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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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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중 이름이 김봉남인 푸른거탑의 등장인물:
김봉남(푸른거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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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김의 주요 수훈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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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파일:문화금관.jpg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10년
이름 앙드레 김
분야 패션 디자이너
금관문화훈장(1등급)
파일:문화보관.jpg
연도 2008년
이름 앙드레 김
분야 패션 디자이너
보관문화훈장(3등급)

}}} ||
앙드레 김
André Kim
파일:fashiondesigner_andrekim.jpg
<colbgcolor=#333><colcolor=#fff> 본명 김봉남 (金鳳男)
본관 개령(開寧) 김씨[1]
출생 1935년 9월 21일[2]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現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3]
사망 2010년 8월 12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묘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광덕로 383 천안공원묘원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가족 아들 김중도[4]
학력 서울신도초등학교 (졸업)
고양중학교 (졸업)
한영고등학교 (졸업)
국제복장학원[5] (졸업 / 1기)
종교 불교
브랜드
파일:fashiondesigner_andrekim_logo.jpg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대한민국 패션 디자인의 선구자2.3. 사망
3. 디자인 특징4. 브랜드5. 본명에 대한 이야기6. 오해와 진실7. 마이클 잭슨과의 인연8. 옷로비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9. 사생활10. 저서11.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패션 디자이너.

'앙드레'라는 이름은 '외국인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라며 프랑스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지어줬다.

2. 생애


2.1. 유년기

파일:attachment/andrekim-past.jpg

(1960년대 사진, 서울 반도호텔에서 열린 웨딩패션쇼에서 모델로 등장했던 젊은 시절 앙드레 김(좌측): 참고로 앙드레 김은 평생 독신이었다.)

1935년 9월 21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지금의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그의 고향이 서울시로 편입되어 있지만 '서울 사람'이 아닌 '고양 사람'이라는 지역 정체성을 가졌다.[6]

아버지는 농사를 지었고, 다섯 남매와 함께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땅바닥에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며 놀았는데 고양중학교 재학 때부터는 미술 자체에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가 있던 시절, 극장에서 외국 영화 화니 페이스[7]를 접하고 배우들의 패션에 강하게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의상과 관련해 진로를 결정하게 된다. 본래의 장래 희망은 배우였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 예술로서의 패션을 가르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는 외국 책을 뒤지면서 독학을 하다 1961년 국제 복장학원이 문을 열면서 1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이듬해 우리나라 남성 디자이너 1호[8]란 말을 들으며 의상실을 열고 반도호텔[9]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다.

2.2. 대한민국 패션 디자인의 선구자

파일:앙드레김 1988년.jpg
1988 서울 패럴림픽 기념 패션쇼
파일:앙드레김 1999.jpg
199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앙드레김의 날 선포식
파일:2004년 앙드레김.jpg
2004년 베이징에서 열린 패션쇼에서 이영애, 이서진과 함께
파일:앙코르와트 패션쇼.jpg
2006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열린 패션쇼 피날레 中
파일:2009년 앙드레김.jpg
2009년 자신이 디자인한 롯데시네마 티켓을 들고 웃고 있는 앙드레김

척박한 대한민국의 패션계에 이미 1960년대부터 돌풍을 불러오며 패션계를 이끌어 온 공로가 있다. 2010년 7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권위있는 패션 쇼나 시상식 등에는 항상 등장하며 그 위용을 과시했다.

사실 해외 쪽에서는 워낙에 뛰어난 의상 디자이너들이 많은지라 지명도는 뒤지지만, 한국에서는 일단 패션 디자이너의 대명사.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였기 때문이다. 다만, 앙드레 김 본인은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2.3. 사망

파일:앙드레김 2010.jpg
2010년 3월 29일 베이징에서의 패션쇼를 지휘하는 앙드레 김. 이 패션쇼는 그가 생전 참여한 마지막 패션쇼가 되었다.

