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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9:52:04

하비에르 사비올라

사비올라에서 넘어옴
아르헨티나의 축구인
파일:saviola-fifa-2019-getty_crop1585948332669.jpg_1902800913.jpg
<colbgcolor=#eee><colcolor=#000> 이름 하비에르 사비올라
Javier Saviola
본명 하비에르 페드로 사비올라 페르난데스
Javier Pedro Saviola Fernández
출생 1981년 12월 11일 ([age(1981-12-11)]세)
부에노스 아이레스주
국적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
신체 168cm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코치
소속 <colbgcolor=#eee><colcolor=#000> 선수 CA 리버 플레이트 (1998~2001)
FC 바르셀로나 (2001~2007)

AS 모나코 FC (2004~2005 / 임대)
세비야 FC (2005~2006 / 임대)
레알 마드리드 CF (2007~2009)
SL 벤피카 (2009~2012)
말라가 CF (2012~2013)
올림피아코스 FC (2013~2014)
엘라스 베로나 FC (2014~2015)
CA 리버 플레이트 (2015~2016)
지도자 FC 오르디노 (2016~2022 / 수석 코치)
FC 바르셀로나 후베닐 A (2022~2024 / 수석 코치)
국가대표 39경기 11골 (아르헨티나 / 2000~2007)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기록
5.1. 리그 기록5.2. 대회 기록5.3. 개인 수상
6. 여담
6.1. 가족관계
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2. 선수 경력

2.1. 클럽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별명은 토끼(El Conejo). 빠른 주력과 순도 높은 골결정력 덕분에 아르헨티나의 공격수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봄직한 포스트 마라도나 소리를 듣기도 했다. 2004년에는 펠레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는 FIFA 100에 최연소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오래 선수생활을 한 덕분에 스페인 국적도 가지고 있다.

1998년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프로로서 첫 신고식을 했다. 2001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기 전까지 86경기에서 45골을 터트리며 디에고 마라도나 이후 10대 시절 가장 완성된 기량을 선보인 선수라는 찬사까지 들을 정도로 주목을 받던 그는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 11골[1]을 뽑아내며 득점왕과 MVP를 독식하면서 전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사비올라의 11골은 2011년까지도 깨지지 않은 U-20 월드컵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그의 리즈 시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후에 이어지는 그의 축구인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렇게 명문구단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는 2001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면서 스페인 라리가에 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3시즌 동안 리그 평균 15골 정도, 시즌 평균 20골 정도를 터트리는 준수한 활약도 바르셀로나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시기의 리그 득점 기록을 살펴보면 '2001-02 시즌 17골(팀내 1위 클루이베르트가 18골)[2], 2002-03시즌 13골(팀내 1위 클루이베르트가 19골), 2003-04시즌 14골(팀내 1위 클루이베르트가 15골)' 인데 충분히 자기 몫은 해 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비올라의 입지가 불안정했던 이유는 바로 사비올라의 비교 대상이 다름아닌 히바우두였기 때문.[3]

히바우두가 2001-02 시즌 후 AC 밀란으로 이적하면서 구단과 서포터들은 새로 들어온 사비올라가 히바우두의 빈자리를 채워주길 바랐을 테지만... 리그 평균 20골, 시즌 평균 30골 정도를 넣어주는 데다가 그 악마의 왼발로 어메이징한 플레이를 보여주며 서포터들의 눈까지 즐겁게 해주었던 히바우두에 비해 사비올라는 득점력도 기대에 못 미쳤을 뿐더러 플레이의 보는 맛도 부족했던 것이었다. 그 유명한 발렌시아전에서의 오버헤드킥이라든지... 한 폭의 그림같았던 프리킥들이라든지... 2002-03 시즌엔 반 할 감독의 3톱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춤하다, 새로 부임한 안티치 감독의[4] 정석적 4-4-2 전술에선 자신의 이상적 위치인 투톱의 스몰로 클루이베르트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2003-04 시즌 레이카르트 감독의 3톱 전술에서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맡았고, 14골을 넣긴 했으나 전술에 녹아들지 못했다는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결국 바르샤는 2003-04 시즌이 끝나자 클루이베르트는 팔아 버렸고, 사비올라도 임대 보내버렸다. 사비올라의 입장에선 토사구팽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닌 상황.

