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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8:36

브랜든 나이트(야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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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 시절2. 일본 시절3. 다시 미국으로4. 한국
4.1. 삼성 라이온즈 시절
4.1.1. 2009~2010 시즌
4.2. 넥센 히어로즈 시절
4.2.1. 2011 시즌4.2.2. 2012 시즌4.2.3. 2013 시즌4.2.4. 2014 시즌

1. 미국 시절

파일:나이트 양키스.jpg

미국 시절 성적

텍사스 레인저스에 지명된 후, 5년 안에 메이저리그 데뷔를 목표로 차근차근 올라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투구폼을 바꿨던 트리플 A에서 뜬금 없이 부진에 빠졌다. 98년 AA에서는 5.11이였는데, AAA에선 9.73으로 폭등해버렸다. 물론, 최악의 타고투저인 PCL인 걸 감안하더라도... 99년 AAA 4.91을 기록했으나,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지,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 되었다. 나이트 말에 의하면, "미국 유망주 시절에는 포심의 평균 구속이 98~99마일을 넘나들었던 파이어볼러였는데, 공끝이 무뎌서 그런지, 선수들이 160을 찍는 자신의 공을 잘만 쳐냈었다."고... 이 때는 자기가 피쳐가 아니라, 그냥 공 던지는 스로워였다고 회상하는 모양이다.

어쨌든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된 2000년 AAA에서 10승 12패 4.41, 2001년 AAA에서 12승 7패 3.66을 기록하자, 드디어 콜업되어서, 메이저리그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주로 연장전에 나오는 불펜투수였다고. 2002년에도 AAA 2승 7패 3.90을 기록하는 저조한 기록을 적립하던 와중에 또 콜업되었다고 한다.

2001년 4경기 10.2이닝 ERA 10.13, 2002년 7경기 8.2이닝 ERA 11.42였다. 2001년에는 5피홈런 기록이 있는데, 한 경기 2피홈런 기록도 있었다는 얘기.

2. 일본 시절

파일:브랜든나이트다이에.jpg
11회 정도 가야 등판 기회가 왔던 미국 생활에 지쳐갈 무렵, 일본에서 연락이 왔고, 조건도 나쁘지 않아 일본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나중에 밝힌 바로는 "그 때 일본으로 간 건 실수였다."고..

미국이나 한국야구와는 달리, 당시의 일본야구는 외국인 자체를 같은 팀으로 보기 보다는 말 그대로 외국인 그 자체라고 생각하며, 소통이 안 됐었고 강요에 가까운 환경에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일본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같은.. 이 건 훗날 KBO 리그로 오게 되는 마이클 보우덴, 제이크 브리검, 닉 에반스도 똑같이 얘기한 바가 있다. 이 때문에 훗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다르빗슈 유가 "일본야구는 팀의 외국인 선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차갑게 대한다."며, 일본야구를 까기도 했다. 다만 이는 어느정도 걸러 들어야 할 게, 그럼에도 은퇴하고 나서도 일본과 연을 놓지 않는 랜디 바스부터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레전드 대접 받으며 일본이 좋다는 외국인 선수는 쌔고 쌨다.[1][2][3] 정확히는 어디나 그렇지만 성적이 안 나오는 외국인에게 차가운 것. 이는 MLB도 한국프로야구도 사실 마찬가지긴 하다. 미국도 팀내 1선발과 땜빵 불펜투수의 팀내 대접은 분명 다르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2003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16경기에 등판해 6승 4패를 기록했다. 다만, ERA가 4.86이었다. 물론 그 해 다이에 호크스는 한신 타이거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년 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성공했다.[4][5][6] 여하튼 다이에 호크스가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덕에 우승반지도 챙겼다. 이 때문인지, 가끔 키움 팬들 중에서는 선수단 중에서 선수 시절에 우승을 경험해본 유일한 인물[7]이라 추켜세우는 이도 있다.

문제는 그 놈의 부상이었다. 그 다음 해인 2004년에는 무승 12.00,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 계약한 2005년에도 2패 11.12로 부진했다고 한다. 따라서 2004, 2005년 2년 동안 단 1승도 거두지 못 하며, 2패를 기록한 채, 2군에 머물렀다고 한다.