2010년 8월 12일 19시 40분경, 대장암이 악화되어 숨을 거뒀다. 향년 74세.(관련 기사) 사후 최고 등급의 문화훈장인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별세로 인해 "대한민국 패션계가 텅 비었다"라고 말하는 도 있을 정도였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말년에 그는 거동이 불편해져서 신사동에 있던 자신의 의상실로 출근할 때 주변에서 거들어 주는 사람이 2명이나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TV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았지만, 힘든 투병 생활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생전에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장례식도 불교식으로 치러졌다. 장지는 천안 공원 묘원이며, 모델 박영선TV조선의 프로그램인 인생다큐-마이웨이에 출연했을 때 그의 묘소를 찾는 모습이 나갔다.

3. 디자인 특징

파일:external/4.bp.blogspot.com/0%2Bng7.jpg

(197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에 실린 사진) 그의 옷을 입고 같이 사진을 찍은 여성은 모델 전원기[10]와 배우 장미희.

파일:external/contents.dt.co.kr/2009102902019922732134.jpg
말년 디자인 (2009년)
파일:fashiondesigner_andrekim_show.jpg
사진 속 모델은 배우 송창의이유리.

흰색을 엄청나게 좋아했다. 평소에도 흰 옷을 입고 다녔으며,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기사가 딸린 흰색 현대 에쿠스를 타다 이후 흰색 벤츠 S500으로 바꾸었으며[11] 생전 마지막 타던 차량도 하얀색 롤스로이스 팬텀 1세대였다.[12][13] 생전 자신의 방을 공개했을 때는 옷장에 평소 입는 흰 옷이 수십 벌 걸려있는 모양이 나왔을 정도. 자신의 자서전은 물론이요 의상 디자인에도 흰색을 많이 썼다. 이 때문에 흰색증이라고 까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백의민족이라는 한국인의 컨셉을 나타냈다는 평이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흰색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 똑같은 디자인의 검은 옷을 입고 방송에 출연한 사진이 있다.

사실 흰색에 대한 집착은 그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늘 자식들에게 순백색의 옷을 입혔다. 그런 그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앙드레 김은 매일 밤 베개를 적실 만큼 울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하는 흰색의 옷에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즉 앙드레 김에게 흰색은 변하지 않는 순수함의 상징이자, 어머니의 사랑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흰 옷에 얼룩이 묻기라도 하면 진저리를 치며 곧바로 옷을 갈아입을 정도로 흰색에 집착했다. 그리고 현명한 예술가로서, 그는 자신의 흰색에 대한 애착을 아름답게 승화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영원한 순수함의 상징인 순백의 웨딩드레스였다. 앙드레 김의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은 결혼하는 신부에 대한 축복으로 승화된 것이다.

실용복 입장에서 봐도 앙드레 김의 작품은 매우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앙드레 김은 정부사업에도 많이 참여했는데 그 예로 1988 서울 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 유니폼이 있다.

해외에선 아방가르드 디자이너로 평가받기도 하는데 정작 앙드레 김은 지나친 아방가르드는 품위가 없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아방가르드를 추구한다고 누더기처럼 만든 옷이나 히피 패션은 싫어했다고 한다. 사실 해외에서 앙드레 김이 아방가르드 디자이너로 평가받게 된 건 당시 한복이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 한복에서 영감을 얻은 앙드레 김의 디자인이 생소하면서도 새롭게 보인 탓이 있다. 그렇다고 앙드레 김이 아방가르드를 모르냐면 그것도 아니고 외국 책을 보면서 독학을 해 당연히 알고 있었고 아방가르드 패션 디자인도 만들었다. 오히려 아방가르드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의 대한민국에서 아방가르드를 하던 몇 안 되는 패션 디자이너였다. 과한 걸 싫어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4. 브랜드

앙드레 김 선생이 디자인한 상품들에 붙는 브랜드 André Kim. 앙드레 김 사후 현재까지 아들 김중도 씨가 대표로 있는 앙드레 김 아뜰리에가 디자인실에서 제작한 옷을 전문으로 생산하고 있고 실질적인 앙드레 김과 관련된 곳은 이곳이 끝. 다만 앙드레 김 브랜드를 널리 알리고자 일부 사업에 라이센싱 방식으로 브랜드를 빌려주고 있다. 벽지, 타올, 우산, 속옷, 화장품 등에 앙드레 김 이름이 박혀있다면 100% 라이센싱. 다만 앙드레 김 골프웨어의 경우 부도나면서 앙드레 김 브랜드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5. 본명에 대한 이야기

