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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에서 찍은 소유즈 | 소유즈에서 찍은 아폴로 |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 Apollo-Soyuz Test Project (ASTP) | |
미합중국의 유인 우주 계획 | |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 미션 패치 | |
이름 | 아폴로-소유스 테스트 프로젝트 |
호출부호 | 사령선: CSM-111 |
발사일 | 1975년 7월 15일 19시 50분 UTC 케네디 우주센터, 플로리다 LC 39B |
귀환일 | 1975년 7월 24일 21시 18분 UTC |
미션 기간 | 9일 1시간 28분 |
우주선 | 아폴로 18호 |
사령관(CDR) | 토머스 스태퍼드[1] |
사령선 조종사(CMP) | 밴스 브랜드[2][3] |
도킹모듈 조종사(DMP) | 디크 슬레이튼[4] |
소유즈-아폴로 테스트 프로젝트 Экспериментальный полёт «Союз» — «Аполлон», Союз 19[5] | |
소련의 유인 우주 계획 | |
소유즈-아폴로 테스트 프로젝트 미션 패치 | |
이름 | 소유즈-아폴로 테스트 프로젝트 |
호출부호 | Союз(소유즈) |
발사일 | 1975년 7월 15일 12시 20분 UTC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카자흐 SSR |
귀환일 | 1975년 7월 21일 10시 50분 UTC |
미션 기간 | 5일 22시간 30분 |
우주선 | 소유즈 19호 |
사령관(CDR) | 알렉세이 레오노프[6] |
플라이트 엔지니어(FE) | 발레리 쿠바쇼프[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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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는 소련과 미국의 합동 우주 프로젝트이다. 비록 과학적인 의의를 따지면 그다지 돋보이는 미션은 아니나,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제 합동 우주 프로젝트이고,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로 과열되던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이 이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양국의 경쟁 관계가 해소되어 인류 발전을 위한 협력 관계로 바뀌게 된다. 이후 양국의 우주개발 교류는 훗날의 미르-셔틀 프로젝트와 ISS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역사상 큰 의의를 갖고 있는 우주 미션이다.
또한 아폴로 계획의 대미를 장식하는 미션. 하지만 소유즈는 지금까지 여러 번의 마개조를 통해 장수만세 현역 우주선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2. 승무원
모형에 올라탄 5인
뒤쪽은 토머스 스태퍼드(미국, 아폴로 사령관), 알렉세이 레오노프(소련, 소유즈 사령관)
앞쪽은 디크 슬레이튼(미국, 도킹 모듈 조종사), 밴스 브랜드(미국, 아폴로 사령선 조종사), 발레리 쿠바쇼프(소련, 소유즈 엔지니어)[8]
스태퍼드는 제미니 계획 시절부터 활동하였던 베테랑이자 아폴로 10호의 사령관이었고, 레오노프는 보스호드 2호에서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을 실시했고 그 과정에서 죽다 살았던 인물이다. 브랜드는 아폴로 18호의 사령선 조종사로 달에 갈 예정이었지만 프로그램이 17호를 끝으로 중단되어 새됐던 인물이고, 슬레이튼은 머큐리 세븐의 일원이었으나 미션 직전 심장박동 이상이 발견되며 십수년 넘게 우주비행사 훈련과 팀 구성 등의 업무에 종사하다가 각고의 노력으로 우주비행 자격을 되찾은 인물이다. 한편 상대적으로 신참내기였던 브랜드는 이후 셔틀 프로그램에서 핵심으로 활동했다. 4차례의 테스트 비행 이후 진행된 첫 정규 임무인 STS-5의 사령관을 맡았고, 사상 첫 무선 EVA가 시행된 STS-41-B, 사상 최고령 우주 비행사로 기록을 남긴 1990년 12월의 STS-35에서 사령관을 맡았다.[9]
3. 배경
일단 우주개발사에 있어서는, 1971년 발생한 소유즈 11호의 사고와 관계가 있다. 게오르기 도브로볼스키(Георгий Добровольский) 사령관과 블라디슬라프 볼코프(Владислав Волков), 빅토르 파체예프(Виктор Пацаев)가 탑승했던 소유즈 11호는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류트 1호에 도킹하고 최초로 승무원이 살류트에 진입한 미션이었는데, 이 미션은 귀환 도중 우주선이 좁다는 이유로 여압복을 착용하지 않고 평상복만 입고 대기권에 재돌입하다가 귀환 모듈의 감압 밸브에 문제가 생겨 공기가 빠져나가고 전 승무원이 질식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에 소련에서는 이들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추서와 함께 국장을 치르고 유리 가가린의 옆에 안장하였는데, 이 당시 NASA에서도 조문사절을 보냈고, 우주비행사들의 관을 운구하며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했던 그 조문사절이 바로 아폴로 10호의 사령관으로 달에 갔다왔던 토머스 스태퍼드였다.또한 소유즈 11호의 이 팀은 원래 정규 팀도 아니었다. 인류 최초의 우주유영을 수행했던 알렉세이 레오노프(Алексе́й Лео́нов)와 발레리 쿠바소프(Вале́рий Куба́сов), 표트르 콜로딘(Петр Колодин)의 팀이 내정되었다가 쿠바쇼프의 결핵 진단[10]으로 팀이 통째로 붕괴되며 도브로볼스키의 팀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팀이 귀환 도중 변고를 당한 것이었다. 결국 이들은 이후 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이 1971년은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가 급진전되는등 미국을 위시한 서방권과 공산권 국가들 간의 관계가 개선될 조짐을 보이는 시기였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 등에 관련하여 서로 까대는 분위기였고 인류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류트 1호와 달로 향하는 우주선 아폴로 14호에 대해서도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사실 소련도 중국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는 않은 편이었는데 미국이 중국과 친하게 지내려는 움직임이 일자 더욱 민감해졌다. 다행히 베트남에 파병된 미군의 철수 논의가 시작된 뒤로 어느 정도 원만해지기는 했다만, 어쨌든 전통의 라이벌인 미/소라서...