일본 시절 통산 성적은 30경기(선발 18경기) 104이닝 6승 6패 ERA 5.95

3. 다시 미국으로

파일:나이트 메츠.jpg

일본 시절 생활을 청산하고, 2006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으며,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AA에서 2승 7패 2.25를 기록했고, 베네수엘라 윈터리그 06-07 시즌에서 0승 3패 9.00을 기록하고 결국, 2007년에 팀을 찾지 못 하자, 독립 리그인 서머셋 패트리어츠[8]에서 뛰게 되었다. 2007년 성적은 12승 5패 4.03. 2008년에도 서머셋에서 뛰었는데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고, AAA PCL리그에서 5승 1패 2.28의 놀라운 성적을 기록하고,[9] 메이저리그에 콜업되어 4경기 12이닝 5.25를 기록했다. 이 게 나이트의 마지막 메이저리그 등판 기록.

3.1. 2008 베이징 올림픽

한국에 처음 알려진 계기도 독립 리그인 서머셋 패트리어츠에서 뛰던 때[10]2008 베이징 올림픽의 미국 대표팀 자격으로 출전해 한국전에 선발로 출장한 때부터였다. 이대호에게 투런 홈런을 맞는 등 4.1이닝 8안타 6실점으로 부진하고, 팀도 패했으나, 대만전에서는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 때 괜찮게 본 기억이 있어서인지 AAA에서 4승 9패 5.06을 기록하고 있던, 2009년 7월 삼성 라이온즈가 루넬비스 에르난데스의 대체 외국인 선수로 계약하며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4. 한국

4.1. 삼성 라이온즈 시절

파일:삼성 시절 브랜든 나이트.jpg

추억의 밤느님 시절. 8월 4일 데뷔 첫 승을 거둔 대구 한화전 때였다.

4.1.1. 2009~2010 시즌

2009년에는 윤성환과 함께 삼성의 실질적 1, 2선발 자리를 꿰차며 에이스로 취급받았다. 별명은 백기사부터 시작해서 밤느님, 밤신. 못할 때는 밤.

구단 관계자 말에 따르면 친화력도 좋고 한국 음식에도 빠르게 적응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차가운 동료들과 구단의 압력 등에 괴로웠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동료 선수들도 친근하게 대하고 잘할 땐 같이 좋아해주고 못할 때는 위로해주고 격려해 줘서 좋다고 하며, 대한민국에서 오래 활동하는 게 목표고 심지어는 대한민국에서 성공해서 활동하다가 은퇴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열심히 훈련도 하고 일부 외국인들이 요구하는 특별대접 요구도 안 한다고 한다. 제일 친한 선수는 진갑용(Jin). 클럽하우스에서 같이 논다고 한다.

2009 시즌 이대호에게 가장 약했다.(3타석 이상 기준)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에 이대호가 나이트로부터 시원한 홈런을 때린 바 있으며 시즌 도중에도 홈런을 맞았다. 나이트 상대로 6타수 4안타 1홈런을 기록. 그렇지만 롯데 자이언츠한테 약한 건 아니라서 롯데를 상대로 져 본 적이 없다.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타자는 이도형이라고 한다. 이도형 또한 이대호와 마찬가지로 나이트 상대로 2009 시즌 6타수 4안타.

8월 1일 KIA와의 경기에서 0:7 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 선발 배영수의 뒤를 이어 6회말에 구원등판하였다. 첫 타자 이현곤을 3루수 땅볼로 잡아내고, 다음 타자인 김선빈을 삼진으로 처리했다. 이후에 김원섭까지 2루수 땅볼로 잡아내며 성공적인 데뷔를 마쳤다.

2009년 9월 21일자 최훈 프로야구 카툰에 기사(knight) 투구를 쓰고 나왔다. 2009 시즌 최종 성적은 11경기 60.2이닝 6승 2패 3.56. 후반기에 들어온 대체 외국인 치고는 매우 좋은 성적을 기록해주며, 당연히 재계약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2010년에는 초반에 부진하였고, 5월에 4연승을 찍으며 에이스 모드로 돌아가나 했으나, 8월 1일 넥센전에서 3회 초 투구 도중 무릎 통증으로 공을 던지고 자진 강판하는 일이 일어났으며[11], 이튿 날 구단 지정 병원인 서주미르방사선과에서 촬영 결과, 무릎 외측 반월상 연골 손상이 판명되어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시즌아웃 판정이 났다. 그리고, 8월 4일 임의탈퇴 공시되어, 8월 6일에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시즌 성적은 21경기 13선발 83.1이닝 6승 5패 4.54. 여러모로 전 해에 비해서 부상으로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던 지라, 후에 구단이 이 사건에 대해 밝힌 바(기사 삭제됨)로는 "무릎 통증이 너무 심해서 마운드에서 무릎을 붙잡고 뒹굴고 싶었던 심정이였으나, 그랬다가는 팀의 분위기가 안 좋을 거 같아서 그러진 못 했다."고..

