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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14:08:48

아즈텍 제국/인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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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식인의 존재
2.1. 일상론2.2. 종교적 풍습론2.3. 부정론
3. 인신공양의 원인4. 꽃 전쟁5. 결론6. 문화 및 종교 탄압과 소멸

1. 개요

아즈텍 제국은 고도의 국가 체제가 정비된 문명 중 대규모의 인신공양 행위가 제도적으로 있었던 국가들 중 제일 근래까지 존속한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사제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제물의 팔다리를 구속한 상태에서, 흉부를 돌칼로 베어낸 후 심장을 꺼내어 제단에 바쳤다고 한다. 시체는 피라미드 계단에서 굴려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는 당대의 기록에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러한 인신공양을 했던 유적들 역시 발굴되고 있다.

아즈텍의 인신공양 자체는 모두 메소아메리카 지방의 인신공양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였다. 이는 현생인류가 정착한 시기가 다소 늦었을 뿐더러 유라시아와는 교류가 불가능한 완전히 단절된 지역이었으며, 대형 동물의 부족으로 제물로 바치기에 합당한 가치를 가진 것이 인간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기원전의 올멕 문명과 테오티우아칸부터 시작해 메소아메리카 전반에 퍼진 이러한 행태에, 유카탄 반도의 마야 문명,[1] 아즈텍 이전의 톨텍 문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2015년 멕시코시티 내의 템플로 마요르[2]에서 발견된 우에이 촘판틀리(Huey Tzompantli)는 코르테즈 원정대원 안드레스 데 타피아(Andrés de Tapia)가 136,000명의 머리를 전시했다고 기록한 것과 달리 두개골은 현재까지 발견된 수는 670여 개이며, 인근 유적들의 크기와 규모까지 합하였을 때에 최대 1만여 명 정도일 것이라 추산하고 있다.

사실 13만여 명의 두개골을 수납한 촘판틀리는 단순 계산만 해도 테노치티틀란의 전성기 시절 인구수에 맞먹는 엄청난 수이며, 이러한 수의 두개골을 단순 수납하기만 해도 테노치티틀란 전체를 뒤덮을 수준의 크기일 테니 전혀 현실성이 없는 숫자다. 따라서 136,000명의 두개골이 수납되었다는 것은 중세시대에 흔했던, 스페인 측에서 전공을 과장하기 위한 의도의 숫자 부풀리기식 과장법에 불과하다 봐야한다. 특히 13만이라는 숫자는 성경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유명한 숫자인 14만 4천과 유사한 숫자로 중세에는 대충 큰 수를 나타낼 때 흔히 사용되었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템플로 마요르(대신전)에서 출토된 믹틀란테쿠틀리 신의 테라코타에서 나온 성분 분석에서 기록대로 인간의 혈흔이 검출되기도 했다.[3] #

아즈텍이 주변국가들을 인육농장처럼 굴렸다는 주장 또한 대표적인 낭설이다. 되려 정복하기 힘든 규모의 국가들이기에 꽃 전쟁을 통해 서로가 서로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보는 게 맞다. 주변국 역시 아즈텍에게 먼저 꽃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던 것이 그 근거 중 하나. 조선의 변경을 약탈하던 여진족이 조선을 일부러 정복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듯, 아즈텍 역시 일부러 인육을 위해 주변국을 정복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즉 아즈텍이 멸망한 원인은 인신공양에 의한 원한이 아니며, 지속적인 대립관계와 조공 요구로부터 자연스럽게 쌓인 원한이었다. 애초에 인신공양은 당시 메소아메리카 전역이 공유하는 신화적 세계관에 따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종교 제의였다.

2. 식인의 존재

아래 내용들은 만화로 보는 아즈텍 신화 13화의 "식인" 편의 내용을 참고하였다.#

아즈텍 멸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아즈텍 문명을 비롯한 당대 멕시코 지역의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은 꾸준히 논란이 되어왔다. 크게 제도적으로도 일상적으로도 식인이 흔히 퍼져있었다고 주장하는 콩키스타도르들의 지론, 일종의 종교적 풍습으로만 존재했었다 주장하는 당시 선교사들의 지론, 그리고 아예 제도적으로도 풍습으로도 식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주장하는 메스티소계 지론이 존재한다.

