시 부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개신교 미션스쿨 중학교였으며 1966년 개교 당초부터 남녀공학으로 개교한 부산 최초의 남녀공학 중학교로 오늘날 남녀공학 중학교 개념의 효시라고 할만한 학교였다.

연제구 지역에서는 두번째로 폐교된 학교지만[4], 연제구 출범 이후로 따지면 처음으로 연제구에서 폐교된 학교이자 2019년 기준으로 연제구에서 마지막으로 폐교된 학교이며 부산 4학군(동래교육지원청 관할) 학교 중에서는 첫번째로 폐교된 정규학교로 기록되었다. 그 외에도 중, 고등학교 평준화가 완료된 이후로 부산 내륙 지역에서 최초로 폐교된 중학교이기도 하다. 그리고 같은 학군에서 6년 후에 폐교된 태광여자상업고등학교와 함께 멀쩡한 학교도 얼마든지 폐교될 수 있다는걸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5]

2. 역사

이 학교의 전신은 1958년 9월 15일에 설립된 고등공민학교인 브니엘야간중학원[6]이었다. 브니엘야간중학원은 천막과 차고에서 수업을 하던 고등공민학교로 중학교 과정을 운영했으나 정규 학교가 아니었기에 학력인정은 되지 않았다.[7] 1965년 12월 7일에 브니엘중학교의 설립이 인가되었으며, 1966년 3월 5일에 연산4동 옛 브니엘실업고등학교(이후 브니엘종합고등학교 → 현 브니엘고등학교, 브니엘여자고등학교) 부지 내에 브니엘중학교가 개교하였다. 1966년 개교 당초에는 아직 중학교 입시가 존재하던 시절이었고 브니엘중학교는 3차 중학교에 속하였다.[8] 1968년에는 브니엘종합고등학교와 함께 여자 테니스부가 동시에 창설되었으며 1970~80년대에 걸쳐서 브니엘 중고등학교 여자 테니스부는 전국구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1970년 부터 부산지역 중학교 평준화가 실시되어 무시험 추첨배정이 되었으며, 1978년을 전후하여 브니엘고등학교와 함께 연산9동 토곡(예전 부산과학고등학교가 있던 자리)으로 이전이 추진하였으나 재단 문제로 1980년에 이전이 무산되었다.

1989년에 브니엘고등학교와 함께 지금의 금정구 구서동 정선학원(구 브니엘학원)부지로 이전이 추진되었으나[9] 이전 추진 과정에서 학교 위치상의 문제 및 이로 인한 금정구 구서동 및 부곡3동[10] 일대 주민들[11]의 반발 민원으로 학교 이전이 불허되었으며[12], 브니엘고등학교 및 브니엘여자고등학교의 구서동 신축건물 건설비용 마련을 위해 연산동 교사를 철거 및 부지를 매각해야 하는 문제로 인하여 브니엘중학교는 1995년 9월 2일에 폐교가 확정되었으며 1996학년도부터 신입생 배정이 중단되었다. 다만 연산동 교사 철거 관계상 브니엘중학교의 잔류 학생들도 브니엘고등학교를 따라서 금정구 구서동으로 이전을 하기는 했으며 신설 중학교 과정 각종학교인 브니엘예술학교 교사에서 2년간 교사를 임차하여 더부살이를 하다가 1998년 2월 13일에 마지막 졸업인 30회 졸업으로 47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것을 끝으로 1998년 2월 28일에 최종적으로 폐교되면서 한시대를 풍미했던 브니엘중학교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폐교 당시 교직원들의 대다수는 같은 재단의 사립학교들로 배치되었지만, 일부 과원 교사들은 부산시 교육청으로 특별채용되면서 공립학교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빈 교사는 한신공영에 매각되어 철거되었으며, 이후 해당 부지에 한신아파트가 신축될 예정이었으나 한신공영의 부도로 인하여 계획이 엎어지고 한신공영 워크아웃 과정에서 부지는 경매에 넘어가 반도건설이 매입하면서 반도보라아파트가 신축된다.[13]

3. 학교 상징

3.1. 교표

브니엘고등학교와 공통 교표인데, 심지어 브니엘중학교 교표의 영어 스펠링도 Peniel Middle School이 아닌 Peniel High School 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Middle School 이라는 표현 대신에 Junior High School을 뜻하는 표현을 쓰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

3.2. 교훈

나는 하나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련다.
나는 마음껏 자라며, 마음껏 생각하며, 마음껏 일하는 사람이 되련다.
나는 웃는 자와 같이 웃고, 우는 자와 같이 우는 사람이 되련다.
나는 조국과 인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

3.3. 교가

작사/작곡 박환철

산보다 더 드높은 소망을 안고서
모였다 우리들은 사랑의 샘터로
브니엘 브니엘 온 누리에 뻗어 갈
그 이름도 미쁘다 우리 브니엘 학원
빛나는 역사의 창조자 역사의 창조자
길이길이 빛나라 우리 브니엘 학원.

사실 엄밀히 말해서 교가 보다는 학원(學園)가라고 해야 맞는 표현이다. 브니엘 계열 학교들은 브니엘고등학교나 폐교된 브니엘중학교를 비롯하여, 이후에 신설된 3개교 까지도 학원가를 사용한다. 부산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

3.4. 교목

히말라야 시다

3.5. 교화

영산홍

사실상 브니엘고등학교의 병설학교 성격이었기에 교표, 교훈, 교가, 교목, 교화를 모두 공유하였다.

4. 특징

이 학교의 여자 테니스부는 1968년에 브니엘종합고등학교 여자 테니스부와 동시에 창설되면서 건국이후 부산에서 처음으로 창설된 중고등학교 여자 테니스부로 알려져 있다. 1972년에 창설된 동래여자중학교 테니스부와 선의의 경쟁을 벌였고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를 배양하는등 1970~80년대 부산의 테니스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학교가 폐교된 이유는 역시 때문이라는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졸업인 30회 졸업에서도 10학급 472명이 졸업한것으로 봐서 폐교 선언 직전에는 1500명에 달하는 규모였다는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정도면 폐교될 무렵에도 학생수가 넘치는 학교로 볼 수 있었으며 부산에서 도심공동화로 인한 학생수 급감으로 폐교된 다른 사립중학교들과는 폐교 사유가 확연히 달랐다. 그리고 이 학교가 폐교선언을 했던 1995년까지만 해도 해당 학교가 속했던 동래학군(4학군)은 대구광역시 수성구에도 비견될 정도의 부산 최고 학군이었고 폐교선언 당시 2학년과 3학년 재학생들의 경우는 연제구가 아닌 분구 이전의 동래구 명의로 입학했으며 당시 1학년 재학생들의 경우도 학교 배정 자체는 1995년 1월 아직 동래구 였던 시절에 전산 배정되었고, 연제구의 공식적인 분구는 1995년 3월로 분구와 동시에 입학식을 하였다.[14] 해운대 학군은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아서 본궤도에 오르기 전이었기 때문에(사실 4학군이 몰락하기도 전에 이 학교는 완전히 폐교되었다.) 사실 부산 최초 도심지역 남녀공학이라는 핸디캡과 학군내에서는 날고 기는 다른 중학교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는 평판이 별로였어도, 부산 전체로 따지면 아무리 못해도 중상급은 되었던 학교였고 절대적으로 따지면 못써먹을 수준은 전혀 아니었으며, 최소 서부산 기피지역 학교나 도심공동화가 심각한 원도심 소재 학교(당시 동성중이 학년당 8학급이었다.) 보다는 상태도 좋았고 경쟁력도 있었기 때문에 막무가내식 이전 추진만 안했어도 1995년 기준으로 폐교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었다.