나이트는 인터뷰에서 "좋은 구단에서 선수생활을 한 것이 무척 보람 있었다. 하지만 좋은 성적으로 팀에 보탬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삼성이 한국시리즈 우승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밝혀 많은 삼성 팬들을 눈물 짓게 했다.

그리고... 넥센 히어로즈에서 2010 시즌 후 무릎 치료를 받던 중인 그에게 러브 콜을 보낸다.

4.2. 넥센 히어로즈 시절

파일:PYH2012092611950001300_P4.jpg
목동예수 시절.

4.2.1. 2011 시즌

미국으로 돌아가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한 후 넥센 히어로즈가 그에게 영입 제의를 했고, 넥센 히어로즈삼성 라이온즈로부터 동의를 받아 임의탈퇴가 해제되어 2011년부터 넥센 히어로즈에서 뛰게 되었다. 2011년 4월 8일 경기까지 2경기에 등판, 14⅔이닝 1실점으로 엄청나게 호투 중. 넥센 팬들은 환호하였다.

4월 26일에 등판, 썩 좋지 않은 컨디션이었으나 정말 어찌어찌 막아냈다. 하지만 승리는 기록하지 못했다. 이 때까지의 기록은 1승 3패 ERA 2.27로 넥센의 1선발급 활약을 보여줬지만 승운이 따르질 못하는 상황.

5월엔 8일 한화전, 15일 LG전에서 시원하게 털렸지만 그 후 꾸준하게 잘 던져서 넥센의 제 1선발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근데 승을 거의 못 먹었다. 6월 12일 현재 3점대 방어율임에도 불구하고 넥센의 타선이 2011시즌 너무나도 빈약해 고작 2승 6패에 그쳤다. 3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선발 투수들 중에서 3승 투수도 한 명도 없다는 걸 봤을 땐 승운이 지독하게 없었다.[12] 못 던지는 날은 얄짤없이 패전이고, 잘 던지는 날은 노 디시전.

후반으로 가면서 무릎 부상이 완전히 낫지 않은 탓인지[13] 많은 이닝을 소화하지 못한 채 골골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11년 넥센의 선발진이 초토화된 상황이라, 어찌됐든 꾸준히 선발로 나와주는 나이트가 팀 내 공헌도가 제일 높은 선발이라는 상황이 만들어졌다.[14]

2011시즌 결국 7승 15패시즌 최다패 투수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러나 시즌 내내 특유의 성실함과 건강함을 앞세워 로테이션을 한 번도 거르지 않으며 리그 5위에 해당하는 172.1이닝을 기록해 이닝이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며 넥센 투수들 중 유일하게 규정 이닝을 채운 투수로 자리매김했고[15], 그 실력을 인정받아 2012년에도 넥센과 재계약을 하게 되었다.

그 외에 좀 유별난 경기를 꼽자면, 9월 15일 정전으로 인해 선발로 나오던 나이트의 컨디션 조절이 우려되던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7이닝 동안 109개를 던져 5피안타 1볼넷 6삼진 1실점(1자책)으로 호투하며 승리를 챙긴 것.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밤의 기사가 되었다.

4.2.2. 2012 시즌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2012 KBO 리그 평균자책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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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의 부진은 모두 털어내고 2012 시즌 최강 외국인 에이스로 군림하였다.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완전히 털어낸 것에 더해서 2011년 전지훈련지에서 손승락에게 싱커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이 구종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키면서 싱커볼러로 재탄생한 것. 이 덕분에 탈삼진 개수는 2011년에 비해 크게 줄었지만 땅볼 유도율이 훨씬 높아졌고, 무엇 보다 방어율이 2점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심지어 200이닝 돌파도 했고, 결국 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며 이닝, 평균자책점, 조정방어율까지 1위를 찍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KBO MVP는 30-100과 20-20을 달성한 팀내 동료인 박병호에게 밀렸는데 정작 문제는 그 해 KBO 골든글러브 수상에서 터졌다. 승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부문에서 나이트에 뒤쳐지는 장원삼에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골글에서 밀려버린 것.[16] 그런데 아이러니 한 점은 바로 이 외국인 차별정서 덕에 다음 해에는 넥센의 손승락이 수혜자가 돼버리고 역시 한참 우월한 성적을 찍은 두 외국인 크리스 세든, 찰리 쉬렉이 골글에서 밀려버리게 된다.

4.2.3.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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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 송신영 트레이드로 24번을 쓰던 박정준이 NC로 건너가게 되면서 미국, 일본에서 쓰던 등번호인 24번을 다시 달게 되었다.