2.1. 일상론

대체로 콩기스타도르들의 책들에서 이러한 식인의 존재가 일상적이었으며, 디에고 두란 사제의 기록, 코르테스 밑에서 멕시코 정복을 도운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íaz del Castillo)의 책 '누에바에스파냐 정복의 진실한 역사' 등에서 이러한 기록들이 크게 두드러진다.# 해당 기록들에선 공통적으로 아즈텍인들에게 인간의 고기는 다른 가축들의 고기와 같이 널리 음식으로 애용되어왔으며, 특히 넓적다리 같은 경우는 진귀하여 황제에게 진상되기까지 하였다고 드러난다.

당대 아즈텍의 계급 사회 내에서 위 아래 할 것 없이 식인이 흔하였으며 이러한 보편적인 식인문화가 정착된 아즈텍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 목장을 운영하는 등의 온갖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수준의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증언과 기록들이 큰 신뢰성을 가지기는 힘들다. 디에고 두란 사제의 경우 아즈텍이 멸망한 1521년으로부터 약 16년 뒤인 1537년에 탄생한 인물이며, 본격적인 저술 활동은 1574년부터 시작하였다. 이미 멸망한지 53년이나 지나 아즈텍 문명의 여러 기록들과 유물들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당시 원주민들 역시 기독교에 동화되어 있었기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 디에고 두란 사제의 기록은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또한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를 비롯한 콩기스타도르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들이 본격적인 정복전쟁에 대한 저술 활동은 1521년으로부터 꽤 시간이 지났었으며, 이러한 기록들의 저술 역시 크게 정확도가 떨어지는 개인의 기억을 위주로 편찬되어왔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멕시코를 비롯한 아메리카 대륙의 초기 정복자들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잔악행위들을 벌여왔기에 본토와 교회 등에게 규탄받았다. 이러한 잔악행위들을 정당화하고 더 유리하게 서술하기 위해 당시 메시카인들을 인륜을 거스른 식인종들이자 무자비한 살육자들로 포장해야했을 당위성이 충분하다.

2.2. 종교적 풍습론

식인은 종교적 풍습의 일부였다는 것은 아즈텍 멸망 이후 아메리카 식민지로 파견된 사제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한 내용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신공양을 할 당시엔 신이 몸에 깃들기에 제물을 먹는단 것은 신의 살을 먹는 것과 같은, 즉 일종의 성체성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인신공양 이후엔 제사를 지낸 사제 집단, 그리고 제물로 쓰일 노예나 포로를 잡거나 봉헌한 병사와 노예상에게 식인의 영광이 주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식인은 하나의 종교적 관습으로써 소금만으로 간한 밍밍한 국물에 15g 가량의 인육이 고명처럼 올라갔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요리가 바로 틀라카틀라올리, 껍질을 벗긴 인간 옥수수로 만약 이를 싫어한다면 거부할 권리 역시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 역시 크게 신뢰하기는 어렵다. 우선 이러한 종교적 풍습으로써 식인이 존재했었단 지론의 핵심인 피렌체 문서의 저자, 베르나디노 데 사아군 역시 멕시코 지역에 파견된 것은 아즈텍이 멸망한지 8년이 지난 1529년이었고, 피렌체 문서는 고고학, 문화학적 측면에서의 정확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스페인 선교사들에게 미리 아즈텍의 문화를 교육하기 위한 저서란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의도적인 야만화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목적은 더 많은 원주민들을 더 많이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이 때문에 창세 신화같은 기초적인 문화의 기틀 역시 제대로 서술되지 않았기에 이를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2.3. 부정론

우선 부정론의 가장 큰 지지자들과 주체자들은 아즈텍 멸망 이후 스페인령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성장한 메스티소계 선교사, 종교인, 학자 계층이다. 테소소목 문서, 치말파인 문서 등에선 식인의 묘사들이 나오지 않거나, 나온다하더라도 하나의 도발, 혹은 분노에 의한 잔악행위 등으로 묘사된다. 특히 치말파인 문서에선 메시카 내전, 즉 틀라텔롤코 전쟁 당시 분개한 아사야카틀 황제는 틀라텔롤코가 테노치티틀란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흉계를 꾸미자 이에 격분하여 틀라텔롤코의 대사들을 붙잡아 살해한 뒤, 고기로 만들어 이후 틀라텔롤코 황제와 신하들을 초대하여 그들에게 진상하고 이후 그들에게 동족을 먹었다 힐난하며 곧 전쟁 상태에 들어가기까지 한다.