고양군 출신이라 자신의 고향은 서울이 아닌 고양군이라고 했으나 그의 말투는 서울 사투리를 잘 사용했었다.[14] 사실 경기 중북부 방언이나 서울 방언이나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앙: 앙녕하세요우. 저는
드: 드~자이너에용
레: 레(내)이름은
김: 김봉남 이에요우
그의 이름 사행시가 유명하다. 국민의 정부 시절 옷로비 사건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을 때 증인 이름을 말하시라는 질문에 "앙드레 김입니다."이라고 답했는데, 본명을 말씀해 주시라고 요구받자 당시 청문위원이던 한 국회의원이 동남방언 억양으로 "김봉남씨죠?"라고 되물었다. 이에 앙드레김은 "네 본명은 김봉남입니다." 라고 다시 대답했다. 이 장면은 생중계 됐는데, 당시 KBS2의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시사터치 코미디파일에서 이 장면을 다시 재생하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을 정도.

앙드레 김과 토속적인 김봉남이라는 두 이름 사이의 이미지 간극이 너무 컸던지라 세간에서는 위와 같은 사행시가 유행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정치 평론가들은 "옷로비 사건 수사는 결국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앙드레 김 선생의 본명만 알렸을 뿐"이라고 시니컬하게 비평하기도 한다.[15]

6. 오해와 진실

한국의 대중들은 앙드레 김을 알게 된 것이 그의 패션 디자인이 아니라, 여러 매스컴에의 출연과 연예인들이 출연한 패션쇼, 그리고 남녀 커플이 함께 하는 유명한 패션쇼의 피날레 때문인 것이 사실일 것이다. 사실 앙드레 김 옷 디자인의 예술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많은 편이며, 일부에서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는 혹평도 있다.

옹호하는 측에서는 앙드레 김의 옷은 패션으로써 보는 게 아니라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드는 것들로는, 일단 앙드레 김의 옷은 슬림화라든지 디테일이라든지 테일러링이라든지 하는 세계적인 트렌드를 따라가지 않고 있다. 예로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의 김연아의 옷(참고 자료)을 들 수 있다. 물론 같은 것을 반대 시각에서는 늘 거기서 거기인 비슷한 디자인에서 탈피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앙드레 김은 "자신의 옷을 상품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패션을 상품화하고 돈과 연결시키는 것을 싫어했다. 그 때문에 앙드레 김이 만든 옷은 노출이 없다. 게다가 "남성 디자이너 1호"라는 수식어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게다가 한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여는 서울 패션 위크에 참가한 경력이 없다. 대신 지자체나 기업의 후원을 받아 비정기적으로 자주 패션쇼를 열었다. 여는 횟수는 1년에 약 10여회. 일반적인 패션 디자이너들이 1년에 2번 패션쇼를 여는 것에 비교하면 매우 많다. 이런 것들을 보면 앙드레 김의 패션 기조는 프레타포르테보단 오트쿠튀르의 특징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수입원단을 절대 쓰지 않고 국산원단만을 고집하는 등, 우리가 그에 대해 가지는 서양문화 선호적인 이미지(아마도 영어를 자주 써서)와는 달리 한국적인 면이 많았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겹옷 드레스(8~9벌 가량의 여러벌의 드레스를 겹쳐 입는 것)는 한국여성의 을 상징한다고 밝힌 적도 있다.

