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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6:58

이관용(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관용
李灌鎔[1], 李鎔, 李鎔, 李鎔, 李灌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파일:이관용 박사.png
1933년 8월 14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왼쪽)#
과 같은 날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 (오른쪽)#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전주 이씨[2]
출생 1891년 7월 15일[3][4]
한성부 동부 창선방 동학동계 동학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12번지)[5]
사망 1933년 8월 13일 (향년 42세)
함경북도 청진부
부모 아버지 이재곤
형제 남동생 이순용
학력 공립한성소학교 (중퇴)
도쿄부관립제4중학교 (중퇴)
경성전수학교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문학 / 중퇴)
취리히 대학교 (철학 / 박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사후4. 가족과 후손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철학자, 언론인.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정미칠적 중 한 명인 이재곤의 4남이다. 즉, 아버지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데 아들은 독립운동가이다. 이관용의 아랫동생 이순용도 독립운동을 했다.

저런 경우는 생각보다 종종 일어난다. 각 나라의 매국노는 자식들에게 최고급 교육을 해주길 마련이다. 그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 현실에 눈을 뜬 사람은 식민지 본국과 본래 민족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마침내는 자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 게 되는 것.[6][7]

이관용의 집안은 조선 14대 왕 선조의 9남 경창군종가이다. 왕실 직계와는 300년 전에 갈라져 사실상 남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관용의 큰아버지이자 이재곤의 형 완순군 이재완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양자가 되면서 완순군의 생가인 그의 집안 역시 가까운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다.

2. 생애

공립한성소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고, 일본 도쿄부관립제4중학교를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귀국한 뒤 경성전수학교에 입학해 1913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3월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고, 1916년에 스위스로 옮겨가 이듬해 취리히 대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김규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만들고 부위원장이 되었다. 그해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단으로 참석하려 했으나 열강들의 무시로 실패했고, 같은 해 7월에 국제사회주의자회의인 루체른 회의의 의장에게 일제 침략 비판 및 회의 참가를 바란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뒤 조소앙과 함께 대표로 참가했다. 이 때 한국민족독립결정서를 제출했다. 그해 8월에 김규식이 미국으로 떠나자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했고, 한 달 뒤 파리위원부와 한인위원회가 합쳐져 구미외교위원부[A]로 개편되자 구미외교위원회 주불대표부 직원이 되어 10월까지 활동했다.#

1920년 1월에는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A]으로 임명받아 스위스 국제적십자회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 적십자사에게 항의서를 제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국제연맹옹호회 연합대회에 참석했고, 이듬해인 1921년에 취리히 대학을 졸업했다. 그해 6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스위스에 있던 이관용을 영국프랑스에 보내기로 뜻을 모았다.#

2년 후인 1923년에 같은 대학에서 논문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의 의욕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유럽 대학 박사이자 한국인 최초의 서양철학 박사가 되었다.

그해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을 견학했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동아일보〉에 기자로 취직했고, 같은 해 5월부터는 연희전문학교 문과 교수를 겸했다. 1924년 3월에는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발기회 이사로 선임받았으며, 10월에는 조선기아구제회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2월에는 〈동아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갔고 러시아유럽에서 취재활동을 했다. 그리고 1925년 7월에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동생 이운용과 같이 귀국했다. 이때 상하이에 들러 이시영과 만났다.[10] 돌아온 후 태평양문제연구회 위원직을 맡았고, 1926년 3월에는 〈시대일보〉 부사장이 되었다.#

1927년 1월에 신간회를 설립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한 달 뒤에 간사가 되었다. 그해 12월에는 신간회 경성지회 임시집행부 서기장이 되었고, 같은 달에 재만동포옹호동맹 집행위원회에서 성명서 작성위원으로 선출받았다. 이때 같이 활동한 사람이 홍명희, 김기전이었다.#

1928년에는 조선교육협회 정기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다음해 2월에는 〈조선일보〉 난징특파원으로 발령받아 중국에 갔다. 그때 북만조선농민개척사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귀국 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간부들과 함께 일제 관헌을 규탄하고 항일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집회를 열기로 했다. 그래서 결의문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1931년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복역하다가 1932년 1월에 가출옥했다.

