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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6:42:10

원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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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忠淵
1921년 2월 23일 ~ 2004년 12월 8일 (향년 83세)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 문헌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본관은 원주(原州)[1]. 원충연 반혁명 사건의 주모자이다.

둘째 형 원주연독립유공자이다.

2. 생애

1921년 2월 23일 함경남도 정평군 부내면(현 정평군 정평읍)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원종집과 어머니 전주 노씨(全州 盧氏) 노문제(1885.4.13. ~ 1950.12.23.)[2] 사이에서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3]

일본 주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8.15 광복 이후 귀국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한 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정치학과에서 전임강사로 근무하였다. 그러던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을 보고 군에 철저한 사상무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1949년 4월 육군에 정훈 1기[4]로 자원입대했다.[5] 여기서 알 수 있듯 원충연의 정치성향은 철저히 우파였다.

이후 6.25 전쟁에 참전했으나 정훈이라는 병과 특성상 일선에서 교전을 펼치진 않았다. 그래도 전후 주변의 추천을 받아 1951년 3월 미국보병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이어 미국 참모대학 정규과정에 입학해 1957년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대대장, 연대장, 부사단장, 주 서독 대한민국 대사관 국방무관, 육군본부 정훈감실 차감, 육군본부 교육과장 등으로 복무하였다. 원충연은 군 내에서 보기드문 정치학을 전공한 엘리트였으며 서구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었기에 이런 업무에 제격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 당일 박정희에게 혁명을 함께 하자는 제안을 받고 군사혁명위원회[6] 공보실장, 즉 쿠데타군의 대변인이 된다. 원충연 본인은 1981년 인터뷰에서 쿠데타에 대해 몰랐고 당일 제안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당시 관계자들이 모두 사망한 현 시점에선 처음부터 포섭된 것인지 본인 주장대로 쿠데타 당일에 합류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단, 항목 상단에 링크한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추측한 대로 원충연은 서구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은 정치학과 출신인 데다 미국 유학, 서독 대사관 근무경력 등이 있어서 쿠데타 정부의 대외승인을 목적으로 원충연을 공보실장으로 기용한 듯하다.

그러나 원충연은 해당 직무를 9달간 수행한 후 야전부대 참모로 발령난다. 이유는 불분명한데, 단순히 박정희 등 쿠데타 지도부와 원충연의 의견이 안맞아서 일수도 있고, 쿠데타군의 얼굴마담이었던 장도영이 이북지역 출신 군 인사들을 요직에 앉혀 박정희를 견제해보려다 숙청당한 사건의 연장선상 일수도 있다.[7] 그밖에, 1961년 11월 박정희의 제1차 방미 당시 수행하였는데, 이때의 방미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것에 대한 책임 추궁이 원인일 수도 있다. 박정희는 1차 방미에서 쿠데타 승인이라는 성과는커녕, 조속한 민정이양을 하지 않으면 모든 원조를 끊어버리겠다는 케네디의 통보를 받고 와야했기에 속이 부글부글 끓던 중이었으니. 심지어 프레스센터에서 연설할 때 연설문이 양면이었으나 이를 알지 못한 박정희는 앞면만 읽어 일부 내용이 누락되고 문맥 안 맞는 연설을 하는 일까지 일어났다.[8] 61년 5월 쿠데타 및 원충연 공보실장 임명, 7월 장도영 숙청, 11월 방미 실패, 62년 1월 공보실장 해임으로 이어지는 타임라인을 보면 장도영 숙청의 연장선보다는 방미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대외승인 목적에서 기용한 원충연에 책임을 추궁이 더 말이 되기는 한다.

이렇게 원충연은 쿠데타군과의 짧은 인연을 마무리짓고 1962년 제2보병사단 부사단장으로 원대복귀하였다. 이후 1년간 복무하면서 장교들을 포섭하였고, 그 후 또 2년간 쿠데타를 준비하였다. 그러던 1965년 5월 16일, 박정희가 존슨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방문하고자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납치하여 군문으로 원대복귀시킨 뒤, 육군·해군·공군·해병대 등 각 군의 소장 이상으로 구성된 이른바 '구국위원회'를 조직하여 6개월 이내에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민정이양을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거사를 10일 앞둔 1965년 5월 7일, 원충연이 포섭을 시도하던 수도사단 기갑대대장 이상열 중령이 육군 방첩부대장 윤필용에게 밀고하면서 쿠데타 계획의 전모가 일체 발각되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원충연 반혁명 사건이다.

1965년 5월 19일 이른바 반혁명 사건의 주동인물로 검찰에 송치되어 그해 7월 31일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8월 13일 육군교도소에 이감되었다. 1966년 4월 21일 형이 확정되어 대령으로 강제 예편된 뒤 5월 5일 서울교도소에 이감되었다. 1969년 8월 15일 광복절무기징역에서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어[9] 미결기간을 합쳐 15년 10개월간 복역하다 1981년 출범한 전두환 정부에 의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는 지난 박정희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격하를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차원으로 보인다.

출소 후 옥중 회고록 『이 줄을 잡아라』를 저술하였으며, 검열을 통해 여러 부분이 수정, 삭제되어 출간되었다. 그러나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한 후 일주일 만에 판매금지 처분을 받아 전량 회수되었다. 이후 3년간 교회를 순회하며 신앙 간증을 하는 한편, 범죄자 선도를 위한 복지사업단체인 '중생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84년 1월 11일 캐나다 온타리오 토론토에 거주하던 외동딸을 20년 만에 만나기 위해 캐나다로 건너갔고, 1987년까지 3년간 거주하며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고 '중생회' 후원회를 조직하는 등 종교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88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귀국하여 '중생회' 사업을 계속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자 일선에서 물러났다. 1995년부터 고문 후유증으로 목디스크가 다 녹아 없어져 수술을 3번이나 받아야 했고, 이후에도 하반신마비를 겪으며 투병하였다.

2004년 12월 8일 오후 4시에 온타리오 킹스턴 킹스턴 제너럴 병원(Kingston General Hospital)에서 사망했다.[10] 유해는 2005년 11월 3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장병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

4. 참고 문헌


[1] 시중공계(侍中公系)-교리공후(校理公后)-정민공파(貞愍公派) 29세 연(淵) 항렬.[2] 노유옥(盧惟玉)의 딸이다.[3] 2004년 12월 11일 경향신문 기사2003년 11월 3일 사이버뉴스24 기사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원충연의 아버지를 함경남도 정평에서 3.1 운동을 주도한 것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훈장을 받은 '원종제'로 쓰고 있는데, 정작 함경남도 정평 출신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원종제가 아닌 원종집이다. 아마 원종집의 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4] 육군사관학교 8기생과 함께 교육을 받았으며, 12.12 군사반란에 가담한 유학성과 동기이다.[5] 군번 14822[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다.[7] 이후 박정희 정권 내내 함경도, 평안도 출신들은 군부내에서 비주류로 소외되었다. 원충연은 물론, 원충연의 동료였던 우덕주 역시 함흥 출신이다.[8] 통역관은 미리 영문 원고를 받아 현장에선 문제 없었으나 미국의 소리(VOA)에 방송될 녹음방송이 문제라 VOA 아나운서 황재경 목사에게 부탁해 빠진 부분은 방송에서 부연하는 식으로 수습했다.[9] 1969년 8월 15일 조선일보 기사[10] 2004년 12월 11일 경향신문 부고기사[11] 2003년 11월 3일 사이버뉴스24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