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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colcolor=#fff> 한글 명칭 | 아프리카 국민회의 아프리카 민족회의 |
약칭 | ANC |
창당일 | 1912년 1월 8일 |
정치 이념 | 사회민주주의 아프리카 내셔널리즘 반제국주의 |
정치적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좌익 |
당 색 | 검은색 (#000000) 초록색 (#008000) 금색 (#ffcc00) |
주소 |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 Luthuli House, 54 Sauer Street |
대통령 | 시릴 라마포사 |
부통령 | 폴 마샤틸레 |
의장 | 그웨데 만타셰 |
사무총장 | 피킬레 음발룰라 |
제1사무부총장 | 놈불라 모코냐네 |
제2사무부총장 | 마로페네 라목고파 |
국제조직 | |
청년조직 | ANC 청년 연맹(ANCYL) |
여성조직 | ANC 여성 연맹(ANCWL) |
기관지 | ANC 투데이 |
당가 | 주여 아프리카를 보호하소서[1] |
평의회 (상원) | 43석 / 90석 (47.8%) |
국민의회 (하원) | 159석 / 400석 (39.8%) |
당원 수 | 661,489명 (2022년 기준) |
당기 | |
공식 사이트 |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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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당. 1990년대부터 장기 집권 중인 집권 여당이며, 압도적인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표방하고 노조들과 동맹 관계를 이루고 있지만, 경제정책은 중도적이라는 평도 있다.2. 역사
1912년 시민단체 형태로 창립되었으며 20세기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중요한 흑인 저항 운동 단체였다. 1950년대에는 내부 무장 조직 '국민의 창'을 통해 무장 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넬슨 만델라의 석방과 함께 평화적 저항으로 전환했다. 90년대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면서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평화적 철폐를 이끌었다.2.1. 창립과 초기 평화투쟁
1912년에 정당이 아니라 일종의 시민단체와 유사한 단체로 창립되었다.1940년대 남아공 연합당 정부에 대항하여 인도계 단체와 연합하여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하여 대대적인 파업을 벌이기도 했었고, 인도계 단체와 연합하는 과정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의 영향을 받은 측면도 있었기 때문에 1950년대까지는 평화투쟁을 지향했다.
2.2. 1950년대 - 1980년대 무장투쟁
1950년대 들어서 대도시 지역의 흑인들이 오지로 내몰리고, 많은 부부들이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혼당했으며 기존에 투표권을 가지고 있던 컬러드(흑백혼혈)마저도 투표권을 박탈당하자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희망을 버리고 내부 조직인 '민족의 창'을 창설하여 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화력이 안되었고 조직력도 그리 뛰어나지는 못해서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있어도 백인 국민당 정부를 제압하지는 못했다.[2]더군다나 남아공 백인정부는 탄압정책을 완화하지는 않고 오히려 아프리카 국민회의라는 조직 자체를 테러 단체로 매도하여 더더욱 잔인하게 탄압하였다.[3] 그러나 흑인 국가들이 하나하나 독립해나가면서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강력한 우군을 얻게 되었고, 1970년대 들어와서 백인정권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펼쳐나갔다. 1980년대 남아공 백인정부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조금 완화하는 듯싶었지만 여전히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등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을 지속하면서 아프리카 국민회의는 적극적으로 반발하며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2.3. 넬슨 만델라의 석방과 평화주의로의 변화
그러다가 1989년 F. W. 더클레르크가 남아공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넬슨 만델라가 석방된 이후에 아프리카 국민회의의 노선은 평화주의적으로 다시 바뀌었고 당시 백인 정권과 협상에 나서면서 인종차별 철폐 주장을 관철시켜나가 끝내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전면 폐지시켰고, 다음해에는 흑인 역시 참정권을 보장받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여파로 당시 반투스탄(홈랜드) 지역내의 흑인정권들[4] 이나 잉카타 자유당[5], 아프리카너 민족전선, 아프리카너 저항 운동 등의 백인 극우주의자들 사이 내전이 터질 듯한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처음 치러진 1994년 총선에서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압승하고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 백인 극우주의자들이 백인들 내에서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잉카타 자유당과 국민당과의 연립정부를 수립하면서 유야무야되었고,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면서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시절에 잔혹한 짓을 저질렀던 것에 비해, 대체로 관용적으로 포용하는 등의 화합정책을 펼치며 백인들의 불안감을 누그려뜨렸다.