이렇게 식인이 모욕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위의 두 가지 이론에서 서술되는 일상론, 풍습론 양쪽 모두에 반하는 행위로, 유라시아에서도 비슷하게 제우스에게 자신의 아들을 음식으로 진상하였다가 늑대로 변해 식인종이 되는 벌을 받은 리카온, 정적의 아들을 젓갈로 담았단 상나라의 마지막 왕 제신, 혈육을 살해하고 자신을 속인 팥쥐에게 분노해 거열하여 죽인 뒤 젓갈로 담은 내용이 전해지는 콩쥐팥쥐 등으로 흔하게 등장한다.

오히려 아즈텍은 식인을 장려하는 쪽이 아니라 금지하는 쪽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치말파인 문서, 이슈틀릴쇼치틀의 문서 등지에선 아즈텍이 식인 풍습이 있는 위칠로포코 사람들과 만나자 이들에게 식인을 금지시키고 포교하여 끝내 식인 풍습을 없에도록 교화하였다는 서술이 존재한다. 만약 스페인인들의 서술처럼 아즈텍인들이 식인을 장려하거나 종교적으로 정당화했다면 이러한 행위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행위다.#

또한 여러 식인의 증거로써 쓰이는 유골들에선 소기파같이 당시 진주하였던 스페인인들이나 그들의 앞잡이 행세를 하는 동족들에게 분개하여 그들을 살해하고 복수심에 음식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긴하나 이러한 경우는 유라시아 등지에서도 흔하게 관측되는 행위들 중 하나이며, 오히려 이러한 식인들의 증거 역시도 부정확하기에 온전히 식인에 이용되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칼질 등을 하다가 생긴 상처일지 불확실하다. 무엇보다 식인이 일상화되고 종교화되었다는 테노치티틀란에선 살을 발라내거나 인간의 이빨로 인해 상처가 나는 등의, 도축의 흔적이 있는 유골이 발견되지 않았다.

3. 인신공양의 원인

많은 사람들이 아즈텍인들은 하루라도 인신공양을 하지 않으면 다음날 태양이 뜨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인터넷에 퍼진 속설로 인한 완벽한 오해로, 당연히 당시 아즈텍인들도 인신공양을 하루이틀 하지 않는다고 곧 태양이 뜨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4]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즈텍 신화의 복잡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아즈텍을 비롯한 멕시코 원주민들의 신화에서 신들은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그들 역시 결국 언젠가 힘을 잃고 쓰러질 운명이다. 아즈텍의 신들은 사라지지는 않지만 죽음과 부활을 반복하는 존재들로, 태양신 토나티우가 결국 모든 힘을 잃고 죽는다면 곧 다섯차례의 멸망을 이은 새로운 멸망이 도래할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신들의 존재를 지속시켜주는 에너지, 만물에 깃들어 순환하는 토날리를 바쳐야 했다. 이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신들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신들조차 자신을 공양하여 태양에게 토날리를 바치는데 인간은 당연히 신들을 본받아 이들의 의식을 돕고 우주의 운행에 기여해야 한다는 관념으로 이어졌다.[5] 토날리는 단순히 신체에 상처를 가하는 것만으로도 신들에게 보급할 수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가장 크게 도움이 되는 행위는 결국 인간의 죽음이었다. 한마디로 인신공양으로 바쳐지는 인간들의 기운은 신들의 왕 태양에 공급하는 신성한 연료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기에, 마치 우주를 움직이는 자동차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동차에 매일 연료를 채울 필요는 없듯이 아즈텍 세계관에 태양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아즈텍을 비롯한 당시 멕시코 고문명들의 인신공양이 급증한 계기에는 자연재해와 지각변동이 있었다. 메소아메리카는 톨텍과 테오티우아칸같이 아즈텍이 패권을 잡기 이전의 잘나가던 선진문명들도 갑작스러운 몰락을 겪으며 쇠락한 사례가 굉장히 많았다. 그 배경은 다름이 아니라 멕시코 문명의 치명적인 약점, 바로 신대륙 특유의 재해가 빈번하고 대제국을 유지할 자원이 없는 환경이었다.

