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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23:22:17

대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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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諲譔
대인선
시호불명[1]
왕호인선왕(諲譔王)[2]
성씨대(大)
인선(諲譔)[3]
출생미상[4]
사망 926년 이후[5]
재위기간906년 이전[6] ~ 926년 1월 14일 (20년)
왕후대인선후
왕태자대광현(大光顯)(?)[7]

1. 개요2. 생애3. 발해가 멸망한 원인4. 평가5. 기타
5.1. 야율종교 묘지명에서 언급?
6. 가족관계7. 연표

[clearfix]

1. 개요

발해의 마지막 군주.

시호 역시 알려지지 않았는데 '애왕'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는 ‘신라 효소왕 때 발해가 건국됐고 (신라) 경애왕 때에 (발해가) 거란에 공격당해 망했다.’라는, 신라 왕대 기준으로 발해사를 간략히 정리한 《동국사략》의 구절을, 한국사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부족했던 일본 학자들이 ‘(발해가) 경왕과 애왕 때 거란에 공격당해 망했다.’라고 잘못 해석란 결과이다. 즉 "景哀王時 契丹攻滅之(경애왕시 거란공멸지)"라는 구절을 "(신라) 경애왕 때에 (발해가) 거란에 공격당해 망했다."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경애(景哀)를 잘라 ‘경(景)’을 발해 임금 대현석, 뒤의 ‘애(哀)’를 발해 임금 대인선에 대입한 것. 한때는 교과서에도 이 오류가 들어있다가 현대에는 빠졌다. 대현석과 대인선 사이에 빠진 임금인 대위해는 유일하게 《당회요》(唐會要)라는 책에만 기록된 인물이어서 당시엔 발해 임금으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망국 군주로서의 작명으로는 그럴듯한 '슬플 애'(哀) 자이기에 인상이 강해서 그런지, 종종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만화 한국사나 교양 서적 등에서 아직도 '애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그러나 대인선은 국가의 마지막 군주여서 백제의자왕고구려보장왕처럼 처음부터 시호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8] 즉, 마지막 왕에게 시호 대용으로 흔히 붙는 왕호인 '말왕(末王)'이나 에서 딴 '인선왕'이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고구려의 '보장왕'이 후자의 방식으로 붙여진 호칭이다.

2. 생애

즉위년도는 미상이며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906년이다. 대현석부터는 군주의 즉위년도와 생몰년도가 정확하지 않다. 대인선은 전대에 즉위한 대위해와 함께 배씨 세력을 중심으로 국정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내치 및 외치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고, 그의 대에 이른 기록은 거란의 침략과 관련된 것뿐이다. 거란의 팽창에 두려움을 느낀 대인선 치세의 발해는 해족, 신라, 고려, 후량, 일본 등 발해 주변에 이름이 알려진 거의 모든 나라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시도하는 한편 이들과 힘을 합쳐 거란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908년, 919년 등 몇 차례 동해를 건너 일본에 사신 배구(裵璆)를 파견했으나 헤이안 시대 당시 일본은 덴노의 황권이 추락하고, 나라 사정이 좋지 않아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했다. 이후 후백제도 일본에 사신을 여러 번 보내 동맹을 시도했지만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했다. 후량에도 사신을 보내 봤지만 중국마저 5대 10국의 대혼란기라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거란국지》에 따르면 해족이 아예 거란에 병합당하자 대인선은 신라와 비밀 결원을 맺었다고 하는데 신라 역시 후삼국시대의 대혼란기라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9]

918년, 거란에도 사신을 보내 화친을 도모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는지 거란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한 것은 단 1차례로 끝났고, 오랫동안 전쟁을 치렀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요사》에서는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가 20여 년을 힘들게 싸워 발해의 요동 지역을 얻었다는 대목이 나와 20년동안의 거란의 침공으로 요동 일대를 잃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924년 거란이 요동을 공격하여 발해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에 대인선은 군사를 일으켜 거란군을 무찌르고 요주자사 장수실을 죽이고 포로를 되찾는 등 대승을 거뒀으나 요동 전투는 발해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925년 12월 21일, 요동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거란이 대대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수도 상경성으로 진격해왔고 이것이 발해의 마지막이 되었다. 거란은 20여 년 동안 꿈쩍도 않던 요동 방어선을 아예 무시하고 우회해서 발해의 요충지인 부여부에 맹공을 퍼부었다. 이에 부여부는 포위 3일 만인 926년 1월 3일에 함락되었고, 발해는 이에 맞서 노상(老相. '늙은 재상')[10]에게 군사 30,000명(혹은 5,000명)을 주어 저지케 하였으나 이 결사대조차 맥없이 무너지게 되었다.