결국 좋지 못한 평판도 사실은 이 학교가 진짜로 구려서 평판이 나빴기 보다는 동래중이나 동래여중 같은 동래 학군(4학군)내의 다른 중학교들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좋아 보였던 것이었다. 그 외에도 고등학교 배정의 경우는 교육지원청 단위로 배정되다보니 연산동에 있었던 브니엘고등학교는 온천동 동래 럭키아파트나 복천동 우성 베스토피아 아파트, 안락동 동래화목타운 아파트는 물론이고, 구서동 선경아파트에서도 학생 배정이 되면서 학생 수급 범위가 넓었으나, 중학교는 동단위라서 배정범위가 연산동이나 거제동 까지다보니 브니엘중학교의 경우는 주변에서 배정되는 대단지 아파트는 거제 현대아파트나 거제 경남아파트 정도에서만 배정되어서 학생 수급 범위가 다소 좁았다는 점도 있었다. 더군다나 1998년에 연제구 연산동에 부산시청과 경찰청이 이전해와서 행정타운이 조성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연제구 일대에 공무원 이주 수요를 노릴수도 있었었다. 학교를 살릴 방법은 연산동 학교부지 매각을 취소하고 기존의 연산동 교사에 잔류시키거나,[15] 1970년대 후반의 계획 대로 연산9동 토곡으로 이전 시키거나, 동아중학교, 동주여자중학교, 영남중학교, 해동중학교 처럼 고등학교와 별도로 일반계 중학교가 위치할 수 있는 부지로 이전시키는 방법도 있지만[16] 사실 구재단에서도 멀쩡한 중학교를 폐교시키는 게 내키지 않았던 나머지 브니엘중학교만은 연산4동의 예전 브니엘학원 부지에 따로 남겨두는 것을 검토했으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포기했다는 뉘앙스의 내용이 있다. #

당시 이 학교에 다녔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대에는 학생들을 상대로 해서 교회 다녀 오고 학교에 주보를 제출하라고 하였다고 하였으며, 그때 교회가지 않았던 학생들은 교회 다니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자기 것도 챙겨오라 해서 제출하는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중학교가 의무교육화가 이루어지고, 학생인권과 학부모들의 입김이 이전과 비교했을 시 상당히 강력하게 작용하게 된 오늘날에 학교가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짓을 했다가는 신나게 탈탈 털리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교육청과 재단간의 치킨게임이 벌어질 수도 있는 민감한 일이다.

사실 브니엘고등학교도 그렇지만 브니엘중학교 또한 학교 자체는 굳이 이전할 필요가 없었는데, 브니엘중학교의 이전이 추진되던 시기인 1992년에 같은 권역에 속하는 거제동에 부산 4학군 최후의 중학교인 거제여자중학교가 개교했기 때문. 아이러니하게도 거제여자중학교가 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니엘중학교는 학급 감축 없이 여전히 학년당 1학급, 총 30학급이었다. 한마디로 당시에는 지역내에 여전히 학령 인구가 충분히 있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구재단은 어떻게든 학교 땅 팔아서 그걸 밑천으로 하루빨리 신학대학을 만들어야 했던 만큼 그런 사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거제여자중학교의 개교 덕분인지 이미 지역내에 중학교는 필요한 만큼 설립되어 있었기에 브니엘고등학교와 달리 브니엘중학교는 일대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도 지역에 딱히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고 지역 주민들도 브니엘중학교가 없어지든 말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고 한다. 대체 학교로 10년후에 연제고등학교가 개교했던 브니엘고등학교의 경우와 달리 브니엘중학교는 폐교되면서 30학급에 달했던 TO 자체를 아예 소각해버리는 바람에 브니엘중학교를 완전히 대체할만한 학교는 개교하지 않았고[17], 이 일대의 1996년 이후 중학교 입학 예정 정원은 연산중학교, 동명여자중학교(현 연제중학교), 부일여자중학교(2004년 사상구 이전, 현 신라중학교), 이사벨여자중학교(현 이사벨중학교), 거성중학교, 거제여자중학교 등지로 분산시켰다고 한다.

1998년 부산에서 단성학교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하기 시작하면서 남중이었던 사직중학교와 여중이었던 온천중학교의 남녀공학을 필두로 부산의 단성학교들은 남녀공학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5. 학교 시설

파일:nT1FcKw.jpg
과거 브니엘 중고등학교 시설 배치

브니엘중학교 건물은 브니엘고등학교 건물과 같은 부지에 있었으며, 브니엘중학교 건물의 정확한 건축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60년대 후반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브니엘중학교와 브니엘종합고등학교가 같은 건물을 썼던 것으로 추정되나, 고등학교 평준화를 앞두고 1973년경에 브니엘고등학교 건물이 학교 부지 안쪽으로 브니엘중학교 건물과 T자형태로 연결되는 배치로 신축되었다. 하지만 브니엘중학교 건물은 학교 건물이라는 게 대로(월드컵대로)와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것도모자라 아예 대로와 평행하고 있는데다가 방음벽 조차도 아예 없다보니 자동차 소음문제가 지적되기도 했으며, 축대를 부실하게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짓다보니 완공된지 15~20년이 지난 1980년대에는 브니엘중학교 건물이 도로쪽으로 기울어지는 문제점도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금양중학교 건물은 2022년에 개축이 확정되기는 했어도 내구연한 45년을 거뜬히 넘겼고, 52년차인 2022년에 정밀안전진단을 했을때도 B등급을 받았던데다가 완공된지 반세기를 넘긴 2024년에서야 철거되고 개축에 들어갈 예정이다보니 브니엘중학교 건물이 기울어지는 게 사실이었다면, 빼도 박도 못하는 부실공사 인증이었다. 지어진지 십수년만에 건물이 기울어진 서남대학교 봉황관 처럼 브니엘중학교 또한 재단이 문제라고 봐야 할듯...

학교 부지 면적은 1만제곱미터를 전후한 수준이었으나 학교 부지가 제대로된 사각형이 아니라 실제 체감면적은 이보다도 낮은 수준이었는데, 믿겨지지 않겠지만 최고 전성기때는 브니엘중학교와 브니엘고등학교 2개교를 합쳐서 4천명에 육박하는 면적대비 어아마한 학생수를 자랑했다고 하며, 1학급당 60명은 기본으로 넘겼다고 한다.