아즈텍 신화에서 그 위대한 태양신들조차 다섯 번의 죽음을 통해 교체되어 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톨텍 문명을 비롯한 선진문명들이 그 찬란한 전성기에도 불구하고 자연재해와 기근, 전쟁에 의해 빠르게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재난과 기근에 대한 공포는 메소아메리카 문명인들에게 뿌리깊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문명 흥망성쇠의 역사가 다섯 태양의 시대라는 신화적 메타포로 구전되어 온 것이다. 당시의 멕시코 문명은 물론 유럽 문명들도 자연재해를 완전히 해석하지 못 했다. 더구나 발전하던 문명들이 한순간 갈아엎어질 정도로 재난재해가 흔했던 당시의 메소아메리카 문명에게 있어서 자연재해는 단순히 자연의 변덕이 아니라 인류 멸망이 임박하였단 신호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이런 현상들은 '신들이 힘을 잃어 점점 세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재난재해들이 급증하는 목테수마 1세 시기 아즈텍의 사제들은 제국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런 인신공양을 체계화할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자연재해의 급증에 위기감을 느낀 멕시코 지역의 다른 원주민 국가들과 함께 인신공양을 정교하고 합리적이며 명예로운 형태로 빚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즉, 목을 자르고 심장을 꺼내어 태우는 행위는 신들의 의식을 재현하는 것으로서 아즈텍을 비롯한 멕시코 문화권에선 순교에 맞먹는 신성한 행위였다. 그중에서도 전사계급 이상의 고위층의 심장이 가장 신성하고 순수한 토날리를 많이 담고 있기에, 인신공양이 이루어진다면 웬만하면 높은 계급의 심장을 바치려고 했다. 즉 노예와 일반 백성들을 가축 취급하며 대규모의 인신공양을 벌이고 그 시체를 먹었다는 속설은 스페인의 완벽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인신공양의 부당함은 멕시코 문화권 내에선 힘을 잃기 마련이었다. 피지배층의 심장으로 인신공양을 했는데도 재해와 기근이 닥친다면 지배층의 심장에 깃든 토날리를 바침으로써 모범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배경에서 아즈텍과 주변국의 공통된 종교적 필요와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상호합의하에 제안된 국지전 형태의 종교의례적 전쟁 제도가 바로 그 유명한 꽃 전쟁이다.

4. 꽃 전쟁

아즈텍의 전쟁 방식 중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꽃 전쟁이다. 무기들은 오로지 마쿠아후이틀과 방패만을 이용하며, 매복이나 함정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아야했고, 양측의 머리수 역시 동일해야했다. 이러한 전쟁에서 벌어진 적군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것. 이렇게 생포된 포로들은 인신공양에 이용되었거나 아니면 상대 측 지도부에게 알려 포로 몸값을 뜯어내는 식으로 이용되었다.

5:5부터 400:400까지 다양한 크기와 형태로 일어난 국지전으로, 이는 틀락스칼텍같은 아즈텍에 비해선 영세하나 언제든 강력해질 수 있을 잠재력을 가진, 아즈텍에 적대적인 도시국가들을 상대로 벌어진 전쟁들이다. 아즈텍만의 고유의 전쟁 방식은 아니고 아즈텍 이전 고전기부터 존재해왔던 전쟁 방식이나, 틀락스칼텍과의 200여년 간의 꽃 전쟁은 특기할만한다.

한창 테츠코코 근방을 평정하고 여러 민족 도시 국가들을 복속시켜가며 규모를 불리던 아즈텍은 근방의 틀락스칼텍 역시 몇 번 공격했으나, 이를 요격한 틀락스칼텍 병력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틀락스칼텍을 정복하는 것은 매번 실패했다. 애초에 틀락스칼텍은 목테수마 1세까지도 약소국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며 테노치티틀란을 견제할 정도로 강대한 도시국가였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한 틀락스칼텍에 대한 공략이 매번 실패하고, 그렇다고 틀락스칼텍과의 원수 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놔뒀다간 틀락스칼텍이 어느 사이에 강대해져서 아즈텍을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만 했는데, 이를 위해서 사용한 방책이 바로 서로 간 합의를 하고 벌어지는 소규모 국지전을 통한 견제, 즉 '꽃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전쟁 형태였다.