2.4. 계속된 1당 독주, 하지만 당세 축소
만델라 퇴임 이후 타보 음베키 시절 들어서면서 부정부패 사건이 터지고 경제는 상당부분 성장했기는 했지만 그 과실이 일부 계층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흑인들 사이에서 아프리카 국민회의 소속 정치인에 대한 평판은 급속히 나빠졌다. 하지만 그래도 불과 30년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남아공 내의 토지를 자유롭게 구매하거나 백인거주구역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도 없었고, 교육도 제대로 받기 힘들었기 때문에 여전히 아프리카 국민회의에게 애정을 가진 흑인들도 많아서 각종 선거에서 득표율 60%는 기본적으로 깔고 들어간다.예외적으로 웨스턴케이프나 대도시 지역에서는 민주동맹에 밀리거나 타 지역에 비해 득표율을 적게 가져가는 경향이 있으며, 흑인이라고 해도 젊은층에서는 상대적으로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대한 지지는 비교적 약한 편이며[6], 아파르트헤이트가 실행되었을 때 같이 차별받았던 인도계나 컬러드도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대한 지지가 약한 편이다. 줄루족도 같은 줄루족 역시 제이컵 주마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아프리카 국민회의에 대한 지지가 약했다.
그렇지만 2014년 총선 이후부터 주마 대통령이 부정부패로 말썽을 일으키는데다가 재무장관을 함부로 바꿨다가 주가가 추락하는 등의 난맥상을 보였고 경기침체로 거기에 청년실업률이 50%에 달하고 전체 실업률은 30%를 넘기때문에[7] 대학생과 청년실업자들, 중산층들 사이에서 민심이반이 심각해서 2016년 지방선거에서 웨스트 케이프[8] 지역은 물론, 주요 대도시 지역[9] 에서 중산층은 민주동맹(DA) 청년층은 경제자유투사당(EFF)으로 표가 쏠려서 패배할 것이라는 전망이 슬슬나오고 있다.[10] 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와 아프리카 민족주의. 인종화합을 내걸고 있으며 남아공 공산당, 남아공 노총과 협렵관계다. 그러나 남아공 공산당이나 코사투측 내부에서 자신들이 내세운 경제정책이 반영되지 않는데다가 빈부격차 또한 심하고 사회인프라 시설 구축같은 것도 아파르트헤이트 시절보다는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좋은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코사투 회원이나 남아공 공산당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상당하다 전해지며 남아공 노총 내에서도 ANC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는 세력들이 힘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이고 2014년에 남아공 노총에서 ANC 지지를 철회하자는 세력(금속노조)을 제명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2016년 지방선거에서 득표율이 54%에 그치는 참패를 거뒀다. 그나마 9개 주 의회 가운데 7개 주에서 과반을 달성했지만 하우텡주[11]에서 득표율 과반에 달성하지 못했으며(45.1%) 케이프 타운을 제외한 7개의 주요 대도시[12] 지자체 가운데 4곳(요하네스버그, 프리토리아, 포트 엘리자베스, 에크룰레니)도 야권에게 과반을 넘기는 참패를 거뒀다. 덕택에 2019년 총선에서 ANC가 과반수에 미달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이 와중에도 주마는 지속해서 살아남고 있지만 주마에 대한 비토가 워낙 심하고 각종 추문과 빈부격차 문제 해결 실패, 경기침체, 고실업 등의 문제에도 주마를 감싸는 ANC에 대한 실망감이 퍼지고 있기 때문에 차기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미지수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2017년 12월에 있던 ANC 전당 대회에서 현 부통령인 시릴 라마포사가 승리, 당수가 되었다. 