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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베이커[1] Scott Baker | |
출생 | 1970년 5월 18일 ([age(1970-05-18)]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베이직 고등학교 |
신체 | 188cm ,79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 입단 | 1990년 드래프트 7라운드 (전체 195번, STL) |
소속팀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1995) 삼성 라이온즈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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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수. KBO 리그 사상 외국인 투수 1호 승리의 기록을 보유한 선수이다.호세 파라와 더불어 삼성 라이온즈의 첫 외국인 선수이자, 삼성 역대 외국인 투수 최다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투수였었다.[2][3]
2. 선수 경력
2.1. 미국 시절
베이커는 1990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지명되어 입단한 후 줄곧 마이너리그에서 활동했고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던 1995년 시즌 후에는 방출[4]되어 1996년에는 독립 리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97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더블 A 팀 소속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했는데 겨우 4경기 등판했다.2.2. 삼성 라이온즈
2.2.1. 1998 시즌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ERA- | WAR |
26 | 172 | 15 | 7 | 0.682 | 4.13 | 172 | 15 | 81 | 87 | 82 | 79 | 1.45 | 98.33 | 3.15 |
스캇 베이커는 1998년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 때 삼성이 투수진 보강을 위해 호세 파라에 이어 2라운드에서 뽑게 되며 삼성으로 오게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화려한 메이저리그 경력을 가진 파라와 달리 베이커의 메이저리그에서 활동은 1995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중간계투로 1경기 등판한 게 전부인 무명선수였다. 또한 강속구를 갖고 있어 대어로 평가 받은 파라와 달리 베이커는 전형적인 기교파 투수였다. 그래도 당시 한국 프로야구의 수준은 낮은 편이라 메이저리그에 한번도 올라가지 못한 선수도 꽤 있는 마당에 1경기라도 메이저리그 등판 기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커리어였기에 이문한 스카우트가 강력 추천하면서 삼성은 베이커를 지명하게 되었고, 그가 선발의 한 자리를 맡아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베이커는 스프링 캠프 때 구속이 130km/h대를 근근히 유지하는 가운데 '음식이 안 맞는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등 핑계를 대면서 시종일관 불성실한 모습을 보였고 스프링 캠프 도중 가정사를 핑계로 귀국하기도 했다. 가뜩이나 구단에 밉보인 가운데 시범 경기 때도 부진했다. 그러면서 구단 내부에서는 베이커의 영입에 굉장히 실망했고, 베이커의 영입을 관철한 이문한 스카우트는 사직을 생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행히도 정규 시즌이 시작된 후 외국인 선수로서 첫 승을 기록하는 등, 눈부신 호투를 보였고 전반기에는 현대 유니콘스의 정민태와 다승왕 경쟁을 하며 10승을 올리며 전반기 다승 1위를 기록한다. 후반기에는 부상이 겹치면서 페이스가 주춤했지만 그래도 시즌 15승을 기록해 다승 3위에 올랐다.
삼성은 베이커와 재계약을 원했지만 베이커는 연봉으로 25만 달러를 요구했다. 1998년 베이커의 연봉은 6만 달러라서 그 4배가 넘는 셈이었는데 당시 외국인 선수와 재계약할 경우 연봉 인상 상한선이 전년도의 10%라서 베이커의 요구는 들어주는 건 불가능했다. 또한 딸까지 둔 유부남인데도 경기가 끝날 때마다 여자를 요구했고(...)[6] 평소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에 불만이 많아 한 번은 심판 판정에 불복해 심판에게 욕설을 하는 등[7], 성격적인 문제와 결정적으로 금액 차이로 인해 결국 어깨 부상을 빌미로 계약을 포기했다.[8] 미국으로 돌아간 베이커는 멕시코 리그, 독립 리그 등에서 활동했고 2002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 외에도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에 폭행시비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당구장에 놀러 갔다가 한국인들과 시비가 붙었던 것. 그런데 당시에도 여자친구라는 한국인 여자를 두 명 끼고 있었다니 여자를 좀 많이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듯.