6. 출신 인물


브니엘중학교는 한마디로 이후에 부산에서 학력고사 전체수석 까지도 나왔던 중학교로 부곡중학교와 더불어 학력고사 전체수석이 거쳐간 둘 밖에 안되는 중학교이자 유일무이한 사립학교 였으며, 부산 3대 건설업체의 대표 까지도 나온 학교였었다. 사라진 학교이기는 해도 부산 4학군의 사립 중학교 중에서는 동래여자중학교 다음가는 동문 라인업을 보여줬었으며 동아중학교와 비슷한 급이었다. 이 학교의 출신 성분이 3차 중학교라는 낮은 위치에 있었다가 4년후에 중학교 평준화 정책으로 평준화 되었고 존속기간이 30년으로 상당히 단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괄목할만한 성과였다.[20] 이 외에도 브니엘중학교 출신 동문들이 의사, 법조인, 교수, 장군 등등으로 부산뿐만 아니라 전국 여기저기서 활약을 하고 있지만, 이정도만 해도 비록 폐교된 학교기는 해도 그시절 부산 동래학군(4학군) 값을 제대로 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리고 역대 학력고사 전체수석이 거쳐갔던 학교 중에서 유일하게 폐교되어 사라진 학교로 남아버렸다. 이후에 개교한 브니엘예술중학교의 경우도 세간의 악명(??)과는 달리 방탄소년단 프로듀서인 피독과, 하연수를 배출한 적이 있는 만큼, 브니엘예술중학교가 브니엘중학교의 연혁과 기수 및 동문 라인업을 모두 승계했었다면 동문 라인업에서만큼은 브니엘중 + 브니엘예중 동문 라인업을 모두 다 포함하게 되면서 부산시내 사립 중학교 중에 한해서는 끝판왕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아쉬운 사실이다. 다만 부산시내 중학교 중에서 동문 라인업 끝판왕은 무리인게 공립학교 중에 비평준화시절 3대 중학교인 경남중, 부산중, 동래중이 있기 때문.

7. 이 학교의 후신은?

이 학교의 직계(?) 후신으로 설립자 측에서는 1996년에 신설된 브니엘예술중학교를 언급하고 있지만, 브니엘예술중학교의 경우는 신설 당시 브니엘중학교의 역사와 기수, 개교기념일을 아예 계승하지 않은데다가 위치도 아예 다르고 기능적인 면에서도 전혀 달라서 설립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크게 관련이 없는 상황이며 이후로 운영주체가 여러번 바뀌면서 두 학교는 교명이나 학교 상징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관하게 되었다. 게다가 브니엘(국제)예술중학교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이 학교를 전신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직계 후신이면서도 후신이 아닌 미묘한 관계로 컴파일과 아이키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고등공민학교 시절 동문들이나 기수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던 시절의 극초기 브니엘중학교 동문들이라면 몰라도 브니엘중학교 마지막 기수인 30기의 경우는 폐교식까지도 했기 때문에 1기부터 새로 시작한 브니엘예술중학교를 아예 별개의 학교로 여기고 있는 현실이다.[21] 그래도 마지막 30기 재학생들은 사라질 처지에 놓인 멀쩡한 학교를 넋 놓고 방관만 했던 것은 아니고 이에 대해 어느정도 반발을 하기도 하였지만, 1995~1997년이라면 국내에 인터넷이 보급되기 이전이었고 PC통신이 있기는 하였으나 PC 보급률이 저조하던 그 시절로써는 지금의 인터넷 처럼 대중적인 수단은 아니었기 때문에 폐교 결정에 대해 반발 하여도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95년이면 인터넷이 보급되기는 커녕 PC조차도 부잣집이 아니고서는 쉽게 구입하기 어려운 고가의 사치품이었고 PC통신의 이용 요금도 일반적인 서민들이 감당히기에는 많이 비쌌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 같았으면 서울 은혜초등학교 폐교 사태 처럼 인터넷 상에서 여기저기 기사가 뜨면서 난리가 났을 일이다.[22] 더군다나 1995년 당시면 예체능계 학교들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치던 시절[23]이라서 몇몇 사람들은 왜 멀쩡하게 잘 돌아가는 중학교를 없애고 예술중학교를 만드나면서 의아해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브니엘중학교는 박정희 정권 시절 학교설립 준칙주의가 적용되지 않은 한마디로 허가제로 설립된 학교로 학교의 정원(定員)도 동래교육지원청에서 관리하였는데, 브니엘예술중학교는 김영삼 정권 시절 5.31 교육개혁의 일환인 학교설립 준칙주의(일정 요건이 되면 학교를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는 것)가 적용되어 설립이 이루어진 학교이고 학교의 정원(定員) 조차도 재단의 자율에 맡겼던 학교인 만큼 학교 설립 방식도 완전히 다르기에 두 학교는 전혀 다른 별개의 학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브니엘예술중학교 홈페이지에서도 2019년부로 학교 개교 일자를 1996년으로 완전히 정하면서 과거에 브니엘중학교가 존재 했다는 사실을 존중해주기는 커녕 아예 대놓고 부정하게 되는 바람에 공식적으로도 완전히 흑역사가 되어버렸다. 결국 재단 차원에서도 공식적으로 두 학교는 전혀 별개의 다른 학교라는걸 인정하게 되었다. 같은 4학군의 폐교된 중학교인 윤산중학교만 해도 브니엘중학교 처럼 단명하기는 했으나 브니엘중학교의 사례와는 달리 학생수의 심각한 급감으로 폐교가 되었으나 폐교 이후에도 건물은 남아서 부산산림교육센터로 쓰이고 있는데다가, 폐교 이후에도 브니엘중학교는 관련 자료들이 학적부 같은 최소한의 자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폐기[24] 되었으나, 윤산중학교는 학적부 이외의 학교의 관련 자료들 일부가 보존되어 부산산림교육센터 내의 윤산중학교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폐교 이후 윤산중학교 출신의 지민을 비롯한 방탄소년단의 전세계적인 대활약 덕분에 방탄소년단 지민의 모교로 전세계의 방탄소년단 팬덤(A.R.M.Y)들에 의해 계속 기억되고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도 방탄소년단 팬덤들에 의해 꾸준히 성지순례가 오고 있다는 사실에서 윤산중학교의 사례와 비교해도 브니엘중학교의 말로가 서남대학교 못지 않게 얼마나 비참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 윤산중학교는 폐교되기는 했어도 그 이후 전세계의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지만, 브니엘중학교는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는 이들도 없고 재단 차원에서도 그냥 아예 흑역사로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다. 사실 브니엘중학교 출신들이 졸업자 수만 따져도 약 16000명 이상인 만큼 결코 적은 수가 아니고 윤산중학교의 9576명 보다 훨씬 많은데다가 연제구 뿐만 아니라, 동래구, 금정구에도 브니엘중학교 출신들이 제법 남아있지만, 학교 자체가 폐교되는 과정이 지저분했던 만큼 출신들 사이에서도 모교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풍조가 있던 것도 한몫 하였다. 심지어 재직했다가 폐교 이후 동 재단내 다른 학교로 재배치 혹은 공립학교로 특채된 출신 교원들 사이에서도 언급하기를 꺼릴 정도였었다. 심지어 브니엘중학교에 대해 물어보면 언급을 회피하는건 물론이고 신경질을 내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출신 교원들도 있었을 정도. 윤산중학교가 폐교된지 6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계속 언급이 되는것과 달리, 브니엘중학교는 폐교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0년대 초반에도 사실상 잊혀져서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 언급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불과 몇년만에 이런 학교가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어버렸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 졸업생인 30기의 증언에 따르면, 브니엘중학교는 폐교 직전 금정구 구서동으로 이전을 하기는 했으나 서류상으로는 브니엘중학교 소유의 건물이 아닌 브니엘예술(중)학교 소유의 건물이었던 만큼 브니엘중학교는 결국 제 건물이 아닌 다른 건물을 빌려서 더부살이 하는 처지였었고, 그 덕분에 오히려 건물의 주인인 브니엘예술(중)학교에서 건물을 임대해 쓰는 처지였던 브니엘중학교 29~30기 학생들(1994~1995년 입학)에게 텃세와 차별이 심했었다고 하며 서로간을 선후배로 인지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 아마도 그 이후에는 학생들이 모두 졸업하고 완전히 폐교 처리 되면서 재단에서 아예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유령 취급을 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25] 대한민국의 고도성장기에 설립되어 30년 동안 운영되면서 만명 단위의 적지 않은 산업역군을들 배출하면서 나름대로 부산, 경남 지역의 산업화, 근대화에 어느정도 공헌을 했었던 학교인걸 생각하면 말로가 참 비참할 따름이다.

