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대륙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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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대인의 민족 정체성을 보유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2. 역사
오늘날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지역에 콘베르소(가톨릭으로 강제개종당한 세파르딤)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점은 해당 지역이 스페인에 의해 식민화가 시작되던 16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른 한편으로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지역은 오늘날의 멕시코, 콜롬비아 및 쿠바에 해당하는 지역이었고, 아르헨티나에 해당하는 지역은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 설치 이전까지는 식민지 내에서도 변두리 정도에 취급되었다. 아르헨티나에도 일부 포르투갈 유대인들이 항구도시에 정착하기는 했으나[1] 그 규모는 스페인의 여타 아메리카 식민지와 비교해보았을 때 대단찮던 수준이었다.비교하자면 중근세 스페인 콘베르소들의 문화가 오늘날 멕시코나 콜롬비아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과는 반대로 아르헨티나의 경우는 스페인인들의 본격적인 이민이 늦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르헨티나 문화에서 콘베르소들이 차지하던 비중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2.1. 근현대 유대인의 이민
아르헨티나는 1816년부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으로부터 대량 이민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도 아르헨티나로 이민하였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러시아 제국, 프랑스에 흩어져 있던 아슈케나짐들이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사회는 아슈케나짐이 주류가 되었다. 같은 기간 상당수의 세파르딤들이 오스만 제국이나 프랑스 혹은 그리스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왔다.유대인들은 아르헨티나 국적법에 영향을 크게 끼치기도 했는데 아돌프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자행하면서 수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거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두고 그 곳을 인외마경으로 만들어서 탄압했는데 이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해외로 도피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렇게 도망친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아르헨티나 정부에서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국적법을 개정했는데 한 번 아르헨티나 국적을 취득하면 영원히 포기할 수 없다는 조항을 신설했다. 이렇게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피해 도망쳐서 아르헨티나인이 된 유대인 중에서는 볼펜을 발명한 비로 라슬로도 있다.
2.1.1. 아슈케나짐
아슈케나짐들의 아르헨티나 이민을 자극한 주요한 동기 중 하나는 러시아 제국 내에서 빈발하던 포그롬(반유대주의 폭동)이었다. 1897년부터 1905년 사이 집계된 러시아 제국 인구 조사 당시 제국 내 유대인 인구는 500만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 중 절반은 도회지에 절반은 슈테틀이라는 유대인 마을을 중심으로 거주하였다. 많은 유대인들이 러시아 제국을 떠나 해외로 이주를 희망하였으나 슈테틀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빈곤층이다보니 이민이 쉽지 않았다. 바르샤바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 조직폭력배들이 미국으로 이민이 힘든 이런 슈테틀의 어린 소녀들을 골라서 사기 인신매매를 했던 흑역사도 있다.# 1906년부터 1913년 사이에는 매년 13,000여 명 상당의 유대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이런 인신매매 피해자들이었다.#[2] 1차 대전 종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등이 해체되고 폴란드가 독립한 이후에도 바르샤바 유대인 갱단들의 인신매매는 한동안 기승을 부렸었다. 이들 인신매매단 중 하나는 "바르샤바 상호 원조 협회(la Sociedad de Socorros Mutuos Varsovi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으나, 1927년 폴란드 측에서 강력 항의하자 이후 조직 명칭을 즈비 미그달(Zwi Migdal)로 변경하였다. 한 편 1919년에는 아르헨티나에서 백색테러 폭동이 발발하는 와중에 "러시아인 사냥(La caza del ruso)"이라 불리는 반유대주의 테러도 동시에 벌어졌는데, 이는 당시 아르헨티나 유대인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 내 포그롬을 피해 망명한 유대인이었음을 나타낸다고도 볼 수 있다.이 즈비 미그달은 포그롬이 반유대주의를 낳고, 포그롬에 희생된 유대인들 중 사회적 강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들 갱단들은 포그롬이 더 심화될 것을 우려하여 해외로 인신매매될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 여성들 그중에서도 슈테틀(동유럽 농촌 지방의 유대인 집단촌)의 유대인들을 주로 노렸다.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갓 입항한 피해자들은 마치 중세의 노예 시장 비슷하게 자신들을 데려가려는 포주들 혹은 하인을 찾는 부유층들 앞에서 알몸으로 행진하며 치아의 상태 등등을 검사받아야 했고,(#스페인어) 브라질의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렇게 인신매매된 여성들과 같은 시나고그와 유대인 묘지를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만의 시나고그에서 따로 예배를 봐야 했다. 한 편 남미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인신매매 관련한 언급은 미국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반유대주의적인 목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 규모나 실상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는 편이다. 참조 참고로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인신매매 조직이 소탕되던 당시 1930년대는 아르헨티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미국발 대공황으로 전세계 경제가 휘청이던 영향으로 아르헨티나 정부에서 외국인 이민을 제한하려던 시점이기도 했다. 당시 즈비 미그달의 소탕을 보도하던 아르헨티나 언론은 "이른바 고기 시장이 호텔 팔레스티나, 카페 파리지엔이라는 장소에서 열렸다." "부패한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이 다 한통속으로 인신매매를 방조했다.(다시 말해서 이런 놈들은 쿠데타로 쓸려나가도 할 말 없다.)"라는 식의 선정적인 기사를 싣었던 것 역시 비판적으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유대인 이민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해서 아르헨티나 내 유대인 사회는 "유대인 가우초" 등등의 이미지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3] '1889년 러시아 제국에서 아슈케나지 유대인 824명이 아르헨티나에 정착촌을 건설하였고', '프로이센의 유대인 부호들이 이들의 농장에 구호자금을 비롯한 원조를 보내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아르헨티나 초원 지대에는 유대인들이 운영하는 농장과 마을들이 들어서고 유대인 이민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신화가 그것이다.[4]
1차대전 이후 헝가리 왕국(1920~1946)에서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유대인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2차대전 중에는 홀로코스트에까지 가담하는데 이 과정에서 적지않은 헝가리 유대인들이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다. 1929년 미국이 대공황으로 골골거리는 동안 아르헨티나는 헝가리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매력적인 망명 선택지 중 하나였다.