7. 마이클 잭슨과의 인연

파일:michael-jackson-london_angryshot.jpg
파일:마이클 잭슨 컴백 - 2009년.jpg
2009년 컴백 기자회견에서 입은 앙드레 김의 의상이다. 마이클 잭슨이 입고 나온 앙드레 김의 의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는 해외의 스타들에게 옷을 디자인해서 주기도 했는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같은 유명 배우도 포함된다. 또한 마이클 잭슨이 생전에 앙드레 김의 옷을 특히 좋아하였다. 화려한 무늬의 자수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였냐하면 유명한 시상식에는 물론이요, 외출할 때에도 입고 나갔다. 특히 잭슨의 마지막 공식 인터뷰가 되었던 This Is It 콘서트 발표회 때 입었던 위의 사진의 의상이 바로 앙드레 김이 제작한 의상이다.

실제로 마이클 잭슨은 수차례 앙드레 김에게 자신만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앙드레 김은 "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단 한 사람만의 의상을 만들 수는 없다." 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 대신에, 앙드레 김은 마이클 잭슨을 위해 언제든지 원하는 대로 주문을 받아 직접 수제로 제작한 맞춤복을 보내줬는데 무려 200벌 이상이나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앙드레 김은 마이클 잭슨 사후 개봉한 2010년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 VIP 시사회에도 참석했다.

공교롭게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지 거의 1년 만에 앙드레 김도 사망하였다.

8. 옷로비 사건의 억울한 피해자



김대중 정부 초기인 1999년 일어난 옷로비 사건 때 증인이자 피해자로 나온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은 헌정사상 최초 특별검사제도가 시행된 로비 사건이기도 했으나 그 요란한 재수사, 특검 등 노력에 비해 실제로는 흐지부지 끝났던 사건으로 그 사건의 증인[16]으로 나와서 선서를 할 때 김봉남이라는 본명이 이 사건을 계기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졌다. 법정에서 증인으로 선서를 할 때는 예명이 아닌 본명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본명이 다소 '촌스럽게' 들린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놀림을 받았기에 본인은 굉장히 상처를 받았었다고 한다. 게다가, 평소 앙드레 김의 신비주의 이미지와 상반된, 평범한 동네 노인스러운 이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감이 없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때 언론들은 "검찰이 밝혀낸 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뿐이다. 옷로비 사건 수사는 결국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던 앙드레 김 선생의 본명만 알려줬을 뿐이다." 라고 시니컬하게 비평하는 신문 사설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본명이 알려지면서 신비주의가 점점 옅어졌고 친근한 이미지로 바뀌기도 했으며 아울러 사업상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물론 앙드레 김의 입장에서는, 굳이 본명이 알려진 문제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수많은 시간을 공들여서 만든 작품이 더러운 정치권 로비에 쓰이는 꼴을 봤으니 당연히 분노할 정도로 몸서리가 쳐지고 불쾌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앙드레 김은 청문회에 참석하여 공개 증언을 할 때, "이 현실을 개인 디자이너로서는 한국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 나오면서 정말 슬프게 생각합니다. 대단히 실망스럽고 슬픈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면서 울분을 토했고 대중들로부터 안타깝다면서 수많은 동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드레 김은 청문회가 끝난 후 자신을 비웃고 불쾌하게 대접한 정치권과 언론 인사들을 상대로 용서해주면서 "제 패션쇼에 한 번 구경오세요." 라고 초대하며 대인배같이 행동하는 멋진 모습도 보여줬다.기사



훗날 앙드레 김은 언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인터뷰를 하면서, "정직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인지를 잘 배웠습니다. 본명이 밝혀지면서 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사람은 진실하고 정직하면 좋은 끝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억울해도, 오해를 살 만한 일이 있어도 진실한 마음으로 잘 견뎌내면 전화위복이 되고 좋은 결과가 뒤따른 다는 것을." 이라고 발언을 하였는데,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앙드레 김 본인은 그냥 평범하게 옷을 제작하여 판매했을 뿐인데, 졸지에 원치않던 정치계에 엮여서 검찰에 증인으로 출석했으니 뭔가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사실, 본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만 얻은 건 그래도 있다. 앙드레 김이 신비주의에서 친근한 이미지로 바뀐 것과 사생활이 매우 깨끗한 사람인 것을 무려 검찰을 통해 인증받았다.