설상가상 2003년에는 호나우지뉴가 바르셀로나에 강림하면서 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만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스트라이커였기 때문이다. 사비올라는 키 169cm의 작은 키이며 전술적으로는 스피드를 살린 최전방침투와 결정력을 살리는데 주력하는 그야말로 정통 스트라이커이며 일반적인 빅-스몰 투톱 시스템의 스몰에 어울리는 투톱형 스트라이커였다. 한마디로 원톱이 불가능한 포워드. 그런 선수를 딩요 데려와 다시 만든 바르샤식 3톱 시스템의 중앙에다 넣어 맞추려고 하면 맞춰지나...[5][6] 무엇보다도 서포터들은 호나우지뉴의 묘기에 가까운 플레이이에서 히바우두의 모습을 떠올리며 열광했을 것이다. 심지어 호나우지뉴는 히바우두가 했던 것과 거의 흡사한 바이시클 킥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2004년에는 카메룬산 흑표범스웨덴의 전설까지 합류하면서 결국 2시즌 연속 AS 모나코세비야 FC에서 임대생활을 한 그는 2006년 바르셀로나로 복귀하지만 그 시기는 아르헨티나 후배가 떠오르며 주전자리를 확고히 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리고 원톱 자리는 사무엘 에투가 건재했으며, 헨릭 라르손이 스웨덴으로 돌아갔지만 서브로 아이두르 구드욘센을 영입하여 사비올라는 제 3옵션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그는 다음해인 2007년 루이스 피구에 이어 바르샤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로 직행한 선수가 되지만 이미 바르샤에서 그의 입지도 인기도 그저 그럴때라 피구 때만큼의 충격은 없었다.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CF의 스트라이커 자리에는 레알의 아이콘 라울 곤살레스라리가에서도 득점왕을 거머쥐며 골폭풍을 몰아치던 뤼트 판니스텔로이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결국 제대로 출장기회도 잡지 못하고 2시즌 동안 벤치를 달구던 그는 2009년 갈락티코 시즌2 시작과 동시에 포르투갈SL 벤피카로 이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 이적은 사비올라의 커리어가 꼬이게 된 계기. 사비올라가 레알 마드리드에 소속된 2007년~2009년에는 라울과 반 니스텔루이 등의 스트라이커진이 자리를 확고히 잡은 시기였기 때문에 사비올라가 중용되지 못하였고 그 결과 2시즌 합쳐서 20경기조차 나오지 못했다. 차라리 주전 보장되는 팀에서 뛰었더라면 커리어가 좀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2007년 당시 사비올라의 나이는 26세였고 그 나이면 꼬였던 커리어를 풀 수 있을 충분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벤피카에서는 좋은 활약하고 있다. 비록 대세는 포르투지만... 포르투가 워낙 대단한 거고 사비올라도 제 몫은 충분히 해내고 있다.

2012년 8월말라가 CF와 1년 계약을 맺고 이적하면서 다시 스페인 라리가로 돌아왔다.

2013-14 시즌은 그리스 리그올림피아코스 FC에서 활약했었고, 2014년 9월 세리에 A의 엘라스 베로나 FC로 이적하였다.

2015년 6월 21일 고향 클럽인 CA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고향팀 리버 플레이트에서는 리그에서 한골도 넣지못하는 극심한 부진을 보여준 바람에 2016년 1월 8일자로 리버 플레이트와 계약 해지를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K리그 팬들은 '현재 빅네임이 필요하다는 전북 현대 모터스가 영입했으면 좋겠다.' 반응과 '이제 자국리그 에서도 안먹히는 퇴물선수인데 K리그 와도 안먹힐것 같다.'는등 여러반응이 나뉘고 있다.