제이컵 주마가 대통령이었던 2009년 부터 현재까지 비록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마무리 했고 당당히 BRICS의 일원이 되었지만 경제 불안정으로 한때 1달러당 18랜드까지 치솟았고[13] 인도 재벌인 굽타 가문과 주마 간의 유착이 명백화 되었고 인종간 갈등이 극심해져 주마를 탄핵하려던 시도가 주마 임기 도중에 무려 9회나 있었지만[14] 집권당 ANC의 반대로 의회 레벨에서 부결되었고 ANC는 상당한 신망을 잃었다. 집권당이 그만큼 뻘짓을 해댈 동안 리버럴한 관광도시이자 흑인의 영향이 적은 케이프타운과 그 주위인 웨스턴케이프 주를 베이스로 하는 DA 가 약진했고 심지어 최대도시 요하네스버그를 2016년 지방선거에서 ANC를 누르고 승리했을 정도였다. 또 ANC의 청년부 총재였고 극단주의자여서 결국 쫓겨난 줄리어스 말레마가 2013년에 창당한 EFF[15]는 가난한 흑인 및 유색인종, 특히 청년 계층으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어 ANC vs DA 구도 [16][17]를 깨뜨려 천하삼분지계를 구축, 심지어 대권까지 노릴 정도로 곤고한 지지층을 만든 상태이다. 시릴 라마포사는 당수가 된 후 첫번째 기자간담회에서 부패척결 을 내세웠고 주마가 망쳐놓은 당 내 정리 및 2019년에 예정된 총선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해 쉼없이 뛰어야 하는 상황이다.[18]
라마포사 체제가 성립된 후 대통령 주마는 더 이상 안고 갈 필요가 없어졌다. 거대한 버팀목이었던 ANC는 새로운 당수가 선출된 이후 주마에게 하야를 요구했고 주마는 당연히 거부한 뒤 2018년 6월에 나가겠다고 네고를 쳤지만 ANC는 2018년 2월 12일 주마를 리콜했고 당장 하야하지 않으면 2월15일에 탄핵투표로 우리가 끌어내겠다 라고 반응해 결국 2월14일 남아공 시간 밤 10시 주마가 하야를 선언했다. 2018년 2월14일 주마 하야선언 부로 부통령인 라마포사가 바로 대통령 직을 승계해 2019년 4월까지 임기를 채우게 되었다.[19] 라마포사 같은 경우 거대정당 ANC의 당수로서 어차피 2019년 선거에 대통령으로 선출 될 수순이었는데 만약 그렇게 되고 2024년에 있는 재선까지 성공한다면 자그마치 11년 동안 대통령 직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라마포사는 2019년 총선을
2020년 세계적인 코로나19 위기로 남아공도 한때 전세계 확진자 순위 5위까지 찍는 등 혼란이 가속되자 2020년 3월 27일부터 락다운을 발효해 전세계서 가장 엄격한 규정으로 나름 방역을 체계적으로 이끌었지만 동시에 경제가 휘청거려[20] 가뜩이나 만성적인 불황에 시달렸는데 더더욱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4월에 편성한 코로나 추경 한화 약 33조원이 7월에 모두 바닥났고 이게 ANC 쪽 정치인과 관료들이 신나게 해먹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21] 반 ANC 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러하기에 대통령 이자 당수인 라마포사가 직접 나서 부정부패 척결작업에 돌입했지만 ANC 가 ANC 의 부정부패를 심판하려 한다는 조롱 여론이 있고 상기됐듯 무언가 확실한 쇄신이 없으면 정권유지는 커녕 유실을 걱정해야 하는 상태이다.
한편, 주마는 줄루족의 맹목적인 지지를 받는 거물이라 하야했지만 성대한 환송회도 치렀고 임기 중 말 많던 은칸들라 사저에서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는데 심지어 권력욕도 버리지 못한 상태이다. 당내 친 주마 의원들이 많아 부정부패 수사는 거의 안되고 있고, 2021년 주마를 법정모독죄로 구속했지만 바로 폭동이 터지는 등 추하게 나가도 강성한 지지층이 있어 쉽게 당내 정리가 안되는 상태이다.