실제로 앙드레 김은 사생활 문제라든가 탈세같은 범죄에 연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데다 오히려 성실 납세자로 모범이 된다면서 표창장을 받은 경력도 있다. 기사 1990년대 당시에는, 사업 좀 크게 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탈세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말로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온 사람이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단한 거물이었다. 또한, 자선 복지단체에다 수 억 단위의 돈을 기부도 많이 했고, 고액 기부자 모임으로 유명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에 등록되기도 했다.

여담으로, 옷 로비 사건이 있었을 당시의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오후 시간대에 만화 방영이 전격 취소되고 '옷로비 사건 청문회' 를 대신 방영해주는 바람에 방송국을 욕할 정도로 불만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어린이들이 "저 사람들 뭐에요? 왜 TV에서 만화 안 해요?" 라고 물어보는 바람에 설명해주느라 진땀을 빼야했다고...

9. 사생활


파일:F443F5B1-3511-4260-8DD1-7C3C9F5F8D9C.jpg[22]
동복은 웨스턴/오리엔탈, 하복은 웨스턴/사파리 2종류가 있다. 웨스턴은 정장, 오리엔탈과 사파리는 간편복 개념으로 입는다고. 외대부고생들 말에 따르면 웨스턴이 간지나지만 오리엔탈과 사파리가 무척 편해서 이쪽을 선호한다고. 과연 앙샘. 여담으로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교복은 이것을 고친 것이다.

10. 저서

파일:앙드레김 - my fantasy 커버.jpg
앙드레김의 자서전 <My fantasy>

앙드레 김이 생전 발행한 자서전은 2002년 발매된 <My Fantasy> 가 유일하다. 동아일보의 이승재 기자가 4개월동안 진행한 심층인터뷰 연재가 시초로, 책의 내용은 인터뷰 형태로 구성되었다. 2010년, 사후 개정판이 발매되었고 위에 서술된 엘르 부록 <나는 앙드레김입니다> 가 추가로 발매됐다. 이 자서전을 제외한 나머지 책들은 제3자가 앙드레 김에 대해 서술한 책으로 앙드레 김이 저술에 직접 관여한 책들은 없다.

11. 대중매체에서

우리나라 패션업계의 아이콘이다보니 여러 매체에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캐릭터에 그의 이미지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