2.2. 국가대표

포스트 마라도나의 최선봉으로 여겨졌던 선수답게 어린 시절부터 대단한 각광을 받았다. 실제로도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파브리시오 콜로치니막시 로드리게스 등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기대치 때문에 당시의 축구 게임 챔피언십 매니저(풋볼 매니저의 전신)에서는 무조건 세계 최고가 되는 선수로 이름을 널리 떨쳤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엔트리에는 뽑히지 못했다. 황혼기에 접어든 가브리엘 바티스투타가 월드컵 직전 A매치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한창 때였던 에르난 크레스포가 있는 상황에서 그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다만 2002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엔트리를 보면 다소 아쉬운 점도 많이 있었다. 물론 바티스투타가 건재했고 크레스포가 전성기였지만 문제는 사비올라 대신 당시 35세의 늙은 클라우디오 카니자가 뽑힌것. 아르헨티나가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 조별리그에 탈락한 이유도 바로 바티스투타에게만 의존한 공격진 때문이다.[7] 당시 잉글랜드는 리오 퍼디난드솔 캠벨이라는 유럽 최정상 수비라인을 구축하고있는 사실상 시드권팀에 필적하는 전력을 가진 팀이였다. 잉글랜드가 선제골 이 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우주방어에 성공한 이유도 바로 월드 클래스 수비진 덕분이였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아르헨티나가 역전에 성공했을 것이다. 스웨덴전 역시 스벤손의 기습적 프리킥에 일격을 당한 이 후 아르헨티나는 가장 강력한 공격력으로 스웨덴의 골문을 노렸지만 문제는 스웨덴에게 역시 2001년 유럽 최우수 수비수로 선정된 파트리크 안데르손과 그를 보좌하는 요한 미엘뷔라는 유럽 정상급 수비라인을 구축한 팀이였고 후반 막판 크레스포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이미 늦은 상황이였다. 괜히 아르헨티나의 F조가 죽음의 조로 불린게 아니며 이런 상황에서 사비올라라는 카드는 아르헨티나 공격진의 다양성을 제공해 줄 수 있었고 당시 바티와 크레스포가 건재하더라도 충분히 조커 역할로도 활용할 수 있었지만 사비올라 대신 노장의 카니자는 2002년 월드컵 본선에서 단 1초도 뛰지 못했고, 3차전인 스웨덴과의 경기 도중 벤치에서 퇴장을 당했다.

2003년 리비아와의 친선경기에서 A매치 첫 골을 기록했고, 같은 해 한국과의 친선경기에서도 결승골을 기록했다.

이 후 2004 코파 아메리카에서 에콰도르와의 1차전에 국제 메이저 대회 첫 골과 첫 해트 트릭을 동시에 이루면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하지만 이 후 경기에서는 부진했고 아르헨티나는 그래도 카를로스 테베즈,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등 또 다른 대형 신인들의 활약으로 결승까지 진출하지만 브라질과의 결승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엔트리에 올라 선배인 에르난 크레스포, 후안 파블로 소린 등과 같이 호흡을 맞추며 코트디부아르전에서 득점을 올렸다. 하지만 이 월드컵 이후에는 스스로가 부진하고 그를 대체할 자원으로 이미 카를로스 테베즈가 건재한데다 이 후에도 세르히오 아궤로, 곤살로 이과인이 등장하는 바람에 2007년을 마지막으로 다시 국가대표 엔트리에 오르지 못했다. 참고로 사비올라의 백업이 추후 펠레, 마라도나와 어깨를 나란히 혹은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19살 소년이였다.

