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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들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출신 후손들을 의미한다. 현재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의 인구 수는 약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시기적으로 브라질로 이민간 우크라이나인보다 본격적인 이민 역사가 늦었다.2. 상세
기록상 최초의 우크라이나계 이민은 1897년 12가구 69명의 갈리치아 출신 이민자들이 미시오네스 지방에 정착한 것이 최초이다. 브라질로 이민한 우크라이나 인구 대다수가 갈리치아 출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였다면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 중에서는 정교회 출신도 많았다.1차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은 정교회를 믿은 많은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루신인 소수민족 인구가 있었는데, 이들 상당수가 폴란드 제2공화국 내의 차별을 피해 1차대전 이후에도 계속 유럽계 이민을 환영하던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다. 우크라이나인들이 1순위로 희망하던 이민 목적지는 미국이었으나, 미국에서 폴란드계 이민 쿼터를 할당하여 이민을 대폭 제한하자 상당수가 미국 대신 캐나다나 아르헨티나로 빠져나갔던 것이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 중 절반이 정교회 신도였다고 한다. 특히 농토가 척박한데다가 인구 밀도마저 높아서 빈곤 문제가 심각했던 갈리치아 지방 출신 이민자들이 많았다 한다. 2차대전 와중에는 나치독일에서 징집한 우크라이나인들이 탈출하여 아르헨티나로 망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나치 독일에 끌려갔다가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서는 고학력 전문 인력이 많았고 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일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처럼 폐쇄적인 농업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현지 아르헨티나인들과 동화되었다. 여기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의 경우 독자적인 교회 건설 과정에서 다른 가톨릭 신도들과 갈등을 빚어 독자적인 교구 설립이 늦어졌던 이유도 있다.[1]
소련 해체 이후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구소련 및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 출신 국가들 출신 이민자들을 적극 유치하였는데 해당 이민 프로그램에 참여한 인원 중 71.5%가 우크라이나인들이었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6,720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아르헨티나로 이민하였다.
3. 관련 문서
[1] 1940년대에 들어서야 교회가 제대로 건설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