이는 세력 간의 전면전이 발생했을 시 교착 상태로 빠지고 이에 대해 마땅한 대책이 없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전통적인 의례 전쟁이었다. 이런 형태의 전쟁은 양측에 여러 이점이 있었다. 아즈텍은 막대한 전비로 인해 경제가 망가지는 것을 막음과 동시에 틀락스칼라를 포위하고 사실상 손아귀 안에 있음을 과시할 수 있었고, 틀락스칼라 입장에선 전면전으로 들어간다면 막대한 출혈을 볼 수 있는 상황에서 상대 측 고위급 전사를 잡으면 포로의 몸값을 받아낼 수 있었으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던 것이다. 200여년간 이러한 꽃 전쟁을 통해 균형을 맞춰왔으며 다른 도시국가들에 대해서도 통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6]

그러나 이러한 꽃 전쟁의 지속은 틀락스칼텍같은 복속되지 않은 크고 작은 부족 세력들과 아즈텍 사이에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악감정을 불러올 것이 명확했다. 계속된 아즈텍의 압박과 방어전에 이골이 난 틀락스칼텍은 언제든 테노치티틀란을 파괴하고 싶어했으며, 그러한 감정이 코르테스의 에스파냐 군대와 만나게 되면서 결국 아즈텍 입장에선 최악의 형태로 현실화되었다. 꽃 전쟁 같은 소규모 국지전을 통한 영향력 행사는 고대 그리스 같은 도시국가들의 연합 형태의 권력 구도를 가진 여러 국가들에선 의외로 흔한 형태의 전쟁이기도 하다.

비슷한 것이 스파르타메세니아의 관계다. 스파르타도 실질적으로 정복한 영토인 메세니아를 일부러 멸망시키지는 않고 남겨두었고 매년 메세니아에 대한 전쟁을 선포해 쳐들어가 메세니아인들을 죽였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후일 메세니아를 잃는데, 스파르타가 테베와의 전쟁에서 진 후 테베가 메세니아를 실질적으로 독립시키자마자 그동안 스파르타가 저지른 만행에 이를 갈며 스파르타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지하고 재침공에 대비해 방어준비를 했다. 이후로도 메세니아는 스파르타가 참여한 동맹에는 절대로 참여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반스파르타 성향을 띄게 된다. 이는 틀락스칼텍이 어떤 협상도 없이 메소아메리카 외부의 침략자 편에 붙어 아즈텍을 멸망시키려고 한 것과 비슷하다.

다만 꽃전쟁은 다른 나라 역사의 국지전과 달리 몇가지 독특한 점도 존재한다. 상술한 스파르타의 경우 단지 정치적인 수단으로서 메세니아가 절대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일방적인 학살을 벌이고 속임수를 썼던 반면, 꽃전쟁은 형식적이기는 했을지언정 종교적 의례성이 강하고 틀락스칼텍이 역으로 아즈텍에 전쟁을 선포하고 쳐들어갈 정도로 공평한 대결을 지향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러한 차이는 메세니아의 경우 명확하게 스파르타에게 패배하여 사실상의 복속 관계였던 반면, 틀락스칼라는 불리하긴 했지만 끝까지 저항하여 정복당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즉, 틀락스컬텍이 일방적으로 탄압받는 피지배민족이었다는 통념과 다르게, 아즈텍과 틀락스칼텍은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동등한 위치에서[7] 연합체를 형성했을 뿐인 전통적 대립관계에 가까웠다. 한 마디로 국력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어느 한 쪽을 멸망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니만큼 균형 유지를 위해 서로의 국력을 소모시켜야 했으니, 그 수단으로 선택한 방법이 바로 꽃 전쟁이었다.

꽃 전쟁은 아즈텍과 그 주변국들의 신화적 세계관에 입각했을 때, 이러한 현실 정치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중단할 수 없는 대립을 지속하면서도 느슨한 연맹을 유지하는 모순적인 관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명분이 있는 방안이었다. 상술했듯이 당시 메소아메리카의 인신공양 풍습은 훨씬 이전의 문명에서부터 내려온 전통이었으며, 아즈텍의 대규모 인신공양 역시 목테수마 1세 시기에 아즈텍과 주변국의 사제들이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고 동등한 관계에서 참여하여 합의 하에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제도였다. 인신공양의 원인이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였고, 자연재해는 제국이든 약소국이든 피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었기에 태양신의 죽음을 막으려면 함께 합리적인 인신공양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측 기록에는 틀락스칼텍이 마치 아즈텍의 속국이자 인신공양의 일방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되는데, 이는 스페인 본국의 독자들에게 정복자들을 영웅화하고 그들을 도운 원주민은 쳘저하게 무지하거나 피해자인 존재로 포장될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스파르타를 포함해 대부분의 국가가 사로잡은 포로를 노예로 부려먹은 반면, 아즈텍은 포로를 신성한 인신공양의 제물로 취급해야 했기에 인신공양 전까지 아즈텍의 전사로서 최대한 예우와 대접을 해주는 독특한 풍습[8]이 있었다는 것도 뚜렷한 차이점이다. 그래서 콩키스타도르가 인신공양 직전의 제물을 구해줬더니 왜 내가 신에게 가는 길을 막느냐며 제물이 역으로 화낸 사례로 자주 있었다. 당시 패전한 전사가 인신공양되지 않는다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가족에게조차 신들의 뜻을 져버린 가장 수치스러운 불명예로 취급됐다고 하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상기한대로 아무리 거대한 제국이라 한들, 서로 간의 머리수가 똑같고 무기가 제한되며 매복이나 함정이 없는 제한전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이는 몬테수마 2세의 치세에서 두드러졌다. 꽃 전쟁이 6번이 있었는데. 0승 4패 2무, 즉 한 번도 못 이겼고, 심지어 한 번은 침공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는 몬테수마 2세가 아즈텍 제국이 재규어 전사 제도를 폐지해 전문적인 전투 집단의 양성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필요할 때 전쟁을 선포하는 건 주로 전사의 머리수가 압도적인 아즈텍이었기에, 주변국들은 꽃전쟁이 필요하다고 여기면서도 노동력에 필요한 건장한 남자들을 전쟁에 투입할 수밖에 없게 하는 아즈텍의 갑질에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5. 결론