4.2.4. 2014 시즌

2013 시즌 종료 후 거취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전[17]도 있었으나, 앤디 밴 헤켄과 함께 일찌감치 재계약을 맺었다. #

이로써 대한민국에서만 6시즌째 선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다니엘 리오스와 같은 기간의 투수 최장 기록이며, 외국인 전체로 확대해도 제이 데이비스 다음으로 긴 기록이다. 아예 본인은 선수의 마지막 커리어를 KBO에서 마무리하려고 마음을 굳혔고, 인터뷰에서도 번번히 넥센의 투수코치를 하고 싶다며 의견을 피력하였다.

4월 6일에 선발 등판해서 지난 첫 등판 때와는 달리 7이닝 2실점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 줬지만 팀 타선은 이재학을 공략하지 못했고, 9회말에 손승락이 시원하게 불을 지르며 팀은 지고 말았다.

4월 12일에 선발 등판해서 5⅔이닝 사사구 4개 3삼진 1자책점의 준수한 투구 내용을 보이고, 팀 타선이 홈런 3방을 터트리는 등 6점의 득점 지원을 받아 2014년 첫 승리를 기록했다. 다음 등판은 유리하게 가져갔던 롯데전.

4월 23일 롯데전에는 4이닝 동안 피안타 8개 3볼넷을 내주고 8실점했다. 로나쌩 클럽이였던 지난 때를 생각해 볼 수 없는 정도의 처참한 성적.

4월 29일 두산전에는 4⅓이닝동안 피안타 6개, 볼넷 5개,사구 1개를 내주고 2실점했다. 꾸역꾸역 막았다 볼수 있지만 2경기 연속 5이닝도 채우지 못하고 강판되었다.

5월 6일 NC전에는 4⅓이닝 동안 11개의 피안타를 맞으며 6실점. 피안타율 5할을 기록하며 장렬하게 산화.

그 후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노쇠화의 영향 때문인지, 당시 나이트의 세부기록은 외국인 중 최하위권에 속했다. 나이트와 비슷한 평균자책점, FIP을 기록하던 외국인 투수는 케일럽 클레이가 유일했는데, 나이트의 BABIP이 더 낮았다. 정상적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돌고 있는 선수 중 나이트와 비슷한 성적을 보였던 건 봄 타는 송승준 정도.

그렇다고 운이 없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NC전 이전의 FIP6.98, BABIP0.288로 FIP은 ERA보다 훨씬 높았고 BABIP은 리그 평균(0.300)보다 낮은 축에 속했다. NC 다이노스전 이전의 잔루율 역시 0.832로 리그에서 굉장히 운 좋은 투수였는데도 성적이 그랬다.

장점이었던 제구력이 엉망인 게 원인일 지도 모른다. 9이닝당 볼넷 개수는 6.750개 이며 정상적인 선발 로테이션을 돌고 있는 투수 중 2위(1위는 7.615개의 유창식). 허나 NC전에서는 제구가 되는 공으로도 그냥 주구장창 얻어터지는 모습을 보여줘서, 많은 넥센 팬들이 불안해했다. 노쇠화로 인해 구위가 떨어져 프로에서 타자들을 상대하기에는 한계가 온 듯. 다시 말하자면 나이트의 나이는 39세로, 한국 나이를 치면 40세다. 노쇠화가 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다. 인터뷰를 보면 스프링캠프 때 허벅지 부상을 입었는데 이때 밸런스가 무너진 듯하다.