[1] 2000년대에 새로 생긴 성씨이며, 인구는 3명으로 확인됐다.[2] 음력 8월 24일. 기사[3] 하지만 앙드레 김 본인은 고양시민으로의 정체성이 더 강해서 항상 고양시 출신이라 밝히고 다녔다. 실제로 구파발 일대가 서울로 편입된 것은 1973년이다.[4] 1981년생. 1982년에 입양한 아들이다. 참고로 앙드레 김은 평생 독신이었다.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의뢰인으로 출연한 바 있다. # 2004년에 결혼해서 현재는 쌍둥이의 아버지이다.[5]국제패션디자인아카데미[6] 정치인 손학규도 비슷한 케이스로, 지금은 서울 금천구로 편입되어 있지만 태어날 당시 행정구역대로 '시흥 사람'이라는 지역정체성을 갖고 있다.[7] 서점직원(오드리 햅번 분)이 패션잡지 모델이 되는 패션 관련 영화이다.[8] 하지만 당시 재봉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디자이너라는 말 자체가 퍼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앙드레 김 여사로 소개된 해프닝도 있다.[9] 롯데호텔 서울자리에 있던 곳으로 1939년에 세워져 해방 뒤 교통부, 국제관광공사가 각각 운영하다 1973년 호텔롯데에 부지가 팔려 1975년에 철거되었다.[10] 1970년대 대한민국의 탑 모델이었다.[11] 1세대 에쿠스에서 S클래스(W221 페이스리프트 이전의 S500L)로 변경했다. 지금이야 S클래스는 도로에서 상당히 흔한 차지만, 당시에는 수입차 자체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고, 억대 가격의 S클래스는 보기도 힘들었으며 대부분 검은색 또는 은색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흰색 S클래스였다고. 그 외엔 스타크래프트 밴을 타기도 했다.[12] 이 차량은 정비 유튜버 메르카바의 영상을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 공개되었다. 아마 현 소유주일 아들 김중도씨의 지인이 맡긴 듯.[13] 참고로 본문에 쓰여진 1세대는 BMW 인수후의 현행 롤스로이스의 1세대라는 뜻으로 팬텀 통합으로 따지면 7세대 초기형 모델이다.[14] 지금의 지축동, 삼송동은 02 지역번호를 쓰듯이, 당시 경기도 고양군 신도읍 지역은 서울 사투리를 사용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튜브 등에서 그의 생전 말투를 들어 보면 전형적인 서울 사투리를 들을 수 있으며, 특히 지금을 지끔, 먼저를 먼처라고 하듯 서울 사투리를 사용하여 서울 토박이가 아니냐는 의혹도 있지만, 뼛속부터 고양시 사람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는 또한 손학규와도 상당히 비슷한데, 현재의 금천구에서 태어났으나, 그렇다 할지라도 뼛속까지 경기도 시흥군 사람이라고 강조했듯이 말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은평구의 전신인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과 고양군 신도면 일대는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가 많았고,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도 그렇다. 다만, 현재의 삼송동지축동과 은평구 진관동은 각각 삼송지구 개발과 은평 뉴타운으로 인하여 토박이들이 상당히 많이 사라졌다.[15] 앙드레 김이 증인으로 나왔던 내용이 더 궁금하다면 여기를 참고하자.[16] 사건 관련자인 부인들에게 옷을 판매했었다. 그리고 부인은 그 옷을 로비용으로 썼다.[17] "앙드레 김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 기사[18]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것에 반해, 특유의 말투와 억양으로 인해 오해도 많이 받았지만, 아들의 이름이 '철수'인데, 너무 굴려서 주위 사람들은 모두 '찰스'라고 알고 있다는 둥의 헛소문이 있었다.[19] 주변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김중도 씨도 유복하게 자라긴 했지만 출생과 입양의 과정 때문에 청소년기에는 잠시 일탈도 했다고 한다. 앙드레 김 선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극정성으로 외아들을 양육했고 대학 들어간 후 개심했다고. 다만 예전에 워낙 놀았던 전적탓에 졸업 성적은 평범했다는 뒷얘기가 있다.[20] 방송에 나와서 fashion을 프랑스식으로 "빠숑"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fashion이라는 말 자체가 영어 단어이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도 대체로 "패션"이라고 한다. 참고로 "파송"이라고 불리는 불어 façon(방법)은 영어 fashion의 어원이 되기는 하지만, "옷차림"이라는 특정한 뜻은 없다. 본인은 '옥스퍼드 영어'라 주장하였으나 실제와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물론 제대로 된 영어 학원이 없던 시절에 한참이나 나이가 들어서 영어를 배웠으니 억양을 완전히 없애긴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21] 2011년 마복림 할머니는 91세의 나이로 고인이 되었다. 뒤를 이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마복림 할머니의 며느리가 2021년 유 퀴즈 온 더 블럭 방송에 출연해서 이야기한 내용이다.[22] 앙드레 김의 사생활을 다룬 기사로, 출처는 여성동아 1999년 10월호이다. 앙드레 김이 사진 속에서 읽고 있는 신문동아일보.[23] 그러나 어느 정도 좋은 분위기로 이슈가 마무리되며 시간이 흐른 이후에도 연예 정보 프로그램 단독 인터뷰에서 그의 패션쇼에 대해 주로 묻던 리포터가 여담으로 이혁재에 대한 질문을 하자, 웃으며 부드럽게 대답은 하였지만 "이혁재 씨가 제 흉내를 내는 것 자체는 괜찮지만 저는 절대 저질 영어 단어는 쓰지 않으니, 흉내내실 때 제발 저질 영어 단어는 쓰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다시 한번 성대모사 시 사용된 영어에 대한 불만은 남아있음을 확실히 했다.[24] 참고로, 안정환은 앙드레 김 패션쇼의 피날레 무대에서 아내 이혜원을 처음 만난 인연으로 2년간 연애를 했고 결혼했다.[25] 그것도 서커스의 백미 중 하나인 불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