석방 후 철학연구회 회원 및 〈조선일보〉 편집고문 직을 맡았고 조선물산장려회 선전부에서 일하는 등##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했다. 그러나 1933년 8월 13일에 함경북도 청진에서 해수욕을 하다가 풍랑에 휩쓸려 익사했다.

3. 사후

사망 3일 후인 8월 16일에 유해가 청량리역에 도착했고 그날 오전 8시에 역 앞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다.#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광장리[11] 선영에 안장되었다.

같은 달 19일에 이관용의 추도회가 경성부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사회는 홍명희가, 식사[12]여운형이 맡았다. 이외에도 약력보고는 주요한, 추도사는 유억겸, 조병옥, 허헌, 송진우 등이 읽는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많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독립운동의 공으로 2007년 8월 15일에 독립유공자로 지정받았고 2008년 1월 20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4. 가족과 후손

연상인 기계 유씨(1890 ~ 1932)와 혼인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파일:이원조와 이해순.png
잡지 《여성》 - 1936년 5월 호에 실린
큰사위 이원조와 큰딸 이해순[13]
큰딸 이해순(李海順)은 1911년 생으로, 이육사 시인의 동생 이원조와 결혼했다. 이육사 시인의 딸 이옥비 선생의 말에 의하면, 왕실에서 퇴계 이황 가문[14]과 인연을 맺고자 먼저 결혼을 제안했다고 하며[B], 이에 정인보가 이원조를 낙점하여 중매해주었다고 한다.[16]

둘째딸 이해숙(李海淑)은 최정묵과 결혼했으며 6.25 전쟁월북했다.[B]

아들은 이해인(李海寅)이다. 1929년 생으로, 6.25 전쟁실종되어 지금까지 소식을 모른다. 자녀도 없어 이관용의 남계 후손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할 때 유족을 찾지 못해 한동안 훈장 전달을 못했다가 2009년 1월에야 조카 이해석[18]에게 주었다.#

[1] 문헌에 따라 李[2] 경창군파 11세 용(鎔) 항렬.[3]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왜정시대인물사료 참조.[4] 《전주 이씨 경창군파 족보》와 선원속보에는 1891년 음력 5월 20일(양력 6월 26일)생으로 등재되어 있고, 취리히 대학교에 제출한 박사 학위논문에 첨부한 이력서에는 1893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고 한다.#[5] #[6] 이외에도 이관용의 손자 뻘 친척 이철주(이관용의 혈연 상 큰아버지 완순군 이재완의 증손자),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 민규현의 아들 민태곤, 윤택영의 아들 윤홍섭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주도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아버지는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합병을 추진하는 정당 소속이었던, 한마디로 한국으로 치면 일진회 회원이랑 다를 바 없던 인물이었다. 덤으로 북한김성일 사건처럼 독재정권의 고위층 집안의 자제들이 체제의 모순을 실감하며 민주화 운동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7] 매국노 가족 출신은 아니긴 하나 남베트남응오딘지엠이나 카메룬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인도네시아수하르토처럼 식민지배국을 위해 부역했던 사람들이 후에 독립운동가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다. 당장 인도국민회의도 시작은 친영 단체였다. 물론 대부분 매국노 자식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모처럼 반민족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A] 구(歐)는 유럽을 뜻한다. 예전엔 유럽을 음차해서 구라파(歐羅巴)로 불렀다.[A] [10] 출처: 조선총독부 정탐 보고.[11] 현재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12] 式辭. 밥먹는 거 말고(...) 식장에서 그 식에 대해 인사말하는 것을 말한다.[13] 출처: 장문석 著, 《댄디와 양반 - 여천 이원조 연구(1)》 p.311[14] 이육사 - 이원조 형제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B] 출처: 장문석 著, 《댄디와 양반 - 여천 이원조 연구(1)》 p.303[16] 출처: 장문석 著, 《식민지 출판과 양반 - 1930년대 신조선사의 고문헌 출판 활동과 전통 지식의 식민지 공공성》 p.379[B] [18] 이관용의 동생 이운용의 친자이자 맏형 이원용의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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