결국, 2021년 11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과반을 넘지 못하는, 상대적이긴 하지만 기존 성적과 비교했을시 대참패를 당하면서 케이프타운을 제외한 대도시에서는 연정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물론 이를 ANC가 주도한 일당 독주 체제에서 사실상 다당제에 기반한 연정체제로 접어들었다고 좋게 보는 시선도 있긴 했다. 2022년 1월 8일에 창당 110주년을 맞이했다. 다만 작년 지방선거 참패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모양새.#
2022년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의 러시아 편입에 관한 국민투표 당시 청년조직에서 투표 감시단을 파견하면서 간접적으로 국민투표 시행 주체인 러시아 지지 의사를 나타냈다. 이에 대해 남아공 우크라이나 협회에서 정부 개입 여부와 파견 자금 출처 등을 묻는 비판 성명을 내고 직접 당에 문의하기까지 했으나 아프리카 국민회의 측은 침묵을 유지했다.#[22]
2023년 전력 생산 시설을 제때 보수 및 교체하지 않았던 댓가로 심한 전력난이 발생[23], 전국에 순환정전(Load Shedding)이 벌어지고 있는데 하루 최소 6시간에서 최대 10시간 가까이 계획적으로 단전되고 있어 막대한 불편과 경제적 손실이 감수되고 있다. 전력 이외 수도도 인프라 문제로 단수한다는 루머가 돌고, 각종 사회적 간접자본과 치안도 악화되어 국민 여론도 영 좋지 않다. 이에 라마포사 대통령이 부랴부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전력부를 신설, 사적 발전도 혜택을 줘가며 용인해주는 판국이다. 물론 그와 별개로 정부 및 ANC에 대한 비판이 커져가 2024년 총선 결과도 사뭇 궁금해지는 상황이다.
2.5. 2024년 총선과 그 이후
2024년 총선을 앞두고는 30년만에 단독 과반 실패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여겨지고 있다. 지지율도 이전보다 많이 내려와 총선 직전까지 30% 후반대에서 40% 초반대를 유지하는 선에 그치고 있다. 그래도 지지율 2위인 민주동맹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기 때문에 1당 가능성이 높지만 창당 이후 첫 단독 과반 미달 상황에서 연정 구성을 고려해야할 것으로 보인다.선거 패배의 사유는 이러니 저러니해도 극심한 실업률로 대변되는 경제 상황. 2024년 1분기 기준으로 국민 전체 실업률은 무려 32.9%이고[24], 청년 실업률은 45.5%로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때문에 치안도 좋지 않아져 살인률이 10만명 당 45명으로 아프리카에서도 최악 수준이다.[25]
2024년 5월 29일 투표 및 이후 개표 결과, 159석을 얻어 1994년 이후 첫 단독 과반 미달이 확정되었다. 국민회의에서 축출당한 제이컵 주마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족의 창(MK)이 약 14%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58석으로 대선전한 영향을 그대로 받은 것인데, 연정 구성을 추진할만한 정당도 많지 않다는 것이 큰 장애물이다. 민족의 창은 당연하게도 연정 구성을 하려면 사이가 나쁜 시릴 라마포사 현 대통령의 사임과 주마 전 대통령의 사면을 요구할 것이고, 경제자유투사당(EFF)은 이미 지방정부 차원에서 연대한 경험이 있으나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나 ANC 지도부가 원치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은 제2당에 오른 민주동맹(DA) 측에서 국민회의와의 연정 구성 가능성을 먼저 언급했으며, ANC 측도 원로들이 DA를 선호한다고 한다. 그웨데 만타셰 의장 역시 다른 정당들과 비공개로 연정 협상을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6월 2일, 피킬레 음발룰라 사무총장이 선거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연정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공식화했으나 그 요구 조건이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의 퇴진인 경우는 배제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6월 4일 기준으로 DA와 EFF 측 및 기타 소수 정당 3당과 연정 협상을 타진했지만 아직 긍정적인 단계까진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ANC는 특정 정당과의 연정보다는 거국내각의 형태를 띄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고 한다. 이틀 뒤에는 MK 역시 연정 협상에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6월 12일., 잉카타 자유당이 연정 참여를 결정하였다.#
6월 14일 최종적으로 아프리카 국민회의(ANC)-민주동맹(DA)-잉카타 자유당(IFP)-애국동맹(PA)이 ANC가 제안한 '국민통합정부'를 구상하여 연립내각을 수립했다. 이날 의회 본회의를 통해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되었고, 6월 19일에 공식 취임식을 할 예정이다.
사실 이런 조합이 아프리카 국민회의로서는 아주 어색한 조합만은 아닌데,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정권교체에 성공했을 때 단독과반을 확보했음에도 인종화합 차원에서 민주동맹의 전신 중 하나인 국민당, 그리고 잉카타 자유당과 연정을 구성해 국민통합정부(Government of National Unity)라고 명명한 바 있기 때문.