그러던 1972년 1월, 헨리 키신저가 NASA 국장대행 조지 로를 만나 야 소련 과학원에서 예전에 합동 우주개발 드립 친 거 있다며?[11] 소련 우주국장이랑도 잘 얘기해봐ㅋ 하였고, 그렇게 키신저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NASA는 소련 우주국 높으신 분들과의 합의에 이르렀고, 급기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알렉세이 코시긴 소련 각료회의 의장이 1972년 5월 비용 지불에 대한 양해각서를 쓰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전까지 양국의 우주개발은 전혀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기술적인 난관이 한 둘이 아니었다. 가장 잘 알려진 문제가 바로 대기 문제. 아폴로 우주선은 순도 100%의 산소[12]로 우주선을 채웠던 것과 달리 소유즈 우주선은 지상에서의 대기처럼 79% 질소, 21% 산소의 구성비로 호흡을 했던 것. 때문에 도킹 과정에서 서로간의 보정이 필요했다. 또한 서로 다른 도킹장치에 대한 문제 때문에 상당히 골치아팠는데, 도킹을 위해서는 상호 우주선의 도킹장치를 하나로 통일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나, 서로 도킹장치의 변경은 거부하였다. 결국에는 여유가 되는 아폴로쪽에서 소유즈 도킹장치에 맞는 커플러를 제작하고, 이 커플러에 앞에 설명한 대기 문제를 해결하는 장치까지 달아서 도킹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주비행사들 외에 엔지니어들 또한 양국의 표준규격이나 우주선 디자인과 내부 구성 등이 다르다며 혼란을 많이 겪었는데,[13] NASA 관계자는 '아폴로는 다목적으로 만들어서 조종사의 조종 실력이 중요하지만 좀 쓸데없는 버튼과 기능들이 많았던 반면 소유즈는 하나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서 하나라도 잘못되면 미션 포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우주비행사들에게 주어진 부담이 적었다' 같은 평가를 했다. 양 측 모두 일장일단이 있지만 어째 공돌이들 눈에는 남의 떡이 더 커 보였나보다..
다만 아폴로가 여지껏 3인의 우주비행사로도 별 문제 없이 미션을 수행해온 것과 달리 이 당시의 소유즈는 3인이 모두 소콜 여압복을 입은채 들어앉기엔 좁다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했던지라[14] 결국 당초 소유즈 11호의 승무원으로 내정되었던 레오노프-쿠바쇼프-콜로딘 팀에서 콜로딘은 빠져야 했다.
아폴로와 소유즈의 두 사령관은 이 미션 이전에 각각 장군으로 진급[15]하였는데, 이에 따라 사상 초유의 우주 장성급 회담(...)으로도 기록되었다.
4. 미션
소유즈 19호는 협정 세계시 기준 1975년 7월 15일 12시 20분에 바이코누르 우주기지 유리 가가린 발사대에서 발사되었고, 아폴로는 몇 시간 뒤인 19시 50분에 케네디 우주센터 LC-39 발사대[16]에서 발사되었다.역사적인 악수
그리고 17일 16시 19분 9초에 아폴로와 소유즈는 역사적인 도킹을 이뤄낸 뒤 19일 15시 26분 12초를 끝으로 양측은 도킹을 해제했다. 약 이틀 조금 안되는 시간.