926년 1월 9일, 거란은 단숨에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까지 진격하여 상경성을 포위하였다. 대인선은 백성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표명했으나 오히려 백성들은 고려 등지로 피난을 갔다. 이전부터 발해인들이 소규모 혹은 대규모로 고려로 망명가기는 했다.

926년 1월 14일 대인선과 300여 명의 신하들은 야율아보기 앞에 나와 대인선이 흰 옷을 입고 밧줄을 목에 매고 양을 끄는 항복의식을 치러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발해는 15대 228년만에 멸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포위된지 4일, 항복을 결정한지 2일만이었으며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거란군의 방화로 인해 며칠간 불타올랐다.

야율아보기는 대인선을 처음에는 융숭히 대접했지만 망국의 군주의 운명이란 순탄치 않았다. 발해의 옛 군현에서 반거란 항쟁 기미가 보이자 야율아보기는 926년 1월 17일 발해의 옛 군현에 조서를 내려 회유를 시도했으며 926년 1월 19일에는 거란 장수 강말달을 성으로 보내 수색하도록 했는데 옛 발해 병사들이 강말달을 살해했다. 대인선도 움츠리고 있지만은 않아서 926년 1월 20일에 대인선이 남아있는 발해 유민들을 모아 부흥 운동을 펼치려고 시도했는데 결국 성난 야율아보기가 다시 상경용천부를 공격함으로써 얼마 뒤 성은 함락되었다.

926년 7월에 있었던 거란군의 회군 때 대인선과 그의 부인을 포로로 잡은 뒤 거란 본토로 끌고 갔다. 야율아보기는 끌고 간 대인선과 그의 부인에게 이름을 새로 줬는데 대인선에게 준 이름은 오로고(烏魯古), 그의 부인(발해 왕후)에게 준 이름은 아리지(阿里只)였다. 야율아보기와 그의 부인인 순흠황후 술률평(述律平)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때 탔던 의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로고(烏魯古)로 가차된 거란어 '울구'는 마부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말의 이름에서 따다 붙인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큰 틀에서는 '말[馬]'과 관련이 있으며, 모욕감을 주기 위해 준 이름이라는 것에는 변함없다.

이후 거란이 정해준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서쪽에 성을 쌓고 살았다고 한다.《문헌통고》에 따르면 야율아보기가 죽은 후 동생을 시켜 부여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문헌통고》에 오기가 많기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그렇게 발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발해 마지막 태자 대광현은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내려갔고 발해 각지에서는 발해부흥운동이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왕건이 아직 살아 있었을 때 고려가 후진과 연합해서 거란에 잡힌 대인선을 구하려고 시도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만약 사실이라면 대인선은 940년대까지 살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1]

3. 발해가 멸망한 원인

기록이 없기에 그의 재위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복합적인 이유로 발해가 멸망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대현석 때부터 이어온 지배층의 내분과 더불어 주로 흑수말갈과의 대립,[12] 등 자연재해가 겹치고 오랜 전쟁과 내분에 따른 민심이반 등의 요인들이 합쳐져 끝내 발해가 멸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거란족의 의한 멸망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도 있다.