결국 5월 14일자로 웨이버 공시되었다. 한때 넥센의 마운드의 기둥이었기 때문에 많은 팬들이 아쉬워했지만, 성적이 우선 순위인 프로의 세계인 지라 구단의 행보도 이해가 간다는 의견도 많았다. 구단으로서도 스프링캠프 때부터 하락세를 보였던 나이트를 5월까지 기회를 주고 웨이버 공시 후 잔여 연봉도 모두 지급하기로 하는 등 예우는 다했다. 기사 은퇴식이나 투수코치 부임을 기대하는 팬들도 있지만 나이트가 현역으로 뛰고 싶다는 의사가 강해서 언제 성사될지는 미지수. 나이트는 퇴단이 결정된 날 "넥센이 내 퇴단으로 한층 발전하는 팀이 됐으면 좋겠다"며 동시에 "삼성에서 버려졌던 내게 다시 기회를 준 넥센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대체 선수는 작년까지 KIA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헨리 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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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히려 아롬 발디리스처럼 일본에서는 팀에 잘 어울리면서 잘 지내다가 한국에서 팀과 어울리지 못하고 한국을 디스하는 선수도 있었다.[2] 일본은 물론 한국보다 전반적인 용병에 대한 대우가 떨어진다고 하는 대만에서도 마찬가지인 게 한국에서 1년간 뛰었던 대만의 전설적인 용병투수 마이크 로리는 한국 생활에는 만족했지만 한국 시절보다 대만 시절에 팀에서 자신에게 더 잘 대해줬다고 인터뷰했다.[3] 또한 전직 야구선수였고 현재는 해설가로 일하는 사토자키 토모야의 유튜브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일본 선수들은 외국인 선수가 같은 팀으로 융합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성적이 좋지 않아 혹평을 받고 퇴출된 선수나 선수 본인이 다른 선수들과 말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경우(본인이 아시아 야구를 무시해서 내려다보고 교류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사회성이 떨어져서 그러는 경우도 있다. 특히 운동선수들 집단에서 후자의 경우는 엄청 소수라서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은 다른 직종에 비해 평판이 더 나쁜 경우가 많다.) 일본인들이 차갑게 대한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4] 당시 다이에는 사이토 카즈미, 스기우치 토시야, 와다 츠요시, 아라카키 나기사 등 신예 4인방이 선발투수진을 구성했었다. 사이토 카즈미는 이 해 20승 3패를 기록하며, 이가와 케이와 함께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사이토는 전성기가 오래 못 갔는데, 소프트뱅크가 인수했던 2005년부터 호크스는 몇 년 간 플레이오프에서 미끄러지며 가을고자 소리를 들었는데, 사이토는 이 시절 부상을 당하고 5년을 재활하다가 은퇴하고 만다. 현재는 소프트뱅크의 코치로 재직 중.[5] 1,2,6,7차전은 다이에의 홈인 후쿠오카 돔에서, 3,4,5차전은 한신의 홈인 고시엔 구장에서 개최됐다. 홈팀들이 홈 경기에서 모두 승리를 거둔 특이한 시리즈였다.[6] 참고로 4년 전 호크스가 4승 1패로 우승했던 1999년 일본시리즈의 상대팀은 주니치 드래곤즈였는데, 당시 주니치 3총사(선동열-이종범-이상훈)가 일본시리즈에서 무릎을 꿇었다.[7] 그런데 사실 히어로즈에서 우승하지 못했을 뿐이지 타 팀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사람은 제법 있다. 특히 현대에서.[8] 미국 독립리그인 '아틀란틱 리그' 소속팀. 넥센에서 같이 선수 생활을 한 앤디 밴 헤켄도 한때 여기 소속이었다. 리그 수준은 AAA 정도. 나중에는 브래드 스나이더도 넥센에서 재계약에 실패한 후, 여기서 여포짓을 했다.[9] 왜 놀라운 성적이냐면, PCL 리그는 최악의 타신투병 리그다.[10] 다만, 그 때는 뉴욕 메츠 소속이였다.[11] 이게 문제가 됐던 게 경기 초중반에 선발투수가 마운드에서 상태가 안 좋으면 트레이너를 불러서 몸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 사이에 덕아웃에서는 유사 시를 대비해 불펜투수의 몸을 풀게 한다. 즉 아무리 투구가 불가능한 상태라도 조금이라도 불펜투수가 몸 풀 시간을 벌어주는게 보통인데, 나이트는 상태가 안좋으니 공 던지고 그냥 자기 발로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결국 이우선이 올라오긴 했는데 제대로 몸 풀지도 못하고 부랴부랴 올라와야 했다.[12] 선발, 계투를 모두 소화한 고원준이나 브라이언 코리는 제외.[13] 해설자들도 이를 수 차례 지적하곤 했다.[14] 일전에도 무릎 때문에 구단에서 많이 걱정하면서 매일매일 체크하라는 김시진 감독의 요청으로 2012년 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체크를 시작하여 제대로 각성 했다.[15]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이닝이터를 찾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KIA 타이거즈가 아킬리노 로페즈의 후반기 부진을 보고도 재계약 쪽에 무게를 두는 이유 중 하나가 그만한 이닝이터를 찾기 어렵기 때문. 나이트 다음으로 넥센에서 2011년에 많은 이닝을 던진 투수는 문성현이었고, 130이닝을 살짝 넘었다.[16] 떨어진 이유가 수비율이라는 궤변을 했던 이용균과 이숭용은 그대로 야구팬의 주적이 되었다.[17] 2013 시즌 내내 기복 있는 롤러코스터 피칭과 불혹에 접어드는 나이 때문에 재계약을 포기해야 된다는 여론과 비록 2013년의 기록은 좋지 못하지만 나이트만한 외국인 구하기도 쉽지 않다는 여론이 대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