사실, 과학적인 성과를 논하자면 이 미션은 별 볼 일 없다. 어쨌든 이 미션은 공산권과 서방권의 냉전 분위기를 해빙하는 데탕트의 상징이자 양국이 장차 합동 우주개발에 나설 수 있는
미소중력에서의 송사리 부화, 미생물 채집, 균류 번식, 아폴로가 달이 되고 소유즈가 지구가 된 인공 일식 실험 등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대기과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실험을 했는데, 사실 그것이 꼭 이번 미션이어야만 했던 실험들은 아니라 과학적으로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양측 우주비행사들이 평화적 목적의 우주 개발을 추구한다는 선언문에 서명하고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과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우주비행사들과 화상 대화를 하는 등 세계 멸망으로 이어질 대결구도를 타파해보자는 상징성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이 미션은 단순한 선전용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데, 훗날 소련이 해체된 뒤 소련 시절의 물건인 미르 우주정거장에 우주왕복선이 도킹하면서 이 시절의 연구는 다시금 크게 중요하게 여겨졌다. 특히 에네르기아에서 이 미션을 위해 개발한 중성 도킹(Androgynous Peripheral Assembly System, APAS)의 개념 등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으며, 이 미션을 계기로 소련과 미국의 우주기술자들의 교류가 증진되어 훗날의 ISS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소유즈는 이후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달에 착륙한지 6주년째인 7월 21일에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고, 아폴로는 영광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돌이켜보며 추가적인 실험과 활동을 하고 7월 24일 태평양에 착수했다. 다만 아폴로는 재진입 도중 로켓 산화제인 사산화질소가 사령선에 흘러들어와서 브랜드가 정신을 잃고 슬레이튼도 구토를 하는등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은 끔살당할 뻔 했고, 결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2주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된 도킹 모형.
5. 기타
- 워낙에 상징성 있는 역사적 순간이라 그런지 이것의 이름을 딴 소유즈 아폴로라는 담배 브랜드도 있다.관련 사진 아폴론 소유즈 라는 이름으로 게임 Escape from Tarkov에서 소모품으로 패러디 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러시아 현지에선 아저씨 담배 취급을 받는지 이걸 피는 젊은이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어르신들이나 좀 피는 듯하다.
- 이를 기념하여 명명된 소행성(2228 소유스-아폴로)도 있다.
- 이 프로젝트는 프랑스어 기반의 우주항공 용어이던 랑데부(Rendez-Vous)란 말을 전 세계구급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프랑스의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장 미셸 자르의 8집 앨범 Rendez-Vous도 이 프로젝트에서 영감을 얻었고, 이 앨범의 타이틀곡 Rendez-Vous도 전 세계적으로 히트했으며 시대를 초월한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이 앨범이 기획한 '세계 최초로 우주에서 녹음하려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는데, 하필이면 그 우주선이 챌린저 우주왕복선이었기 때문에... 성공했다면 제임스 맥네어는 인류 최초로 우주에서 녹음한 연주자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이 곡은 십몇 년 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때에도 밴드 Apollo 440과의 공동작업으로 Rendez-Vous '98로 리메이크었고, 다시 한 번 인기를 끌었다. 현 세대는 이 버전을 더 기억할 듯.
- 아폴로의 경우는 달 탐사 로켓인 새턴 V 로켓이 아니라 새턴 I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고작 지구 궤도에만 올라가는 미션인데 거대한 새턴 V 로켓을 쏘는 것은 연료와 자원 낭비일 뿐이다.
- 이 비행을 끝으로 아폴로 계획으로 수많은 새턴 로켓을 발사해 온 케네디 우주센터의 LC-39A 발사대는 잠시 폐쇄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의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개시되면서 LC-39B와 동시에 우주비행사 탑승 및 연료 주입, 그리고 대형화물 적재용 고정식 타워를 추가하고[19] 우주왕복선 전용 발사대로 개조되었으며, 2011년 7월 셔틀의 마지막 미션인 STS-135의 발사대가 되는 영광을 안고 다시 폐쇄되었다. 현재 LC-39A 발사대는 스페이스X가 2014년부터 20년간 임대 중이며 2017년부터 팰컨 9와 팰컨 헤비를 취급 중이다. 참고로 우주왕복선 시대에 사용되곤 했던 고정식 타워는 스페이스X에 넘어간 이후로는 옆에 붙은 대형화물 적재 장비를 잘라내고 새로운 보딩 브릿지를 장착하여 계속 쓰고 있다. 한편 이웃한 LC-39B 발사대는 당초 아폴로 계획의 후속 프로젝트로 계획되었던 컨스텔레이션 계획의 유일한 산출물인 아레스 I 로켓을 시험발사한 적이 있고 NASA가 SLS 로켓 발사용으로 리모델링하면서 고정식 타워가 다시 사라졌다. 아르테미스 계획에서도 아폴로 때처럼 MLP에 타워를 세워서 사용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들 케이프 캐내버럴 발사대 중 3개는 한국이 협정을 맺고 임대해서 쓸 예정이다.[20]
- 아폴로 우주선을 사용한 마지막 비행이며, 사령선은 로스앤젤레스의 캘리포니아 과학 센터에 전시되고 있다.[21] 스미스소니언 협회는,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소유스의 본체와 아폴로 우주선의 실물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 영화 발레리안: 천 개 행성의 도시의 시작 부분에서 영화의 주 무대가 되는 우주 정거장의 연합도시 '알파'의 시초가 되는 도킹이 바로 이 프로젝트였다. 이 도킹을 시작으로 중국 우주선, 인공중력 발생 장치, 각종 외계인들의 우주선들이 차례차례 도킹되면서 지구 궤도상에 우주 정거장으로 이루어진 도시가 이루어지는 장면이 백미이다.