다만 앞서 보듯 924년 때의 기록을 보면 발해가 오히려 역공을 가하는 등 강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발해는 내분, 말갈과의 대립, 자연재해, 민심 이반과 더불어 거란의 첩자들로 인해 너무나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은 당연히 어느 나라나 충분히 안고 가는 문제이고, 결정적인 이유는 고구려와 달리 수도를 아우르는 방어선이 매우 취약한 구조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발해가 과거 삼국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취약한 수도 방어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절대로 발해의 수도 방어 체계가 허술하다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는 외부 세력이 수도 평양으로 진입하려면 요동의 천산산맥과 평안도의 묘향산맥 등 여러 크고 험준한 산맥들을 넘어야 해서, 당나라가 수십년간 파상 공세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가 무너진 건 남쪽에서 백제가 멸망하고 상대적으로 평양으로 접근이 쉬운 남쪽 신라에서 보급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중심부가 위치한 길림성 ~ 연해주 일대가 농안 지역의 탁트인 평야 쪽의 방어선이 뚫려버리면 수도인 상경까지 별 무리없이 진격할 수 있는 취약한 방어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상경성 주변 일대의 지리와 맞지않다. 상경성으로 직공하기 위해서는 부여성을 돌파하고 세로로 흐르는 제2송화강을 넘어서 목단강 물길을 거의 비슷하게 따라가는 산맥인 장광재령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거란군이 그 근방에 위치했던 장령부의 군사를 격파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광재령 또한 방비가 철저했을 것임을 추측해볼 수 있다. 게다가 상경성이 있는 영안 일대는 산으로 감싸져 있는 분지 지형이었다. 그리고 그 분지를 나가기 위해서는 목단강송화강 합류 지점으로 흐르는 북쪽의 루트로 이동해야만 했다. 즉 직공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로로 흐르는 송화강 본류를 따라간다면 달라진다. 하얼빈을 위시로 한 송눈평원과 목단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삼강평원이 쭉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거란의 주력이었던 기병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삼강평원은 기병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었던 평야가 아니었다. 1940년대 이후 북대황 지역에 대한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오늘날 소위 삼강평원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삼림이 무성하고 소택, 습지가 많았던 지역이다. 다시말해 추운 요택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영안분지를 나갈 수 있는 통로였다. 물론 이 지역은 발해의 철리부와 막힐부가 있었지만, 과거 말갈족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발해 말기 말갈 제부의 이탈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거란군의 쾌속 진격에는 이러한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핵심 방어선인 요동을 놔두고 우회해서 중심부만 타격하면 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마지노선을 제껴두고 아르덴 숲을 통과했던 독일의 전격전과 비슷한 양상이었던 셈이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야 두말할 것 없는 강대국이었지만 순식간에 패망했다. 마찬가지로 발해 같이 강한 나라가 쉽게 무너진건 바로 취약한 수도 방어 구조가 그 원인일 가능성이 크고, 역사에서 별탈없이 안정적이고 잘 굴러가던 나라가 이런식으로 망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너무 빨리 수도만 무너졌고 지방은 아직 건재한 잔존 세력들이 많았기에, 발해 부흥 운동이 200년 가까이 지속된 것도 이러한 멸망 과정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또한 거란과의 관계도 나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주장들도 있다. 발해는 일부 국경지역 인근의 거란족들을 일부 복속하기도 했지만, 그것만 제외하면 딱히 발해와 거란과의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발해 초기에는 사이가 좋아서 당나라와 싸우기도 했고, 발해 후기에도 선왕 때에는 무역도 흥했을 정도였다. 그 이후에도 별 다른 갈등은 딱히 없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요련거란 8부에서 야율아보기가 거란을 통일하고, 후당 북부 국경 인근의 하동 지방까지 침략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고 이 때 야율아보기가 발해에게 같이 동맹을 맺고 중원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발해가 이를 거절하자 화가 난 야율아보기는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여겼는지 발해와 관계를 끊고 적대 관계가 되었다. 심지어 이 때부터 거란은 발해를 아치에너미처럼
"옛날부터 발해가 원수였다"
라는 언급을 한 걸 보면 선왕 사후의 발해와 거란 사이에서 약간의 갈등이 있었거나 갈등의 원인이 되는 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발해의 전설인 홍라녀 녹라녀 전설 중 여러 일화에 거란과의 대립이 그려져 있다. 이 설화의 배경이 전성기인 선왕 때였다는 것을 감안해보면 융성했던 때조차 발해가 거란을 경계하고 있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4. 평가

망국의 군주이기는 하지만 이렇다 평가할만한 기록이 없으므로 정황 추측으로만 평가가 가능하다. 혼돈의 10세기 초 동아시아의 정세에서 거듭 성장하는 거란의 요동 지역 공략을 20여 년 동안이나 계속 저지시킨 것으로 보아 대인선 시대의 발해는 상당히 안정적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나라가 혼란스러우면 20여 년 동안 버텨낼 여력도 없다. 무신정권 하의 고려도 세계사 최강 중 하나인 몽골제국을 29년 간 막아내었다.

적대국인 거란과 직접 친선을 도모하기도 하며 중국, 일본, 후삼국 등 활발히 사신을 보내 외교를 펼치며 세력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아 대인선이란 군주도 나름대로 중간은 가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출처 : 《왕조의 마지막 풍경》)

5. 기타

5.1. 야율종교 묘지명에서 언급?