논쟁이 오가기는 하지만, 가장 명확한 원인은 '농업의 늦은 정착'과[9] '종교'다. 이렇게 종교에 매달린 원인은 빈번한 자연재해와 기근에 대한 공포였다. 아즈텍이 조상으로 여긴 톨텍 문명도 가뭄으로 인해 약해지고 외부 침략을 당했으며 이러한 정기적 기근과 대형 가축의 부재는 인신공양 문화를 지속시켰다. 심지어 아즈텍과 꽃 전쟁을 벌이던 부족들도 기근을 예방하고 아즈텍의 갑질에서 벗어나고자 신에게 비는 차원에서 인신공양을 했을 정도로 인신공양은 메소아메리카에서 일반적인 문화였다. 상나라처럼 일종의 공포정치로 인신공양을 이용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지만 상술했듯이 아예 제의의 목적이 다르므로 틀린 주장이다.

6. 문화 및 종교 탄압과 소멸

그리스도교 문화권으로부터 온 스페인 제국콩키스타도르들과 스페인 선교사들은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럽 국가들의 경우, 고대에는 인신공양 제례가 있었다고는 하나 가톨릭 전래 이후에는 고대 레반트 지역의 인신공양 풍습이 상징화되어 빵과 포도주를 살과 피라고 말하는 제사를 빼면 완전히 사라졌고[10] 스페인에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스페인 전역을 정복한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구대륙과 고립된 채 빈번한 재해로 고대적인 종교의식이 유지될 수밖에 없던 아즈텍의 사정을 중세 유럽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결국 이들의 눈에 인신공양은 반드시 척결되야 할 악마의 농간쯤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교황청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야만적인 문명을 계몽시키고 있다.'라는 도덕적 정당화와 낭만적인 영웅주의적 포장이 잔뜩 들어간 서사가 먹혀들어가기 좋은 지점이었으므로 악마화도 더해졌다. 여기에 더해 스페인 콩키스타도르의 침략 과정에서 여러 문헌과 유적이 파괴되면서 식인설을 포함해 인신공양과 관련한 악마화도 이루어졌다. 특히 아즈텍 신화와 역사, 종교의례에 대한 소실과 왜곡이 심각하다. 세상의 도덕적 양면성을 인정하는 아즈텍 종교의 세계관을 선과 악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닌 선교사들이 이해하지를 못해서 온갖 왜곡을 가해 재해석한 바람에 아즈텍 신화를 테스카틀리포카라는 악신과 케찰코아틀이라는 선신의 대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다만 스페인인 모두가 아즈텍 문화 소실을 자행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아즈텍 토속신앙은 문화인류학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이 원주민들과 같이 나와틀어로 된 기록을 굉장히 상세히 남겼던 바 있고, 당시 예수회나 프란치스코회 성직자들 중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문헌 등에도 박식한 지식인들도 있었던지라 모두가 흑백논리에 빠진 강경파인 건 아니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소수 온건파의 입장에서도 원주민 문화를 왜곡하고 희생시켜서라도 원주민을 카톨릭으로 무조건 개종시켜야 한다는 기본지침이 변경되지는 않았다. 특히 원주민들의 빈번한 반란에 위기감을 느낀 식민화 초기에는 하루라도 빨리 스페인의 문화적, 종교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게 급선무였기에 이는 이들의 문화 탄압을 더욱 부추겼다. 상술한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역시 멕시코 지역에 파견된 것은 아즈텍이 멸망한지 8년이 지난 1529년이었고, 그가 저술한 피렌체 문서는 고고학, 문화학적 측면에서의 정확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스페인 선교사들에게 미리 아즈텍의 문화를 교육하기 위한 저서란 것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의도적인 야만화[11]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목적은 더 많은 원주민들을 더 많이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이 때문에 창세 신화같은 기초적인 문화의 기틀 역시 제대로 서술되지 않았기에 이를 온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