- 드라마 애플TV+의 포 올 맨카인드 시즌 2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뤄진다. 다만 대체역사인 만큼 1983년에 추진되고 있다는 설정인데,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NASA 국장이 사망하는 등의 사태로 인해 이 프로젝트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일단 갈등을 무마하고 양측의 우주선이 발사되지만,[22] 그와 동시에 달 기지에서 오해로 인해 미국 우주비행사가 소련 우주비행사를 사살하고, 그 보복으로 소련측에서 미국 달 기지를 전면 공격하여 미국측 사망자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핵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미국측 우주비행사들이 예정대로 소유즈와 도킹하여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로 결정하면서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달 교전 사태도 마무리되고 레이건-안드로포프 정상회담을 통해 평화가 회복된다.
[1] CDR백업 앨런 빈.[2] CMP백업 로널드 에반스.[3] 원래 내정된 사령선 조종사는 잭 스와이거트였으나, 아폴로 15호 우표 사건에 연루되어 계획 단계에서 강판당했다.[4] DMP백업 잭 루스마.[5] 소유즈의 19번째 미션이었다. 반면 아폴로는 비공식으로 아폴로 18호라는 명칭이 불리지만 이전에 스카이랩에 쓰였던 아폴로 우주선들도 있거니와 무엇보다 팀원 구성과 임무 일정도 다 계획했다가 파토난 아폴로 18호를 배려해야 했던 NASA에서는 그냥 ASTP라고 부른다.[6] CDR백업 아나톨리 필립첸코.[7] FE백업 니콜라이 루카비스니코프.[8] 여담으로 이 기념사진에는 고증오류가 하나 있다. 뒤에 성조기와 함께 걸려 있는 소련 국기에 있는 별은 원래는 저렇게 통짜가 아니라, 금색 테두리의 붉은 별이어야 한다. 하지만 정작 이런 상징성이 큰 기념 사진에서조차 고증이 틀릴 정도로 이 원칙은 소련 내에서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9] 59세의 나이로 세운 이 역사상 최고령 기록은 이후 STS-80의 61세 미션 스페셜리스트 스티브 머즈그레이브가 경신하고, 이후 STS-95의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이자 프렌드십 7호의 레전드인 77세의 존 글렌 상원의원이 경신한다.[10] 그런데 사실 오진이었다.[11] 소련 과학원장 므스티슬라프 켈듸쉬가 NASA의 3대 국장 토머스 페인에게 이런 답을 보냈고 한번 관계자들간 회담도 열렸지만 진전은 없었다.[12] 대신 0.3기압이었다.[13] 예를 들면, 미국 쪽은 각종 기술적인 자료가 문서로 체계화되어 있어서 참고하기 편했지만, 소련쪽은 그런거 별로 없고 기술자의 경험이 주가 되어서 움직였다.[14] 이 문제는 아예 소유즈 사이즈를 좀 키워서야 해결되었다.[15] 레오노프는 소장(★)이 되었고, 스태퍼드는 준장(★)이 되었으며 이후 중장(★★★)까지 달았다.[16] 아폴로 우주선을 달로 보냈던 이 발사대도 ASTP 미션을 끝으로 폐쇄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시작되자 우주비행사 탑승 및 연료 주입, 그리고 대형화물 적재용으로 고정형 타워를 새로 건설한 다음 부활했다.[17] 실제로 양국간 합동 우주미션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나 다시 이뤄졌다.[18] 폴류스니 SDI니 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프로젝트가 계속 이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시도'로만 끝났다.[19] 새턴 로켓의 경우 이동식 발사대에 연료 탱크 및 보딩 브릿지가 붙은 타워가 일체화되어 있었고 이를 로켓 수송용 무한궤도차량(크롤러)를 이용하여 VAB에서 발사장으로 이동시키게 되어 있었다. 현재의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군 기지 SLC-40 발사장을 생각하면 되는 구조.[20] MOU는 체결되었는데 아직까지 실제로 쓰인 적은 없다.[21] 이곳에는 우주왕복선 엔데버 호 역시 전시되어 있다.[22] 아폴로 계획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설정이라 미국측은 아폴로 75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