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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7-06-18 22:20:50

서견

고려 후기의 문신. 초명은 반(頒),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수상)

2세           서필(徐弼 내의령.종 1품. 수상)

3세           서희(徐熙 내사령. 종 1품. 수상)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정 2품.부수상)

7세          서찬(徐瓚 (장령. 정 4품. 차관보)

 

호는 여와(麗窩) 또는 죽송오(竹松塢). 
일찍이 안향(安珦:1243~1306)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1369년(공민왕18)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1391년 사헌장령(司憲掌令)에 이르렀다. 조선왕조의 건국과 관련하여 정몽주(鄭夢周)․강회백(姜淮伯)․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상소하여 혁명세력인 조준(趙浚)․윤소종(尹紹宗)․오사충(吳思忠) 등을 탄핵하다가 정몽주가 격살당하자 김진양․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은둔하였으며, 한 때는 이색(李穡)․원천석(元天錫)․길재(吉再) 등 고려의 절신(節臣)들과 함께 정선(旌善)에 모여 시와 술로 서로를 위로하며 고려를 사모하였다. 
선조 때 대사간에 증직되고 충신묘에 봉해졌으며, 충현서원(忠賢書院)․삼현사(三賢祠)에 신주가 모셔지고 또 두문동서원과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다. 그는 일찍이 원천석․범세동(范世東)․탁신(卓愼) 등과 문답하여 ≪동방사문연원록 東方斯文淵源錄≫을 저술하고, ≪화해사전 華海師全≫을 편집하였으며, 현전하는 시문은 고려를 그리워한 한시와 자신을 고죽(孤竹)에 비긴 시조가 각 1수씩 남아 있을 뿐이다.

경력사항

1369~공민왕18년 문과에 급제1391~사헌장령(司憲掌令)

암반 설중 고죽이야- 徐甄(서견)

 

巖畔 雪中 孤竹이야 반갑기도 반가왜라 묻노라 孤竹君이 네 어떠하던인다 首陽山 萬古 淸風에 夷齊를 본 듯 하여라

 

술회(述懷)-서견(徐甄)

마음을 적다-서견(徐甄)

千載神都隔漢江(천재신도격한강) : 천년의 신도가 한강 넘어에 있는데

忠良濟濟佐明王(충량제제좌명왕) : 충직하고 어진 이들 나란히 밝은 임금 도왔도다

統三爲一功安在(통삼위일공안재) : 삼국을 한 나라로 만든 공이 어디 있는가

却恨前朝業不長(각한전조업불장) : 전조의 업적이 길지 못함이 도리어 한스럽도다.
 

서견묘표(徐甄墓表)

아! 이곳은 고려의 충신 장령 서선생(徐先生)의 무덤이다.선생의 휘는 견(甄)이요, 이천인(利川人)이다. 공양왕 4년(1392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간관이던 김진양 · 이확 등과 함께 조준 · 정도전 · 남은을 치죄하라고 청하였는데,포은이 순국함에 이르러 선생과 함께 말한 사람들을 한 패거리로 여겨 모두 벼슬에서 내쫓았다. 그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생은 금천에 숨어 지내면서 앉을 적엔 북쪽을 향하지 않았고, 일생을 마칠 때까지 한양의 성곽을 대면하지 않았다. 
일찍이 시를 지어

천년을 누려온 신도가 아득한 곳에 있어,
많고 많은 충신과 현량들이 어진 임금을 도왔네.
삼한을 통합한 공은 어디에 있느뇨? 
전조의 왕업이 길지 못한 게 한스럽구나!

하니 대신과 대간들이 공을 국문하자고 청했으나 우리 태종대왕은 하교하기를, “서견은 고려의 신하로서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잊지 않으니 또한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다.”라고 하고는 그를 관리로 임명하고 국문하지 말라 하였다. 그 뒤 선조대왕은 경연에 참여한 신하의 주청으로 인하여 그의 묘에 봉분을 올리라고 명하고 또 제물을 하사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금천의 번당리에 있는데, 금천현의 소재지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금천현감으로 재임하고 있는 이제원이 선생의 묘소에 가서 절을 하고는 슬픈 어조로, “충신의 묘에 묘표가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고서 석재 하나를 마련하여 선생의 묘소 앞에 세우고자 하면서 자신의 뜻을 아버지인 이재에게 고하니 그의 아버지는 그 얘기를 듣고 기뻐하면서, “옛날에 주부자께서 장사에 부임하였을 적에 맨 먼저 절의를 지키다 죽은 다섯 사람을 표명하여 그들의 사당을 세웠는데, 네가 그 의미를 안 것 같구나. 선생은 일신으로써 오백년 동안의 인륜을 붙들어 세웠으니 포은과 더불어 생사는 비록 다르지만 인을 행한 것은 한 가지이다. 가히 일월과 빛을 다툴 만한데 도리어 그의 사적이 희미하여 밝힐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선생이 자신의 지조를 이야기한 시만큼은 가히 선생의 본심을 백세의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상상하여 볼 수 있게 한다. 대체로 백이와 숙제의 사람됨을 살피려 하는 자는『채미가』하나면 충분하거늘 또 어찌 반드시 사적이 많아야만 하겠느냐? 네가 임지로 돌아가거든 이 말을 묘비의 뒷면에 새겨도 좋겠구나.”라고 하였다.

숭정갑신년 후 99년째인 계해년(영조 19, 1743년) 8월 ▨일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이재 기록함
통훈대부 행홍문관응교 윤심형 글씨를 씀

 

徐甄墓表
嗚呼 此高麗忠臣掌令徐先生之墓也 先生諱甄 利川人 恭讓四年爲掌令 與諫官金震陽李擴等 請罪趙浚鄭道傳南誾 洎圃隱殉國 以先生及諸言者爲黨與 悉放流之 是年高麗亡 先生遯居衿川 坐不北向 終其身 不對漢陽城郭 嘗作詩曰千載神都隔杳茫 忠良濟濟佐明王 統三爲一功安在却恨前朝業不長 大臣臺諫請鞫之 我太宗大王敎曰 甄高麗之臣 不忘其君 亦夷齊之流也 其署勿問 後宜祖大王因筵臣言 命封其墓 且賜祭 墓在衿之樊塘里 去縣治十里餘今縣監李濟遠往拜之 慨然曰 忠臣之墓 其可無表乎 爲具一石 將竪之墓前 以告于其父縡 縡聞而喜之曰 昔朱夫子之任長沙 首錄死節五人 立其廟汝其知此義矣 先生以一身而扶樹五百年倫常 與圃翁 生死雖殊而爲仁則一 可以爭光於日月 顧事蹟微昧 無可徵信而獨其言志之作 猶可以想見先生本心於百世之下 夫欲觀夷齊者 采薇一歌足矣 又何必多乎哉 可歸而刻諸表陰也
崇禎甲申後九十九年癸亥 八月 日
資憲大夫議政府左參賛 李縡 記
通訓大夫行弘文館應敎 尹心衡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