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13:53:56

수춘궁

여정궁에서 넘어옴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의 궁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개경
만월대 / 개경 본궐 수창궁 북천동궁 수춘궁 연경궁 명복궁 양화궁 현덕궁 북궁
승천부 강도 서경 동경
승천궐 고려궁지 / 강도 본궐 서궁 장락궁 대화궁 용덕궁 구제궁 좌우궁궐 조유궁
남경 동주 그 외 사찰 내 재궁
남경 별궁 태봉국 철원성 만월대 내 별궁 고려의 궁원 남궁 의종 대 별궁 삼소궁궐 흥왕사 안화사 }}}}}}}}}

1. 개요2. 수춘궁 / 여정궁
2.1. 주요 건축2.2. 기타 건축2.3. 태자부

1. 개요

고려 왕조의 태자궁이다. 만월대 동남쪽에 위치했으며 왕태자와 태자비가 거주하고 산하기관이 있던 곳이다.[1]

2. 수춘궁 / 여정궁

수춘궁은 고려의 동궁이다. 태자와 태자비가 살던 곳으로 인종 대까지 수춘궁, 이후엔 여정궁, 원 간섭기엔 세자궁으로 불렸다.

좌춘궁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려도경에서만 나오는 명칭으로 고려사에선 수춘궁(壽春宮)이라 하였다.[2] 이후 인종 16년(1138년) 5월 여정궁(麗正宮)으로 바꾸었다. 고종 대에 강도로 천도 했을 때에도 여정궁이 존재했다. 원종 대에 태자가 세자로 격하되면서 세자궁(世子宮)으로 바뀌었다.

고려사 예지에 따르면 왕태자를 책봉할 때, 관례를 치를 때 모두 여정궁에서 행한다. 특히 관례를 치를 땐 특별히 치황의(梔黃衣)[3]를 입는 것이 허락된다. 왕태자가 결혼할 때도 여정전에서 결혼식이 이루어진다.

2.1. 주요 건축

고려도경에 따르면 궁궐은 고려 본궐보단 위세가 작았다고 한다. 고려도경에 나오는 궁문은:
본궐과 여정궁을 잇는 대문. 뜻은 봄 혹은 태자의 덕. 이자겸의 난 때 궁성을 뒤지고 있던 척준경이 이 문에 잠복한 근위대에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후 인종16년(1138년) 5월 궁이 여정궁으로 바뀔 때 체통문(棣通門)으로 바꾼다.
춘덕문 다음의 문. 뜻은 큰 부드러움.
대화문 다음의 문. 뜻은 큰 인자함.
원인문 다음의 문. 뜻은 덕을 키우다.
여정전의 대문으로 보인다.
여정궁과 이름이 같은 걸 보아 정전으로 보인다. 인종이 여정궁으로 이름을 바꾸기 전의 수춘궁을 묘사한 고려도경은 좌춘궁의 정전은 이름이 없으며 전각 안에 문왕세자 편을 기록해둔 병풍이 세워져 있다고 했다.

2.2. 기타 건축

수춘궁에 있던 누각. 인종이 궁을 여정궁으로 바꿀 때 소휘루(韶暉樓)로 개칭한다.
태자궁의 침전 대문인듯하다.
태자가 태자부를 받을 때 태자의 호위대가 사열하는 곳이다.
태자궁의 대문인듯한데 춘덕문과 동일한 문으로 보인다.

2.3. 태자부

고려의 삼사삼공
삼사(三師)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
삼공(三公)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
태자부(太子府)
태자태사
(太子太師)
태자태부
(太子太傅)
태자태보
(太子太保)
태자소사
(太子少師)
태자소부
(太子少傅)
태자소보
(太子少保)

태자가 세워지면 그는 여정궁을 관저로 받게 되며 '동궁관(東宮官)', 혹 '태자부(太子府)'로 불리는 산하기관을 가지게 된다. 태자부는 일반 왕자들이 받는 산하기관 '제왕부(諸王府)'와 구분되며 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

현종 원문대왕 대[4]에 최초로 태자부가 설치됐으며 문종 대[5]에 세분화되었다.[6] 이후엔 문종제를 고치기만 했다. 충렬왕 대[7]엔 태자부가 세자부(世子府)로 격하된다.

문종 대에 제정된 태자부 직렬은 다음과 같다. 태자부 수장은 왕태자였으며 태자의 스승으로 종 1품 태자태사(太子太師), 태자태부(太子太傅), 태자태보(太子太保)가 있었으며, 태자의 자문객으로 종 2품 태자소사(太子少師), 태자소부(太子少傅), 태자소보(太子少保)가 있었다.[8]

태자는 문벌귀족의 고위자제로 이루어진 동궁시위급사(東宮侍衛給使)[9] 10명과 동궁시위공자(東宮侍衛公子)[10] 20명을 거느릴 수 있었다.[11]

태자는 총 8부(府)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태자 시위군 8부는 각각:

으로 8부 총지휘관은 '시위상장군(侍衛上將軍)', 8부 부지휘관은 '시위대장군(侍衛大將軍)'이다. 각 부의 지휘관은 솔(率)이며 부지휘관은 부솔(副率)이다.[12]

[1] 고려사에 따르면 순종, 헌종, 인종이 수춘궁에 거주했는 기록이 있다.# #2 #3[2] 태자의 관저를 부르는 다른 명칭은 춘궁(春宮), 태자궁(太子宮), 동궁(東宮), 고려 말엔 세자궁(世子宮)이 있다.[3] 금색 의복으로 천자만이 입을 수 있다.[4] 당시 태자는 덕종 경강왕.[5] 당시 태자는 순종 선혜왕.[6] 당시 고려는 최전성기를 찍어 모든 분야에서 전문화, 세밀화가 진행됐다. 거기다 순종이 거진 30년 동안 태자 노릇을 하다보니 아버지 문종은 순종의 힘을 키워주기 위해 태자부를 강화시키고자 했다.[7] 당시 세자는 충선왕.[8] 자세한건 삼사 문서의 태자부(동궁관) 항목 참조.[9] 최소 정 5품 이상 관료의 자제들.[10] 최소 정 3품 이상 관료의 자제들. 춘방(春坊)시위공자라고도 한다. 동궁과 춘방은 같은 뜻이다.[11] 신종 정효왕 대엔 태자가 문관 및 무관의 자제들을 거느렸다. 정부가 무신정권 하에 있기에 이렇게 변한 것.[12] 이 8부는 국왕군 2군 6위(통칭 8위)를 따르되 제도를 한단계 낮추고 변경하여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