3. 플레이 스타일

투톱형 스트라이커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데뷔를 했지만, 원톱 시대의 SL 벤피카 시절과 말라가 CF 시절에도 나름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며 원톱으로도 나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중 사비올라의 가장 큰 장점은 날렵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는 순간 공간 침투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코트디부아르전 선제골 역시 순간 공간침투로 기록한 득점이다. 또 득점력도 좋았고 남미 선수 다운 화려한 발재간과 동료선수들과의 연계 플레이도 잘했으며 오프 더 볼 능력도 준수했다.

다만 아쉬운건 경기의 흐름을 뒤집을 수 있는 역량을 지닐 정도의 실력은 지니지 않았기에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나쁘지 않는 스텟을 올렸음에도 바르셀로나의 전임 에이스인 히바우두와 비교해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기복도 은근 심하게 타기에 특히 20대 중반의 나이임에도 2007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매우 저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라울 곤살레스.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 공격진이 건재한 이유도 있지만 앞에 언급한 것 처럼 크랙의 자질까지 갖추지 못했기에 저 둘을 뛰어넘기는 커녕 벤치만 달구게 되었고 기회를 받았더라도 본인이 살리지 못했다.

그 외에도 단점이라면 오프 더 볼 능력은 준수했으나 경기 전체 흐름을 읽는 시야가 좋다고는 볼 수 없었고 아무래도 체구가 작다보니 공중볼 경합 및 세트피스 상황에선 거의 계륵이나 다름 없으며 체력 및 수비가담도 그리 뛰어나지 않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바로 이점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사비올라가 라울과 반 니스텔루이를 넘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며, 국대에선 동갑내기 막시 로드리게스와 2004년 나타난 대형 신인 카를로스 테베즈에게 밀리고 말았다.

모든 선수마다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고 사비올라 역시 장점과 단점이 극명한 선수였다. 즉 특정 포지션에 최적화된 선수다 보니 2000년대 중반부터 점점 멀티플레이 능력이 중요시되는 축구 트랜드에 밀려나게 되었다.

혹자는 그가 윙어로 커리어를 이어나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체급의 한계 때문에 원톱 공격수로는 쓰임새가 제한되는 한편, 2000년대 이후부터는 윙어와 스트라이커의 역할이 점점 겹치고 있는 데다가 그의 훌륭한 오프 더 볼 무브먼트의 수준을 보고 있노라면 실제로 현대의 스트라이커들보다는 윙어에 어율리는 움직임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 드리블 수준도 괜찮았기에 윙어로 뛰어도 제 몫을 해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4. 평가

결과적으로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 보여준 임팩트가 너무 강했고 어떻게 보면 사비올라의 커리어 하이(...) 일 정도로 사비올라의 경우 어린나이에 벌써 빅클럽 이적이 오히려 독으로 다가온 셈이다. 이 후 카를로스 테베즈[8], 세르히오 아궤로[9] 등이 처음부터 매머드 클럽으로 이적하지 않고 차근차근 프로팀에 실력을 쌓으며 성공했을때 사비올라도 조금 낮은 레벨부터 프로팀에 활동했다면 더 빛을 볼 수 있었던 선수였다.

그래도 독일 월드컵에서 아직 건재한 에르난 크레스포와 또다른 대형 신인 스트라이커인 카를로스 테베즈의 등장에도 나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국가대표팀에서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이 후 스스로 부진하여 대표팀에서도 멀어졌고, 나름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해 상황을 반전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커리어가 더 꼬이면서 그저그런 선수로 전락해버렸다.

5. 기록

5.1. 리그 기록

시즌클럽리그경기
1998/99리버 플레이트프리메라 디비시온196
1999/00리버 플레이트프리메라 디비시온3319
2000/01리버 플레이트프리메라 디비시온3420
2001/02FC 바르셀로나라리가3617
2002/03FC 바르셀로나라리가3613
2003/04FC 바르셀로나라리가3314
2004/05AS 모나코리그 1297
2005/06세비야 FC라리가299
2006/07FC 바르셀로나라리가185
2007/08레알 마드리드라리가93
2008/09레알 마드리드라리가81
2009/10벤피카프리메이라 리가2711
2010/11벤피카프리메이라 리가249
2011/12벤피카프리메이라 리가184
2012/13말라가라리가278
2013/14올림피아코스수페르리가 엘라다252
2014/15올림피아코스수페르리가 엘라다10
2014/15엘라스 베로나세리에 A81

5.2. 대회 기록

5.3. 개인 수상

6. 여담

6.1. 가족관계

축구계, 그것도 남미에서는 흔치 않은 무녀독남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남미 축구선수들에 비해 과거사진이 굉장히 많은 편이다.