다만 넓게 보면 브니엘중학교의 기능상 방계 후신이라 할만한 학교가 여자중학교이기는 하지만 2007년에 개교한 양동여자중학교가 연산동 일대의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개교하였기 때문에 폐교된 브니엘중학교나 저 멀리 사상구로 이전한 부일여자중학교(현 신라중학교)의 기능을 어느 정도 이어간다는 점에서 직계는 아니지만 어쨌든 통합 방계 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브니엘중학교가 구서동으로 이전하려고 했다가 교육청에서는 이전을 거부하는 바람에 폐교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브니엘학원이 이전되는 와중에 브니엘학원 이전 대상 부지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기습 개교한 남산중학교[26] 또한 넓게 보면 직계는 아니지만 어쨋든 방계 후신이라고 할 수 있다.

8. 여담


[1] 건물 끄트머리에 창문이 작은 부분은 화장실인데,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1960년대 후반에 개교한 중학교인데도 불구하고 건물 안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1960년대에나 쓰였을법한 밀어서 여는 조잡한 창틀 형태를 보면 알겠지만 그것도 1970년대 이후에 증축한 게 아니고, 개교 당초 부터 있었던 것이다. 1966년 개교 당초의 사진에서도 아직 2층 까지만 완공된 교사에서 수세식 화장실 부분을 볼 수 있다.# 1960년대 중후반 기준으로 부산에 수세식 화장실을 쓰는 중학교는 대부분 1,2차 중학교(개성중, 부산여중 등등...) 였고 이들 학교 중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아닌 학교도 많았는데, 브니엘중은 당시 3차 중학교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수세식 화장실을 건물안에 갖춘것으로 3차 중학교 중에서는 최초로 추정된다. 물론 그당시 학교 답게 변기는 화변기 형태에 물탱크의 줄을 당겨서 물을 내리는 하이탱크 식 이었으며(남자화장실의 소변기는 샘(마르셀 뒤샹) 으로 유명한 작고 둥근 형태에 밸브를 돌려서 물내리는 방식이었다.) 1996년에 건물이 철거될때 까지 별다른 개 보수 없이 그대로 썼었다.[2] 부산광역시 교육연표 참고[3] 폐교 확정은 1995년 9월 2일.[4] 1993년에 거제동 경남아파트 인근에서 폐교된 산업체 부설학교인 삼화여자상업고등학교가 있기는 했다. 연제구는 1995년에 동래구에서 분구되어 출범.[5] 후술하는대로 실제로 두 학교를 모두 거쳐간 사람도 적지는 않다고 한다.[6] 대표적인 출신인물로 김성호 전 법무부장관, 전 국정원장이 있다.[7] 부산시 교육청의 고등공민학교 폐교 명부에 브니엘야간중학원이 없는것으로 봐서 이때는 정식 인가를 받은 것은 아닌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브니엘중학교의 경우 중학교 폐교 명부에는 등재되어 있다.[8] 당시에 중학교 입시를 쳤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1차, 2차 중학교와 달리 3차 중학교는 그냥 시험만 치면 거의 합격이었다고...[9] 하지만 애초부터 부산시나 부산시교육청은 브니엘중학교의 금정구 이전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브니엘중학교의 금정구 이전은 교육청 기록에 따르면 1989년부터 추진되었으나, 그 이후인 1991년에 인근에 공립 남산중학교가 신설되었기 때문이다. 지역내에 사립학교가 이전해 온다고 하면 공립학교의 신설은 보류 혹은 취소 되는것이 일반적인 사례인데 브니엘중학교가 이전해 온다는데도 공립 남산중학교가 기습적으로 신설된 것은 이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니엘학원이 브니엘중학교의 금정구 구서동 이전을 강행한 이유 중에서 브니엘 신학대학 설립 뿐만 아니라 구서동 태광산업 공장 부지가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이 될 것이라는 떡밥을 철석같이 믿어서 이전을 강행했던걸로 보인다. 1990년대가 되면 되면 금정구 일대의 공장들이 하나둘 이전하고 철거되면서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경남합섬→경남한신아파트, 반도상사→우신뉴타운아파트, 현대모직→부곡SK아파트, 태창기업→부곡대우아파트, 쌍용양회 →부곡쌍용아파트) 되는 바람에 금정구 마지막 도심 공장지대로 남게되는 태광산업 역시도 아파트로 재개발 되는 떡밥이 있었고 태광산업의 경우는 금정구 최대 공장이다 보니 못해도 2000~3000세대 규모의 매머드급 대단지 아파트로 재개발이 가능했는데 이 구서동 태광산업 공장 부지와 브니엘중학교 이전 예정부지는 지름길을 통하면 어느 정도 가까운 통학거리가 보장이 되어서 구서동 태광산업 부지가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면 브니엘중학교도 이전하면 태광산업 재개발 부지 아파트에서 학생 수급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여겨졌었다.(구서동 태광산업 부지에서 남산중학교로 가는 거리나, 지름길을 타서 브니엘학원 부지로 가는 거리나 거의 같았다.) 하지만 태광산업은 현금 보유량이 많은 기업이라 현금이 그리 급하지 않다보니 정작 구서동 태광산업 공장 부지 재개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서 아파트 단지로의 재개발은 사실상 무산되었고 그걸 철석같이 믿었던 브니엘 학원은 제대로 엿을 먹은데다가 설상가상격으로 구서1, 2동 주민들과 부곡3동 주민들이 브니엘중학교 이전을 반대하는 바람에 붕 떠버리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태광산업의 자회사인 고려저축은행은 브니엘학원의 최대 채권자 중에 하나이다.[10] 계획에 따르면 구서 주공아파트(구서롯데캐슬로 재건축), 구서 선경1~3차 아파트, 부곡 선경(SK)아파트, 경남한신아파트 위주(주로 구서초등학교, 장서초등학교, 금양초등학교)로 배정하려고 했었다고.... 특히 금양초등학교 배정 단지인 경남한신아파트나 부곡 선경(SK)아파트 거주 학생들을 1순위로 배정하려 했었다고 한다. 근데 학교 부지에서 가장 가까운 대단지 아파트이자 1순위 배정 단지인 부곡 선경(SK)아파트 까지만 해도 2.5km 가량 되는 거리를 보여줘서 중학교 등학교 기준거리인 1.5km를 가뿐히 넘었다.. 이러니 폐교될 수밖에...