바야돌리드 논쟁에서도 보듯, 콩키스타도르들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원주민 부족들에게 잔혹한 통치를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동안 붙잡은 사제나 귀족 계급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켰으며, 신화 및 역사문헌 파괴에 저항하는 사제와 사관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또 일찍이 회유에 넘어가 복종을 맹세한 자들에게는 기득권 지위를 부여하는 등 큰 혜택을 베풀었다.[12] 물론 제국을 전부 통제하기에는 코르테스 일당의 수가 적기도 했고, 무조건적인 파괴만 일삼아서는 오랜 세월동안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온 한 문명의 고유종교를 말살하기는 무리였다. 이후 폭압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코르테스 일당은 몇가지 보조적인 정책을 동원했다.

우선 스페인 침략자들은 인신공양이 벌어진 이유가 //돼지/ 같은 대형 가축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했고, 사육 난이도가 낮고 번식율이 엄청 높은 돼지[13]를 구해서 키우게 했다. 다만, 돼지의 보급이 다소 영향을 끼치긴 했어도 인신공양이 사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카톨릭이 아즈텍 종교에 유화적인 때가 없었으므로 돼지를 이용한 공양 역시 허용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원인은 사회제도에 있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를 신대륙에 이식한 형태인 엔코미엔다 방식이 멕시코에 정착한 콩키스타도르들 사이에 보편화되면서, 점차 '영주-교회-피정복민'이라는 유럽식 질서가 원주민들에게 익숙해지며 카톨릭이라는 이방 종교가 권위를 가질 수 있는 토대도 만들어졌다. 1503년에 제정된 엔코미엔다 제도의 목적은 아메리칸 인디언의 지위를 규정하여 신대륙 발견 직후에 행해진 강제 노역의 악습을 줄이고자 제정되었으나, 실제로는 원주민을 노예화하는 제도로 악용되었으며, 사실상 과거 아즈텍이 요구했던 조공 이상의 공물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면서 반란의 싹수를 잘라버릴 탄압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렇게 문화 및 종교탄압이 지속되고 구대륙에서 비롯되는 물질적 기반이 마련되자 카톨릭이 급속도로 퍼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시기부터 카톨릭과 관련된 사료가 많이 발견된다. 과달루페의 성모 전승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전승들은 현대에 와서는 토착 종교유산의 파괴를 정당화하고 원주민 개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톨릭의 프로파간다라는 비판도 많다.

그러나 멕시코 일대 정복 이후 가축들이 대거 들어온 뒤에도 인신공양 풍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는데, 인신공양을 부추긴 가장 큰 원인이 종교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근과 재난에 대한 뿌리깊은 공포를 불식시키는, 메소아메리카 환경의 특수성에 발맞춰 발전한 종교가 오랜 세월 정착해 있었기에 인신공양을 하루아침에 없애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이 이들의 개종에 성공한 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의 인신공양 교리가 가톨릭의 성체성사 교리와 꽤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인신공양 외에도 옥수수 가루를 사람 모양으로 반죽한 또띠아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나와틀 종교의식에 이미 존재했다는 점에서 둘이 닮은 부분이 있었다.

상술했듯이 위대한 신이 인간과 세상을 위해 희생한다는 관념은 나와틀 종교에서 낯선 개념이 아니었다. 따라서 '또띠아로 만든 성체'와 '코치닐 염료로 염색한 음료'를 이용해서, 누구보다 고귀한 제물인 하느님의 아들인신공양되어 세상의 멸망을 늦춘 사건을 매주 재현하는 변용은 메소아메리카인들에게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다.