파일:external/www.magxone.com/Romanella-Amato-FHM-Portugal-Cover-Page.jpg

파일:external/leclubfoot.com/Romanella-Amato6.jpg

파일:external/img.giaoduc.net.vn/romanella_amato_javier_saviola_bo_nguoi_dep_giaoduc.net.vn%20(1).jpg

파일:external/www.webconferencia.net/20234755ch-2.jpg
1991년생인 로마넬라 아마토(Romanela Amato)는 아르헨티나의 모델로 1981년생 사비올라와 16살(!!!)인 2008년부터 교제했다고 알려져있다. 둘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약혼했고, 아들, 딸이 한 명씩 있다.

7. 같이 보기

1 아본단시에리 · 2 아얄라 · 3 소린 ⓒ · 4 콜로치니 · 5 캄비아소 · 6 에인세 · 7 사비올라 · 8 마스체라노 · 9 크레스포
10 리켈메 · 11 테베스 · 12 프랑코 · 13 스칼로니 · 14 팔라시오 · 15 밀리토 · 16 아이마르 · 17 쿠프레
18 M. 로드리게스 · 19 메시 · 20 J. 크루스 · 21 부르디소 · 22 L. 곤잘레스 · 23 우스타리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호세 페케르만


[1] 여기엔 2번의 해트 트릭이 포함되어 있다.[2] 더군다나 아르헨티나를 떠나 유럽에서의 첫 시즌이었다.[3] 또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의 미친 활약이였다. 만약 사비올라가 소위 무명선수 신분에 저런 스텟을 올렸다면 오히려 찬사를 받았겠지만, 당시 사비올라는 2001년 FIFA U-20 월드컵에서의 미친 임팩트로 그 당시엔 펠레, 마라도나의 뒤를 잇는 또 다른 신동이란 찬사까지 받았기 때문에 저 스텟에 성이 차지 않았던 것.[4] 세르비아 출신으로 바르셀로나와 레알마드리드 모두에서 감독을 맡았던 경력의 소유자다.[5] 파트릭 클루이베르트와 클래식 투톱을 뛰던 시기인 2002-03 시즌에는 빅-스몰의 조합이 적절했기에 사비올라의 득점력이 발휘되어 개인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그 시기가 한참 루이 판할감독의 전술적 삽질 등으로 성적이 널을 뛰었다는게... 사비올라와 같은 문제를 후안 로만 리켈메 역시 겪었고 결국 리켈메도 바르셀로나 전술에 적응 실패해 비야레알로 갔다. 참고로, 그 시기가 히카르두 콰레스마가 바르샤에서 병풍이던 시기다. 윙포워드가 4-4-2에서 윙으로 뛸 수가 없으니.[6] 그래서 팬들 사이에서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어로 정착했더라면 더욱 대성하지 않았을까 하며 아쉬워하기도 한다. 빠른 스피드와 침투, 그리고 수준급의 드리블 실력을 살릴 수 있다면 침투형 윙어로 보다 큰 활용가치가 있었을텐데 말이다.[7] 4년 후 독일 월드컵에서 또다시 죽음의 조에 걸렸음에도 2002년과 달리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며 조 1위를 차지했다. 결국 이런 원패턴 공격전개가 아르헨티나가 죽음의 조에 희생양이 된 이유였다.[8] 2004 하계 올림픽 남자축구 금메달[9] 2007 FIFA U-20 월드컵MVP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