[11] 하지만 브니엘중 이전을 반대했던 주민들이 순수한 실거주민이 아닌 소위 말하는 떳다방이나 투기꾼일 가능성도 굉장히 높다. 1995년 당시 금정구 중앙대로 라인은 경남 한신아파트를 필두로 공장지역에서 주거지역으로 재개발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부동산 시장이 굉장히 과열 되었는데 브니엘중 이전 반대 집단행동이 있었던 당시에는 경남한신아파트가 막 입주했던 시절로 경남한신아파트에는 여전히 전국에서 몰려든 부동산 투기꾼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이 무렵에 부곡 선경아파트가 분양이 이루어지면서 부곡 선경아파트 모델하우스 주변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떳다방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전매 프리미엄을 남겨먹어야 했던 만큼 중학교 학군 문제에 굉장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구서주공아파트 까지도 재개발 떡밥이 현실화되면서 재개발을 노리고 부동산 투기꾼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브니엘중이 폐교된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금정구에서 이정도의 집단행동이 더 이상 없었다는 점이라던가 브니엘중 이전 대상지에서 금양초를 기점으로 학군이 상당부분 겹치는 금양중이나 부곡중의 경우는 아이러니하게도 수 년후인 2001~2002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을 강행할 당시에도 브니엘중 이전 당시와는 달리 부곡3동 일대에서 이상할 정도로 별다른 반발이나 집단행동이 전혀 없었다는 점인데 2001~2002년이면 부곡3동 일대는 아파트 분양이 한동안 기근 상태라서 부동산 열기가 한동안 식어버리고 일대 아파트들은 투기꾼들은 이미 되팔아서 손털고 나가면서 대부분 실수요자들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된 시점이라 떳다방이나 투기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감과 동시에 실수요층만 남았고 실수요층들은 전매로 이득을 취하려는 떳다방이나 투기꾼들에 비하면 중학교 학군 문제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국은 1995년 당시 브니엘중 이전에 반발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떳다방이나 투기꾼이라는 결론이 날 수밖에 없다.[12]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대진공고 개교 반대 시위 사건이 장전동 일대에서 크게 일어났는데, 금정구 입장에서는 이 두 학교를 동시에 인가냈다가는 앞으로 뒤탈이 상당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아예 둘 다 인가를 불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래도 대진공고는 재단의 종교 문제였을뿐이지지 법적으로는 결격사유가 없었지만 브니엘중학교의 경우는 안그래도 연산동 시절에 이미지가 안좋았던 기피학교 였고 등하교 기준 거리를 초과하는 문제로도 형평성 문제가 있기에 결국 불허할 명분이 충분했던 브니엘중학교를 희생시켰다고 보면 될지도... 그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금정구에서 영락공원 이전에 대한 님비 문제로도 크게 골머리를 앓기도 했으니 셋 다 금정구에 오게 했으면 김진재 금정구 의원 입장에서나 금정구청장 입장에서나 뒤탈이 상당하였을 것이다. 결국은 대진공고와 영락공원 문제 때문에 브니엘중을 희생시켰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에 브니엘학원 이전 관련해서 대진공고 문제와 같이 다루어졌고 주민들을 설득했었다는 걸 보면 아마도 사실인듯 하다.# 그러나 브니엘고등학교의 경우는 믿기지 않겠지만 연산동 시절에는 지금의 대연고 수준을 넘어서 대구 경신고 수준으로 이미지가 좋았기에 당시에는 금정구 이전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이전 당시 플랜B로 구서동과 부곡3동 대신에 중학교가 아예 없는 인접 지역인 공덕초등학교가 위치한 금정구 선두구동이나 철마초등학교가 위치한 기장군 철마면에서 학생들을 배정받는 방안도 있었으나 이 경우는 주민들의 반발은 딱히 없었으나 학생수가 너무 적어서 결국 무산되었다.[13] 이때문에 차라리 브니엘학원 이전사업 당시에 애초부터 한신공영이 아닌 반도건설을 시공사로 정해서 부지를 처음부터 반도건설에 매각했었다면 사태가 이정도 까지는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도 있지만, 반도건설은 기업 특성상 리스크가 큰 사업은 건드리지 않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경매로 싸게 나온 부지만 사갔을 뿐이지 브니엘학원 이전 사업 자체에는 당초부터 아예 관심 조차도 주지 않았었다.[14] 결국 연제구 명의로 배정이 이루어진 학생은 폐교때 까지도 단 한명도 없이 마지막 기수 조차도 배정은 동래구 명의로 이루어졌고, 브니엘중학교가 연제구 소속으로 있었던 기간도 공식적으로는 1년(1995년 3월~1996년 3월)에 불과하였으며, 이마저도 브니엘학원 이전사업의 지연으로 당초 이전 완료 시기도 1993년으로 예상되었던게 1996년으로 미뤄지자 어쩔 수 없이 1년의 연제구 분구 이후 기간이 본의 아니게 생겼을 뿐이다. 한마디로 동래구의 학교로써 사실상 생을 마감해버린 꼴. 당대의 동래학군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 학교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로를 맞이했는지 알만하다.[15] 실제로 과거에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와 같은 부지에 있었던 형제학교인 대신여자중학교가 1976년에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후에도 대신여자중학교는 기존의 부지에 계속 잔류하면서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가 쓰던 시설 까지도 모두 인계받아 단독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이쪽은 한술 더 떠서 1979년에 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와 별개의 재단으로 분리되기도 했다. 당시 기울어지는 문제가 있었던 교사는 브니엘중학교 교사로, 구 브니엘고등학교 교사는 딱히 언급이 없었던것으로 봐서 의외로 멀쩡했던 것으로 보인다. 1990년 기준으로는 20년도 채 안된 건물이기도 했으니... 게다가 상대적으로 브니엘중학교 보다 안쪽에 있다보니 그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사용하는 방법도 있었겠고, 지금이라면 방음벽 설치, 이중창 교체, 냉방기 설치로 소음문제를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립학교라도 일반계 중학교는 의무교육이다보니 건물 리모델링 같은 시설/교육환경 개선 비용은 정부에서 보조금 형태로 상당수 지원해주는데다가, 사립중학교라도 해도 학생수가 어느정도 있는 멀쩡한 중학교는 교육청에서 마음대로 폐교할수도 없기 때문에 연산동에 계속 잔류했다면 교육청에서 알아서 리모델링을 해주면서 지금쯤이면 학교 시설이 꽤나 쓸만한 수준으로 바뀌면서 손 안대고 코 풀었을 것이다. 