각료직 분배와 관련하여 협상중인 상황에서 자유전선 플러스 등 소수 6정당이 추가로 합류했다. 6월 30일 내각 배분이 완성되면서 이제 공식적으로 라마포사 정부 3기가 출범했다.
3. 역대 선거결과
1994 총선 | ||
하원 | 252/400 | 62.7% |
상원 | 60/90 | |
1995 지방선거[26] | 58.0% | |
1999 총선 | ||
하원 | 266/400 | 66.4% |
상원 | 63/90 | |
2000 지방선거 | 59.4% | |
2004 총선 | ||
하원 | 279/400 | 69.7% |
상원 | 65/90 | |
2006 지방선거 | 66.3% | |
2009 총선 | ||
하원 | 264/400 | 65.9% |
상원 | 62/90 | |
2011 지방선거 | 62.1% | |
2014 총선 | ||
하원 | 249/400 | 62.2% |
상원 | 60/90 | |
2016 지방선거 | 53.9% | |
2019 총선 | ||
하원 | 230/400 | 57.51% |
상원 | 54/90 | |
2021 지방선거 | 45.95% | |
2024 총선 | ||
하원 | 159/400 | 40.18% |
상원 | 43/90 |
[1] 1994년 ~ 1997년까지 남아공의 국가이기도 했다.[2] 실제로 평화주의자로 유명한 넬슨 만델라도 당시 무장 투쟁을 하였다. 사실 원래는 평화주의적 노선을 걸었지만 희망이 안보이자 1960년대에 무장노선을 걸으려 했다가 남아공 당국에 붙잡혀서 27년간 옥살이하다가 무죄로 출옥한 이후, 다시 생각을 다잡고 평화주의 노선을 걷게 된 것이다.[3]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도 진영논리로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테러단체라 언급했다가 비난을 받았다.(...)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고, 만델라와 만나 화해하였다.[4] 대표적으로 보푸타츠와나의 독재자 루카스 망고페 (Lucas Mangope)는 권력을 내려놓기를 거부하며 1994년 아프리카너 민족전선같은 극우 단체는 물론이고 아프리카너 저항 운동같은 테러리스트들까지 불러모으며 완강히 저항하는 과정에서 보푸타츠와나 유혈사태를 일으켰다.[5] 줄루족 정당으로 1970년대에는 아프리카 국민회의와 연대관계였으나 코사족과 줄루족간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있고, 1980년대에 남아공 백인 정부가 이들을 지원하면서 적대관계로 돌아섰다.[6] 남아공의 청년실업률이 높다보니까 그렇다. 빈부격차가 큰 것도 있고 인프라 확장도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더뎌졌다.[7] 경제난으로 아우성인 남유럽 국가들의 전체 실업률보다 높고 청년실업률은 비슷한 수준이다.[8] 이 지역은 원채 컬러드가 많이 살아서 1990년대에는 국민당의 텃밭이었고 국민당이 와해되고나서는 ANC가 잠깐 집권했을때가 있었지만 2000년대 중후반부터 DA(민주동맹)의 텃밭화가 진행되었다.[9] 요하네스버그-프리토리아 도시권, 블룸폰테인 도시권, 더반 도시권, 넬슨만델라 베이(포트 엘리자베스) 도시권[10]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당주도 체제가 끝난다는 얘기까지는 잘 안나오는게 사실 지방조직력은 강하고 중장년층에서의 ANC에 대한 지지는 여전히 강하기 때문에 지방에서의 우위는 유지될걸로 예측되기는 하며 그 때문에 득표율 50%대는 유지될걸로 보인다. 대도시 지역에서의 우위가 무너진다는것만으로도 파장은 크겠지만[11] 국토 면적 대비 1.5% 수준으로 가장 작은 주지만 최대 경제도시인 요하네스버그와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 이를 중심으로 한 대형 위성도시들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남아공 국내는 물론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도 가장 경제력에서 앞서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남아공 GDP의 33%, 아프리카 전체 GDP의 10%가 이 주 하나에서 나오는 수준.[12] 기존에 ANC가 집권하던 곳이었다.