3. 플레이 스타일
좌완 기교파 투수.인성은 둘째치고 나름 KBO의 역사에서 한번 짚고 넘어갈 만한 선수다. 사실 구속은 140km정도로 빠르지는 않았고, 직구의 구위나 컨트롤도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낙차 큰 위력적인 너클커브와 체인지업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지금도 좌완이 140대 초반이면 조금 느려도 쓸만한 구속인데 20년도 더 된 이 시절 좌완이 140km이면 꽤 괜찮은 구속이었고, 무엇보다 변화구의 위력이 상당했던 투수. 심판 판정에 불만을 가진 것도 이렇게 낙차 큰 너클커브를 본 적 없는 한국 심판들이 스트라이크를 잘 잡아주지 않아서였을 정도로 너클커브는 대단했고, 체인지업 또한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생소하면서도 위력적인 변화구였다. 당대 메이저리그와 한국프로야구의 격차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투수. 이 선수 한국 오기 전년도에 트리플도 아니고 더블A에서 뛰었던 선수였다.
또한 메이저리그 기준으로는 확실히 느린 구속이었지만 제구력이나 변화구가 좋은 좌완이었기에 메이저리그는 몰라도 파워가 부족한 양산형 우투좌타가 많은 KBO에서는 아주 잘 먹히는 카드였다.
이런 좌완 기교파 외국인 투수로는 과거 선수로는 쉐인 유먼, 크리스 세든, 벤자민 주키치, 앤디 밴 헤켄, 비교적 최근 선수로는 브룩스 레일리, 에릭 요키시 등등이 있는데 이런 좌완 기교파 용병선발의 원조인 투수.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1995 | OAK | 1 | 3⅔ | 0 | 0 | 0 | 9.82 | 5 | 0 | 5 | 1 | 3 | 2.73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이닝 | 승 | 패 | 세 | ERA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사구 | 탈삼진 | WHIP |
1998 | 삼성 | 26 | 172 | 15 (3위) | 7 | 0 | 4.13 | 172 | 15 | 78 | 3 | 87 | 1.45 |
<colbgcolor=#ffff88> MLB 통산 (1시즌) | 1 | 3⅔ | 0 | 0 | 0 | 9.82 | 5 | 0 | 5 | 1 | 3 | 2.73 | |
KBO 통산 (1시즌) | 26 | 172 | 15 | 7 | 0 | 4.13 | 172 | 15 | 78 | 3 | 87 | 1.45 |
5. 관련 문서
[1] 한국 등록명은 스코트 베이커였는데, 당시에는 Scott을 "스코트"라 표기했다. 이는 현대 유니콘스의 용병 스캇 쿨바도 마찬가지였다.[2] 베이커 이후 삼성 외국인 투수 15승은 한동안 나오지 않았으나, 2020년 10월 16일 데이비드 뷰캐넌이 무려 22년만에 15승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2021년 10월 17일 16승을 올리며 마침내 베이커의 기록을 넘어섰다.[3] 심지어 베이커 이후 삼성 좌완 투수 중에서 시즌 15승을 올린 선수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는데, 2012년 장원삼이 베이커 이후 14년만에 17승을 올렸다.[4] 커리어 중 1995년 한 경기만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다. 이런 선수들을 Cups of Coffee Player라고 부르며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명단이 기재되어 있고 1995년 7월 17일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1경기 등판하여 3과 2/3이닝 4자책을 기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커리어 중 1경기만 메이저리그에서의 경력이 있는 투수들[5] 쉽게 말하자면 ERA-는 낮을수록 좋고, 100이 투고성향 제외 시 ERA 4점 정도로 평가되니 투고성향을 제외 시 ERA 3.93 수준의 활약을 했다고 보면 편하다.[6] 구단 치어리더와 하룻밤을 요구했다는 설까지 있다.[7] 이 날 베이커가 심판판정에 대한 불만으로 거의 태업성 플레이를 하다 결국은 퇴장당했고, 이 덕분에 삼성은 라이벌 현대에게 무려 6:19로 깨지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흔히 99년 플레이오프 7차전을 대구아재들의 끝판왕으로 평가하지만, 이 경기도 그에 못지 않게 엄청난 난동이 벌어졌다. TV로 중계되긴 했지만 그닥 중요한 경기가 아니었던 탓에 묻히긴 했지만.[8] 결정적으로 삼성은 당시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단 한번도 못했기 때문에 큰 경기에 강한 선수들을 원했고 약한 선수는 가차없이 버리던 시절이었는데, 베이커가 1998년 플레이오프에서 2경기를 다 말아먹어 삼성이 정규시즌 2위로 플옵에 직행하고도 한국시리즈에서 진출하지 못하게 된 1등공신으로 찍혔던 게 결정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