사실 재단에서도 이 방법을 검토했으나 잔류시 드는 비용이 너무 커서 포기했다고...[16] 지금의 양동여자중학교가 있는 부지도 과거에는 사립중학교 이전이 제안되었던 부지이기도 한데, 실제로 이곳에 브니엘중학교의 이웃(?)인 부일여자중학교가 이전을 추진하다가 재단 예산 문제(이쪽도 신라대 이전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한 상태)로 나가리 된 적도 있었으니 이때를 틈타서 브니엘중학교를 여기로 이전했어도 폐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 부지는 부산진구 양정동 소재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연산동 경계와 맞닿아있다보니 연산동이라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 그 외에도 1990년대 초반에 사직동에 짓다만 학교 건물이 장기간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 건물을 인수해서 완성해가지고 이전했어도 되었을 것이다.[17] 물론 후술하는대로 브니엘중학교의 남녀공학 30학급 완편이었던 TO를 아예 소각하지 말고 부산대학교 사범대학이 부설중학교가 없었던 만큼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로 TO를 전환하거나 재개교 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1990년대 중후반 당시 부산대학교는 역외 이전을 추진하고 있던 상황이라서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를 부산시내에 확보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18] 정확한 기수는 알 수 없으나 1958년생이라는 점에서 6기로 추정.[19] 협성건설 창업자의 아들로 2대 세습이기는 하지만, 선대가 운영할때 당시만 해도 협성건설은 부산에서 순위가 무의미한 하위권 업체였는데, 2010년 2세였던 김청룡 대표가 협성건설을 물러받은 이후로 전국 44위 부산 3위 건설업체로 초고속 성장을 하였다. # 다른 업체의 2대 세습과는 많이 다른 경우.[20] 반면 동래여자중학교나 동아중학교는 1, 2차 중학교 출신이었고 이들 학교의 역사는 상당히 긴 편이며 현재도 존속하고 있다.[21] 2000년대 초반에 30기 졸업생들이 다음 카페 등지에 작성한 글을 보면 브니엘중학교에 대해서 마지막, 공중분해, 없어진 학교, 사라진 학교, 폐교 같은 표현을 쓰는 것에서 브니엘중학교와 브니엘예술중학교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다.[22] 이후 이 30기 재학생들의 적지 않은 인원들은 연제구 이사벨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하였고(30기 재학생들은 대부분 연제구 거주민들이었다.) 이사벨여자고등학교의 남녀공학 전환 결정에 반발하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이 상황이다보니...[23] 1995년이면 1991년 한해를 강타한 서울대학교 음대 입시비리 사건이 일어난지도 4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라서 아직도 그 여파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는 사람들은 아는 학력고사 전체수석을 배출한 중학교를 없애고 당시 인식이 바닥을 기어다니던 예술중학교를 만든다는거 자체가 몇몇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로 생뚱맞아 보였다는것. 당시 학력고사는 진짜 공평하고 정정당당한 입시라는 인식이 있었던 만큼 더 생뚱맞아 보인건 당연지사 였다.[24]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브니엘중이 폐교 직전에 마지막으로 더부살이 했었던 현재의 브니엘예고 건물에 끝물 시절(1996~1998년) 학생들이 썼었던 교내 회지 라던가, 폐교 직전 까지 사용되었던 286, 386급 PC, MS-DOS 운영체제, 아래아 한글 2.*, 3.0 같은 사료 들이 일부 남아서 창고에 보관되고 있었으나, 실기실로 개조하기 위해서 창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폐기되었다. 그간 이사회가 여러번 엎어진데다가 새로 학교를 인수한 정선재단에서도 브니엘중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해 버리다보니 윤산중의 사례와 달리 브니엘중은 전산화가 가능한 학적부 같은 자료 외에는 대부분 얄짤없이 쓰레기장으로 보내버렸다. 그래도 재단에서 브니엘중의 존재를 존중해줬다면 이런 자료들은 충분히 학교 역사관에 보존할만한 자료였었다. 그로 인하여 이후로는 학교 역사를 복원하고 싶어도 복원할 수 없는 애석한 상황이 되어버렸다.[25] 반면 이 무렵 브니엘중학교의 라이벌인 거성중학교는 재단이 훈성학원에서 효창학원으로 바뀐 이후 건물의 리모델링이 이루어 지면서 하이샤시로 창틀이 교체되고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새로 만들어지는 등 이전의 영 좋지 못한 시설이 쓸만한 수준으로 개선되어서 두 학교 학생들의 처지는 완전히 상반되게 된다. 거성중학교가 1968년에 만들어진 건물을 쓰기는 했어도 이 무렵에는 쓸만한 수준으로 고쳐졌고, 이쪽은 최소한 자기 명의 건물이었던 만큼 같은 건물내에서 차별대우 같은건 거의 없었기 때문.[26] 브니엘중학교의 금정구 이전 추진이 1989년부터인데 남산중학교는 그보다 2년 가까이 지난 1991년 1월에 설립 인가를 받았으며 남산동과 구서동 일대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목적으로 개교하였다. 브니엘중학교가 금정구로 이전하려 한 것이 해당 지역의 학생들을 수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확인사살.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남산중학교의 경우 학교 부지 선정 조차도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설립인가를 받고 인근 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급하게 개교했다가 개교한 후에서야 학교 부지를 매입하여 학교 건물을 만들었다. # 오히려 부지 확보는 남산중학교가 브니엘학원 보다 1년 가량 늦었다.[27] 예외로 명지오션시티 내에 위치한 명호중학교센텀시티 내에 위치한 유일한 중학교인 센텀중학교를 제외하면 중학교 정원이 1,000명이 넘어가는 중학교는 존재하지 않는다.[28] 1993년 국정감사이 학교가 나오기는 했지만 학교 이전 문제로 나온 것이었으니 이후 이 학교가 어찌되었는지를 생각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고, 1997년 5월에 식수에서 세균이 과다검출된 문제로 언론에 보도되기는 했지만, 이때는 이 학교의 생명과도 같았던 연산동 교사는 아파트를 짓기 위해 이미 부숴버린 상태고, 이 학교는 학생 모집이 진작에 중단되어 폐교를 9개월 하고도 2일 앞둔 시한부 상태였다.