[13] 주마의 전임인 음베키 시절엔 1달러 당 10랜드를 유지했고 한때 8랜드 대 까지 간 적도 있었다.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주마 1기 초반부인 2010년 월드컵 때 만 하더라도 USD1=ZAR10~11 정도로 괜찮았던 시절이었다.[14] 제일 최근은 2017년 8월8일.[15] 극좌 극렬 아프리카 민족주의 정당. 백인 학살과 재산몰수 및 외국자본 추출을 공공연 하게 주장한다. 참고로 여기서 나오는 백인 학살은 주로 농장주들을 뜻하는데 상당수의 흑인들이 1차산업, 농업에 종사하는데 백인은 거기에 비해 극소수의 인구수이지만 전체 농장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 쉽게 말해 '백인=영주, 흑인=농노'인 구조라 윗동네처럼 죽창질을 하자는 슬로건.[16] 그래봤자 주마 집권 이전에는 ANC 절대다수에 DA가 그나마 케이프타운은 베이스로 하고 유일하게 좀 의미있는 야당처럼 기능했다. 남아공에는 상당히 많은 정당이 있고 심지어 아파르트헤이트의 주동자인 백인 아프리카너 정당도 존재하지만 ANC와 DA를 제외한 나머지 정당은 적어도 2013년 이전까지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다.[17] 그나마 DA가 백인정당 이라는 이미지를 없애려고 흑인인 음무시 마이마네를 원내대표 및 당수로 선정했고 주마가 실정하는 동안 텃밭인 케이프타운과 웨스턴케이프 주 를 잘 가꾸어 좋은 이미지를 생성해 주마 임기 (2009년 4월 당선~2018년 2월 하야) 동안 기존의 서남해안가 지역정당에서 전국 정당으로 성장했다.[18] 남아공은 의원내각제와 같은 대통령제 국가로 집권당의 당수가 대통령을 맡는 구조이다.[19] 남아공의 정치 시스템은 대통령직이 공석이 될 경우 부통령이 바로 대통령직을 인계받아 다음 대선까지 수행하게 된다.[20] 20년도 2분기 경제성장률은 전년대비 -51% 였다.[21] 일례로 개인에 대한 코로나 지원금으로 ANC 소속 지방관료가 한화 4억을 받아가고 그걸로 슈퍼카를 구매했다 한다. 신청하면 인당 R350 (한화 2만5천원 정도지만 시골지역 물가로는 약 2주 정도의 식비는 된다.) 지원금에 그 외 여러 개인과 법인에 주는 지원책이 마련됐었지만 실현된 경우는 거의 없다.[22] 다만 지도부의 성향과 별개로 2022년 11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남아공 전체 여론이나 ANC 지지자 여론이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는 70% 이상이 규탄해야 한다고 응답했고, 정당한 행위였다는 응답은 10%대에 그쳤다.#[23] 남아공은 에스콤(ESKOM)이라는 아파르트헤이트 시절부터 운영되던 국영 전력회사가 주로 화력발전을 통해 전기를 생산하는데 1994년 이후 발전소의 기기들이 교체가 거의 안됐고, ESKOM부터가 각 지자체로부터 전기세를 전혀 받지 못해 한화 약 200조에 달하는 막대한 빚을 진 상태이다. 여기에 무능한 경영 및 석탄 속 돌을 섞는 등의 부정부패가 벌어지고 있어 민주화 이후 터부를 깨고 백인 CEO를 세웠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해고되었다. 다만 이 백인 CEO가 증언하기론 ANC 내부의 고위공직자가 부정부패를 주도하고 있어 해결이 불가능했고 본인도 그걸 캐보다 암살 위협도 받아봤다고 주장했다.[24] 남아공에서 ANC가 처음 집권한 1994년보다 10%p나 악화된 수치다.[25] 웃픈건, 그럼에도 남아공은 블랙 아프리카의 맹주국이다. 아프리카에서 민주 체제가 제대로 갖춰지고 경제도 어느정도는 굴러가는(2022년 1인당 gdp 약 6,766불) 나라가 몇 없다. 남아공처럼 인구도 제법 되고 땅덩이도 넓은 나라로 국한시켜보면 더 그렇다. 나머진 저성장과 독재, 빈부격차 삼중고에 최악의 경우 내전까지 겪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남아공의 살인률이 아프리카에서 제일 높다기보다, 다른 국가들은 중앙정부 차원에서 살인률 통계를 낼만한 행정력조차 보유하지 못한 수준이라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26] 일부 주에서 선거가 연기되어 1996년에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