2.1.2. 세파르딤/미즈라힘
아르헨티나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민 왔는데 오스만 제국의 유대인들은 라디노어로 예배를 보는[5] 세파르딤, 지중해 레반트 일대에서 일상 생활에서는 아랍어를 사용하되 아람어로 예배를 보는 미즈라힘 및 고대 이래 아라비아 반도에서 생활하며 에티오피아와 인접한 예멘에 거주하며 흑인과 혼혈화되어 있었던 예멘 유대인 이렇게 크게 세 가지 그룹으로 나뉘었다. 이들 중 예멘 유대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두 그룹은 유럽 기독교인들과 교류가 빈번하였고,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아르헨티나 이민을 선택했다.오늘날 시리아의 대도시에 해당하는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는 오스만 제국 시절 당시에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중심지였다. 전근대 당시에는 세계적인 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나, 19세기 후반부가 되면 인도산 면화를 떨이로 가져와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영국 면화와의 경쟁에서 밀리며 심각한 경제 불황에 시달리게 되었다. 특히 당시 시리아 유대인들 상당수는 직물 유통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에서 지중해 건너 유럽으로 수출하던 견직물, 면직물, 모직물이 국제 시장에서 도태되자, 심각한 경제적 곤경을 겪었다. 이들은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미국의 목화 수출이 막힌 틈을 타서 이집트에서 면화 수출을 늘리자, 이집트에서 장사를 했으나, 남북전쟁이 끝나자마자 이집트의 면화 산업이 몰락하면서 다시 또 곤경을 겪게 되었고, 이들 상당수는 영국 맨체스터로 이주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또 일부 시리아 유대인들이 현지 사회 적응에 실패하고, 결국 아르헨티나나 멕시코로 이주하게 되었다.
상술한 것처럼 영국에서 재이민한 유대인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세파르딤/미즈라힘 유대인들은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를 통해 아르헨티나로 이주할 수 있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마르세유에서 아르헨티나로 향하는 뱃삯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가는 기차표 값보다 더 저렴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로 이주해 온 세파르딤/미즈라힘들은 수가 나름 되었음에도 불구, 이들은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특별히 잘 살거나 유별난 집단은 아니었다. 관련 BBC 기사를 보면 아르헨티나 내 세파르딤 인구 추산치가 4만에서 7만 사이라고 나오는데, 이렇게 추정치가 폭이 크다는 것은 다른 종교나 종파로 갈아탄 사람이 많다는(그래서 정확한 추산이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세파르딤들이 아슈케나짐 종파로 갈아타는 자체도 드문 일은 아니다.
2.2. 역이민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호르헤 비델라 정권에서 더러운 전쟁을 벌일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군부의 반유대주의적 탄압을 피해 이스라엘이나 유럽 각지, 혹은 북미로 이주했다. 1960년대 초 31만여 명에 달했던 아르헨티나 유대인 인구는 2017년 통계 기준 180,500 명으로 다소 감소한 상황이다.3. 현황
- 세계 각국의 유대교 우세 분파를 나타낸 지도.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멕시코와 칠레는 세파르딤 우세 지역, 브라질은 아슈케나짐이 우세하되 세파르딤 인구도 상당수인 것으로 나오는데 비해, 유독 아르헨티나는 아슈케나짐 인구 비중이 우세한 것으로 나온다.
아르헨티나 유대인 인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으며, 미국과 캐나다 다음으로 아메리카에서 세 번째로 크며, 이스라엘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많다.
4. 인물
[1] 포르투갈계 아르헨티나인 문서 참조[2] 무료 열람 가능 논문. 인신매매 피해자 비율 관련해서는 92페이지와 175페이지의 통계 그래프도 참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당시 이민은 남성 이주노동자나 가족 단위 이민이 주가 되었는데, 유독 러시아 제국이나 폴란드 제2공화국 출신 유대인들은 여성 이민자 비율이 높았다.[3] "유대인 가우초"라는 어휘나 개념은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이민자 작가 알베르토 게르추노프의 작품이다.[4] 참고로 상술된해당 논문의 175쪽 그래프 이후 설명에서 이 유대인 가우초 신화가 반박이 되고 있다. 굳이 해당 논문의 통계 자료가 아니더라도 애초에 도회지 주민이었던 유대인들이 아르헨티나에 오자마자 갑자기 목동으로 변신한다는 말 자체가 설득력이 없다.[5] 혹은 조상대에는 라디노어로 예배를 보았던[6] 볼펜을 발명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