[29] 1990년 당시 부산시내에 남녀공학 중학교는 딱 9개만이 존재했는데(...) 그중에서도 6개교는 짐작하는데로 인구밀도가 낮아서 학교를 여러개 두기는 애매한 지역의 중학교들이 어쩔 수 없이 학생 수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남녀공학으로 운영되었는데 이들 학교는 모두 김해군(현 김해시) 지역 일부가 1978년(대저읍, 명지면, 가락면 일부), 1989년(가락면 일부, 녹산면)에 부산으로 편입되면서 들어온 중학교들이고, 인구가 많은 부산의 도심지역에서 남녀공학으로 운영된 중학교는 진짜 드물었다. 1990년에 부산 시내 지역에 존재했던 남녀공학 중학교는 단 4곳으로 브니엘중학교, 백양중학교, 화명중학교, 동백중학교였는데 백양중학교와 화명중학교의 경우는 1985년, 1986년에 정부시책에 의하여 시범적으로 개교한 남녀공학 중학교이고 1989년에 개교한 동백중학교 또한 비슷한 취지로 남녀공학을 도입하다보니 1985년 이전 까지는 브니엘중학교가 사실 부산 시내지역 유일 남녀공학 중학교였으며 1978년 이전에는 부산 유일의 남녀공학 중학교였다.[30] 남녀공학이었던 브니엘종합고등학교가 남자고등학교인 브니엘고등학교가 된 이유도 고교 평준화가 시행된 당시에 대다수의 학부모들이 남녀공학 학교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기 때문에 문교부에 의해 강제로 남고로 전환 되었다고 한다.[31] 1980년대 산업체 부설학교 대량 등장 이후 야간제 브니엘여고는 상태가 정말 아니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시절에 연산동 일대에 초록색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 보이면 중학생들이 겁을 먹고 도망을 갔다고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32] 그래도 이것이 인연이 되었던건지는 몰라도 브니엘중학교가 폐교된 이후로도 브니엘 돌림 학교들이 부산대학교와 협약하여 브니엘(국제)예술중학교가 폐교되어 사라진 브니엘중학교 대신에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대타로 쓰이거나, 현재도 부산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여 간간히 테스트 목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물론 브니엘중학교의 사례 처럼 큰 도움은 안되고 대개 데이터만 뽑아먹히고 그걸로 끝나는 경우가 부지기수지만...[33] 학교 TO를 보면 알겠지만 비록 사립학교이기는 해도 진짜 지방거점국립대학교인 부산대학교의 사범대학 부설중학교로 전환하기에 안성맞춤인 TO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부산에서 드물었던 남녀공학 중학교 라는 점이 있었던데다가 개교 당초부터 폐교때 까지 남녀공학을 유지했으며, 전국에서 30학급 완편이었던 중학교가 폐교된 사례는 브니엘중이 유일하였고 학교 연혁도 보면 알겠지만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설치 시기(1969년)와 3년 밖에 차이가 안났었으며 동문 라인업만 봐도 지방거점국립대학교인 부산대학교의 사범대학 부설학교로 쓰기에도 그 위상에 나름대로 부합하였다. 국립대학교 사범대학 부설 중학교는 원칙적으로 남녀공학이었다는걸 생각하면 TO만 국립으로 전환해도 다른 중학교에 영향을 줄 이유도 없었기에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로 쓰기에 좋았다. 하지만 당시 부산대학교는 부산시내에 사범대학 부설 중학교를 유치할 의사가 전~혀 없었고(아마도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부산대학교의 강서구 혹은 양산 이전 추진 때문이었던걸로 보인다. 1990년대 당시 부산대 양산캠퍼스(혹은 강서구 지사 캠퍼스)의 초기 계획은 장전캠퍼스를 아예 새 캠퍼스로 이전하는 구상으로 사범대학도 새 캠퍼스로 이전을 검토했으며 이 무렵에 브니엘중이 폐교 되어버렸으나, 이후 부산시와 금정구의 반대로 2000년대 이후에 장전캠퍼스를 존치하고 새 캠퍼스인 양산캠퍼스를 제2캠퍼스로 하는 안으로 결국 절충 하게 되었었다. 부산대는 1970년대 중반부터 부지난으로 학교 이전을 계속 추진했었다.), 브니엘중이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몇년이 지난 2000년대 초반에 와서야 뒤늦게 사범대학 부설 중학교를 유치하겠다고 나서면서 결국 금정여자중학교(현 금양중학교)와 부곡중학교가 남녀공학으로 전환되는 불똥이 튀어버리면서 남녀공학으로 전환했지만 그 결과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버렸다.[34] 공교롭게도 부산대학교는 1990년대 당시에 연산동 토곡 일대에 큰 규모의 나대지 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하필이면 1970년대 후반에 브니엘중, 고등학교가 이전하려다가 재단의 자금난으로 포기하면서 무산된 부지 바로 앞쪽이었다. 하지만 당시 부산대가 연산동 토곡 일대에 부지를 매입한건 부산대 병원을 이전할 목적으로 매입한 것이었으며 부산대 병원이 토곡 이전이 무산되고 해당 부지는 1990년대 초중반에 그냥 처분해 버리면서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되어버렸다. 해당 부지를 처분하지 않았더라면 브니엘중이 폐교될 처지에 놓였을 무렵에 TO만이라도 인수인계 해서 그 부지를 부산대 사대부중 부지로 썼어도 되었을 것이다.[35] 사립→공립으로 이전 재개교한 경우는 강서구의 경일중학교, 울산의 온산중학교, 울산중학교, 상북중학교의 사례가 있다.[36] 1999년 브니엘학원 사태 이후로는 운영주체가 바뀌게 되고 그 와중에 교원들이 대거 변경되는 바람에 두 학교는 이름만 브니엘 이라는 세글자가 들어가는 공통점 외에는 사실상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된다.[37] 거성중학교는 1990년에 지금의 재단으로 넘어가면서 개신교 색채를 완전히 잃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해도 부산최대 개신교 미션스쿨 재단으로 알려진 김길창계열 재단 훈성학원 소속이었다. 다만 당시 거성중학교는 김길창 계열 재단에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바람에 거의 찬밥 신세였다고 한다.[38] 이사벨여중:1965년, 브니엘중:1966년, 거성중:1968년[39] 이사벨여중:이사벨여고, 브니엘중:브니엘고, 거성중:계성여상[40] 2009년에 사상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폐교되었다.[41] 관내에 있는 유일한 중학교인 장전중학교는 남학교이다.[42] 서울예고와 예원학교는 이화학당의 방계 후신 관계이기도 한데, 1988년 까지는 이화학당의 직계후신인 이화여자고등학교와 같은 학교법인 소속이기도 했다.