(중략) 왕의 휘는 종교(宗教)로, 자는 휘고(希古)이며, 효성황제(孝成皇帝: 요나라 경종)의 제손(諸孫)으로, 효정황태숙(孝貞皇太叔: 요나라 경종의 2남 야율융경耶律隆慶)의 맏아들(胤子)이다.。어미니는 소씨(蕭氏)인데, 옛 발해성왕(故渤海聖王)의 손녀(孫女)로 지녀낭자(遲女娘子: 늦둥이 딸 아가씨)라 하였다.
王諱宗教,字希古,實孝成皇帝之諸孫,孝貞皇太叔之胤子。母曰蕭氏,故渤海聖王孫女遲女娘子也。
<야율종교 묘지명>

요나라 황족인 야율종교(991년 ~ 1053년)[14]의 묘지명에서 언급된 '발해성왕'(渤海聖王)이 대인선이라는 추측이 있다. <야율종교 묘지명>은 한문과 요나라 시기에 쓰인 거란소자로 쓰였다. 위 기록을 보면 옛 발해왕의 손녀가 요 경종의 차남 야율융경(耶律隆慶: 973년~ 1016년)과 혼인했으며 아들인 야율종교를 낳았음을 알 수 있다.[15]


한문본과 달리 거란소자본에서는 발해성왕에 대응되는 문구가 '단 구르-은 주 칸 우르구(丹─國之─聖─汗: Dan gur-n ju qan Urgu)'[16]로 읽히는데 'Urgu'가 대인선이 발해 멸망 이후 받은 '오로고'(烏魯古: Wulugu)의 다른 표기라는 설이다.<야율종교 묘지명>(耶律宗教 墓誌銘) 거란소자본의 옛 발해성왕 원문(출처: 契丹文dan gur與「東丹國」國號 ──兼評劉浦江「再談“東丹國”國号問題」) 우르구 = 오로고가 동일인물이라면 해당 인물이 대인선이라는 것.

다만 대인선의 손녀로 비정할 경우, 왜 대씨가 아닌 소씨(蕭氏)로 기록된 문제[17]를 비롯해 거란소자가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기에 좀 더 자료가 나올 필요가 있어보인다.[18]

6. 가족관계

7. 연표



[1] 마지막 군주이기에 시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진숙보의 경우처럼 강등된 작위로 시호가 추시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전해지는 시호가 없다.[2] 보통 망국의 군주는 시호가 없기 때문에 왕호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대한제국과 신라 같은 경우,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이왕가로 격하됐음에도 불구하고, 황실의 예우를 받았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를 올릴 수 있었고, 신라는 평화적으로 고려에 항복한 것이기 때문에 고려에서도 경순왕을 신라의 전 군주로서 예우했던 것이다.[3] 예전에는 '인전'이라고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4] 확실히 아들로 기록된 대소순의 존재로 보아 빨라봐야 860년대 중후반 생일 것이다.[5] 발해 멸망 이후 행적이 없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940년대까지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있다.[6] 906년에는 재위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나 언제 즉위했는지는 불명이다.[7] 고려사엔 대광현이 발해국의 세자라고만 했지 대인선의 아들이라고는 안 했다. 그래서 정약용은 대인선이 항복한 후 임의로 왕위에 오른 대인선의 아우의 세자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8] 망국의 군주임에도 시호가 있는 신라의 경순왕, 고려의 공양왕, 조선의 순종이 특이 케이스이다.[9]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동시에 정치적 혼란을 겪는 시기들이 몇번 있는데, 이 시기들은 보통 소빙기라 흉작이 오랫동안 이어져서 불만이 터진걸로 추정된다. 서양사도 비슷한 시기에 정치적 혼란을 겪는 경우가 많다.[10] 노상은 발해 멸망 후 동란국의 우대상이 된다. 위 사실을 봤을 때 노상이 거란과 내통했을 가능성도 있다.[11] 언제인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기록이 945년으로 나오는 것은 후진이 고려에 사신을 보냈을 때의 이야기로 그때는 이미 왕건이 죽고 아들 왕무가 집권하던 시기였다. 고려 왕건이 주변국을 병탄하고 강해졌다는 서술과 석경당이 살아있던 시절에 논의되었다는 언급으로 볼때 936년 ~ 942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12] 참고로 백두산 대폭발은 936년으로 발해가 망한 지 1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기에 발해 멸망과 연관성은 없다.[13] 대위해도 20세기 가서야 존재가 발견된 것이다.[14] 경종(요)의 손자다.[15] 남편인 야율융경이 973년생이고, 장남 야율종교가 991년생인 점으로 볼 때 야율융경의 부인 소씨도 960년대 후반~970년대 초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단국(丹國)의 성스러운 칸(聖汗) 우르구.[17] 다만, 이는 외손녀거나 사성받았다고 하면 말이 된다. 참고로 소씨는 술률씨의 한화된 성이다.[18] 참고로 거란소자는 10% 남짓밖에 해독되지 못한 거란대자보다는 상황이 나은 편이나 여전히 절반 가까이 해독되지 않는 문자들이 있다.[19] 925년 9월의 기록을 통해 대이진 시기의 천지춘하추동이 다시 전통적인 이호예병형공으로 회귀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