또한 '예수가 모든 사람을 위해 영구히 제물이 되어주셨으니 더 이상 사람이나 동물을 바치는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는 그리스도교의 교리 자체가 여타 종교의 과비용적인 제사의식들을 밀어내고 거대 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던 원동력 중 하나였으니 이는 메소아메리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구세계[14]에도 고대에는 바알 신앙 등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종교가 있었고, 인신공양을 혐오한 고대 로마 종교나 고대 유대교에서도 가축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의식은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이 같은 교리는 이전의 기존 종교에 비해 간소하고 효율적인 종교의식을 통해, 특히 가축을 제물로 바칠 경제적 여유가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크게 어필됐다. 이와 같은 현상이 아즈텍에서도 반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례성사 역시 몸과 영혼의 병을 고치는 신비한 의식으로 여겨져 상대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졌다.[15] 물론 이는 기존 나와틀 종교의 물의 여신 숭배 중에 카톨릭의 세례처럼 물로 신도를 축복하는 의식이 있어서 아즈텍인들에게 익숙하기도 했고, 고유종교에 대한 철저한 탄압을 골자로 성체성사와 세례성사를 보조적으로 보급했기에 개종에 성공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라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게 스페인 침략자들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에서 빠른 속도로 가톨릭을 전파했고, 코르테스의 도래로부터 불과 수십년만에 주요 도시와 국가들에서 인신공양 의식을 거의 말소하는데 성공했다. 아즈텍의 대규모 인신공양은 그 의식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는 강력한 국가가 필요했으나, 스페인인들에게 그런 주요 국가들이 정복된 이상 수행할 수 없었다는 점도 원인이었다


[1] 특히 마야 문명의 경우, 보남팍 유적에서 발견된 벽화에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바 있다.[2] Templo Mayor, 위칠로포치틀리와 틀랄록을 섬기는 쌍두 피라미드를 중심으로 매장된 테노치티틀란 구 시가지.[3] 이와 별개로 한동안 해당 문서에 믹틀란테쿠틀리 신상에 어린아이 혈흔이 검출되었다는 낭설이 작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판케찰리스틀리 축제에서 아마란스 씨앗을 섞어 만든 위칠로포치틀리 신상 형태의 강정에 어린아이 피가 섞였다는 유언비어와 혼동되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는 위칠로포치틀리 신상에 어린아이 피가 섞였다는 설 역시 스페인측에서 뿌린 헛소문이며, 노팔 선인장 과즙을 강정에 곁들여 먹는 풍습이 와전된 것이다. 애초에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했던 믹틀란테쿠틀리 신상은 흙으로 빚은 도자기다.[4] 제사장 틀라카엘렐에 의해 정립된, 차기 태양신이 될 위칠로포치틀리를 위한 인신공양 신앙에서는 특별한 재앙이 없으면 대략 52년 주기로 토날리가 바닥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당시 기대수명을 감안하면 하루는 커녕 최소 두 세대는 지나야 태양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5] 그래서 메소아메리카 신화에는 신들이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스스로 혹은 서로의 심장을 바쳐 태양에게 토날리를 공급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세계관은 훗날 예수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그리스도교의 성체성사 교리가 메소아메리카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밑바탕이 되었다.[6] ##[7] 물론 규모의 차이가 있던 만큼 현실적인 이유로 여러 부분에서 아즈텍이 갑이긴 했지만.[8] 승리한 전사가 패배한 전사를 양아들로 삼았다고 한다.[9] 어느 문명이든 농업이 정착한 직후에는 인신공양이나 순장같이 초기 형태의 종교 제의가 발생했다.[10] 로마 제국 내부에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 사라졌으며, 로마 외부의 이방민족인 바이킹슬라브도 기독교 전래 이후 이런 풍습이 사라졌다.[11] 특히 아즈텍 식인설[12] 아즈텍의 후예를 자처하는 현대 멕시코에서 틀락스칼텍을 매국노 취급하는 것에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다. 물론 이들은 아즈텍 제국에게 오래동안 시달렸다는 이유가 있기에 정당화할 여지가 있지만, 이러한 배신 행위는 아즈텍 고위층 일부도 포함된다.[13] 한 번 태어날 때마다 10쌍둥이는 기본이다.[14] 특히 유럽 문화권 주변[15] 죄와 병을 연관 짓는 세계관은 어는 문화권에서나 보편적인 신앙이다. 기독교를 공인한 것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누스 1세도 세례가 죄를 씻는다는 교리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았다는 일화도 이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와 전혀 상관없는 불교 신화에서도 부처의 은총을 받거나 열반을 했더니 모든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것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와 나와틀 종교가 서로 합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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