[43]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경우도 임시이사 파견 학교법인의 정상화 과정에서 의견 청취 대상으로 각 학교의 동문회도 그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임시이사나 정이사 추천권을 어느정도 부여하고 있는데, 브니엘중 동문회는 구재단에게도 신재단에게도 적대적으로 나올 수 있는 한치 앞도 알 수 없을 정도이기에, 구재단이든 신재단이든 어떻게든 그들에게 불리하게 나올 우려가 있는 이해당사자를 하나라도 완전히 떼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만약에 브니엘예술중학교가 브니엘중학교의 기수와 연혁을 승계했으면 브니엘중학교 동문회도 이어지는 만큼,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에서는 브니엘중학교 동문회의 의견도 들어야 했을 것이고, 브니엘중학교 동문회도 임시이사 추천 혹은 정이사 추천 등등으로 결국은 합법적으로 학교법인 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브니엘예술중학교가 브니엘중학교의 기수와 연혁을 이어받지 않고 아예 말소시킨 이유로 1980~1990년대 당시 연산교차로 유흥가 일대에서 악명을 떨치던 조직폭력배깡패, 화류계들 중에 브니엘중학교 출신들이 많은데다가, 당시 학교 내에도 실제로 조직폭력배와 연관된 폭력써클(실제로 당시 브니엘중학교내의 폭력써클은 그 악명높은 연산동파 같은 연산교차로 일대 조직폭력배의 팜 노릇을 하다 보니 졸업 이후 실제로 조직폭력배 일원이 되곤 했었다.)이 활개를 치고 다녔기 때문에 이들을 아예 떼어내기 위함이라는 또 다른 설도 있다. 당시 브니엘고등학교는 단성 일반계 고등학교로 연합고사 커트라인이 있다보니 질이 떨어지는 이들이 들어오는걸 막을 수 있었던 데다가 특유의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학생들을 빡세게 굴리기로 유명해서(당시 브니엘고등학교는 우스갯소리로 양아치도 사람 만들어서 졸업시킨다는 말이 나올정도로 빡셌었다.) 학생들이 엇나가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브니엘중학교는 일반 중학교로 무시험 전형으로 배정되다 보니 질이 떨어지는 이들이 들어오는것을 애초부터 막는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고 남녀공학 남녀합반에다가 1980~1990년대 당시 희대의 막장학교였던 야간제 브니엘여고와 건물을 같이 써서 학생들이 영 좋지 않은 쪽으로 물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학교 자체도 학생들을 거의 방임하던 분위기 였기 때문에 엇나가는 학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다만 이런 이유로 기수와 연혁을 말소시켰다면, 그나마 열심히 해서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상위권 출신들 입장에서는 매우 억울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브니엘중학교를 폐교 시키면서 브니엘 계열 학교들은 조직폭력배들이 더 이상 손을 대지 못하게 되었다.[44] 특히 브니엘실고나 그 전신인 고등기술학교 시절 동문들은 거의 높은 확률로 구재단에 우호적이었으며 브니엘고를 구재단의 사유 재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브니엘실고나 고등기술학교 극초기 기수들은 가족같이 지냈을 정도로 그 숫자가 매우 적은데다가 동문들 대다수가 구재단 설립자를 지지하고 있다는거. 물론 브니엘고 총동문회 내에도 평준화 이후 기수들(특히 1980년대 후반 이후 기수들이라면...) 중에서는 구재단 반대파가 일부 있기는 한데, 이들은 총동문회 내에서는 입지가 매우 좁다.[45] 당시 인수를 검토하던 동원개발이 전국 건설사 도급순위 30위권의 중견기업이자 엄연한 코스닥 상장기업 이라서 시민단체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비상장 중소기업 혹은 의료법인이 모기업인 정선재단 처럼 학교를 편법으로 운영을 했다가는 결국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같은 각종 시민단체들에게 지속적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거의 반 강제로 체제 개편이 강요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 후신이 되는 중학교는 전학년 9학급 규모 예술계열 특성화 중학교에서 신축 이전을 통해 특별실 일체를 다 갖춘 21~30학급 규모 일반계 예술중점 중학교로 어쩔 수 없이 전환을 할 수밖에 없거나, 일반계 중학교로써 사교육 없는 학교, 공교육 성공신화 같은 것으로 리브랜딩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특히 부산은 예술계열 특성화 중학교는 같은 금정구에 인접해서 2곳이 있는 반면 일반계 예술중점 중학교는 단 한 곳도 없다.[46] 모기업 온병원그룹의 경우는 자사의 연혁도 상당 부분 날려버린 적이 있는데, 비공식적인 온병원그룹의 전신인 윤종구의 개인 부동산 사업체 및 그 후신인 코아연구개발(現 지주회사 온그룹)의 연혁 까지도 포함 하면 이쪽 역시도 동원개발과 비슷한 1970년대 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2017년 이후 윤종구 회장이 나이가 들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을 무렵에 연혁에서 전신격이 되는 사업체들의 연혁을 완전히 배제 시켜서 정근안과 설립 시점인 1994년 부터 연혁으로 인정하게 되는 바람에 20년 가량의 연혁을 지워버렸다.[47] 이렇게 되었다면 브니엘 계열 학교들의 연혁들 또한 동원교육재단 산하에서 장복만 이사장의 주도로 일괄적으로 재정립 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데, 학교의 교표들 또한 동원교육재단 산하 학교들의 양식을 따라서 일괄적으로 새 교표로 변경되면서 브니엘예술중학교 혹은 후신이 될 학교의 새 교표에는 SINCE 1958(브니엘고등공민학교를 개교 시점으로 잡았을시) 혹은 SINCE 1966 이라는 문구가 들어가고, 브니엘고등학교 새 교표에는 SINCE 1962(브니엘고등기술학교를 학교의 공식역사로 인정했을시), 브니엘여자고등학교 교표에는 SINCE 1975(야간제 브니엘여고를 학교의 공식역사로 인정했을시) 같은 문구가 들어갔을 것이다. 특히 동원교육재단 장복만 이사장은 가난으로 통영동중, 통영상고도 어렵게 졸업하고 등록금 때문에 대학을 중도 포기해야 했을 정도의 고학생 출신이었기 때문에 청소년기의 자신과 비슷했던 처지의 고학생들이 다니면서 배움의 갈증을 해소했던 고등공민학교, 고등기술학교, 야간제 전용 학교 시절의 역사도 배제하지 않고 학교의 소중한 역사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48] 현재의 동아중학교정도로 보면 된다.[49] 다른 둘은 사상고등학교금명여자고등학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